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싸움
이사는 내일 다시 와서 검호를 데려가기로 했다. 오늘밤이 지나면 당분간 검호는 사제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제들은 별로 섭섭해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검호는 무척이나 괴로운 표정이었다.
"자객 수업이란 얼마나 힘든 것일까!"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프게 말했다. 내일부터 고생을 할 생각을 하니 앞이 암담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나 위험한 일일 것인가? 그는 어쩌면 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제들은 코웃음을 쳤다.
"사형에게 맡길 사람이라면 분명히 하찮은 사람일게 뻔해. 뭘 그렇게 걱정을 해?"
검호는 분개하며 물었다.
"너희들은 나의 이 순결한 손에 사람의 피가 묻는 것이 가슴 아프지도 않단 말야?"
그것은 사제들을 뜨끔하게 했다. 사람을 죽여서 돈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히 마음에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좋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죽을 사람이 천하의 악한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사실 전 노야가 원하는 것은 단지 황금 만 냥의 돈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전 노야에게는 전 노야의 뜻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만냥의 돈을 갚으면 전 노야는 많은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줄 수도 있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들을. 대사형은 어떻게 죽었으며, 또 사부는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사실들을.
그것은 그들에게는 커다란 유혹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혹을 이겨낼 만큼 강한 사람들이 되지 못했다.
검호는 슬픈 눈으로 자신의 흰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제들도 모두 입을 다물고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손에 사람의 피를 묻히게 된다. 어쩌면 그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 사실은 무거운 돌처럼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을 짓눌렀다.
갑자기 검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결한 손은 무슨 순결한 손! 게으른 손이지! 어서 나가서 밥이나 먹자!"
그들에게는 이사가 주고 간 약간의 돈이 있었다. 그리고 내일은 이별이 있을 것이다. 비록 가진 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별연을 베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금릉은 돈 없는 사람에게는 매정한 곳이었지만 아주 약간이라도 은자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 은자만큼의 행복을 주는 곳이었다.
그들은 휘황한 금릉의 거리로 나아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휘황하다는 진회하로 그들은 어깨를 펴고 나아갔다.
진회하는 진(秦)나라 때 만든 운하로 금릉의 명소였다. 강에는 술을 팔고 노래를 파는 배들이 꽃등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채 떠다녔고, 강 양쪽에는 이층 삼층의 호화로운 누각들이 서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거나한 얼굴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집에 앉아있거나, 아니면 술집을 찾아가거나, 그도 아니면 술집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물위에는 배들이 꽉 차 있었다.
이 호화로운 금릉에서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은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들도 이방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물결에 휩쓸렸고, 운하 가까이로 다가갔다.
"오늘은 우리도 저 배 위에서 뭘 먹도록 하자."
검호가 신이 나서 말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는 마지막 여물을 잘 먹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막상 손님들을 끄는 배들을 보니 모두 기녀들이 춤을 추고 노래하는 곳이었다. 사매가 둘 이나 낀 그들 일행이 가기에는 적당치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고민은 큰배로 손님을 데려가기 위해 강기슭을 오가는 작은 배의 사공이 해결해 주었다.
"이 배로 올라오십시오! 제가 점잖게 마시고 먹을 수 있는 배로 안내하겠습니다."
사형제들은 서슴지 않고 그 배에 올라탔다. 사공은 곧 솜씨 있게 배를 부려 운하의 중심으로 가기 시작했다.
운하 위에는 정말 배들이 많았다. 심지어 대부분의 배들이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배들 사이에 끼어 꼼짝 않고 서있을 정도였다. 커다란 배들 사이로 작은 배가 움직여 가는 것은 마치 암초가 많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처럼 위험했다. 그러나 사공은 아주 익숙하게 미꾸라지처럼 쪽배를 몰았다.
검학이 물었다.
"여기는 원래 이렇게 배들이 많습니까?"
사공이 고개를 저었다.
"왠걸요. 원래는 이렇게 꼼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사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저 위쪽에 큰 배 하나가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운하가 좁아진 것이나 다름이 없지요."
"큰배요?"
검학이 다시 물었지만 사공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사공은 그 큰 배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배가 그들을 인도한 것은 운하 거의 반대편에 떠있는 그보다 좀 더 큰 배였다. 그 배에는 홍등(紅燈)도 걸려있지 않고 다만 노란 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기녀의 노래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배에는 손님도 없었다.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그들을 맞이해 준 것은 인상이 좋은 중년여인이었다. 그리고 요리를 하는 것은 역시 인상이 좋은 중년의 남자였다. 그 두 사람은 부부로 보였다. 그곳은 여자를 원하지 않는 점잖은 손님들을 위해 요리를 파는 배였다. 그들은 아주 편안하게 다섯 사람을 안내하여 자리에 앉히고 곧 음식과 술을 내오겠다며 물러갔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사형제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처럼 운하가 복작복작하지 않은 날은 배 위에 있으면 물결이 일렁이는 수면과 그 수면에 반사되는 아름다운 불빛들을 볼 수 있으련만, 오늘 보이는 것은 오직 앞과 뒤와 옆에 꽉 차 있는 다른 배들의 풍경뿐이었다.
"어, 저 사람들은?"
옆의 배 안에서 기녀들이 춤을 추고 가야금을 뜯는 것을 보고있던 검웅이 문득 소리를 질렀다.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았다. 옆의 배에서는 잠시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 떼의 검을 든 도사들이 풍류를 깨며 뱃전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들은 도를 닦는 사람들답지 않게 눈에 흉흉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저 옷은 분명히 어제 비무대회에서 보았던 그 공동파 사람이 입던 것과 같은 것인데?"
그들은 틀림없는 공동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석수도장은 그들 속에 없었다. 공동파 사람들이 옆의 배에 올라가자 그 배의 풍악 소리는 끊겼고 기녀들은 입을 다물었다. 손님들도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두려움에 떠는 듯 했다.
공동파 사람들은 손님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그 배를 떠났다. 공동파 사람들을 태운 작은 배가 또 다른 큰배를 향해 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누굴 찾는 걸까?"
