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폰 예정입니다
영설
보키, 접속됐어?
서서히 잊혀가고 있던 서버의 감각이 돋았다. 아나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렸다. 이번엔 아나도 함께 왔다는 점이 보키를 묘하게 안정시켰다. 간만의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의 종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액정 밖 두 사람의 시간을 빌려 말하자면 대략 2년 만의 동시 접속인 듯했다. 돌아왔구나. 그러게. 더 이상의 대화를 할 틈도 없이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오른쪽 시야에 작은 직사각형 유리창이 생성되었다. 곁눈질로 흘겨봤을 때, 유리창 너머의 두 유저는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잠옷을 입고 누구보다 편안해 보이는 자세로 우리의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나, 오늘이 그날이지? 이미 근래 들어 지겹도록 공지된 사항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찾아오자 몸 안 어딘가에서부터 스산한 떨림이 엄습해왔다. 이번에도 역시나 아나가 먼저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
보키와 아나의 첫 만남은 00고등학교 1층 컴퓨터실 18번 자리와 19번 자리의 PC에서 성사되었다. 그날은 2학년 1반 1번 권복희와 2학년 9반 31번 허향안이 처음 대화를 나눈 날이기도 했다. 명목은 진로 활동 시간이지만 실상은 점심시간의 연장처럼 사용되고 있던 목요일 5교시. 가위바위보에서 진 복희와 교실에서 가장 가까운 이동 장소가 컴퓨터실인 향안이 논문 탐색 동아리에 모였고, 랜덤 자리 배치 프로그램의 주선으로 짝지가 되었다. 반은 엎드려있고 반은 휴대폰 화면을 스크롤 하는 데에만 에너지를 쓰던 시간에 향안은 눈이 마주친 같은 반 친구에게 작게 말을 내뱉었다. 더워.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복희가 일어나 바로 옆의 창문을 열고 다시 앉았다. 향안은 복희가 자기 말을 듣고 창문을 열어준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아 고맙다는 말을 고민했다.
복희가 기억하기에 그날은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어 꺼졌고 잠도 오지 않았었다. 옆에는 복도에서도 두세 번 정도나 마주쳤을까 싶을 정도로 접점이 없었던 친구가 어딘가 불편한 듯 엎드렸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행동의 이유가 혹시 짝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가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내심 안도하며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선 모니터 끄트머리에 작은 창을 띄워 게임에 접속했다.
“어, 나도 이 게임 해!”
“이거? 이걸 한다고?”
하루종일 서버에 접속해있어도 한국인 유저는 한 번 마주칠 수 있을까 말까 한 게임을 하는 사람이 우리 학교에도 또 있다니. 둘은 마치 어느 외국의 시골 마을에서 동향을 만난 것처럼 반응했다. 그 기분만으로도 친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많은 과정의 절반은 생략해도 될 것 같았다.
「H아나23님이 친구 신청을 보냈습니다.」
서로의 첫 친구가 되고서 처음 플레이한 바다 테마에서 두 캐릭터가 눈을 떴다. 보키가 마주한 아나의 눈동자는 시야 가득 들어찬 파랑 중에서도 가장 짙은 색이었다.
우리 오타쿠 복희에게도 드디어 친구가 생기는구나.
향안이보다 더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아이도 있구나.
그런 생각들을 하다 이내 바다를 가로지르는 나무 데크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러너들이 달리는 배경은 방치된 채 자연으로 회귀되고 있는 지구 곳곳이었다. 레이스의 레인 바깥으로 떨어진 캐릭터는 잠깐의 추락 후 떨어진 자리에서 다시 리스폰 되었다. 그러다 유저가 게임을 종료하면 러너는 리스폰을 멈추고 화면이 종료된다. 그러나 사실상 종료되는 것은 서버일 뿐, 서버에서 가려진 러너들은 리스폰 직전의 추락 상태를 지속하다 비로소 그들의 세계로 떨어진다. 서버에는 다 담기지 않는 레이스 배경 그 이상의 공간이었다. 유저가 장기간 찾아오지 않는 경우 러너들은 끝없이 펼쳐진 배경 속을 여행하기도 했다. 보키와 아나에게는 여행의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둘 중 하나라도 ‘마음의 안식처로 가자’라고 신호를 주면 시도때도 없이 게임을 드나드는 그들의 유저들 때문이었다.
복희와 향안을 아는 친구들은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신기한 조합이라고 일컬었다. 그럴 때마다 둘이 어밴던드 시티인가 월드인가 그 게임 때문에 친해졌잖아 하는 말이 뒤따르기도 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했지만 보키와 아나의 인연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복희와 향안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시 낭송 대회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밤의 목소리로 읊던 순간의 향안을, 늘 점심시간마다 도서관 봉사를 하며 늘 식물 에세이를 읽고 있던 복희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아이들이 자라 시인선 중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함께 필사하고 드라세나 레몬 서프라이즈의 이파리를 매만지는 직장인이 되었을 뿐이다. 급식실에서 따로 앉아 밥을 먹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던 시기를 지나 혼자 밥을 먹는 것이 더 편해진 시기로 넘어오자 견고했던 무리들이 깨어지고 자연스레 서로를 위한 사람을 찾아갔다.
