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아카데미 6월 27일 첨삭 자료
■ 선견지 답사(先遣地踏査) /정치돈
계절의 여왕 5월의 끝자락에 와있다. 양(陽)의 기운이 연중 최고조에 달해 새싹은 뿌리 내리고 잎은 우거져 신록의 계절이라고 한다.
향교에서는 매년 선견지 답사라는 명목으로 200여명의 유생과 관계자가 동시에 움직이니 어려운 문제점도 많았다. 첫째는 대단원이 수용되어야 하는 행선지이고, 둘째는 종교(宗敎. 카토릭)에 관한 고증이 있어야하고, 셋째는 휴식을 겸한 공부와 참가자(60.70.80대 고령자) 전원의 안전성이다. 그러자니 매년 실시하는 행사가 가볼만한 곳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올해는 남해한려수도 삼도수군통재영과 통영 미륵산 케이블카를 탑승해 보기로 했다. 남해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을 몸소 느끼며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받으며 한국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소중이 지켜 자라는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짐해 본다.
50~60년 전 피폐해진 우리나라가 새마을 사업 운동으로 세계에 유래 없는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과거 못 살던 때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슬로건을 걸고 민관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친 결과가 아니겠는가? 문득 한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옛 선현의 가르침이다.
오찬시간이 되었다 통영시 관광부에서 직원이 나와 점심식당을 마련해주고 편의를 제공해 생선회로 점심을 먹었다. 가정에 돌아가면 어른이 되고 나와서는 어린 소년이 된다더니 그 말이 꼭 맞는 말이다.
평균 연령이 71세인데 어찌 보면 철없는 소년 같다. 왁자지껄 약주 한잔에 도취되어 노망기를 내어 놓는다. 국가에서 부담해주는 것을 모두 자신의 세금이라는 것도 모르고 한 끼에 1만 2천원 짜리가 되느니 안 되느니들 불평도 많다.
유생들이여! 제발 선비정신을 잃지 말자! 고급식사를 하고 리무진 관광버스를 타고 경남에까지 와서 이거 무슨 창피냐, 하소연도 해본다.
귀로에 발해 기념탑을 둘러보았다. 통영 1300호의 기념탑이다. 천여 년 전 용감한 발해인 4명이 뗏목을 타고 항해하다 통영 앞바다에서 산화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용감한 조상들이다. 새로운 발전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용감한 조상의 피가 오늘날에도 흐르지 않느냐고 자위하면서 묵념을 마쳤다. 다함께 노력하여 발전의 끈을 놓치지 말라! 오늘에 만족하지 말자! 역전의 용사들이여…!
■ 거미줄/김치주
남편과 나는 전생에 원수로 만나 살았던가?
15년 전 “뇌졸 증,으로 한의원으로 병원으로 문턱이 닳도록 들락날락 했다. 쓰러지기 하루 전 까지만 해도 춤 방에서 남의여자품고 속 석이던 사람이 지금은 허리 복태를 두르고 다리는 압박 타이즈를 쪼아 메고 손에는 사각휠체어를 껄 고 다니는 가여운사람.
“어느 날 ,아침 식전 전화벨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은 전화를 받는다. 난 잠에서 깨었지만 눈은 뜨지 않고 전화소리를 들었다. 주거니 받거니 여자하고 통화하는 것이 분명하다.
오후6시에 남남 “캬바레, 만나자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듯하여 비닐로 세멘을 덮고 택시를 타고 남남 캬바레 앞에 세워 줄 것을 부탁했다. 간판이 보이지 않자 택시를 잡고 잘못 찾아왔다하자 아저씨께서 손짓을 하는 쪽으로 보니 그렇게 화려하진 않네.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음악소리가 귀에 따갑도록 요란하다.
