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만난 건 한국에 돌아오고 일년쯤 지나서였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책의 표지에는 푸른 잎으로 둘러 쌓인 정원에 할머니가 앉아 있다. 하늘색 블라우스와 짙은 고동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은 할머니는 무릎에 책을 올려놓은 채 나를 보고 있다. 동그스름 발그레한 얼굴은, 눈꼬리와 입꼬리가 만날 듯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이 할머니에게 끌렸다. 정확히는 할머니의 미소에 끌렸다. 표지의 그림이 책 중간에도 들어있는데 조심스레 잘라내어 책상 앞에 붙여두었을 만큼. 어떤 삶을 살면 저런 미소가 지어질까? 책을 읽는 내내 궁금증을 키워가다가 마지막 장을 읽게 된 날, 이 글을 만났다.
아끼는 마음이 자신을 초과하는 사람.
그래서 타인과 타자에 대해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마음을 나누는 사람.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마음 속에
또렷한 흔적을 남기는 사람
마음에 쿵 소리가 났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 맘 속으로만 웅얼거리던 생각을 글로 읽은 느낌이었다.
할머니의 미소는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가진 미소였다.
링크드인에 올린 나의 자기소개는 “내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helping이다” 라고 시작된다. 고민 끝에 쓴 문구였으나, 일년 단위로 나의 삶을 찬찬히 정리해보고 나서 나온 표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삼십 년의 세월동안 교육자, 멘토, 코치로 살아오면서 나의 관심은 늘 누군가를 돕는 일에 있었다. 특별히 부모와 청소년에게 관심이 많았다.
나는 필리핀에서 딸 아이를 키웠는데, 그곳의 다른 한국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교민들 사이에서는 늘 근거 없는 소문들이 무성했고, 부모들은 이게 좋다 저게 좋다 하는 일명 카더라 통신에 휘둘렸다. 그리고 그 혼란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해졌다.
‘우리가 서로에게 믿을 수 있는 선후배가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바램은 점점 간절해졌고, 나는 뜻을 같이 하는 부모들을 모아서 한국인 부모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우리는 배움 공동체가 되어 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함께 공부했고, 아이들을 키우며 생기는 어려움을 나누고 서로에게 든든한 선후배가 되어줬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이들이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아이들이 주체가 되어 만든 한국 청소년 환경단체와 동화번역클럽이다. 아이들은 로컬 시장에서 피켓을 들고 제로 플라스틱을 외치고 오래된 티셔츠로 만든 가방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한국에서 기부 받은 한글동화책을 영어로 번역해서 필리핀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내가 학교에 멘토로 재직하면서 만났던 아이들 그리고 봉사활동에 중고등학생으로 참여했던 아이들은 한국에서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필리핀에서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기꺼이 선배 멘토가 되어준다.
이들이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오고 인사를 하는 것 보다 내게 더 소중한 것은 “멘토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때에 선생님을 만났고, 지금 멘토라는 단어는 우리가 선생님께 받은 도움을 다시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라는 그들의 생각이다. 이게 내가 그들의 마음에 남긴 흔적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이 책의 작가는 노년의 삶에 필요한 세가지를 묻는다. 이동진 평론가는 호기심, 유머, 품위를 꼽았다고 하고, 작가는 좋은 습관을 꼽는다. 나는 글쎄… 작은 것에 표하는 감사, 좋은 생각을 펼침에 주저함이 없는 용기, 큰 것도 작게 말하는 지혜…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 이들이 내 안에 넉넉한 공간을 만들어 누구라도 쉬이 머물기를 바란다. 푸른 잎이 우거진 정원에 앉아, 눈꼬리와 입꼬리가 만날 듯 넉넉한 미소를 띠고 누군가를 바라보는, 그런 할머니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