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實相寺
실상사(實相寺)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禪宗) 사찰이다. 구산선문이라함은, 신라말부터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禪宗)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고려초기까지 형성된 9개의 산문(山門)을 말한다. 구산선문은 최초로 실상사문이 개창된 이후 가지산문, 사굴산문, 동리산문, 성주산문, 사자산문, 봉림산문 등 7개의 산문과 고려시대에 형성된 수미산문과 희양산문을 말한다.
지실사 知實寺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년)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개창한 최초의 선종가람이다. 창건 초에는 지실사(知實寺)라고 하였으나, 구산선문이 분파 대립하던 시기에 하나의 종파로서 그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산문의 개산조 홍척대사의 존칭인 " 실상선정국사 (實相禪定國師) "의 앞머리를 따서 고려 초부터 실상사(實相寺)로 부르게 되었다.
평지 사찰 平地寺刹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천왕봉과 마주 하면서, 남쪽으로는 반야봉, 서쪽으로는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의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실상사는 남녘에서 가장 크고 깊은 지리산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수 만평의 논 한 가운데 놓여있다. 이 너른 들판이 여름이면 새록새록 자라는 볏 잎으로 초록바다가 되고 실상사는 그 속에 마치 섬처럼 있다.
겨울이 되면 벼 베인 휑한 들판에 무상(無常)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山中)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하여,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리산 사찰 중에서 평지(平地)에 자리한 절은 이곳 실상사와 단속사가(斷俗寺)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 채 석탑만 남아있고, 실상사는 여전하게 사찰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인드라망
실상사는 "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실상사 작은 학교 "라는 대안학교를 운영하고있다. " 인드라 "는 본래 인도(印度)의 수 많은 神가운데 하나로 다른 말로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한다. 신통한 재주로 석가모니 전생부터 나타나 수행자를 지켜주는 神이었다. 인드라망은 이 제석천의 궁전에 드리워진 무수한 구슬로 만들어진 그물을 의미한다.
제석천 궁전에는 투명한 구슬그물(인드라망)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 그물코마다 투명구슬에는 우주 삼라만상이 휘황찬란하게 투영됩니다 /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 서로 다른 구슬에 투영됩니다 / 이 구슬은 저 구슬에 투영되고, 저 구슬은 이 구슬에 투영됩니다 / 작은 구슬은 큰 구슬에 투영되고, 큰 구슬은 작은 구슬에 투영됩니다 / 동쪽 구슬은 서쪽 구슬에 투영되고, 서쪽 구슬은 동쪽 구슬에 투영됩니다 / 남쪽구슬은 북쪽구슬에 투영되고,북쪽 구슬은 남쪽 구슬에 투영됩니다 / 위의 구슬은 아래 구슬에 투영되고, 아래 구슬은위 구슬에 투영됩니다 / 정신의 구슬은 물질의 구슬에 투영되고, 물질 구슬은 정신 구슬에 투영됩니다 /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투영되고, 자연 구슬은 인간구슬에 투영됩니다 / 시간의 구슬은 공간의 구슬에 투영되고,공간 구슬은 인간 구슬에 투영됩니다 /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 들입니다 / 총체적으로 무궁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집니다.
' 최초 (最初) '라는 수식어
실상사에는 " 최초 (最初) "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우리나라 선문(禪門)의 효시인 구산선문은 이곳 " 실상사문 (實相寺門) "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실상사는 " 구산선문 최초의 가람 "으로서 우리나라 선풍(禪風)의 발상지이다. 가람 안팎에 화려하고 고색창연한 경관은 없지만.... 실상사가 수행자의 교육기관인 " 실상사 화엄학림 "은 1994년 조계종의 교육개혁의 성과로 이루어진 조계종 최초의 전문 교육기관이다 또한 실상사에는 불교의 연기사상을 교육이념으로 삼은 중고등 과정의 학교인 " 실상사 작은 학교 "가 있다. 불교계 최초이자 대안학교인 것이다. 또한 불교계 최초로 "실상사 귀농학교"를 운영하며 현대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철학을심어주고 있다.
실상사의 창건
실상사(實相寺)는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창건하였으며, 구산선문의 하나로 자리를 잡은 유서깊은 사찰이다. 선종이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것은 신라 제36대 혜공왕 때이지만 발전을 보지 못하다가, 도의(道義)국사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수학하고 돌아온 홍척(洪陟)스님이 흥덕왕의 초청으로 법을 강론함으로써 구산선문 중 최초 사찰로 개창한 것이다. 홍척스님은 이곳에 실상사를 세우고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전국에 선종을 널리 알렸는데 이들을 실상사파(實相寺派)라고 불렀다.
그의 제자로 수철(秀澈), 편운(片雲) 등 두 대사가 나와 이 宗山을 더욱 크게 번창시켰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 약 200년간 스님들은 부속암자인 백장암(百丈庵)에 기거하다가, 1690년(숙종 16)에 이르러 침허대사(枕虛大師)가 300여 명의 스님들과 함께 나라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36동의 건물을 세우는 대규모의 불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지나온 발자욱 역시 눈에 가리웠으므로
나는 어디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한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바람은 바삐바삐 지나가 버리고
눈을 쓴 댓잎의 손가락은 너무 많아
그 방향을 가늠할 수는 없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한 발 한 발 찍은 생각들은
거친 눈보라로 날려가 버리고
어쩌다 손바닥 위에 놓인 생각들은
눈처럼 녹아버려 그 온기를 잡을 수 없다.