입구 쪽으로 들어가니 캄캄해서 덜커덕 넘어져 엉덩이에 무언가 느껴졌다 .캬바레 처음 오나?, 남자 소리가 들리고 소동이 일어나자 뿌옇게 사람형태가 보였다. 앞쪽으로 바라다보니 남편은 여자를 품에 앉고 흥이 났다. 남편은 나를 알아본 듯 여자와 줄 행낭을 친다. 춤을 추는 모습이 추하게 보였다. 공연이 찾아왔다 후회가 된다. 남자는 결코 집에 들어오지 않고 혼자밤새 뜬눈으로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며 날밤을 샜다.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 할 때 없다. 너를 인간이라고 병 수발했고 일하면서 아이들 교육 대소사일 앞만 보고 살았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입에는 물 한 모금 넘어가지 않아 산 위에 올라가는 중 누군가 앞에서 가로막아 위로 올려봤다. 남편 알고 있는 지인이다. 오늘아침에 어느 위치에 안 골목에서 남편을 봤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할머니께 이런 사람 찾으러왔노라 했다. 방을 일러주며 그 부부는 부도가나서 피신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방문을 열자 눈에 익은 옷이 있고 벼 개가 나란히 있고 부엌에는 냄비에 김치지게가 담겨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않고 있는데 찾아 먹을 건 다 먹고 있네. 화가 났다. 방에 있는 보따리 움켜 싣고 집으로 돌아와 이불속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며칠이지나 집에 들어오더니 느닷없이 이혼하자했다. 이혼은 “절대, 안 된다. 당신이 좋아서도 아니다 아이들이 중요한시기고 아이들 결혼 할 때 면 반쪽가정이 된다. ‘아차. 벌어서 남자 앞으로 모든 부동산을 했던 것이 맘에 걸렸다.
다음날 법무사무실에 갔다 나의명의로 가등기 할 수 없느냐고 했다. 안 된다했다. 연대명의 할 수 있느냐 물었다. 모던 명이는 본인 승낙해야 된다. 남자의귀가 팔랑개비 귀라서 걱정이 많이 된다. 이혼이란 말이 강도가 높아진다. 걱정 되던 차 동장이 집 매매용도로 인감을 떼고 있단 연락을 밭고 황급히 달려갔다. 소란이 일어났다.
두 아이가 미국에서 공부 중이라 작은아이에게만 연락하여 한국에 들어오라고 했더니 작은아이가 왔다. 아버지께 모든 부동산 연대명의로 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본인 앞으로 있으니 당신 것 이라했다. 아들과 큰소리가 났다. 결국 내일아침에 법무사 사무실로 가기로 했다. 서류를 작성하자 달아나는 사람을 아들이 잡고 온다. 이렇게 하여 이제는 걱정이 되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남자야 바람을 피우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금은 병 수발을 한다. 문득 옛날생각이 날 때면 밥 먹는 것도 미워 밥그릇도 빼앗아버리고 싶지만 병원에 들락 하며 절뚝거리는 것을 보니 가엽고 없는 것 보다 벽을 짚고 살아도 남편이 있는 게 낳을 것 같다.
■ 장작더미 / 심찬용
조용한 마을에 영구차가 멈추어 선다. 장지에서 엄숙하게 장례를 마치고 고인이 늘 생활했던 집으로 돌아와 황토방에 영정을 모신다. 안방에는 일가친척들과 이웃사람들이 둘러앉아 “그렇게도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아내와 장작더미를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까”슬퍼하며 그의 지나온 삶을 더듬어 본다.
고인은 도시에서 고추 장사를 하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살다가 늘그막에 병든 아내를 위해 귀향을 했다. 이사 오던 날, 늘 그리워하던 고향땅에서 그림 같은 집과 별채로 조그마한 황토방까지 지어 소원을 이루었다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며 즐거워했었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왔지만 막상 농사지을 땅 한 뙈기 없는 그는 남의 땅을 빌려서 혼자 콩이며 채소를 가꾸었다. 시간이 나면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가서 띠를 베어서 오던지, 아니면 장작을 한 짐씩 해 와서 집 둘레에 울타리를 만들 듯이 쌓아갔다.
그가 시골로 내려오고부터 황토방은 마을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마을이라 해 봤자 십여 호도 채 되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은 객지로 다 떠나가고 집집마다 칠순이 넘는 노인들이 외롭게 살고 있어 동네는 적막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황토방이 생기고부터 사람들이 시간만 나면 모여 윷놀이를 하면서 술과 음식을 해 먹었다. 마을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해서 사람 사는 마을 같아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 좋았던 세월도 십년이 채 되지 않아 끝나게 되었다.