"아주 화가 잔뜩 난 것 같은데."
검웅과 검매가 말했다. 더 이상은 그 문제에 대해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속으로 켕기는 바가 없지 않았다. 혹시 공동파 사람들은 그들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찾을 이유는 없겠지만, 하도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금릉이니 혹시 또 모르는 일이 아닐까?
인상이 좋은 중년여자가 그들을 위해 잉어요리를 내왔다. 막 잡아 올린 잉어에 솜씨를 부린 그 요리는 냄새만 맡아도 군침이 넘어갈 정도였다.
그들이 막 젓가락을 가져갈 때, 이 조용한 배 위에 또 한 떼의 손님들이 올라왔다. 긴장하여 그 새 손님들을 바라본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은 곧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공동파의 살기 등등한 도사들이 아니라 조용한 몇 명의 비구니들이었다.
아마 비구니들이 진회하의 멋을 즐기면서도 번잡한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배를 찾아와야 하리라. 비구니들은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차와 음식을 주문했다.
비구니들도, 장백쾌검문의 사람들도 모두 조용했기 때문에 이 배는 마치 장사를 하지 않는 것처럼 적막했다.
적막한 배에 앉아 좌우의 배들로부터 들려오는 요란한 웃음소리와 노래소리를 듣는 기분은 어쩐지 서글픈 것이었다. 마치 인생의 모든 즐거움과 화려함은 다 남의 것이고, 그들 자신은 멀찍이 떨어져 그것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범부(凡夫)의 슬픔과 비슷했다.
검호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 기억나니?"
검웅이 물었다.
"무슨 이야기?"
"사부님이 들려주셨던 이야기. 자객 형가(荊軻)의 이야기 말이야."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어린 시절 그들의 가슴을 벅찬 감동과 슬픔으로 채워주었던 것이었다.
진시황(秦始皇)을 죽이기 위해 자객의 길을 떠난 협객(俠客) 형가. 가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슬픈 사나이의 운명. 그리고 그의 뒤를 밟아 죽음의 길을 간 친구들.
검매의 눈에 스르르 눈물이 고였다. 그녀가 꿈꾸던 강호는 그런 곳이었다. 협객이 있고, 지켜야할 약속이 있고 서슴없이 떠나는 운명의 길이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밟은 강호의 땅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었다. 종적을 잡을 수 없는 의문들만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고, 어디에서나 비열한 음모의 냄새가 났다. 그 음모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 사형제들 중에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떠나고 어떤 사람은 병이 들어 입도 열지 않았다.
검매는 가만히 눈을 들어 옆에 앉은 검란을 바라보았다. 예쁘장하던 그녀의 얼굴은 몰라볼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그녀는 여기까지 와서도 젓가락으로 잉어의 옆구리만 쿡쿡 찔러볼 뿐 별로 식욕이 없어 보였다. 검표가 떠나고 난 뒤로 그녀는 정말 말하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변했다.
'가엾은 것…….'
그녀는 대사형이 죽은 뒤 이 육사매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과 외로움을 반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육사매를 위안해줄 수 있는 방법은 그녀에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검호가 별안간 묵직한 소리로 말했다.
"장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음성에는 비감(悲感)이 가득 묻어 있었다. 검학이 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형가를 생각하고 내 앞날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검호는 갑자기 얼굴을 가리며 진짜로 눈물을 흘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사형제들은 아무도 울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검학이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사형은 형가가 아니고 죽을 사람도 진시황은 아닐 거야. 그러니 울지 말라고."
"정말 그럴까?"
"정말."
"그럼……!"
검호는 비로소 환한 얼굴로 모두에게 말했다.
"오늘은 마음놓고 코가 삐뚤어지게 먹어보자고!"
그는 손을 들어 다시 여주인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또 한 떼의 사람들이 이 조용한 배로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한 손님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배들을 들쑤시고 돌아다니던 바로 그 공동파의 도사들이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짙은 살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젊었고 손에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공동파의 검을 쥐고 있었다. 묘한 것은 그들의 도복 깃에 하나같이 검은 헝겊이 대어져 있는 점이었다. 어쩌면, 그들 문파의 어른 중 누군가가 최근 세상을 떠난 것일지도 몰랐다.
공동파의 도사들 중에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젊은이가 배 안을 둘러보더니 득의하여 외쳤다.
"역시 이곳에 있었군!"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은 일제히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이 도사들은 정말로 그들을 찾아온 것일까?
아니었다. 그들의 살기 등등한 시선이 향한 것은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비구니들의 자리였다.
"무정신니, 어서 나와보시오!"
비구니들 중에 유독 말이 없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사람이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머리를 들었을 뿐 아니라 그녀는 앞으로 걸어나와 공동파 도사들 앞에 당당히 섰다.
"빈니는 오랜만에 금릉 수란사(修亂寺)의 분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만, 공동의 분들께서 어쩐 일로 빈니를 찾으시오?"
공동파 도사들을 보는 무정신니의 눈도, 무정신니를 보는 공동파 도사들의 눈도 결코 곱지 못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은 무림맹이라는 한 지붕밑에서 밥을 먹는 식구들이 아니라 뿌리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들 같았다.
검호가 머리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살았다, 살았어!"
검매가 역시 나지막하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니었잖아? 조용히 먹다가 얼른 나가자고. 보아하니 곱게 넘어가지 않을 일 같은데. 시비를 걸러 온 것이 틀림없어."
검학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소리도 무척이나 낮았다.
"어째서 공동파에서 아미파에 시비를 걸지? 아미파가 공동파에 진 것 때문에 감정이 상해서 시비를 걸면 몰라도 말이야."
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그건……!"
그 답은 공동파 도사들이 들려주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의 도복 깃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은 이것을 보고도 우리가 어째서 당신을 찾아왔는지 모른단 말이오?"
"모르겠습니다만."
쾅!
공동파 도사가 검집으로 뱃전을 세게 치며 외쳤다.