實相은 정말 있는가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흰 눈에 갇혀 눈 감은 것처럼 어두운 저녁
마음의 집을 허물어 버리고 절 한 채를 들여놓는다.
실상(實相)이란 ? 실상(實相)이란, 만물의 있는그대로의 모습,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으로 곧 본체(本體) ..라고 사전에는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상사란 " 만물의 본체를 자세히 따져서 밝히는 선사(禪寺)인가? 실상사 선방에서 만난 도법스님은 " 생명의 진실을 규명해서 문제를 해결해야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평생을 수도한 선사도 생명의 진실 그리고 삶의 본체를 찾지 못한다는데, 어찌 나와같이 오욕칠정을 가진 예사사람이 잠깐동안 삶의 실상을 알 수 있겠는가. 아래 佛家의 禪詩는 평소 좋아하는 글이다.
生也一片浮雲起 / 死也一片浮雲滅 / 浮雲一體本無實 / 生死去來亦如然 ... 쌂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난 것이요 /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다 /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 삶과 죽음의 오고감이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해탈교 解脫橋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지리산 여러 봉우리를 꽃잎으로 삼은 꽃밥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은 실상사는 여느 지리산 자락의 山寺와는 달리 평지에 들어서 있어 분위기가 색다르다. 사찰의 구역을 따라 담장을 낮게 두르고 담 안쪽으로 키가 큰 나무들을 둘러 세운 풍광이 푸근하고 고즈넉하다. 반야봉, 노고단, 고리봉 등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만수천이 큰 냇물을 이루어 실상사 앞을 흐른다. 해탈교를 건너 논길을 200m정도 걸어가면 山門인 천왕문(과거에는 만세루가 있었다)이 나온다. 해탈교를 전후하여 서 있는 세 基의 돌장승은 그 표정이 무섭고도 당당하여 절집을 노리는 잡귀들을 가히 물리칠 만하다
해우소 안내문 ... 뒷간은 농약과 화학비료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생명의 먹거리를 키워내는 소중한 거름이 만들어지던 공간이었습니다. 쌀을 비롯한 온갖 채소들은 똥오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농토와 쌀로 순환되지 못하는 수세식 화장실은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우리가 식수로 사용하는 하천과 강물을 오염시키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땅을 살리고 먹거리를 살리며 농사짓는 농부님을 살리고 그 쌀과 채소를 먹는 우리들의 생명을 살려내는길은 똥을 제대로 대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냄새는 좀 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되살리는 고마운 향기입니다.
소실과 중건 燒失과 重建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하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되었다. 1468년(세조 시절)에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하여 전소되었다는 說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하여 실상사의 승려들은 1680년(숙종 5)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百丈庵)에서 기거하였으며, 원래의 실상사터에는 철불(鐵佛), 석탑, 석등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枕虛大師)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하였다.
또 1821년(순조 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하였으며, 1884년(고종 21)에는 월송대사가 세번째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의 중건을 하게 된 사유는 1882년 (고종 19)에 어느 사람이 절터를 가로 챌 목적으로 방화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전쟁을 맞아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들이 번갈아 점거하는 등 또 한 차례의 수난을 겪게 되었지만, 다행히도 사찰만은 전화(戰禍)를 입지 않았다.
실상사의 국보와 보물
실상사는 우리나라에서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國寶와 보물을 가지고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제33호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 보물 제34호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보물 제36호인 부도(浮屠), 보물 제37호인 삼층석탑 2 기(基)가 있다.
또한 보물 제38호인 증각대사응료탑과 보물 제39호인 증각대사응료탑지,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보물 제41호인 철제여래좌상, 보물제420호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 보물 제421호인 약수암 목조탱화 등이 있다. 모두 국보 1점, 보물 10점 등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귀중한 문화유산인 셈이다.
실상사가 興하면, 일본이 亡하고 .....
천년의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이곳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倭寇)와의 얽힌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사찰의 全燒 원인을 정유재란에서 찾는 것도 그 하나이다. 또한 실상사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富士山)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실상사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하여 대치형으로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그리고 실상사에는 " 일본이 興하면 실상사가 亡하고, 日本이 망하면 實相寺가 흥한다 "라는 口傳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에 있는 법계사에서도 같은 구전(口傳)이 있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실상사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鐘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기듯 치고 있다.
이러한 口傳으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는 이 범종을 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실상사 주지스님이 일본경찰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스님들이 이러한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열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일본지도 중 홋카이도와 규슈지방만 그대로 있고,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졌다.
선종과 구산선문 禪宗과 九山禪門
웅장하고도 섬세한 지리산의 품 속에는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다. 화엄사, 천은사, 쌍계사, 실상사, 대원사, 단속사, 법계사, 영원사, 벽송사, 연고사 등이 골짜기마다 터를 이루고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은 왕실과 귀족에 결탁하여 타락한 교종(敎宗) 불교에 반기를 들고 9세기에 접어들면서, 신진 지식인들에 의하여 수용된 선종 불교의 상징적인 사찰들이다. 달마대사가 갈대잎을 타고 중국으로 건너온 이래 꽃피운 선법(禪法)을 신라의 젊은 스님들이 배워 와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그 당시 선법이란 참신하고 개혁적인 신사조(新思潮)운동이었다. 인과율(因果律)에 의한 기존의 교종불교는 사람의 운명이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적 인식이었고, 반면에 禪宗의 사상은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의식을 제공하였다.