언제인가 집안 큰일에 고향을 찾았다가 황토방에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그날 고인으로부터 젊었을 때 군내 풀베기대회에 나갔던 이야기를 들었다. 군내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모두 지게를 지고 모여들었다. 산비탈에서 심판의 호루라기가 울리자 각자 산으로 흩어져 풀을 베기 시작하였다. 정해진 시간 안에 풀을 베어 짊어지고 저울 위에 올라서서 가장 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이 일등을 하는 것이다. 고인은 풀도 잘 베지만 머리를 굴렸다고 했다. 마른풀을 베지 않고 도랑가 물기 있는 풀을 베어 무게가 많이 나가도록 했던 것이다. 지게에 산더미 같은 풀을 지고 저울 위에 올라갔다. 결과는 당연히 일등을 하였다고 자랑을 했었다.
황토방 구석에는 돗자리 뭉치가 이불 보따리처럼 놓여 있다. 돗자리는 평소 우리가 사용하던 왕골돗자리가 아니다. 산에서 자라는 띠(벼과에 속하는 속칭 삐삐)를 베어 깨끗하게 씻어 찌고, 말려 두었다가 옛날 자리를 만들던 자리틀을 구하여 돗자리를 짜기 시작했다. 띠자리를 만든다는 소문이 나서 방송국에서 촬영을 하러 왔었다. 망건을 쓰고 앉아 띠자리를 만드는 모습을‘KBS 6시 내고향’에 방영이 되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고향을 빛낸 얼굴로 선정이 되어 유명인이 되었다. 밤늦게까지 혼자서 띠자리를 만들며 전통공예를 계승하기 바라던 고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인의 세 여동생이 오빠의 영정 앞에서 향을 피우며 망연자실하게 생각에 잠긴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아마 몇 년 전 부모님 기일에 모인 세 자매가 황토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던 일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그날 밤 황토방은 오빠의 정이 묻어나는 뜨끈뜨끈한 찜질방이었다. 오빠와 함께 자정이 넘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KBS 6시 내고향’프로에 출연한 오빠의 띠자리 짜는 모습을 다시 보면서, 어찌 이런 일을 했을까 꿈만 같다고 기뻐했었다. 세 자매는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눈가가 촉촉해진다.
고인은 아내 사랑이 극진하다. 십 수 년 전에 그의 아내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가다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 뇌수술을 받았으나 반신불수가 되었다. 아내를 살리려고 그는 무한한 노력을 했다. 아내의 건강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구해 오고 칠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삼시 세끼 따뜻한 밥을 해 주었다. 최근 1년은 밥이 먹기 싫다고 하여 도토리를 주워 손수 묵을 만들어 주고, 또 떠먹는 요구르트가 먹고 싶다고 하면 십리가 넘는 읍내까지 자전거로 달려가 사다주었다.
아내 병환에 정신을 팔다보니까 정작 본인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해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게 되어 마을사람들의 마음이 숙연해진다. 고인의 맏처남이 “내 동생을 살리려다가 매부가 먼저 갔다.”는 그 말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짠하게 한다
석양이 지고 어둠이 내리자 조문객들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사람들은 마당으로 나와 상주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눈다. 나도 따라나서며 집 둘레 이곳저곳을 살펴본다. 장작더미가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고, 칼로 벤 듯이 반듯하게 쌓여 있다. 전번에 왔을 때는 울타리가 없는 허허벌판이었는데 장작더미가 담장이 되어 아늑하다. 장작더미를 이렇게 많이 쌓아놓고 어찌 떠날 수 있었을까? 황토방 아궁이로 들어가 본다. 가마솥 아궁이 옆에는 큰 포대기에 불쏘시개를 하려는 솔가리가 가득하게 담겨져 있다.
상갓집을 떠나오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아내를 돌보다 정작 본인이 먼저 간 지금, 저 많은 장작더미는 누구를 위해 쌓았으며, 하늘 같이 믿었던 남편을 잃은 그의 아내는 누가 돌볼 것인가.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파란만장한 고생은 하였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한 삶이 멋진 삶이 아닐까.
가던 걸음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니 고인의 아내는 산속에 잠든 남편을 향하여 집으로 돌아오라는 주문을 외우듯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몸이 성치 못해 일어서지도 못하는 고인의 아내는 갑자기 친정 오빠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창문 밖을 내다보며 “오빠! 오빠!…”오열하며 눈물을 흘리는 여동생의 모습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내일 모래 삼우제를 지내고 탈상을 마치면 자식들과 그의 아내는 모두 고향을 떠나고, 마을사람들의 사랑방인 황토방은 장작더미가 지킬 것이다.
