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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도문에서 바라본 북한 남양역. [사진 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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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7시 30분, 호텔을 출발 도문으로 향했다. 1시간 뒤 우리 도문시 북중 국경에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이곳에서는 플래카드를 내걸 수 없다고 미리 경고했다. 우리는 그 뒤에도 백두산과 광개토왕릉 등 중국이 예민하게 생각하는 곳에서 플래카드는 물론이고 구호도 외칠 수 없다는 경고를 수차례 더 들어야 했다.
두 번째 도문행이어서 낯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감회가 깊었다. 유행가 가사에 등장하는 ‘두만강 푸른 물’은 없었다. 물길은 누런 흙탕물에 가까웠다.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선착장도 있고 유람선도 운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북중 국경을 가로지르는 도문강 다리로 갔다. 두만강 다리도 입장료를 내야 했다. 중국은 모든 곳에서 입장료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곳에서도 입장료를 받았다. 인구가 너무 많은 중국에서 이런 식으로라도 하지 않으면 관광지가 사람으로 넘쳐나 금방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국가가 너무 돈을 밝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북한 남양과 중국 도문을 연결하는 두만강 다리는 좁았다. 차 두 대가 교차할 수나 있을까? 우리의 걸음은 다리 중간 북한과 중국의 경계에서 멈춰야 했다. ‘조중변계선(朝中邊界線)’이라고 한글과 중국어로 쓰여 있고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을 넘으면 북한 땅이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그 경계선 위에서 사진을 한 장 찍는 것으로 끝나야 했다. 저 멀리 다리를 따라 끝부분에 온양역인 듯 보이는 건물 벽에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북한쪽은 평온한 가운데 사람들의 움직임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4, 5명이 움직이는 모습이 언뜻 들어올 뿐 사람들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오늘은 10월 3일, 개천절이다. 한국은 공휴일이다. 나는 어쩌면 북한도 개천절이어서 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북한에서는 개천절날 쉬지는 않지만, 이날 평양에 있는 단군릉에서 단군제를 지내며 기념한다고 소개되어 있었다.(주7)
북한과 중국을 연결하는 두만강교 중국쪽 입구에는 중국세관으로 들어가는 화물차 교각이 서 있는데, 그 높이는 10미터는 될 것 같았다. 왼편 좁은 계단을 통해 그 교각 위로 올라가면 북한과 국경 주변을 잘 볼 수 있다. 교각 통로와 꼭대기에는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는데 북한돈과 북한담배도 팔았다. 이 지역을 방문한 모든 이들이 이야기하듯이 북한의 산들은 대부분 나무가 없었다. 중국쪽은 산들도 완만하고 숲도 우거진데 비해 북한쪽 산들은 가파를 뿐 아니라 나무까지 없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든다.
중국의 창지투 개발, 그리고 북중의 경제적 밀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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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문시에서. 뒤로 두만강과 강 건너 북한을 배경으로 선 필자. [사진 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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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시는 큰 도시는 아니지만, 북중 국경을 연결하는 요충지의 하나다.(주8) 도문은 중국의 변방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연변 조선족자치주 내에서도 중심지는 아니다. 하지만 현재 중국이 동북지역을 전략적 개발지구로 지정하고 창지투(창춘-지린-투먼) 개발을 추진하면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중국의 창지투 개발은 해안을 따라 이어진 동남지역의 성장이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중앙정부가 서안 등 내륙지역과 동북지역 등으로 개발을 확대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또한 중국은 변경지역의 여러 국가들, 즉 북한, 러시아, 몽골 등과의 연계 개발을 통해 이들 국가를 중국의 경제권 내로 포섭하려 하고 있다. 도문은 그런 중앙정부의 전략적인 동북 개발의 출발점이며 북한으로 연결되는 길목이다.
현재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는 경제적으로는 밀착되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소원한 관계에 놓여 있다. 북한이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을 감행하고, 중국 지도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장성택을 처형한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2008년 이후 중국이 북한에 대한 광물자원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으며, 창지투 개발과 위화도 개발, 나진선봉지구 개발, 황금평 개발, 나진항과 청진항 장기임대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양국의 경제관계는 매우 밀착되어 있다.