장흥 보림사의 가지산문(迦智山門) 등 구산선문은 모두가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에 근거를 두었는데, 이 사실은 선종이 지방 호족들의 후원을 받고 성립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敎宗 불교에서 소외된 승려들 못지 않게 지방호족들도 중앙정권으로부터 소외되어 불만이 많았었고 자연스럽게 이들이 결합하여 신라 말 혼란기의 시회질서를 재편해 간 것이다.
선종에서는 대표적으로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나 글로 교를 세우는 것이 아님), 교외별전(敎外別傳 ..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것)이라는 말로 선(禪)을 정의하고 있다. 표월지(標月指 ..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를 보자면, 진리가 달이라면 교(敎)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며, 선(禪)은 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최초의 구산선문 .. 실상사
九山禪門 중 가장 도량을 개척하여 선풍을 떨친곳이 이곳 남원의 실상사이다. 개산조(開山祖) 홍척국사(洪陟國師)가 마조(馬祖)의 법통을 이어받은 서당지장(西堂地藏)에게 깨우침을 얻어 돌아온 이후 흥덕왕(828년) 때 지리산에서 도량을 여니 수천 명의 대중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禪宗의 역사에서 맨 처음 중국으로 건너가 禪法을 배워온 이는 가지산문의 도의선사(道義禪師)이었다. 그는 홍척국사보다 먼저 서당지장(西堂地藏)에게서 심인(心印)을 얻어 돌아왔지만, 가지산문은 도의의 제3대 체징(體澄) 때 와서야 독립적인 山門이 형성되었고, 그 후 출사표를 던진 사람은 실상사문의 홍척국사이었던 것이다.
실상사의 사적지(寺跡誌)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도의선사가 唐나라에서 禪法을 먼저 배워 왔지만, 그 때는 시운이 덜 익어 세상에 전파하지 못하였고, 홍척국사가 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파를 이루었으며 그와같은 사실이 최치원(崔致原)이 쓴 봉암사 지증국사비에 자세히 나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교종과 선종 敎宗과 禪宗
불교에는 교(敎)와 선(禪)의 양대 종파가 있다. 敎는 불교경전을 통하여 점차 道를 닦음이요, 禪은 문자를 통함이 없이 좌선(坐禪)을 통하여 도를 깨닫는 것이다. 신라의 교종에는 5宗이 있었는데, 열반종, 화엄종, 계율종, 법성종, 법상종이 그것이다.
선종에는 남원의 실상사, 장흥 가지산의 보림사, 곡성 동리산(棟裡山)의 태안사(太安寺), 삼가리의 굴산사(屈山寺), 영월 사자산의 흥녕사(興寧寺), 문경 희양산의 봉암사(鳳岩寺), 보령 성주산의 성주사(聖住寺), 해주 수미산의 황희사(黃熙寺) 등 구산선종 또는 구산선문이 있었다.이와같이 교(敎)와 선(禪)을 합쳐 오교구산(五敎九山)이라고 한다. 선종은 달리 달마종(達磨宗) 또는 조계종(曺溪宗)이라고 한다.
돌장승 석장승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의 입구에 세워서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실상사의 이 장승 역시 경계 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不淨)을 금하는 의미에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돌장승들은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조각품으로, 원래는 냇가에 모두 네 기(基)가 있었다. 실상사로 들어가는 내를 건너기 전, 해탈교 앞에 두 기의 장승이 있었는데, 그 중 오른쪽 것이 1936년 홍수에 쓸려내려가 현재는 세 基만 남아있다.
장승들의 높이는 대략 2.5~2.9m , 너비 40~50cm 가량이며, 머리에 모자를 쓰고 튀어나온 둥근 눈에 주먹코와 커다란 귀를 갖고 있는 등 서로 비슷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장승에 새긴 기록으로 보아 1725년(조선 영조 1년)에 세운 것들임을 알 수 있다.장승은 보통 남녀로 배치하여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들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 귀신을 쫒는 장승들의 표정들이 험상궂기는 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옹호금사축귀장군 擁護金沙逐鬼將軍
이 장승은 해탈교를 건너기 전에 있는 것으로, 장승의 몸통에는 " 옹호금사축귀장군 (옹호금사축귀장군) "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수염을 땋아 왼쪽으로 구부리고 벙거지같은 모자를 쓰고 있다. 찌푸린 이맛살과 콧등, 물안경을 쓴 듯 튀어나온 두 눈에 주먹만한 코는 벌름거리고 있는 듯하며, 입술 밖으로 드러난 송곳니는 길게 팔(八)자형으로 튀어나와 매우 해학적인 모습이다.
상원주장군 上元周將軍
해탈교 건너에는 두 기의 장승이 있다. 이 대장군 장승은 해탈교 건너 논두렁에 있는데, 몸통에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이라는 이름과 " 신해년오월 (辛亥年五月) "이라는 각자(刻字)가 있어 1731년(영조 7)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장군 大將軍
해탈교 건너 큰 고목 아래에 서 있다. 몸통에 "대장군(大將軍)"이라는 글씨와 받침돌에 "옹정삼년을사삼월입동변(옹정삼년을사삼월입동변)"이라는 각자가 있어, 1725년(영조 1)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의 천왕문을 들어서면 절 마당에 삼층석탑 두 기가 동서로 나란히 서있고, 뒤쪽 중앙에 석등과 보광전이 차례로 서 있으며, 보광전 양 옆으로 약사전과 칠성각이 있다. 석등의 양옆으로는 명부전과 요사채들이 들어서 있는데 전체적으로 평지에 들어선 전형적인 1금당쌍탑(一金堂雙塔)의 가람배치임을 알 수 있다.