■ 에움길 /이춘실
해남에서 탄 유람선이다. 관광지의 유쾌한 뱃놀이일텐데, 피곤해서인지 여기저기 제 멋대로 누운 모양새는 관광객답지않다. 아무리 좋은 경치도 이젠 귀찮다는 듯 보인다. 마치 위동페리호 지하 일층과 비슷한 풍경을 자아낸다.
남편은 결혼 당시엔 무역회사 수출과장으로 믿음직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내가 박복한 탓인지 결혼 이 년에 접어들면서 회사는 기웃뚱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사표를 쓰고 재충전의 기회를 갖자며 본가로 이사했다.
본가는 대구에서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를 한시간도 훨씬 더 가는 하양이었다. 기관장들의 식사자리로 첫손 꼽는 식당을 경영하며 여섯 마지기 농사를 힘겨워 하시던 아버님은 우리와의 동거를 더 없이 기뻐하셨다.
황망한중에도 재미 있었던것은 내가 피아노 소리를 내면 우리집 창가에는 울타리 치듯, 어른과 아이들이 빙~둘러 서 있는 것이었다. 하양국민학교 선생님 두분이 레쓴을 간곡히 원했다. 재미삼아 시작한 것이 한대 더 구입해서 본격적으로 레쓴을 하게 됬다. 생각지도 못한 직업이 생긴 것이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남편은 다시 사업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 충무로에 사무실을 알아보며 의기 충천할 때 덜컥 아버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어머님은 젊어서부터 천식으로 병약하셨다. 남편은 꼼짝없이 부모님께 붇들리고 말았다. 아버님은 대구 파티마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논을 팔고 식당은 세를 놓고 대구로 이사했다.
삼년 후, 남편의 지극한 보살핌에도 끝내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형님댁에, 남편은 일본으로 떠났다.
두 아들의 엄마가 된 나는 경제적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모든것을 나 혼자 감당해야 할 처지다. 마음 다잡고 종로호텔 뒤에 방 두개를 얻어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재미로 할 때와 직업으로 할 때는 달랐다. 수입도 두 아이와 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생각끝에 보증금을 빼고 피아노를 팔아 칠성시장 상가 이층에 작은 식당을 열었다. 시댁에서 본것을 경험으로 아줌마 한 분과 열심히 하니까 잘 되었다.
제법 자리가 잡혀가고 있을 때 마이카 시대가 도래해 주차장이 없는 나는 또 옮겨야 했다. 그때 남편이 돌아왔다. 남편과 시숙댁에 갔는데 형님이 대만에 간다고 했다. 나도 가고 싶다했더니 형님은 함께 가자고 했다. 쌍십절 관광길이 보따리 장사로 이어졌다. 대만 일본 중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배를 타며 장사를 배웠다. 그중 많은 수입을 내는 곳은 중국이었다.
새벽 다섯시, 대구에서 다섯시간 차를 몰아 인천부두에 도착한다. 긴 줄 끝에서서 사십분만에 위하이로 떠나는 배표를 산다. 시설 좋은 여객실도 있었지만 장사꾼으로 나선 나는 지하 일층에 전투 하듯이 요와 베개를 구해 자리 하나 차지한다. 몇몇이 아는 체를 하지만 일어서면 자리를 잃을까봐 눈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인사 할때는 친한 듯 보이나 물건을 구입 할 때와 구입 후에는 함구한다. 모르는 사이가 되는것이다. 가벼운 물건을 구입해서 이익을 낸다는 소문 때문인지 아줌마들은 인사하며, 트고 지내자고 들이댄다. 개중에는 식사를 같이 하자며 식당으로 끌다시피 잡아당기기도 한다. 어느날은 친절하게 어느날은 쌀쌀맞게 대한다. 될수 있는대로 그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만 그들은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않고 주시하며 경계했다. 언제까지 그들 눈치를 보며 자존심을 구길수는 없었다. 먼저 아는체도 눈길도 주지 않기로 했다.
내가 취급하는 물품은 간단하다. 위하이는 원형의 섬 도시로 상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부둣가 가까이에 양식 진주를 헐값에 구입 할수 있는 상인을 형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진주뿐만 아니라 어떤 날은, 호박과 비취도 가끔 구입해 오면 만족할 만큼의 수익을 볼 수 있다. 한 배를 타고 오고가도 그들은 바닷가에는 가지않고 시장으로 가서 먹거리와 의상 신발등을 취급 한다.