이런 사실 때문에 많은 북한 전문가들과 관련자들이 북한 경제의 중국에의 종속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현재 북한은 석유 등 전략물자를 비롯한 무역의 대부분은 중국에 의존하고 있고, 북한에서 유통되는 상품 또한 90%가 중국산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에의 경제적 의존도가 깊어진 상태이다. 광물 등 북한의 천연자원에 대한 중국의 독점적 확보도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남북관계가 소원해지면서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남한과의 경제협력 창구가 막힌 상태에서 북한이 그 활로를 중국에서 찾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북한 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 경제가 1970년대 초반까지 일본 경제의 하위하청구조로 전락했다고 평가받았지만,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는 주요 산업분야에서 일본과 대등하거나 능가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일본과의 격차가 근본적으로 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점을 두고 볼 때 북한 경제 또한 장기적으로는 중국에의 의존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북중 경제가 밀착되는 것이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촉진할 수 있으므로 이 또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불리할 것이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주9) 결과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고민은 많이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봉오동 전투 현장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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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전적비 앞에서. [사진 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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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문의 북중 국경 관람이 끝난 뒤 우리는 그곳에서 가까운 곳(30리가량 떨어진)에 위치하고 있는 봉오동 전투 전적지로 향했다. 봉오동으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시골 농촌의 풍경이 펼쳐졌다. 주변에는 옥수수밭이 계속되었고, 산과 들에는 어느 듯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산들은 한국처럼 가파르지는 않았고, 완만한 능선을 이루고 있어서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간간이 마을이 보였고 주변에 들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봉오동으로 가는 길은 깊은 계곡과 산골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법 넓은 들판이 펼쳐진 곳을 지나 담장이 있고 건물이 있는 앞에서 버스가 멈춰 섰다. 정문에는 우리말과 중국어로 ‘도문시 봉오동 저수지’라고 쓰여 있었다. 봉오동 전적지는 도문시민들을 위한 상수도 수원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 길 양 옆으로 백양나무가 보기 좋게 심어져 있었다. 한 5분쯤 걸어 들어가니 왼편 산기슭에 ‘봉오동반일전적지’라고 이름이 붙은 기념비가 나타났다.
1993년 6월 중공시 도문시위통전부, 도문시박물관, 도문시수도공사가 세운 작은 전적비가 한 구석에 놓여있고, 2013년 6월 도문시인민정부가 새로 세운 전적비가 모양새 좋게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전적비는 제법 그럴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큰 규모는 아니었다. 나중에 보게 되는 ‘청산리 전투 전적비’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종종 보게 되는 현충탑처럼 규모가 컸다. 봉오동 전적비 위쪽 중앙에는 붉은 별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모양이 내게는 이채롭게 다가왔다.
봉오동 전적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1920년 6월 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사령으로 한 독립운동대한북로독군부(반일독립군)는 협산벽골 봉오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일군 19사단 소속부대, 아라요시 중위의 남양 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감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올렸다. …
연변반일무장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 침략자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 놓았으며 인민대중의 반일투지를 크게 북돋아주었다.
우리는 이 전적지의 참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여 이 옥서를 새긴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부대를 참패시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의 승첩이다.(주10)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 되어 있다. 홍범도 장군이 한국에서 저평가된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소련으로 건너갔으며, 후에 사회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념의 잣대로 모든 것을 보려는 냉전시대의 유물이 독립운동사를 바로 보는 일도 가로막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홍범도 장군의 업적이 상당히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시작해, 의병장이 되었고, 포수부대를 거느리며 전설적인 위용을 떨친 홍범도 장군.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에게 학식이 부족한 평민출신의 의병장, 머슴, 포수, 전설적인 독립군 지도자 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우리의 인식을 깨뜨릴 결정적인 증거물이 발견되었다. 연해주에 있는 어느 박물관에서 도올 김용옥이 찾아낸, 홍범도가 의병장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인석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뛰어난 학식을 소유하고 달필을 자랑하는 인물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독립투쟁 과정에서 뛰어난 전략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실천적 경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사물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는 학식과 지적 능력을 소유한 때문이었던 것이다.(주11)
본래 봉오동 전투가 치열하게 펼쳐진 마지막 장소는 전적비가 있는 곳에서 한창 계곡 위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저수지가 되어 있다. 시간이 촉박한 때문에 저수지까지 올라가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언뜻 중국의 도문시 정부도 한국 방문객들에게 여기서 사진 한 장 찍고 끝내라고 전적비를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봉오동 전적비 앞에서 우리들은 단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플래카드도 펼쳤다. 그날 봉오동 전투 현장을 조금 더 생생하게 느껴보려면 골짜기를 보는 것은 필요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에는 반드시 그곳을 가보리라 다짐하면 그 자리를 돌아섰다.