보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84년(고종 21)에 월송(月松)스님이 본래의 넓은 금당(金堂)터 기단 위에 다시 작은 기단을 만들어 세운 것이다. 보광전 주변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본래의 금당이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광전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과 1981년에 조성한 신중탱과 전북유형문화재인 실상사 법종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 중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대세지 두 보살입상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베트남에서 모셔 왔다고 한다. 좌우의 보살입상은 종이로 만들어진 지불(紙佛)로, 보살상 1 軀가 과거에 분실되어 남은 1軀를 대칭적으로 봉안하여 모신 것이라고 한다.
실상사 동종 實相寺 銅鐘
보광전(普光殿) 안에 봉안되어 있는 동종으로 높이 123cm, 입 지름 83cm의 조선시대 종이다. 용뉴(龍紐)에는 여의주가 없는 용이 종천판(鐘天板)을 딛고 있는 형상이며, 용통(龍筒)은 간략화된 용의 꼬리가 휘감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동종의 조성연대는 종기(鐘記)에 " 강희(康喜) 33년 "으로 기록되어 있어, 1694년 (숙종 20)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종을 만든 사람은 김상립,정칠립, 김천수 등인데,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이 동종은 침허대사(枕虛大師)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상대(上帶)와 천판(天板) 사이에 입화식(立花式) 및 하대문양(下帶紋樣)이 없어지고, 上帶의 문양을 범자문(梵字文)으로 대치하여 간략화되었으나, 용통의 존재는 한국종의 전통을 간직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상대(上帶)에는 종신(鐘身)보다 한 단 높게 원형의 단을 만들고, 그 안에 한 자씩 범문(梵文)을 12곳에 양각하였다. 이 범문자대(梵文字帶)의 아래 4곳에 유곽(乳槨)이 있으며, 방형의 유곽 테두리에는 인동초문을 양각하였다.
유두(乳頭)는 8엽의 중판연화판(重瓣蓮花瓣)으로 받치게 하였으며, 유곽 사이의 공간에는 두 손으로 꽃가지를 집고 보관을 쓰고 있는 보살상이 1軀씩 배치되었다. 몸통 위쪽에는 원 안에 범자(梵字)를 양각(陽刻)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흔히 동종에서 볼 수있는 넝쿨을 둘러쌓은 문양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이러한 형태의 모습은 조선 후기로 넘어 가면서 범종의 구성이 많이 간략화한 것으로 보인다. 몸통 중간에 새겨진 비천인상을 보아도, 이전의 동종에서 볼 수있는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딱딱한 느낌을 주고있다.
이 종에 얽힌 이야기
실상사를 중창하고 난 후 왕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종을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도하며 종을 쳤다. 그런데 이 범종에는 우리나라 지도와 일본 지도가 새겨져 있어, 종을 치면 일본의 경거망동을 경고함과 동시에 우리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말이 전해 돌았다.
이러한 소문으로 인하여 일제강점기 말에는 이곳 실상사의 주지스님이 문초를 당하고, 종을 치는것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 일부가 그대로 남아있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오래 전부터 실상사에는 "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 "라는 구전이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의 범종에는 일본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는 탓에 일본 지도 중 홋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고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실상사 깨진 종 ....破鐘
1967년 실상사에서 발견된 파종(破鐘)으로, 주조(鑄造)에 실패하여 땅에 묻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곽, 비천상, 당좌 등이 현재 남아 있는데, 입지름으로 보아 상원사 동종 보다는 조금 큰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신라 범종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우수한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상대(上帶)는 없어지고, 유곽(乳廓)의 극소 부분만이 남아 있는데 연주문(連珠紋 .. 이음구슬무늬)을 두르고, 안에는 보상화문(寶相華紋)을 조각한 것을 볼 수 있다. 하대(下帶)는상하에 연주문을 두르고, 그 사이에 당초문을 돋을새김하였으며, 당좌(撞座)와 바로 아래 위치에는 에밀레종처럼 당좌와 비슷한 둥근 문양을 두었다. 종의 몸체에는 2 軀의 주악비천상(奏樂飛千像)이 횡적(橫笛)과 생(笙)을 연주하며, 구름 위 연화좌에 앉아 있는데, 천의와 영락(瓔珞 .. 구슬목걸이)을 위로 날리고 있는 飛天의 풍만한 모습은 에밀레종, 상원사 동종과 같은 신라 비천상의 분위기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당좌(撞座)는 중앙에 무늬 없는 8엽의 연꽃무늬를 두고, 그 주위에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이 있고, 다시 이음구슬무늬(連珠紋)가 차례로 표현되어 있다.
약사전 藥師殿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883년 함양, 산청 儒生들의 방화에도 불타지 않았던 유일한건물이다. 정면에는 가늘고 기교를 부려서 전서(篆書)로 쓴 "약사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특히 중앙의 꽃살문은 부분적으로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채색이 아직도 아름다운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실상사의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 중에서는 약사전만이 조선 중기의 양식을 갖춘 단정한 건물이다. 약사전에 모신 철불(鐵佛)은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영험한 불상으로 인근 불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약사당의 천장
약사전 천정은 보물 제41호인 철제여래좌상 위에 보개형 닫집으로 구성해 놓았다. 천정은 하늘의 우물을 의미하며, 닫집은 천정의 중심이 되는곳이다. 천정은 연꽃과 용을 그려 놓아 생명의 근원지인 우물과 태양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곳 실상사 약사전의 닫집 주변에는 마치 사대천왕이 불법과 인연이 닿는 사람들을 수호하듯이 각각의 방위를 지키며, 하늘을 섬기어 사람들을 수호하는 듯한 용이 조각되어 있다. 용의 머리에서 강력한 영기가 분출하는 듯한 외뿔이 길게 돋아나 있다.