"우리 사부님이 오늘 새벽에 세상을 뜨셨는데, 흉수인 당신이 모른단 말이오?"
무정신니의 얼굴에 차가운 비웃음이 떠올랐다.
"흉수라니? 내가 언제 당신네 사부인 석수도장을 해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말을 꺼낸 공동파 도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당신과의 비무에서 입은 내상으로 앓으시다가 오늘 돌아가셨소!"
무정신니의 비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것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뭐가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오?"
"지난번의 비무에서 빈니는 분명 석수도장께 크게 패했는데, 어째서 석수도장께서 저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하시는지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비무에서 일어난 사고를 이렇듯 무례하게 따지는 것은 대체 무슨 경우인지요?"
공동파 도사들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나 그들의 기세는 그렇게 금세 누그러들지 않았다. 말소리는 좀 누그러졌지만, 눈매에 담긴 살기는 더욱 흉흉했다.
말을 처음 꺼냈고, 또 뱃전을 검집으로 두드리며 기세를 토했던 공동파 도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일반 강호인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소."
"무엇을 말인가요?"
"당신은 그날 그 선장의 머리로 사부님의 가슴에 내상을 입혔소. 그것이 바로 사부님의 사인이 된 거요."
무정신니의 눈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그녀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갈수록 기이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만일 빈니가 석수도장께 내상을 입힐 수 있었다면 어째서 패배를 자인했겠습니까? 제 선장은 석수도장의 몸에 닿지도 못했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옆의 배들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 몇몇 사람들이 호기심에 이끌려 이 배를 주목했다. 이 배는 이제 더 이상 조용하고 적막하지 않았다.
공동파의 젊은 도사는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목소리를 낮추시오!"
이상한 일이었다. 따지러 온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고, 추궁을 당하는 사람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무정신니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설마하니 여러 공동파 분들께서는 빈니가 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패배를 자인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공동파 도사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주인!"
별안간 한 도사가 화가 난 목소리로 배의 주인을 불렀다. 주인과 여주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장막을 치게!"
운하 위를 떠다니는 배들은 저마다 지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심한 비가 내릴 때 갑판을 가릴 수 있는 장막이 그 지붕들에 달려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그것들은 곱게 말려 지붕에 매달려 있지만 비가 내리기만 하면 즉시 드리워져 바깥에서는 배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공동파 도사들은 그 장막을 드리워서 무정신니와의 분쟁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검학은 문득 불안해졌다. 석수도장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이 중요한 것이라면, 그래서 저렇게 타인들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면, 같은 배 안에 있는 그들 장백쾌검문의 사람들과 무정신니의 동행인 수란사의 비구니들은 어찌될 것인가?
여주인이 덜덜 떨면서 검호네가 앉아있는 자리로 왔다. 그들의 뒤쪽에는 바로 당기기만 하면 장막이 드리워지는 굵은 끈이 있었다.
그때 무정신니가 차갑게 웃었다.
"세인들의 이목을 피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안될 일!"
말이 끝날 때 그녀의 손에서는 작은 비도(飛刀) 하나가 날아갔다. 이 냉막한 아미파의 여승은 천만뜻밖에도 소매 안에 몇 개의 암기까지 지니고 있었다.
비도는 쏜살같이 날아가 여주인의 어깨를 스치고 검호와 검학이 앉아있는 사이의 좁은 공간을 지나 장막을 드리우는 굵은 끈 쪽으로 돌진했다. 단숨에 그 끈을 끊어 감히 장막을 드리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공동파의 도사 중 하나가 번뜻 몸을 날렸다 그는 검과 함께 날아와 아직 반도 다 먹지 못한 검호네의 잉어요리 접시를 밟고 검을 뻗어 비도를 힘껏 쳐냈다. 잉어도 물론 그의 발에 밟혀 문드러져버렸다.
무정신니와 공동 도사의 움직임은 실로 빨라서, 지켜보던 모든 사람의 숨을 턱 막히게 했다. 너무 놀라면 오히려 행동이 느려지는 법이었다.
"아!"
검호는 공동파의 도사가 다시 몸을 뒤집어 제자리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비명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비도가 귓가를 스치고 머리 위에서 공동의 검이 휘둘러진 것에 놀라는 것 같기도 했고, 맛있는 잉어요리가 박살이 나버린 것을 안타까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이 둘 다 일지도 몰랐다.
무정신니는 자신의 비도가 멀리 날아가 버린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쌀쌀맞은 소리로 말했다.
"이번의 비무에서 빈니가 패하는 바람에 공동파는 아미파의 위에 서게 되었소. 한데 무슨 불만이 있는 거요?"
"우리는 다만 사부님의 죽음에 대해 당신의 죄를 물으려는 것뿐이오!"
"죄를 물어? 무엇으로?"
이미 비도가 날았고 검이 번뜩였다. 이제는 상대방을 향해 무기가 뽑혀질 차례였다. 공동파의 도사들은 검을 뽑아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챙!
도사들은 검을 뽑아들고 무정신니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것으로!"
무정신니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한바탕 싸움이라도 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사람 같았다. 그녀의 눈은 비구니답지 않은 투지와 호승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 놓아두었던 선장을 집어들었다. 그것이 그녀의 검이었다. 그녀는 검을 검집에서 뽑아들며 물었다.
"그래, 그대들 모두가 한 번에 덤빌 건가? 요즘 공동에서는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치나?"
젊은 도사들의 얼굴이 일순 붉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공동의 평범한 제자들일 뿐이고, 무정신니는 아미파를 대표하는 고수였다. 일대 일로 겨루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대였던 것이다.
도사들 중 한 명이 급히 반박했다.
"당신은 감히 비무를 빙자해 우리 사부님을 살해한 흉수이니 설령 공동의 문하 모두가 달려들어 싸운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이 없소!"