연변박물관을 돌아보며 드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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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박물관 혁명역사관에 전시된 조선족의 항일활동 사적. [사진 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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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적지를 떠난 우리들은 다시 연길로 향했다. 연변 조선족박물관을 보기 위해서였다. 연길까지는 대략 1시간쯤 걸렸다. 연변박물관은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 연변조선족혁명기념관, 연변조선족자치주민속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 5층으로 된 박물관의 규모는 제법 컸다. 박물관에는 연변지역에서 발굴된 고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고, 연변조선족의 역사, 민속과 생활 풍습, 연변 조선족들의 혁명운동 역사와 혁명열사 열전,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역사 등이 차례로 정리되어 있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52년 9월 3일 중국 55개 소수민족 최초의 자치주로 성립되었다. 연변자치주가 가장 먼저 성립된 것은 조선족이 중국 혁명운동 및 신중국 건립 과정에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때문이었다. 조선인들은 중국 내에서 일제에 저항하여 중국인들이 항일투쟁을 벌이기 전부터 반일독립운동을 벌였으며, 1930년대 중국 민중과 연대하여 항일연군을 조직하고 반일투쟁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과 중일전쟁이 끝난 뒤 1945년부터 시작되는 국공내전에서도 조선인들은 중국 공산당군이 장개석의 국민군을 물리치고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주도인 연길시를 비롯하여, 용정시, 훈춘시, 화룡시, 도문시, 돈화시, 왕청현, 안도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인구는 220만 명, 조선족은 80만 명에 이른다. 8개의 시·현 가운데 조선족 비율이 2%에 불과한 돈화시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46.5%가 조선족인 셈이다. 처음 연변자치주가 구성되었을 때는 조선족이 70%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그 비율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다. 현재는 80만 명의 조선족 등록인구 중 실제거주자는 20만 명에 불과한 수준이라고 한다. 한국과 중국 내의 대도시 지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 때문이다. 이는 조선족 연변자치주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태이다. 이곳에 한국을 비롯한 해외 기업들이 유치되어 경제발전과 함께 일자리가 대거 창출되면 그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없다.
연변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나는 중국 조선족이 앞으로 지금과 같은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그 주역이었던 예맥족(고구려의 지배족이며 지금의 한국인의 조상)은 만주땅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상실했다. 일부는 고려에 흡수되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서 삶을 터전을 이어갔지만 주도적 지위를 상실하면서 고유의 문화를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고려 시대 만주지역에서 흥기한 거란과 여진이 중원을 위협하고, 한반도에까지 압력을 가했으나 그들은 고구려의 주역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맥계 고구려족의 통제를 받던 주변의 이민족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만주에서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고, 나아가 발해와 거란의 후예들까지 포섭, 만족이라는 이름으로 규합한 뒤 후금을 세우고 뒤이어 중원을 장악하며 청나라를 세웠다. 이 만족 속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들이 포섭되었지만 그들은 한반도 국가와는 사실상 별개였다.