극락전 極樂殿
극락전은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법당으로, 이곳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원래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타버려 숙종 때 다시 지은 것이다. 하지만 실상사 관련 기록에는 1831년(순조 31)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그러다 고종 때 함양 출신의 양재묵과 산청 출신의 민동혁 등이 절터를 가로채고자 실상사에 불을 놓아 태웠고, 후일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금의 건물로 복구하였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684년(숙종 10)에 계오대사(戒悟大師)가 부도전(浮屠殿)으로 지은 것이다. 극락전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88년(정조 12)에 금파 관오대사 (錦波寬旿大師)가 중수하였고, 이후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중건하면서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렀다. 내부에는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인 아미타여래좌상과 1985년에 조성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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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사 정면에는 교(交)자 무늬문살로 짠 문짝과 빗살무늬로 짠 문짝을 번갈아 달아 다채로움을 더했다. 둥근기둥은 위아래의 굵기의 변화가 없이 밋밋하고, 천정은 바둑판모양으로 짜 넣었다. 정면의 길이는 6.5m, 측면은 4.8m인데, 정간(正間)은 3.1m로서 세 장의 빗살 창호를 달고, 좌우칸은 너비 1.7m로 외짝 빗살 창호를 달았다.
명부전 冥府殿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장육전 동쪽에 있던 길선당의 옛터에 건립된것을 1821년(순조 21)에 의암대사가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사으 판관상, 인왕상의 冥府 권속이 봉안되어 있고, 지장보살 뒤에는 1987년 보성한 지장시왕탱이 모셔져 있다.
석등 .. 보물 제35호
실상사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 밑으로 3단의 받침을 쌓고있다. 받침부분은 모두 3단으로 구성을 했는데, 아래 받침돌과 위 덮게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아래받침돌과 위 덮개의 귀퉁이 조각한 귀꽃이 색다는 석등이다. 지대석은 밑에 팔각의 돌을 놓고 그 위에 안상을 새긴 팔각의 돌을 올려 놓았다.
지대석 위에는 아래받침돌을 놓았는데, 귀꽃 위로는 두장의 커다란 앙련을 조각하였다. 중간 받침돌은 일반적인 팔각형이 아닌, 장고통과 같은형태로 둥글게 조각한 간주석을 놓아 특이하다. 간주석에도 띠를 둘러 앙련을조각하였으며, 위에 연결된 조각은 흡사 네 잎 클로바와 같은 형태의 조각이 있어 색다른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보물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등의 전체 높이는 5m, 재료는 화강석이다. 실상사는 828년(신라 흥덕왕 3)에 홍척(洪陟)이 창건한 사찰이지만, 이 석등을 장식한 양식으로 보아 9세기 중엽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에도 두장의 앙련을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 큰 규모로 조형이 되어있어 석조계단을 조성해 놓았고, 그 위로 올라가 불을 붙일 수있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형이 잡혀있어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아름답게 조형되어 있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서 창문을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화사석의 창을 보면 한 면은 크고, 남은면은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을 알수 있다. 아마도 불을 붙이는 창을 크게 낸 듯하다. 창 하나를 내면서도 조금 더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한 듯하다. 화사석 위의 덮개석인 지붕돌은 날렵하게 경사가 졌는데, 팔각면의 끝에도 귀꽃이 자리하고 있다.
석등은 불을 켜는 화사석(火舍石 .. 석등의 중대석 위에 있는 불을 켜는 돌)을 중심으로 바닥에 3단의 받침을 놓고, 위에는 지붕돌을 얹었다. 8각의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석 측면마다 안상(眼象)을 음각하였으며, 上面에는 겹잎(複葉) 8판(瓣)의 복련(覆蓮 ..꽃부리가 아래로 향한 연꽃을 배치하였고, 합각(合角)의 판단(瓣端)에는 삼산형(三山形)의 귀꽃을 둥글게 장식하였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 올려진 형태로 팔작지붕의 날렵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돌출된 꽃모양인 귀꽃을 조각하여 멋을 더했다. 덮개석 위에 얹은 머리장식은 화려한 무늬를 새겼으며, 이 머리장식에도 화려한 무늬와 함께 귀꽃을 조각하여 붙였다. 실상사 석등은 받침돌, 덮개석, 머리장식이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모두 귀꽃을 놓아 뛰어난 장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형태이다. 원형 그대로를 거의 보존하고 있는 실상사 석등은보물 제35호로 지정되었으며, 벌써 천년 세월을 서 있으면서도 그 아름다운자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돌사다리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에 불을 밝힐 때 사용하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국내에서 유일한 것이다. 5m에 달하는 석등에 불을 켜기 위하여 높이 1m의 4층 돌계단이 놓여 있는 것이다.
화사석(火舍石)은 8면에 모두 직사각형의 화창(火窓)을 내었는데, 이는 임실 용암리 석등(보물 제267호)과 개선사지(개선사지) 석등(보물 제111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옥개석은 전각(轉角)의 반전이 약간 표현되었으며, 낙수면(落水面)에는 합각마다 1판씩 복련을 조식하였다. 상륜(上輪)은 8각의 보개(寶蓋), 연꽃 봉오리 형태의 보주(寶珠) 등 각 부재에 화사한 모양을 조식하였다.