무정신니의 눈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이 빙산처럼 차가운 여인은 그 안에 불같은 노여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내가 치욕을 무릅쓰고 패배를 인정해 물러났거늘, 감히 내게 그따위 소리를 한단 말이냐! 만일 약속이 없었더라면 너희 사부는 내 검 아래에서 단 십초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죽은 사부를 모욕하는 소리에 공동의 제자들도 눈이 뒤집혔다. 그들은 더 볼 것없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달려들었다.
검호는 저렇게 살기등등한 검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본 검은 모두 온유하고 정직한 것들이었다. 사부는 그들에게 언제나 말했었다. 검은 무기가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라고. 그러나, 지금 이 싸움을 본다면 사부도 검은 역시 사람을 죽이는 흉기일 뿐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살이 베어지고 뼈가 쪼개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그것이 무정신니 쪽이 되든, 아니면 공동파의 어느 도사들이 되든 간에 그 일이 막 이제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검호는 그런 광경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살이 베어지고 뼈가 쪼개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려온 것은 '쨍'하고 '따당'하는 맑은 소리 뿐이었다. 그러나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는 분명히 아니었다. 저렇게 살기 등등한 검이 부딪혀서 고작 저렇게 작고 영롱한 소리만을 낼 리는 만무했다.
검호는 다시 눈을 떴다. 누구의 살도 베어지지 않았고 누구의 뼈도 쪼개지지 않았다.
무정신니의 검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와 공동파 젊은 도사들 사이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노비구니가 서있었다.
무정신니의 검 옆에는 한 알의 염주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염주알이 그토록 작고 영롱한 소리를 낸 범인이었고, 또한 무정신니의 손에서 검을 떨구게 만든 것이었다.
알 하나가 빈 염주를 손에 쥔 노비구니가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새로 나타난 것은 그 노비구니 뿐만이 아니었다. 청삼을 입은 너댓명의 비구니들이 노비구니의 좌우에 시립해 있었다.
"불자(佛者)는 승패에 연연하는 속세인들과 같아서는 안되느니, 무정아! 너는 아직도 마음에 잡념이 남아있느냐?"
노비구니가 탄식하며 말했다. 무정신니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는 아마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부님, 사부님……! 제자는…….!"
그녀의 입에서 '사부'라는 말이 나오자 숨을 죽인 채 이 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목하던 주변의 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무정신니의 사부다!"
"아미파의 장문인 의화성니(椅化聖尼)야!"
보통 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도 구대문파의 장문인을 이렇게 가까운 발치에서 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물에 빠질지 모르는 위험도 아랑곳않고 뱃전에 몰려나와 수선을 떨었다.
이때, 막 시작하다만 싸움을 차단당한 공동파의 젊은 도사들이 의화성니 앞으로 나아가 막 손을 내밀어 인사를 하려 했다.
"공동의 제자들이 아미파 장문인을 뵙……."
그러나 의화성니는 그들에게 시선도 던지지 않고 낮은 소리로 말을 끊었다.
"공동의 제자들을 다스리는 것은 공동파의 몫!"
젊은 도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이 뒤를 돌아보자, 막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뱃전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마자 젊은 도사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지금 올라온 사람들은 바로 그들의 사형들이었고, 사숙들이었으며, 사조(師祖)였다. 가장 앞에 선 수염이 성성한 노도인(老道人)은 그들이 결코 얼굴을 마주볼 수조차 없는 공동파의 장문인 현우진인(玄優眞人)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제자들은……!"
젊은 도사들도 무정신니처럼 감히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사문의 어른들이 하나같이 노여운 얼굴을 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보기도 어려운 구대문파의 장문인 중에 두 명이 한 자리에 나타났다. 주변을 둘러싼 배들에서는 겉잡을 수 없는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몇 사람은 좀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몸을 내밀다가 떠밀려 그만 물 속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두 신이 난 것 같았고, 즐거워 보였다.
그러나 정작 구경거리가 되는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현우진인이 함께 온 중년의 도사에게 말했다.
"장막을 내려라."
이번의 도사는 장문인의 명을 받들고 점잖게 걸어왔다. 그는 잉어요리 접시도 밟지 않고 검호네의 자리를 돌아서 장막의 끈을 당겼다.
촤르르!
배의 사면에 드리워진 장막이 순식간에 내려왔다. 안에는 비록 몇 개의 노란 등이 밝혀져 있기는 했지만, 배 안은 전보다 훨씬 어두워졌고 무엇보다도 공기가 답답해졌다. 배 지붕의 천장에 난 창문은 아직 열렸지만 그곳으로는 구경꾼의 시선도, 신선한 공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현우진인이 의화성니를 향해 포권했다. 의화성니가 현우진인을 향해 합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석수도장의 죽음에 대해 충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두 거물(巨物)의 목소리 뒤에는 묘한 침묵이 따라왔다. 그들은 무정신니와 젊은 도사들처럼 소리를 지르고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빛은 차분했고 호흡은 침착했다.
그러나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를 바라보는 공동파와 아미파 사람들의 사이, 그 좁은 공간에는 증오와 미움이 꽉 들어차 있었다. 수백년을 내려오는 원한이라도 그들의 가슴에 맺혀있는 듯 했다.
보이지 않는 증오와 원한은 먼저 현우진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말로 정체를 드러냈다.
"장례가 끝난 후에, 아미산에 사람을 보내어 이번의 비무에 대해 몇 가지 묻고자 합니다. 허락하시겠는지요?"
의화성니는 잿빛 눈썹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이 늙은 귀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설마하니 공동파의 존장(尊丈)께서도 이번의 비무에 의혹을 느끼신다는 말씀인지요?"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었으니 일의 앞뒤는 가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죽을죄를 지은 듯이 무릎을 꿇고 있던 무정신니가 별안간 고개를 발딱 쳐들었다. 그리고 증오에 불타는 눈으로 현우진인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이제 그만 가증스러운 가면을 벗으시오!"
그녀의 입에서는 일파의 존장에 대해 이 이상 범할 수 없을 만큼의 모욕적인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비구니로서 입에 담을 말들도 아니었다.