결국 입소문이 나서 이년도 채 되기 전에 낭패를 보고 말았다. 물건이 압수되고 감당하기 힘든 관세가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두운 얼굴로 돌아온 나에게 남편은 끌끌 혀를 차며 잘 됬다고 했다. 왜 그리 악착을 떠느냐고 훈계조로 몰아 부쳤다. 왈칵 화가 치밀어 집을 나섰다. 두 달안에 물건을 찾아 다시 위하이로 가야 하는데 이젠 정남이가 떨어져 가기 싫었다. 포기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었고 돌아가기엔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 풀길없어 울음이 터저버렸는데, 어깨를 툭 치는 손이 있었다. 생각도 못한 남편 손이었다. ㅡ무슨 생각 하느냐, 다 포기하고 편히 쉬라ㅡ했다. 문득, 이렇게 고마울 때도 있구나 하며 위안을 받는 내가 놀라웠다.
남편은 하양 집을 팔고 가진 돈을 합해 봉덕동에 이층 양옥을 샀다. 뛸듯이 기뻤다. 큰 아들 부산에서 병원으로 둘째도 직장으로, 편하고 안정된 생활이 좋았다. 그래도 남편과 나는 담을 헐고 가계를 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몸에 이상이 왔다. 편편성돌출형 경부암으로 시간을 다툰다고 했다. 영대병원에 일주일 후 수술 예약을 했으나 산부인과 전문의인 아들은 늦은 시간에 자기 병원으로 데려갔다.ㅡ내가 전문의인데 누구에게 맏기냐ㅡ고 나를 안심 시키려 애를 썼다. 이튼 날 수술은 성공했고 감사했다. 퇴원하고 몇일이 지나 농 옆에 있는 크로마하프를 보게 됬다. 십년 전에 배우던 것이다. 꺼내 소리를 내보니 맑은 소리가 났다. 또 암 수술 환자들이 모인다는 웃음교실에 안내되어 엔케팔린 세포를 생성시켜 치료를 극대화 시킨다는 웃음운동을 시작했다. 웃음으로 음악으로 몸은 회복되어가고, 크로마하프 강사 자격증을 땄다. 건강상태에 이르자 크로마하프 교실을 열어 지금은 이십여명 교습생들이 드나든다. 주민 자치센터에도 출강하고 있다. 경로대학 교도소 병원 등에도 봉사하고 있다.
지나온 길이 편한 길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골목과 언덕을 넘으며 쌓아온 길이 나에게 많은 거름을 주고 가꾸어 준 길이라 생각한다. 지금 타고 있는 이 유람선은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더 단단히 다지기 위한 것이다.
크로마하프 강사 세미나를 마치고 보길도로 노화도로 전국에서 모인 강사들과 남도 관광을 즐기고 있다
■ 파우치/ 서해숙
간단한 필기구와 립스틱을 조심스레 넣고 지퍼를 닫는다. 내겐 아주 유난스러운 파우치가 하나 있다.
천으로 만들어졌기에 양 끝이 다 헤어져서 구멍이 나 있다. 내용물이 덥지는 않겠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 그 어떤 고급 진 것이 선물로 들어와도 바꿀 생각은 없다. 마름모 문양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되어 있고 중간에 큰 가름 줄이 있는데 희미하게 아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터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학업을 팽개쳤으니 인문계 고등학교에 무사히 입학을 한 것도 감사한 일이긴 했다. 공부하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가족들을 들볶자고 만학도를 택했다. 컴퓨터는 거실로 내 몰렸고 tv를 보는 남편을 약 올릴 심사로 앉은 책상을 거실에 마련하였다. 아무리 학구열이 뛰어나도 공부를 놓은 지 20년이 넘은 내가 책에 몰입을 할 수 있었겠냐만 나는 한결 같은 시간에 똑 같은 자세로 책을 폈다. 어떨 땐 소설책을 펴 놓고도 공부를 하는 척 했다. 안달이 났다. 어떻게 할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공부에 흥미를 붙일까? 속은 숯덩이가 되었지만 이미 내가 입만 열면 잔소리로 치부하는 가족들에게 더 이상 유난을 떠는 수다쟁이는 되기가 싫었다. 환경 바꾸기를 해야 했다. 쇼핑을 싫어하니 뭘 사러 가는 거 또한 여간 거북한 일이 아니었다. 마침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손아래 동서가 준 파우치가 화장대 위에서 마땅한 사용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고등학교 입학선물로 필통을 하나 마련했다면서 작은 파우치 안에 갖가지 필기구를 채워 넣어 주었다. 늘 명령하고 협박과 훈계만 하던 내가 다정하게 선물이라고 주었더니 덧니를 들어내고 웃었다. 몇 주간이 지나고 아들이 진지하게 물었다.
