저마다, 꽃
사월 산길을 걷다가, 엉겁결에
한 소식 받아 적는다
-저마다, 꽃!
연두에서 막 초록으로 건너가는
푸름의 빛깔 빛깔들 그
제 각각인 것 모여, 사월 봄 숲은
그윽한 총림叢林이다
참나무너도밤나무개옻나무고로쇠나무단풍나무소나무오동나무산철쭉진달래산목련아까시나무때죽나무오리나무층층나무산벚나무싸리나무조팝나무서어나무물푸레나무......,
꽃을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몸의 구부러짐과 곧음
색깔의 유무와 강약에도 관계없이
오롯이
함께 숲을 이루는 저 각양각색의
나무, 나무들
사람들 모여 사는 세상 또한, 그렇다
저마다 꽃이다
==========================
윤슬에 대한 고찰
햇빛과 달빛에 비치어 반짝반짝
빛나는 잔물결의 빛깔들, 윤슬
하늘의 빛, 땅 위의 물 그리고
그 사이 바람, 셋이 만나서
하나의 몸동작으로 빚고 빚은
생명의 빛나는 춤이요 꽃이다
나뭇가지에 꽃으로 피어나는 일도
꽃이 되어 풍경 속에 빛나는 일도
허공 속으로 미련도 없이 떨어지는
꽃들의 춤도 윤슬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 생명으로 몸 받아 와서
더더구나 사람의 몸으로 와서는
사람답게 빛나는 목숨의 길 가는
너도나도 슬, 슬, 슬 윤슬이다
=============================
개밥바라기총塚
시총詩塚 바로 앞자리에 작은 무덤 하나 놓여있다.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 영일 정씨 문중이 임진왜란 때 왜적에 붙들려간 주인을 구하려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한 노비를 어여삐 여겨 문중의 하천묘역 안에 고이 모셔놓은 것. 함께 죽은 주인의 무덤 시총보다 턱없이 작은 게 얼핏 보면 개집 같고 무슨 단추 같기도 하다. 이 작은 무덤의 사연을 세상에 내민다. 시총에 시가 들어있다면 노비 억수의 무덤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가. 시총의 주인처럼 노비 억수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면 이 무덤 속에는 대체 무엇이 묻혀 있는가. 마음이겠다. 주인을 구하려는 노비 억수의 마음, 그의 죽음을 안타깝고 고맙게 여긴 영일 정씨 문중의 따스한 마음을 묻었을 터. 그렇다, 이는 심총心塚이다. 또 마음의 깊은 자리는 세월을 넘어 이승과 저승에까지 이어져 썩지 않는 끈이 된다. 주인의 무덤 시총 앞 '충노억수지묘忠奴億壽之墓'는 초저녁 초승달 위에 피어난 별, 개밥바라기를 닮았다. 개밥바라기총塚이라 이름을 붙여드린다. 시총과 개밥바라기총 어울림의 앉음새가 하늘의 그림 같다. 개밥바라기총, 세월이 가도 그 자취 없어지지 않고 빛도 잃지 않겠다. 총, 총,
===================================
이총耳塚, 댕강무디
사천 팔경 유람하는데 어디서 누가
댕강무디*
댕강, 댕강, 댕강무디라 말한다
정신이 번쩍, 이 무슨 말인가
도요쿠니신사 앞 사백 년 천하게 버려진
십이만 육천 생목숨의 귀무덤
임진왜란 때 왜적 칼에 댕당댕강 베어져
소금 절인 전리품이 된 선조들의 귀
신사 앞 왜놈 땅 사백 년 지나도록
서럽고 서러운 한 풀 수 없는 것
사천에 그 귀무덤 모시고 온 것
옳다
마음은 빛보다 빠른 것이니
저, 피맺힌 원한의 댕강무디
진정 보듬어 안고 가야만
설운 땅 해원解寃의 봄풀 끝내 피어난다
* 댕강무디: 경남 사천시 선진리에 있는 귀무덤, 즉 이총耳塚이다.
=============================
시인의 엄마
입 주변까지 번진 대상포진으로 고생하는
여든 일곱의 우리 엄마, 손순연
37도 무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꿋꿋하다
오래만에 안부 전화를 드리니
"우리 선상님, 어데 멀리 외국 나가셨든게?"
이리 무더운데 요새 뭘 드시느냐 하니
"내사 하늘의 별 따다 안 묵는게." 하신다
면구스러움에 앞서, 그것 참!
초등학교도 못 나와 한글도 모르는 분이
외국 유람은 어찌 알고
하늘의 별 따다 먹는 것은 또 어찌 알까?
시인이랍시고 까불락대는
헐거워진 내 언어가 다시 탱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