"그따위 비무대회는 개에게나 먹이시오! 이미 맹 안에서 서열을 다 짜놓고 져주어라 이겨주어라 하는 비무대회가 무슨……!"
의화성니가 무정신니를 불렀다. 나직했지만 힘 있는 소리였다.
"무정아!"
그러나 무정신니는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이번에는 스승을 향해 말했다.
"사부님! 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길러주시고…… 무공의 길을 걷게 해주시고…… 이제 그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건만, 그런 비열한 놀음에……! 제자는 참을 수가 없어서 비무대회 때 그렇게 느리게 걸어 들어갔고…… 마지막 일초에 그만 힘을 싣고 말았습니다……. 제자는 사부님의 명을 어겼습니다. 제자는, 제자는……!"
그녀는 격정에 못 이겨 말을 더듬다가 별안간 소매 안에서 또 한 자루의 비도를 꺼내더니 자신의 심장 위에 푹 꽂았다.
"무정아!"
의화성니가 큰 소리로 제자를 불렀다. 그러나 비도는 이미 심장 깊숙한 곳에 박혀버렸고, 무정신니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녀의 사매와 사저 되는 사람들이 그녀를 부축했을 때, 이미 그녀의 숨은 가늘어지고 있었다.
무정신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현우진인을 향해 말했다.
"석수도장의 죽음은…… 이것으로 갚아진 겁니다."
더 이상 아미파를 핍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현우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숱한 죽음을 보아온 노강호(老江湖)라고 해도, 죽음은 만날 때마다 언제나 무겁고 암울한 일이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아닐지라도.
무정신니는 심장에서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든 승복의 앞자락을 쥔 채, 사매와 사저들의 부축을 뿌리치고 일어나려고 애썼다. 그녀는 의화성니 앞에 무릎을 꿇고 마지막 절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절이라기 보다는 그냥 앞으로 고꾸라지는 형상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그렇게 앞으로 고꾸라진 채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제자……. 성적만경(聖積晩景)을 듣고 싶었……."
아미산 성적사(聖積寺)에는 커다란 동종(銅鍾)이 있는데, 저녁 무렵에 그 종을 백 여덟 번 치고나서야 승려들의 저녁 염불 소리가 온 산을 뒤덮는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아미팔경(峨嵋八景)중의 하나라고 했다.
성적만경을 들으며 불법을 깨우치는 중에 열반에 드는 것은 모든 아미산 승려들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무정신니는 아미산에서 죽지 못했고 종소리를 들으며 죽지 못했다. 그녀는 이 혼탁한 강호의 한 가운데에서 죽었다. 음모와 협잡이 난무하는 소리만을 들으면서.
그녀가 죽자 비로소 그녀의 눈에 괴어있던 눈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입술을 떨며 제자의 죽음을 지켜보던 의화성니는 마침내 눈을 지그시 감고 말았다. 그녀는 현우진인에게 등을 보인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현우진인은 짧게 대답했다.
"유감이오."
갑자기 의화성니가 몸을 돌렸다. 그녀는 늙고 힘없는 비구니의 눈빛을 버리고 있었다.
"빈니는 만족하지 못하겠소이다!"
공동파 도사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나도 내 제자의 목숨 값을 묻겠소이다! 공동의 어느 분이 대답을 해주시겠소?"
"음!"
현우진인은 침음성을 터뜨렸다. 석수도장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으러 왔던 젊은 제자들의 일은, 비록 그 일 처리가 성급하다고는 해도 공동파 어른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일의 책임자인 무정신니가 자결함으로서 좀 과하다싶지만 어쨌든 마무리가 되려는 찰나인데, 애제자의 죽음을 본 의화성니가 별안간 태도를 바꾼 것이다.
무정신니의 무명(武名)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그녀와 공동파 제자의 싸움은 그저 싸움일 뿐이다. 그러나 만일 두 파의 장문인이 격돌한다면?
그것은 앞으로 수백 년을 이어갈지도 모르는 두 명문대파의 갈라섬을 의미한다. 어쩌면 한 쪽이, 아니면 양쪽 다 돌 하나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때까지 명예와 자존심을 건 싸움을 하게 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예상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 자리에서 한 걸음이라도 물러설 수 있겠는가?
"공동파 사람 하나의 죽음에 아미파 사람 하나의 자결! 이것으로 공평하게 일이 끝났는데 무엇을 더 물으시겠다는 거요?"
의화성니는 돌연 어깨를 흔들며 웃어댔다. 지금은 비록 늙었지만 젊은 시절 강호의 뭇 남자고수들을 한 주먹에 쓰러뜨렸던 여인 권법가(拳法家)다운 호탕한 웃음이었다. 웃음이 그친 뒤 의화성니는 노성을 터뜨렸다.
"하기사 문답(問答)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 강호의 일이니 강호의 법으로 해결합시다!"
의화성니는 선장을 옆에 제자에게 건네고 손등을 덮은 긴 가사자락을 걷어올렸다. 그녀는 지금 제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불처럼 끓어오른 상태였다. 아미파의 운명, 공동파의 운명, 그리고 무림맹의 운명에 대해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현우진인 역시 물러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제자가 그의 애검(愛劍) 광성검(廣聖劍)을 그 손에 갖다 바쳤다.
촤라랑!
검이 뽑혀져 나오자 섬세하면서 날카로운 검기가 장막 안에 가득히 찼다.
펄럭!
의화성니가 옷자락을 흔들며 절기인 복호권법(伏虎拳法)의 자세를 취했다.
권풍(拳風)은 검기에 맞서며 사람들의 귀를 얼얼하게 했다.
늙은 도인이 내뿜는 검기는 잔인한 미인의 심성처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웠고, 늙은 비구니가 뻗어내는 권풍은 십척 거한의 기상처럼 힘차고 웅맹했다.
두 사람의 승복과 도복이 태풍 앞에 선 사람들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진기를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늙은 고수들의 싸움은 화려한 초식의 변화로 승부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월의 힘을 모아 일격에 승부를 낸다. 그 일격에 생과 사가 갈리고 승과 패가 나누어질 것이다.