東西 3층석탑 ... 보물 제37호
보광전 앞에 東西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두 탑의 수법과 규모는 거의 동일하다.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가 있으며, 높이는 8.4m이다.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東西) 두 탑 모두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그리고 탑신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통일신라의 정형탑이다. 이 두 탑 중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를 중심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가 모두 남아있으나, 서탑이 경우에는 수연(水煙)이 없어졌다.
두 석탑은 모두 동일 양식으로서, 이중의 기단 위에 3층을 유지한 방형 석탑이다. 따라서 신라시대 석탑의 일반형식을 착실하게 따르고 있다. 이 석탑의 건립은 실상산문의 개창 당시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기단 주위에는 넓게 장대석을 둘러서 탑의 구획을 나타내고 있다. 탑구는 불국사 석가탑에 나타난 팔당금강좌와 같은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석가탑에서와 같이 여덟송이 연꽃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조형은 없어도 그 근본 의도는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탑구 내부의 중앙에는 지대석을 마련하여 석탑의 하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하층기단은 하대석과 중대석을 붙여서 4매의 긴 돌로써 조성하였다. 갑석은 상하 모두 경사가 급한 편이고 우주(隅柱)와 탱주 역시 상하 동일한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즉 우주(隅柱) 둘에 탱주 하나씩을 조각하였다.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다른돌로 마련하고 옥개석의 받침은 4단이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에 가까우나, 낙수면(落水面)의 전각(轉角)은 위로 솟아오르는 반전을 경쾌하게 나타내고 있다.
상륜부의 아름다움
이 석탑의 귀중함은 상륜부(上輪部)의 아름다움에 있다. 일반 석탑에서 신라시대의 상륜부를 볼 수 있는 탑은 별로 없지만, 이 석탑은 상륜을 거의 완전하게 유지하고 있으므로 이 방면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상륜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하늘세계의 보식장엄(寶飾莊嚴)을 보는 듯 환상적 세계에 바지게 된다. 사실 이와같은 탑파건축은 환상적인 조형물이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볼 수 없는 청정한 불국토에 대한 환상적 장엄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륜은 노빈(露盤)으로부터 보주(寶珠)에 이르기까지 착실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노반은 이슬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이슬은 감로(甘露) 바로 그것일 것이다. 모든 번뇌를 쉬게 하고 지혜를 증장시키는 감로를 받는 노반을 상륜의 아래에 놓고, 그 위에 꽃무늬가 있는 반구형의 복발(覆鉢)을 놓았다. 복발 위에는 앙화(仰花)를 정방향으로 조성하여 8개의 꽃잎을 세워 두었다. 원형을 기본으로 한 복발과 그 상부의 보륜(寶輪) 사이에 갑자기 줄어든 정방형의 앙화를 놓음으로써 이들이 조화가 되지 않는듯하면서도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방(方)과 원(圓)의 투합(鬪合)에서 이루어지는 묘상(妙相)장엄이라고 할 수있다.
목탑터 목탑터
백장암, 3층석탑 .. 국보 제10호
백장암 백장암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실상사의 부속 사찰로 원수사, 장계사, 백장사(伯丈寺)가 기록되어 있어, 이 세 사찰은 실상사의 말사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침허대사가 실상사를 중창할 때에 원수사는 폐사되었고, 백장사에 속한 8개 末寺와 실상사에 속하였던 9개 말사가 남아 있었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원래는 백장사(百丈寺)이었다. 1679년 화재를 당하자, 신도들이, 백장사는 10년 동안 두 번이나 화재가 일어났고, 장소도 협소하니까 실상사 옛터에 재건하자고 하였다. 따라서 백장사 터에 몇 칸의 작은 건물을 지어 백장암(百丈庵)이라고 하였다.
1868년(고종 5) 10월에 제3차 화재를 당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운월대사가 아래에있던 터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01년에 다시 화재를 장하였고, 다음 해에 남호대사가 다시 세웠다고 한다.
백장암 남쪽 아래 경작지에 있는 석탑으로, 바로 뒤에 서 있는 석등과 함께 원래의 위치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북쪽에 법당 터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뚜렷한 점으로 미루어 본래의 백장암은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 탑은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 것에 비하여,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나고 있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에만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보개, 수연(水煙)이 완전한 찰주(擦柱)에 겹쳐 있는 것도 희귀한 예이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메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층 탑신과 상륜부
2층 탑신의 주악천인상 (奏樂天人像)
문비 (門扉)와 신장상(神將像)
초층 탑신의 사천왕상과 동자상
백장암, 석등 .. 보물 제40호
삼층석탑과 나란히 함께 서 있는 이 석등은, 하대석과 간주석(竿柱石), 상대석, 화사석, 옥개석 등을 갖추었는데, 상륜부는 도난 당하여 현재 그 원형을 찾을 수 없다. 각 부분에 새긴 조각의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4면에만 직사각형의 불을 켜는 구멍(火窓)이 있으며, 다른 4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화창의 입구에는 창문을 고정시키기 위한 못 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실상사 경내에있는 석등과 같은 형식이다.
이 석등에서 특이한 것은 상대석 앙련(仰蓮)의 윗부분에 난간을 표현한 범으로 이처럼 앙련대석(仰蓮臺石)에 난간(欄癎)을 둘러 장식한 것은 석등으로는 유일하다.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 .. 보물 420호
향로(香爐)란 절에서 마음의 때를 씻어주는 의미를 지닌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기구로 화완(花椀) 또는 향완(香椀)이라고도 한다. 향로는 모양에 관계없이 향을 피우는 도구를 총칭하는 말이고, 화완, 향완은 밥그릇 모양의 몸체에 나팔 모양의 높은 받침대를 갖춘 향로만을 말한다.