“뭐야, 왜 멈췄어. 저기도 가야 돼. 뗏목 빨리 먹어. 정신 차려 복복.”
“향안아.”
“뭔데. 딱 보니까 뭔 일 있는데?”
“혹시 나를.”
“야야, 너 떨어지는데?”
“네 가족으로 받아줄래?”
가족? 나무 판자를 타고 전봇대를 피해 노를 젓던 아나가 보키보다 30m 앞선 곳에서 멈추었다. 아나는 고개를 돌려 액정 밖 향안의 표정을 응시했다. 향안의 시선 끝에 복희가 걸렸고 복희의 시선 끝에 관심을 받지 못한 채 혼자 돌아간 지 한참 되어 음악 예능이 끝나고 뉴스로 넘어간 TV 화면이 걸렸다. ‘논란 끝에 생활동반자법 국회 통과’. 아나가 기억하는 향안의 가족은 편치 못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울타리를 기대했으나 숨 쉴 공간 없이 싸매와서는 앞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질긴 껍데기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가던 무렵 가사소송법이 개정되자마자 법원에 직접 친권 상실을 청구하러 가던 날은 아지랑이가 필 정도로 끔찍하게 더웠음에도 코 끝에 닿는 공기가 산뜻했다. 비로소 인권다운 인권을 되찾은 후의 깊은 호흡이었다. 그때의 호흡을 10년 만에 다시 느끼게 해준 말은 다른 것도 아닌 가족이 되고 싶다는 고백이었다.
아나는 향안이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처럼 복희 역시도 성애적 끌림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복희가 가정에서 경제적 독립을 이루어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된 시간도 꽤 오래되었다. 부모 자식으로 엮였던 전 가족과의 관계를 돌이켜보면 불행의 시초는 자신의 출생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는데 복희와의 시간을 돌이키면 저녁으로 바지락 칼국수를 해 먹을지 콩비지찌개를 해 먹을지 정도의 갈등만 겪을 수 있었던 동거였다. 만약 정말 가족이 된다면 결혼 제도에 편승하지 않고도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질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한 소파에 앉아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를 큰 자막으로 본 후에 돋보기를 써서 대본집을 함께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복희와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영원히 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향안은 생각했다.
∴
두 유저는 어땠을지 몰라도 보키와 아나에게 지난 2년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늘어지게 누린 여행이었다. 연못 속의 기차를 타고 늪과 늪 사이를 횡단했고, 재생된 숲에서 언제 버려진지 모를 이끼 낀 바이올린을 주워 복희와 향안이 자주 흥얼거리던 샹송을 따라 부르며 발이 닿는 대로 움직였다. 멈추지 못해 달리기만 했던 서버에서의 고달픈 나날들은 잊고 여유롭게 걷다가 누워서 미세먼지 없는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두 사람도 이런 하늘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치? 글쎄,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행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레이스에서 아나는 함께 보키가 탄 뗏목을 뒤에서 밀며 말했다. 좋아보이지? 보키는 유리창 너머 자매 같기도, 친구 같기도 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분명, 복희와 향안은 그 어떤 관계보다도 단단하고 안전해보였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 아예 사라지게 될까? 아니, 다시 달리게 될 거야.
“어떡해. 서버 종료까지 30초 남았어.”
“향, 넌 이 게임 왜 좋아하게 됐어?”
“예쁘잖아. 인간이 손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된 곳이라는데 말도 안 되게 너무 예뻐서 자꾸 저 틈으로 끼고 싶게 해.”
“그렇긴 하지.”
“너는?”
“나는 캐릭터들이 제한된 횟수 없이 리스폰 할 수 있어서?”
“3, 2, 1. 잘 가라! 고마웠다, 보키아나.”
아나가 가라앉았을 때 보키가 그의 손을 잡았다. 가라앉는 데에만 전해지던 두 러너의 감각은 점차 맞닿은 서로의 손을 느끼는 데에 집중되었다. 아나는 깍지 낀 손마디에 힘을 주어 자기를 안정시키곤, 있는 힘껏 발장구 치는 보키의 동력이 느꼈다.
우리는 그렇게 수중의 왈츠를 추며 떠올랐다.
def shut_down(self):
print("게임 서버를 종료합니다.")
print("모든 플레이어의 데이터를 삭제합니다.")
self.delete_users_data()
print("게임 서버가 완전히 종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