공동파의 제자들도, 아미파의 제자들도, 수란사의 비구니들도, 장백쾌검문의 제자들도, 이 배의 주인과 여주인도 모두 입을 다물고 손에 땀을 쥔 채 두 노강호를 지켜보았다.
누가 이길 것인가? 그리고 누가 죽을 것인가? 비무대회에서처럼 아미파가 무릎을 꿇을 것인가? 아니면 석수도장이 그랬듯이 현우진인이 죽을 것인가?
두 개의 대조적인 힘이 막 배 가운데서 격돌하려는 순간, 하늘로부터 한 줄기의 번개가 내리꽂혔다. 희고, 빠르며, 강한 번개!
중인들의 눈에는 모두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그 번개에는 뒤따라오는 소리도 없고 불길도 없었다. 그저 빛과 기운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얼음장처럼 싸늘하고 고고한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천장의 열린 창문으로부터 들어왔고, 막 격돌 직전이던 의화성니와 현우진인의 사이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나타난 즉시 놀랍게도 두 노강호의 기세는 물을 만난 불처럼 사그러들고 말았다.
눈의 착각이 가시고 난 뒤에야 사람들은 그 기운이 한 줄기의 번개가 아니라 한 개의 검임을 알았다. 검은 배의 바닥에 꼿꼿하게 꽂혀 있었다.
그리고 검의 주인이 창문으로부터 나타났다. 그는 마치 끈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처럼 천천히 내려왔다. 두 발을 움직인다면 허공에 만들어진 보이지 않는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것은 빨리 내려오는 것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일을 아주 쉽게 해냈다. 마침내 뱃전을 딛는 그의 신발에서는 아주 가벼운 소리마저도 나지 않았다. 그가 만약 위풍이 당당한 중년인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그가 월궁(月宮)에서 내려오는 선녀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녀가 아니었고, 아미파와 공동파의 분쟁을 중간에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바로 무림맹주 송호자였던 것이다.
의화성니가 한숨을 내쉬고 현우진인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모두 송호자를 마주 보는 것은 두려워하는 듯 했다.
송호자는 온화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께서도 이 배의 주인이 요리를 잘 한다는 소문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의화성니도 현우진인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호자는 개의치 않았다.
"좋은 음식과 향기로운 차와 훌륭한 술을 앞에 놓고 있다보면 혀는 부드러워지고 마음은 풀리기 마련이지요. 제가 두 분을 대접해도 될는지요?"
의화성니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빈니는 오늘 입에 아무 것도 넣을 수가 없소. 제자가 죽었으니 앞으로 삼일간 곡기(穀氣)를 끊겠소."
현우진인도 물러서지 않았다.
"빈도도 마찬가지. 제자가 죽었으니 앞으로 삼일간 물도 마시지 않겠소."
두 장문인은 모두 나이가 들었고, 송호자보다도 늙었지만 지금은 마치 서로 상대편이 잘못했다고 어머니에게 일러바치는 나이 어린 남매 같았다. 그들은 여전히 화해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송호자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천천히 물었다.
"어느 분이 약속을 깨려고 하시는 거요?"
의화성니의 몸이 별안간 부르르 떨렸다. 노비구니의 분노가 막 폭발하려는 듯, 그녀의 손과 발이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노비구니의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그녀는 송호자를 향해 돌아서서, 천천히 합장을 했다.
"맹주의 뜻에 따르겠소."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노비구니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제자들이 무정신니의 시신을 안고 그 뒤를 따랐다. 수란사의 비구니들도 그들을 막 따라가려는 찰나에, 송호자가 다시 한 번 의화성니를 불렀다. 의화성니가 굳은 얼굴로 돌아보자, 그가 물었다.
"이 분들도 아미파의 제자이신지?"
그가 묻는 것은 바로 수란사의 비구니들이었다. 지목을 당한 수란사 비구니들의 순진한 얼굴이 일순 겁에 질렸다. 그들은 어쩌면 봐서는 안 되는 일을 보고 들어서는 안되는 일을 들은 것이 아닌지?
의화성니가 고개를 빳빳이 들며 대답했다.
"불문의 제자들은 입이 무겁소."
송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화성니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손을 크게 저었다. 장막의 한 귀퉁이가 큰 바람을 만난 듯이 펄럭이며 젖혀졌고, 아미파의 사람들은 그리로 뛰어내렸다.
아래에는 그들이 타고 온 작은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란사의 비구니들이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작은 배에 올라탈 때까지 기다린 다음, 그 배는 운하를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아미파의 쪽배는 올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비구니들이 가득한 작은 배가 비참하게 죽은 시신까지 싣고 커다란 배들 사이를 비집고 나아가는 것은 어쩐지 슬픈 광경이었다.
검호는 장막의 한 귀퉁이를 살짝 젖히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미파의 쪽배가 다른 배들 사이로 사라져버린 뒤에 그는 장막에서 손을 떼고 돌아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우리 차례군."
그의 말이 옳았다. 배 안에 남은 것은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과 무림맹주와 공동파의 사람들, 그리고 주인과 여주인뿐이었다. 이제 관심은 바로 그들에게로 쏠리고 있었다.
현우진인과 무림맹주의 시선이 검호네에게 지그시 머물자, 공동파의 중년 도사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물었다.
"실례지만, 어느 문하이신지?"
장백쾌검문의 제자들은 모두 검을 차고 있었다. 비록 날카롭고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은 검이었다.
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이 앉은 채로 대답했다.
"우리는 장백쾌검문에서 온 사람들이오."
중년 도사는 이 다섯 젊은이들의 무례한 태도에 약간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래도 계속 정중하게 물어왔다.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지 이십 년이 되어가는 데도 아직 아는 바가 적어 부끄럽소이다. 가르침을 주시기 바라오."
쉽게 말해 '장백쾌검문'이 무슨 문파인지 모르겠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검호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 문파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 돌아가신 사부님의 성함은 아마 다들 알고 계실 거요."