지금 연변자치주 조선족은 대부분 조선 말기, 또는 일제 침략시기 이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우리가 북간도라고 불렀던 이 지역에는 조선인들이 70% 이상을 점했고, 항일투쟁에 참여한 사람들도 조선인이 다수였다.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가 다른 어떤 소수민족 지역보다 가장 먼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소수민족 중 가장 생활수준이 높았던 연변조선족자치주도 개혁개방에 따른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과 함께 크게 변화했다. 1940년대까지 가장 먼저 산업이 발전했던 동북지역은 경제 발전에서도 뒤떨어진 중국의 변방 지역이 되었다. 그와 함께 조선족은 연변자치주에서조차도 소수로 전락했으며 그 정체성마저 위협받고 있다. 연변박물관뿐만 아니라 우리가 돌아본 역사유적지, 동북항일연군기념관(양정우공원), 고구려 광개토왕릉과 장수왕릉, 압록강단교(항미원조기념관) 등에서 중국 조선족의 현재적 위상과 더불어 그들이 겪는 정체성의 위기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은 철저히 중국의 ‘통일적다민족국가론’에 따라 중화민족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나는 연변박물관에서 조선족의 역사, 혁명운동사 등에서도 그런 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용정의 대성중학교 건물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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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정 대성중학교 자리 복원 건물. [사진 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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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박물관을 주마간산 식으로 흩어 본 다음, 우리는 용정으로 향했다. ‘대성중학교’와 윤동주 생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대성중학교 건물은 지금의 용정중학교 옆에 재현, 보존되어 있었다. 대성중학교 건물 정면 오른 쪽에는 윤동주의 서시가 적혀 있는 시비가 있었고, 조금 비켜선 곳에는 이상설 기념비가 서 있었다. 윤동주와 이상설은 1910년대부터 시작되는 민족운동의 요람인 이곳 용정의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윤동주는 한국 국어 교과서에도 많은 시가 실린 탓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민주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의 친구로서 명동 소학교에서 같이 공부했으며, 이곳 용정의 은진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다시 문익환과 함께 평양 숭실학교를 다녔고, 연희전문을 졸업했다. 윤동주는 그 뒤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도지사대학에 재학 중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1945년 2월 16일 사망했다.
이상설은 대한제국 시절의 관리 출신으로 나라가 망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곳 북간도 지역에 독립군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용정에 최초의 조선인 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우고 초기 민족운동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는 이회영 등과 함께 헤이그 밀사 사건을 준비, 기획하고 직접 헤이그에 파견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 용정에서 민족운동을 펼쳤다. 그는 1917년 2월 17일 독립운동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지만 초기 민족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목이다. 서중석 교수는 ‘그가 살았다면 아마도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을 때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뛰어난 독립운동가였다.(주12)
서전서숙이 있던 자리는 용정실험소학교가 들어서 있고, 건물 한 모퉁이에 ‘서전서숙 옛터’라는 글귀가 새겨진 돌 기념비 하나만 남아 있다. 중국 국경일이어서 학교 문이 닫힌 관계로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고 멀리 담장 바깥에서 사진만 한 장 찍고 돌아서야 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요무대 중 하나이기도 한 용정은 1920년대 북간도 항일민족운동의 요람일 뿐 아니라 당시에는 가장 큰 도시였다. 이곳에는 민족운동의 상징이 된 명동촌 등에 여러 민족학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동흥중학과 대성중학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지금의 대성중학은 대성, 은진, 동흥, 광명, 명신여학교, 광명여학교가 합쳐진 것으로 이곳 출신의 유명인물로는 윤동주와 문익환을 비롯하여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청년문사 송몽규, 항일무장투쟁시기 중공당 동남만성위 조직부장 이동광,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1사 참모장 이민환, 왕청현위 제1서기 김훈, 훈춘현위 서기 오빈과 서광, 요하중심현위 서기 박진우, 동북항일동맹군 제4군 당위서기 겸 조직부장 박봉남, 항일연군 제7군 제3사 정치부 주임 이일평, 항일연군 제8군 제1사 정치부 주임 김근, 북만성위 서기 겸 항일연군 제3로군 지도자 김책, 항일연군 제3방면군 참모장 안길 등이 있다. 북한의 전 총리 이종옥, 한국 전 국무총리 정일권과 이주일 장군도 이곳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용정 대성중학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은 윤동주 교실 등이 있고, 2층은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항일독립운동을 간단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곳에서는 용정중학교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용정의 역사와 항일독립운동사, 민족학교의 역사 등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한 바퀴 돌아 내려오면 방명록과 함께 성금함이 있다. 대성중학을 돌아보면서 나는 남과 북, 중국과의 관계에서 연변의 미묘한 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으로 탈바꿈한 윤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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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생가 안에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비. [사진 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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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중학을 관람한 뒤 우리는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한 30분쯤 달리니 작은 농촌 마을이 나왔다. 명동촌은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가 명동소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실시한 곳으로 유명하다. 마침 윤동주 생가는 문이 잠겨 있었다. 가이드가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조금 있으니 관리자 여성이 나타나 자물쇠를 풀어주었다. 우리는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복원한 생가 집 안에도 들어가서 살펴보았다. 그 바람에 이곳 조선족 가옥의 실내구조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인터넷 자료를 뒤지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윤동주 생가는 조부에 의해 처음 복원되었는데, 2012년 중국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복원공사가 다시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집들은 본래 있던 그대로였으나 대 곳곳에 새로 시비가 세워졌다. 그렇게 해서 윤동주의 시들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돌에 새겨져 여기저기 놓여졌다. 생가 입구 정면에 ‘중국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새긴 큰 돌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건 확실히 중국의 의도적인 행위가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윤동주를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고 지칭한 것을 보고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번도 윤동주가 ‘조선족 중국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를 어릴 때부터 교과서에서, 그리고 수많은 시집에서 만났다. 그래서 너무나 친근했던 탓에 나는 그가 중국에서 살았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윤동주는 중국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1945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을 때에도 조선인으로 죽었다. 그리고 그 전에도 조선인이었다.