이 향로(香爐)의 정식 명칭은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百丈庵靑銅銀入絲香爐)"이며, 1584년에 제작되었고, 높이 30cm, 입지름 30cm의 크기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향로의 전 뒷면에 점선으로 기록된 銘文을 통하여 1584년(선조 1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萬曆十二年甲申三月鑄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나팔형 받침으로 이루어진 향로로서 고려시대의 향로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몸체와 받침은 따로 만들어 연결하였는데, 몸체에 비하여 받침이 빈약한 감이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넓은 전에는 쌍선(雙線)을 돌린 9개의 원 안에 쌍구체(雙鉤體)의 범자(梵字)를 1자 씩 새겨 같은 간격으로 배치하였으며 그 사이에 당초무늬(唐草紋)를 장식하였다. 향로 몸체의 4곳에는 큰 원이 있고 다시 그 안에 범자 1자씩을 굵게 입사(入絲)한 5개의 작은 원을, 중앙의 한 원을 중심으로 4개를 "十" 자로 배치하였고, 빈 공간에는 쌍구식으로 당초무늬를 입사하였다.
몸체의 아래에는 앙련화(仰蓮花)가 돌려져 있고, 받침에는 복련(伏蓮)을 배치한 다음 조선시대의 특색을 보이는 꽃잎을 곁들인 연화당초(蓮花唐草)를 입사하였으며, 하단의 둥근 굽에는 구름무늬를 배치하였다.
철조약사불좌상 .. 보물 제41호
약사여래(藥師如來)는 중생의 病苦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현실이익적인 부처이다. 이처럼 약사여래는 인간의 생노병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病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약사신앙이 전래된 이후 계속 신앙되었다.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철불(鐵佛)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찰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한 예로써 당시의 불상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불상은 수철국사가 4천 근이나 되는 철을 녹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크기가 3m가량 되는 巨佛로 우리나라 鐵佛 가운데 가장 큰 鐵佛이다.신라 말 고려 초에는 철제농기구가 보급되어 鐵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지방의 호족들은 이를 토대로 경제력을 높이는 한편 무기를 제작하여 독자적인 행동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철제기술의 발달로 선종 사찰에는 어김없이 鐵佛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철불들은 전 시대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美感으로 고매한 불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이제는 무엇이든 꿈 꿀 수 있는 호족들의 야심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 철불이 봉안된 약사전은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조선 중기의 양식을 갖춘 단정한 건물이다. 이 鐵佛은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영험한 불상으로 인근 불자들에게 큰 人氣를 모으고 있다. 佛者들이 이 철불을 만지느라고 손과 소매가 반질반질하다.
약그릇 들고 있지 않은 실상사 약사여래
약사여래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약사불로 신앙되고 있는 불상 가운데에는 약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이곳 실상사의 약사여래도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불상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고도 하며, 근래에는 원래의 손이 아미타 수인(手印)을 하고 있어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상산문의 제2대 조사인 수철국사(수철국사)가 약사여래상과 삭탑 2 기를 세웠다는 설이 있어, 현재 약사전에 봉안된 철조여래상은 수철국사가 조성한 약사불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이 불상은 실상사가 중창될 때 까지 들판에 있었으며, 약사전을 세운 이후 약사전에 봉안되어 오늘에이르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모양의 나발(螺髮)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모양의 육계(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귀는 긴 편이며, 목의 三道는 겨우 보일 듯이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승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눈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감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양 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 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의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런 모습이다.
이상과 같은 이 불상의 특징들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것에 그 귀중한 가치가 있다. 현재 보물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에는 보화(寶貨)가 많이 들어 있다는 말이 있어 일찍부터 도굴꾼에 의하여 훼손된 적이 있다. 불상의 복장품 중에는 효령대군의 발원문과 사경(射經) 및 인경(印經)이 수 백권 있었으며,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드문 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도난 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한다.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린 9품인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는 두 손을 찾아내 원래 철제 손 그대로 1986년에 복원한 것이다. 무릎 아래 부분 역시 복원한 것이지만 원래 모습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 보물 제 34호
이 탑은 통일신라 진성여왕 7년(893), 수철화상(수철화상)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행적과 뜻읅 ㅣ려 세운 부도탑이다. 실상사를 처음 창건한 홍척대사(홍척)의 제자인 수철화상은 스승의 뒤를 이어 실상사를 유명사찰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수철화상 秀澈和尙
수철화상의 法號와 姓氏는 잘 알 수 없다. 신라 헌덕왕 4년 812년에 15세의 나이로 연허율사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836년 원경의 복천사에서 윤법대덕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설악산에서 홍척국사(洪陟國師)를 만나 地理山에 들어와 , 홍척으로부터 法을 전수받고 실상사의 제 2대 祖師가 되었다.
그의 塔碑에 의하면 "ㅁㅁ신라국양주심원사ㅁ국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명병서 ...ㅁㅁ新羅國良州深源寺ㅁ國師秀澈和尙稜伽寶月塔碑銘幷序"로 기록되어 있어, 그가 양주( 良州..지금의 양산) 심원사에서 실상사로 옮겨와 개산 2대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홍척국사 문하에서 禪僧이 된 수철화상은 禪 수행뿐만 아니라 "화엄경"을 공부하였고, 지실사(知實寺 ..지금의 실상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수철화상이 禪宗과 敎宗을 대립적으로 이해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수철화상은 893년(진성여왕 7)에 세상을 떠나는데, 그 때 세납 79세, 법랍 58세이었다. 이에 진성여왕은 諡號를 수철(秀澈)이라 하고, 탑호(塔號)를 능가보월(稜伽寶月)이라 하여 그를 기렸다.