“엄마! 이거 진짜 필통 맞아요? 친구들이 자꾸 파우치래요”
“필통 맞아. 네 친구들이 촌스러워 몰라봐서 그래”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일사천리로 나와 버렸다. 아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열심히 들고 다녔다.
그 거짓말이 미안해서 나는 아들이 잠든 틈에 책상위에 놓여 있는 파우치를 고상 앞에 가져다 놓고 기도를 했었다. 공부가 재미있는 학생으로 거듭나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500여명 신입생 중에 300여등으로 입학했던 아들이 두 자리 숫자의 성적으로 우뚝 올라서는 거였다. 나는 더 열심히 거실에서 책을 펴 들고 앉았었다. 남편이 어느 날부터 tv를 끄고 신문을 펴는가 싶더니 딸도 아들도 각기 방으로 들어가서 안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이 공부를 하든지 안하든지 일단 컴퓨터 게임만 안하면 나는 안도를 했다. 만학은 힘들고 외로웠다. 아무도 지지를 해 주지 않으니 서러워서 시험이 끝나고 호숫가에 차를 대놓고 핸들에 얼굴을 묻고 운 적이 여러 번이었다. 등록금을 내야건만 입이 안 떨어져서 제 때 못 내고 학교의 대자보의 등록금 미납자 명단에 내 이름이 걸린 적도 있었다. 아이둘이 고등학생이 되다보니 나까지는 벅찼다. 담당교수께 말씀을 드리니 지금 그만두면 평생 다시 공부를 못 할 거라고 달래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남편을 졸라 겨우 학비를 내고 비자금한 푼 없는 신세를 한탄했었다. 힘들 때마다 친구들이 놀려도 내가 준 파우치를 잘 갖고 다니는 아들이 고마워서 위로가 되었다. 짜아식 늘 엄마 잔소리가 지긋지긋 하다더니 그래도 내 말을 믿어주어 큰 위로가 되었다. 하루는 남편이 귀엣말로
“당신 좀 심한 거 아냐 저거 진짜 파우치가 맞구만...”
“쉿 지금 와서 어쩌라고요. 그냥 필통으로 쓰면 필통인 겁니다. 모른 체 해 주세요”
그 후로도 일 년에 한두 번쯤은 아들이 되 묻곤 했지만 그냥 저냥 필통으로 밀어 붙이니 용케도 잘 넘어 갔다. 아들은 늦머리가 터졌는지 안달복달 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성적이 날개를 달았고 원하던 대학을 가게 되었다. 나는 추억의 물건이라도 되라고 그 필통을 챙겨 주었건만 서울생활 한 달 만에 이젠 필통이 필요 없다면서 내가 필요하면 쓰라고 했다. 내가 하도 귀중하게 여겼으니 버리기가 아까웠나 보다. 나는 네임 팬으로 아들이름이 선명하게 써진 그 파우치를 받아서 늘 지니고 다녔다. 다른 집 자식들은 서울로 공부를 하러 가면 한 달에도 몇 번을 내려온다고 하는데 무슨 연유인지 우리아들은 몇 달에 한 번씩 내려 와서는 동대구역에서 바로 친구들과 만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내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대학생활을 1년 한 아들이 군대를 가겠다고 휴학을 했다. 녀석은 선천적으로 한쪽 시력이 몹시 나빠서 공익근무를 해야 했다. 청년취업이 날이 갈수록 힘들다고 나라전체가 난리였다. 스팩도 쌓아야 하고 어학연수와 봉사활동도 해야 하는 시국이라 한 날 한시가 아까운 시절이었다. 입대를 눈앞에 둔 어느 날 아들이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무슨 일이냐고 몸조심을 하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무슨 경거망동이냐고 난리를 쳤다. 농구장에서 친구와 한 판 쌈박질을 했다면서 죄송하다고 말하곤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녀석 지금이 어느 시점인데 쌈이나 하냐고 한숨을 한껏 내 쉬는 날이 몇 몇 일이 지났다. 아들이 얼큰하게 취해 와서는 할 말이 있단다. 속도 상하고 덜컥 겁도 났다. 코앞에 닥친 입대 날짜를 퍼뜩 떠 올리며 좌불안석인 채로 식탁에 마주 앉으니 ‘엄마, 제가 다친 건 정말 죄송 한대요. 너무 그러지 마셔요. 저요 금마 콱 죽이고 싶었는데 아빠 회사와 엄마 어린이집 생각해서 참은 거예요“
“뭔 말이야. 너 어찌 친구를...”