1886년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간도 지역으로 넘어갔다. 윤동주는 당시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성장하면서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조선인으로서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윤동주가 단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중국땅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늘날 중국은 그를 ‘중국조선족 애국시인’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는 중국인이라는 주장이다. 윤동주 생가를 돌아보면서 나는 동북공정이 생각났고,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이 떠올랐으며, 중화역사의 탐원공정과 중화주의, 더 나아가 중화제국주의가 떠올랐다.
우리가 윤동주를 두고 중국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윤동주의 시를 중국인들이 중국어로 번역해 놓았다고 해서 그가 중국의 조선족 애국시인이 되는 것일까? 그의 정서와 언어, 감정 상태는 온통 조선인의 그것인데 말이다. 중국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가 얼마나 한국어의 언어적 감성과 한국인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해주고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미묘한 언어적 감수성을 절대로 중국어로는 옮길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나는 윤동주의 시가 중국 교과서에 실릴 날도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마음이 안타깝고 서글프다.
우리 민족의 끈기를 보여주는 연변 특산물 사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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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의 특산물 사과배. 물이 많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사진 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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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에서 용정으로 넘어오면 구릉지역을 따라서 끝없이 과수원이 펼쳐진다. 우리는 그 과수원에서 나는 연변의 특산물 ‘사과배’ 맛을 보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연변의 사과배 맛이 일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연변에 가면 꼭 한번 맛보고 싶었으나 지난번에는 5월이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정을 지나면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가이드가 마침 과수원 옆에다 차를 세우고 2박스나 사서 그 맛을 보여주었다. 사과배는 사과의 속성이 포함된 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모양과 때깔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맛은 좋았다. 그다지 달지 않으면서도 물이 많아 시원하고 담백했다. 농약을 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는 쓱쓱 닦아서 그 자리에서 한입씩 베어 물고 그 맛을 즐겼다.
사과배의 역사는 1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21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2대째의 최병일이라는 분이 동생에게 부탁해 조선에서 가져온 여섯 그루의 배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되었다. 천신만고 노력 끝에 추운겨울도 지내고 해서 6년 만에 여섯 그루 중 세 그루에서 배가 열리는 결실을 맺었다. 이 배는 1930년대 연변지역에 널리 퍼졌고, 맛이 일품이라고 해서 ‘참배’라고 불렸다. 1952년 길림성 과일품종조사팀은 이 과일이 확실히 새로운 품종이라고 확인했고, 그것이 사과를 닮았다고 해서 ‘사과배’로 불리기 시작했다.(주13)
용정에는 무려 25만 그루나 되는 사과배 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과수원은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만무과원’이라고 불리는 이 과수원은 1952년 초대 연변자치주장 주덕해가 처음 구상했다. 용정시의 구릉을 따라서 끝없이 펼쳐지는 사과배 농장을 보면서 이 땅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한 우리 조상들의 고난의 역사를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주땅에 처음 벼농사를 시작한 것도 조선족이고, 따뜻한 지방에 자라던 배나무를 추운 북방에서 살려내어 새로운 사과배 품종을 만들어낸 이들도 조선족이다. 용정벌에서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면서, 더 넓게 펼쳐진 사과배 과수원을 보면서 나는 새삼 우리 조상의 끈기와 지혜에 감동했고, 그들에게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명동촌을 구경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가기 전 연길 곰 사육장을 돌아보았다. 이곳에만 1800마리의 반달곰이 있고, 북경에도 1800마리가 있다고 했다. 곰사육과 관련된 설명, 그리고 곰쓸개(웅담)를 채취하는 과정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우리 일행 중 몇 사람이 웅담을 구입했다. 과연 웅담의 효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일행 중 당장 그 덕을 본 사람이 있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명준이가 첫날부터 컨디션이 안 좋았다. 음식에도 적응이 안 돼서 힘들어 했다. 그런데 웅담을 물에 타 먹고 다음날부터 상태가 좋아졌다. 웅담 덕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비이락이라고 해야 할까?