"선사(先師)의 존함은?"
"풍혼검이라는 별호를 아시는지?"
순간, 사람들의 안색이 확 변했다. 심지어 무림맹주의 얼굴색도 변했다. 공동파의 제자들은 모두 수근거리고 있었다.
"풍혼검?"
"왕년의 그 낭인검객 풍혼검?"
"그는 오래 전에 죽었다고 하던데!"
"은거했다는 소문도 있었지!"
"풍혼검의 제자들!"
현우진인과 송호자는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두 거물의 눈이 말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별안간 현우진인이 송호자에게 포권을 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끝났으니 나는 이만 제자들과 함께 돌아가 볼까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제자들을 데리고 서둘러 장막을 걷고 배 아래로 내려갔다. 마치 이 자리에 더 남아있으면 두려운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는 듯이.
배 안에 남은 것은 주인과 여주인, 그리고 검호네와 무림맹의 맹주 뿐이었다. 장백쾌검문의 사형제들은 모두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거물이다. 이 거물과 한 자리에 서있을 수 있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이 거물은 지금 그들에게 무척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그들이 방금 본 아미파와 공동파의 분쟁은, 그들이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었을까? 만약 보아서는 안되는 일을 보았다면, 무림맹의 맹주는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과연 무림맹의 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데 어떤 방법을 쓸까?
만약 송호자가 검을 쓰기로 한다면, 이 중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송호자는 검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
"이 배는 아주 한적하지만, 나는 이따금 이곳에 술을 마시러 온다오."
그는 아주 친근하게 말했다.
"내게는 머리를 식힐 수 있는 몇 군데의 좋은 곳들이 있는데 여기도 바로 그런 곳 중의 하나요."
검호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천하제일루도 그런 곳인가요?"
검매는 속으로 기겁을 했다. 검호는 지금 무림맹주에게 말을 걸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사람에게 그는 웃음까지 지어가며 말을 걸고 있다.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고 게슴츠레한 눈매도 바뀌지 않았다. 이 게으른 사형은 도대체 긴장이라고는 모르는 것이다.
송호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호네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여주인을 부르자 그녀가 왔다.
"내게 백건아 한 병을 가져다주시오."
그는 어디에서나 백건아를 마셨다. 천하제일루에서도 그는 그것을 마셨다. 이 배의 백건아는 주인이 직접 담근 것이라 각별한 맛을 냈다. 그는 그 맛을 즐기는 것이었다.
송호자의 말대로 그는 이 집의 비밀스러운 단골이었기 때문에 주인과 여주인은 더 이상 두려움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설령 두 사람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보게 되었다고 해도, 송호자는 그들을 믿고 있는 듯 했다.
여주인이 가져온 백건아를 손수 잔에 따른 뒤에 송호자는 잔을 들었다. 검호도 잔을 들었다. 그의 잔에 담긴 것은 맑은 물이었다.
두 사람은 허공을 격하고 서로에게 잔을 들어 보인 후 단숨에 마셨다. 물을 단숨에 마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잔의 백건아를 마신 뒤에 송호자가 말했다.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 풍혼검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소."
검호가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사부님은 확실히 무서운 사람이었지요. 어렸을 때는 궁둥이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런 분이 은거 생활 끝에 세상을 뜨셨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오."
"안타깝지요."
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안타깝습니다.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이 먼 곳까지 올 일이 없었을 텐데!"
송호자의 눈이 빛났다.
"이 송호자가 죽기 전에 반드시 한 번 겨뤄보고 싶은 것이 바로 그 풍혼검이었소!"
그때, 갑자기 듣기 싫은 고함 소리가 장막 바깥에서 들려왔다.
"협잡꾼의 검은 감히 풍혼검과 겨룰 수 없다!"
송호자의 안색이 변했다. 누가 감히 무림맹의 맹주를 협잡꾼이라고 욕하는가? 그의 몸이 허공에 붕 뜨는 듯 하더니 아까 바닥에 꽂아 두었던 송문검(松紋劍)을 뽑아들었다.
촤라락!
소리가 들려온 쪽의 장막이 눈부신 검광(劍光)에 쪼개졌다. 신선한 공기와 함께 주변의 배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들이 안으로 확 밀려들어왔다.
아미파와 공동파의 장문인이 나타났을 때는 그토록 소란을 피우며 뱃전에 몰려나와 구경을 하던 다른 배의 사람들은 이미 관심이 시들해졌는지 각자의 자리에 앉아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방금 그 고함소리를 내지는 않은 듯 했다.
송호자의 눈이 날카롭게 운하의 수면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아주 작은 배 하나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이 배의 옆을 지나 운하의 저 편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두 번째 소리가 바로 그 작은 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협잡꾼의 검은 그 누구와도 겨룰 수 없다!"
송호자는 그 작은 배에 탄 사람들을 보았다. 검호도 보았다.
배에 탄 것은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아주 크고 뚱뚱했으며 하나는 아주 작고 깡마른 사람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늙고 더럽다는 것 뿐이었다.
검호는 그 중 한 사람은 직접 보았고, 또 한 사람은 목소리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검호는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타이로가 드디어 재회를 했군?"
송호자도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알아보는 순간 그의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그 작은 배를 쫓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술도 마시지 않았다.
장막의 한 쪽은 완전히 찢겨져 버렸고, 벌써 다른 배의 몇몇 사람들은 다시 이쪽에 관심을 가지고 넘겨다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이 사람이 무림맹의 맹주라는 것을 알아본다면 다시 사방이 소란해질 것이다. 아미파와 공동파의 장문인을 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송호자는 품속에서 은표(銀票)를 꺼내 자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검호와 그 사형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젊은 영웅들, 몸조심하시오. 강호는 위험천만한 곳이지만 잘 지내다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거요."
그리고 그는 자신이 들어왔던 천장의 창문을 통해 다시 나갔다.