높이 3m인 이 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부도탑으로 팔각형을 기본형태로 삼고 있다. 탑 몸체 각 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넣었다. 목조건축의 형식을 모방하여 세밀하게 조각해 놓은 지붕에서 석공의 뛰어난 조각술을 엿 볼 수 있다.
이 비석은 부도탑과 함께 세운 것이다. 비석은 높이 2.9m로 비머리에는 구슬을 다루는 용을 조각하였다. 비에는 수철화상이 태어나 불가에 귀의, 득도하여 세상을 교화시킨 후 열반에 들기까지의 과정과 그를 기려 탑을세운 경위를 차례로 적어 놓았다. 아쉽게도 현재는 글자가 거의 마멸되어 판독이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
실싱사 부도 .. 보물 제36호
증각대사응료탑 및 탑비 .. 보물 제 38호, 제39호
실상사의 개창조(開創祖)인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浮屠)이다. 전체 높이가 2.42m이다.
이 탑은 8각형의 석재를 여러 층으로 쌓아 기단을 조성한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고, 위 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비교적 낮은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을 새겼으며,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을 잘 묘사하였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홍척국사 洪陟國師
국사의 법호는 홍척(洪陟), 시호는 증각(證覺), 탑호는 응료(凝蓼)이다. 그는 신라 헌덕왕 때 당나라로 건너가 서당지장(西堂地藏)으로부터 선종(禪宗)의 진리와 법을 이어받아 크게 道를 깨닫고 귀국하였다. 홍척국사가 귀국한 때는 흥덕왕이 즉위한 해로 선강태자가 상대등으로 있을 때 이었다. 왕과 태자는 홍척국사의 덕을 우러러 그를 국사로 임명하였다. 그들은 신라 골품(骨品)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선종(禪宗)의 혁명적 사상에 공감하였던 것 같다.
왕의 신임을 받은 홍척국사는 선종의 최초 가람인 실상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그가 창건한 절의 처음 이름은 지실사(知實寺)이었다. 그 후 구산선문이 분파 대립하던 시기에 하나의 종파로서 그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이 홍척국사의 존칭인 "실상선정국사(實相禪定國師)"의 앞머리를 따워서 고려 초부터 실상사로 고쳐 불렀다.
문비
사천왕
비천상
약수암 목조탱화 .. 보물 제421호
나무에 불상을 조각하여 만든 탱화(幀畵)인데, 탱화는 보통 천이나 종이에 그린 그림을 족자나 액자형태로 만들어 거는 佛畵를 말하지만 나무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약수암
지리산 실상사 앞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산 위로 2km이상을 더 올라가야 약수암이 나타난다. 이곳 약수암은 1724년(조선 경종 4년)에 천은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외의 사실은 전해온느 것이 거의 없다. 법당인 보광전과 요사채 두 동으로 구성된 그야말로 산중 암자이다.
크기는 가로 183cm, 세로 181cm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현재 전하고 있는 목조(木造) 탱화 가운데 가장 간략한 배치구도를 가지고 있다. 이 목조탱화는 한장의 목판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모셔진 목조탱화는 복제품이다. 설명들을 인연이 없으면 그대로 그냥 眞品이다. 그 진품은 도난 등을 방지하기 위하여 금산사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화면은 크게 상하로 나누었는데, 하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보현보살과 세지보살을, 왼쪽으로는 문수보살과 관음보살을 배치하였다. 상단에는 석가모니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월광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으로는 일광보살과 미륵보살을 배치하였다. 본존불인아미타불은 타원형의 광배를 가지고 있으며, 사자가 새겨진 대좌(臺座)에 앉아있다. 불상들은모두 사각형의 넓적한 얼굴에 근엄하면서도 친근감이 넘친다. 좁은 어깨가 목 위로 올라 붙어 마치 앞으로 숙인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양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길게 연꽃의 대좌 밑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乾隆四十七年壬寅十日月方丈山實相寺
1782년(조선 정조 6)에 제작된 것으로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원만한 불상들의 모습과 배체구조, 정교한 세부조각 등은 조선 후기 목각탱화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약수암 목조탱화 전면
불격(佛格)에 따른 크기의 차이는 거의 없는 반면 본존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만은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광배(光背)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본존물은 사자(獅子)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따로 조각하여 끼워 놓았다. 그 주위에 서 있는 8보살 중 관음보살은 보관(寶冠)에 화불이 있고 손에는 보병을 들었다. 지장보살은 스님의 머리모양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있다. 합장한 두 사람의 비구는 석가모니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으로 여겨지고 있다.
보현보살 대세지보살 본존 아미타불 관음보살 문수보살
우협시 대세지보살 본존 아미타여래좌상 좌협시 관음보살
지장보살 월광 아난존자 가섭존자 일광 미륵보살
석가모니의 2대 제자 ...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이 목조탱화는 일반적인 불화의 배치구도와 동일하게 배치하였지만, 나무에 부조(浮彫)로 새겨 후불탱화의 기능을 하도록 한 목조후불탱화이다. 이러한 탱화가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재 조선 후기의 작품들이 10여점이나 남아있어서 적어도 이 시대부터는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