어둠 속에서 청산리 대첩 전적비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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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사진 제공-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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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고 화룡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예정 시간보다 2시간 이상 지체되어서 마음이 급했다. ‘청산리 대첩 전적지’로 가는 길은 시골길의 연속이었다. 연길에서 한동안 버스가 달리니 해가 서산에 짧게 걸려 있었다. 청산리 전적지로 가는 길은 봉오동 전투 현장보다 훨씬 더 깊은 산골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청산리 전투는 한 골짜기에서 하루 만에 끝난 전투가 아니다. 적어도 열흘 이상에 걸쳐 여러 골짜기와 들판에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주변 지역이 모두 청산리 전투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적비 앞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전적비 앞에는 인가가 한 채 있었으나 주변은 적막강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가에서 나온 몇 마리의 덩치 큰 개들이 방문자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버스에서 내려 전적비 계단을 올라가니 주위는 금방 어둠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확실히 산골은 해가 넘어가면 금방 어둠이 찾아온다. 우리 일행은 단체사진도 한 장 찍지 못한 채 그곳 떠나야 했다. 주위가 어두워서 지형도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청산리 전적비는 봉오동 전적비와 비교하면 매우 웅장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기념비에는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라고 한글과 한자로 쓰여 있었고, 아래쪽 기단을 돌아가면서 항일투쟁을 형상화한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비문은 중국어(한문)로 되어 있었고, 비문 마지막에는 중국어로 ‘연변각족인민 경건, 2001년 8월 31일 준공’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기념비가 건립된 과정이나 사연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너무 궁금했다. 왜 비문에 이런 표현이 쓰였으며, 비문은 왜 중국어로만 쓰여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이 기념비는 봉오동의 그것보다 웅장하게 만들어졌을까?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자료를 찾다가 김삼웅 선생의 글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여기에도 중국 동북공정의 여파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주14)
청산리 전투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굳이 여기서 그 내용을 재차 정리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일반적으로 청산리 대첩은 봉오동 전투, 대전자령 전투와 더불어 독립군의 3대 승첩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때의 독립군은 민족주의 계열만을 의미한다.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을 포함한다면 훨씬 많은 대규모 항일전투승첩이 있다. 아무튼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서군과 홍범도 등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등의 연합부대가 만주 길림성 화룡현 백운평, 천수평, 완루구 등지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간도 일대에 진출한 일본군 부대와 벌여 크게 승리한 전투를 총칭한다.
삼둔자와 봉오동 등지에서 연패한 일본군은 중국 영토를 불법으로 침략했다는 비난을 만회하기 위해 ‘훈춘 사건’(주15)을 날조하고, 이를 계기로 만주에 대규모 부대를 투입했다. 이에 독립군 연합부대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교전, 청산리 골짜기에서 일본군을 크게 대파한다. 청산리 전투의 승리로 일제가 1920년 초부터 계획한 만주 내 한인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 후 일본군의 대대적인 조선인 학살, 조선인 마을과 기관의 초토화를 가져온 경신대참변이 벌어졌으며, 일본이 중국에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한국 독립군들은 만주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져 러시아로 건너가는 등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런데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이 청산리 대첩의 실제 주역은 홍범도 장군이지만, 주인공이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이는 이승만 정권 시절 내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바 있는 이범석 등의 왜곡된 증언에 의존함으로써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사실은 장세윤 등의 국내학자와 박창욱 연변대 교수 등에 의해서 새롭게 확인, 정리되었다.(주16)
우리는 전적비를 벼락치듯 돌아보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때부터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까지는 내내 산길이었다. 어둠 속에서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렸다. 역시 기사의 운전 실력이 빛을 발휘했다. 이동 시간을 1시간 이상 단축하여 8시경에 우리는 이도백하의 어느 식당에 도착했다.