이제 배 안에 남은 것은 주인과 여주인, 그리고 검호와 그 사형제들뿐이었다.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이 떠나가자 여주인은 뱃전에 묻은 무정신니의 피를 열심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맹주가 비밀리에 즐겨 찾는 곳이라면, 이런 불상사가 가끔은 일어날 것이다. 그때마다 저 여주인은 열심히 피를 닦아냈을 것이고, 흔적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검호는 정갈한 배 안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는 마치 어디엔가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을 찾아내려는 것 같았다.
검학이 문득 중얼거렸다.
"무림맹주는 모욕을 즐기는 사람일까?"
검매가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모욕을 즐길 리가 있겠어?"
그들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도 모욕당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 못되었다. 한데 무림맹주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 어찌 그것을 즐길 수가 있겠는가?
검학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협잡꾼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그 작은 배를 쫓아가지 않은 거지?"
검호가 말했다.
"협잡꾼이라는 소리가 모욕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그럼?"
"그들은 비무대회의 승자와 패자를 이미 결정해놓고 있었어."
검호의 그 말은 모두가 이해했다. 숨죽이며 지켜본 아미파와 공동파의 싸움은, 바로 그 일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 비무대회의 승자와 패자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다만, 패자의 역할을 맡은 쪽에서는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불만이 터지자 약속이 흔들렸고, 그때 송호자가 나선 것이다. 송호자는 어쩌면 바로 그 비밀스런 약속의 가장 중요한 배후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검웅이 말했다.
"나는 그 작은 배에 있던 노인 중에 한 사람은 본 것 같아."
"어느 쪽?"
"마른 쪽."
검웅은 도둑으로 쫓기던 산동의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때는 아주 무시무시한 젊은 사람이랑 같이 있었어. 그 사람 때문에 나는 잡혔어."
검웅은 불현듯 몸을 떨었다.
"그는 푸른 불꽃같은 비수를 들고 있었어! 아주 새파란 비수!"
막 술잔을 들던 검학이 잔을 떨구었다.
"비수?"
"응."
"푸른 불꽃같은?"
"응."
검학이 별안간 무엇에 엉덩이를 찔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퉁겨 일어났다. 그는 서둘러 뱃전으로 달려갔다. 두 늙은이를 실은 작은 배는 이미 종적이 없었다.
검학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로 돌아왔다. 검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째서?"
"그 비수 때문이야."
"왜?"
"그 사람도 그런 걸 가지고 있었어. 같은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푸른 불꽃같은 비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청린비(靑燐匕)라고 부르더군."
"그 사람이 누구인데?"
검학이 모두를 돌아본 뒤에 천천히 대답했다.
"대사형과 비무했던 사람!"
모두의 몸이 제자리에서 움찔거렸다. 검란의 얼굴이 별안간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뱃전으로 가서 바람을 쐤다. 그녀는 검학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검학은 그녀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 자의 이름은 유경면이라고 했어."
하지만 이제 그는 그 이름이 진짜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검웅이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그가 그 비수로 대사형을 죽인 거야?"
검학이 고개를 저었다.
"시합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그 비수를 꺼내서 만지작거렸을 뿐이야. 그것을 만지는 것이 그의 버릇인 것 같았어. 그리고 시합이 시작되자 그는 그 비수를 자리에 놓고 나왔고, 자기는 천수장을 쓰는 유경면이라는 사람이라고 말했어."
검웅이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어? 내가 본 건…… 내가 본 건 키는 이만하고 몸은 약간 마른 편이고…… 미간에 주름이 잡혀있고, 흰옷을 입은 내 또래의 사람이야."
검학이 대답했다.
"체격은 비슷하지만, 유경면은 좀 더 나이가 든 사람이야."
그들은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무엇인가 진실의 향기를 희미하게 풍기는 것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가, 손에 쥐기도 전에 또 허공으로 흩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한참만에 검웅이 말했다.
"다음에 그 할아버지를 보면, 꼭 물어봐야지!"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많은 것들을 몰랐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은 대수롭지 않았고, 앞으로 알아야할 일들은 더욱 중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것이 그들을 기운 빠지게 했다.
"너무들 하는군!"
검호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사형제들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뭇 화가 난 듯이 땍땍거렸다.
"오늘은 나를 송별하는 자리야! 복잡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난 내일 떠난다고! 왜 아무도 슬퍼 해주지 않는 거지?"
검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사형제들은 비로소 그에게 조금의 미안한 심정을 느꼈다.
검매가 피식 웃어버렸다.
"실감이 안 나서 그래."
"실감이 안 나다니."
"이사형이 그런 일을 하러 간다는 것 말이야."
그녀는 거듭 말했다.
"정말이지 실감이 안나!"
검웅이 덧붙였다.
"아표가 만일 그런 일을 한다면, 좀 실감이 날거야."
검학도 말했다.
"하지만 가는 것은 이사형이고, 우린 이사형을 위해 술을 마시러 왔지. 그러니 오늘은 그냥 마시자!"
검호가 투덜거렸다.
"대체 언제쯤 그 이사형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검매가 못을 박듯 말했다.
"대사형은 언제나 대사형이고, 이사형은 언제나 이사형이야! 변할 일은 없어."
검호는 아주 많이 마셨다. 검매와 검웅과 검학은 그보다 더욱 많이 마셨다. 취해서 비틀거리는 그들을 주인은 친절하게 작은 배로 옮겨 주었고, 작은 배는 그들을 강가에까지 옮겨주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서로 어깨를 걸고 걸었다. 노래를 부르고 고함을 지르며 그들은 간신히 그들이 쉴 수 있는 백리원의 빈집으로 왔다.
그들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잠이 든 듯 조용해졌을 때에야 이사와 장삼은 그들을 지켜보는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행동할 줄 모르는 철없는 아이들이 물에 빠지지 않을까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은 아주 피곤한 것이었다.
이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친구, 저렇게 잔뜩 마시고 내일 아침에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까?"
장삼이 웃으며 대답했다.
"때때로 게으름뱅이가 부지런해지는 일도 있는 법이지. 걱정하지 말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