저녁 9시경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군안호텔에 투숙했다. 겉보기에는 허름한 여관처럼 보였으나 실내 시설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객실이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방을 찾는데 한참을 헤맸다. 방은 약간 썰렁했다. 난방을 틀었으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난방을 포기하고 그냥 잘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다시 어찌어찌 리모컨 조작에 성공해 1시간가량 난방을 할 수 있었다. 따뜻하니 좋았다. 다음날 일정은 더 빡빡할 것이므로 30분 더 빨리 움직일 것이라고 가이드가 말했으나, 나는 룸메이트와 함께 소주를 한잔씩 하고 잤다.
넷째날
백두산, 장백폭포
7월17일 기행 3일차인 오늘도 4시 반에 기상하여 6시에 호텔로비에 모이기로 했지만, 전날 밤 과음(?)으로 침대에서 눈을 뜬 시각이 6시였다. 부랴부랴 옷을 입고 10분만에 차량에 탑승했다. 미안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한 나에게 걱정스레 옥수수, 빵, 우유들을 건네는 일행들... 따뜻한 고마움을 느끼며 백두산길에 올랐다.
일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다 하며 반도에서는 백두산이라 부르고, 눈이 오래 지속된다고 하여 중국에서는 장백산이라 불리는 산, 반도의 고대사의 첫 머리에 나오는 민족 정기의 뿌리라 일컬어지는 민족의 산을 오늘 우리는 돌아 돌아서 중국을 통해 오르려 한다.
아침부터 비가 오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 천지를 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백두산 정상의 날씨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위로(?)의 말에 우리 일행은 노래 '백두산'을 부르며 천지의 염원을 품고 4시간여 동안의 버스길을 달렸다.
점심 식사 후 도착한 장백산 입구. 일요일 오후임에도 생각보다 관광객이 많지 않았다. 날씨는 흐렸고, 입구에서도 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 마음을 품고 백두산에 올라갈 차량을 갈아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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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장백산) 입구 모습. [사진제공-황금상] |
몇 년 전부터 중국 중앙에서 장백산관리위원회를 두고 직접 관리한다. 생태 보존을 위해 일반 차량으로 백두산에 오르지 못하고, 입구에서 30~40인승 전기 차량으로 천지 입구까지 이동하고, 그곳에서 다시 8인승 지프차 전기차량을 타고 천지까지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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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입구에서 천지 입구까지 이동하는 차량에서 본 백두산의 모습. 약 40~50분간 이동하며 길 양 옆으로 밀림이 끝없이 이어진다.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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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산 천지 입구에서 천지까지 지프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 꼬불꼬불한 길을 지프차를 타고 15분~20분간 오른다.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지대라 수목은 보이지 않고, 이끼와 같은 작은 식물만 있다.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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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폭포 가는 길.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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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폭포로 가는 길.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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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폭포로 가는 길.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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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폭포의 전경.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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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백폭포의 하류에 있는 온천 모습. [사진제공-황금상] |
다섯째날
청나라 고궁
중국 기행의 마지막 날인 7월18일이 밝았다. 오늘은 심양으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고,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 있었던 청나라 고궁을 방문하고 인천으로 출발할 예정이다. 원래 일정에는 '조선의용군 기념관'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관장의 납득할 수 없는 방문 거부로 일정이 변경되었다.
심양의 날씨는 무척 더웠다. 주위에 산이 없고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 잡은 도시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과 냉방기에서 거리로 내뿜는 더운 바람이 도시의 온도를 더 올라가게 하는 것 같았다. 도심 한 가운데 위치한 청나라 고궁의 첫 모습은 우리나라의 경복궁보다는 작고 건축물이 조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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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고궁의 전경. 건축물의 지붕이 금색인 것은 누르하치가 기거하는 곳이고, 검은 지붕의 건축물은 신하들이 사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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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고궁의 건축물.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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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고궁. 누르하치가 앉았던 의자.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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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전통 의상을 입은 중국 소녀 관광객.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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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고궁의 모습.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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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고궁의 창문 모양.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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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고궁의 담에 있는 문양. [사진제공-황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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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고궁의 천장에 있는 문양. [사진제공-황금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