“자꾸 까부는데 저 진짜 참느라 힘들어서 친구는 못 때리고 벽을 쳐서 손을 다친 거라구요. 그러니까 엄마 너무 이 손가지고 그러지 마셔요”
늘 동분서주 하는 우리가 나빠 보이진 않았나 보다. 청소년 복지학에서 배운 게 생각났다. 비행청소년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없어서 어긋나는 거라고. 가족들이 아무렇게나 사니까 그들 또한 그렇게 살아도 죄의식이 없는 거라 했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아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 다 헤어진 파우치를 애지중지한다. 아들은 아직도 내가 저의 필통을 갖고 다니는 공부하는 엄마로 나를 알고 있다.
■ 인생은 리더가 행동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 / 서인수
인생은 지구에 딱 한번 초대받아 살아가는 삶이라 희망을 키워 가니 성숙해졌다. 진정으로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니 나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하루하루 웃으면서 생활하고 유쾌하게 지내니 행복한 가정으로 삶이 풍요해지게 되었다. 행복할 때 잠자는 두뇌를 계발하도록 노력하니 잠재역량도 발휘하게 되어 새로운 개념도 창조하게 되었다. 그럼으로 매사에 하는 일이 남다르게 뛰어나 실력을 인정받으면 존경받는 인물이 되기 마련이다.
존경받는 인물로 밝은 인생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어지니 시간적 여유를 갖고 하는 일마다 성실히 행동하면 리더십을 발휘하게 된다. 리더는 최정상에 올라가면 존경받기 마련이라 지혜를 밝혀주면서 빛나는 면모를 보여주니 환호하게 된다. 글 솜씨나 강연으로 인기를 끌면 타의 모범이 되니 행동하는 태도와 자세를 살펴보면서 좋은 점을 배워 가면 정상으로 함께 발전해가게 된다.
최정상의 빛은 밝기가 찬란하고 아름다워짐으로 귀추를 주목해보게 된다. 빛의 밝기로써 미래가 찬란하고 아름다우면 마음도 덩달아 극치로 따라 오르게 된다. 이런 발전과 희노애락이 있음으로써 재미있는 삶으로 인생을 풍요하게 살아가게 된다. 리더가 풍요한 삶을 살면 천부적인 재능으로 행동하는 투지를 배우게 되니 위대한 위인들을 존경하면서 지혜와 덕망을 연구해보면 재미있는 삶이 시작된다.
소설이나 영화는 위대한 영웅이 어떤 모습인지 자주 읽고 고민하면서 보여주는데 인격과 인성은 가변적인 구조임을 살펴보게 된다. 인생사가 변화하고 변천해 가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기술해주는 인기 있는 작가의 글은 재미가 있어 읽어보게 된다. 위대한 인간은 잠재역량이 풍부한 셈이라 철학과 문학이 발전해 가는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가는 근원으로 인문학과 과학은 더욱 심오해지게 되었다.
현재 스마트 폰으로 인터넷이 자유롭게 의사소통되고 있다. 문명시대에 잠재역량을 다방면 다각도로 발휘하면서 획기적으로 발전을 도모시켜가니 기계화/산업화하게 되었다. 다양한 지식과 지혜, 정보와 message를 계속 복습하면 핵심요소를 뽑아 현대화해 지혜를 검증해보게 되었다. 문명이기는 4차 문명 산업으로 부흥해가니 변화에 시간이 많이 단축되고 있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스템이 병행해 편리한 삶으로 건강과 행복을 누리는 인생이 되었다.
연구반 1기 강의 계획서
차시 | 일자 | 요일 | 강의 내용 | 강사 | 비고 |
1강 | 4/18 | 월 | ▪ 수필창작의 절차 | 홍억선 | 개강 |
2강 | 4/25 | 월 | ▪ 서정과 서사 | 홍억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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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 5/2 | 월 | ▪ 수필의 소재, 제재, 주제 | 홍억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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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 5/9 | 월 | ▪ 수필의 구성 | 신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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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 5/16 | 월 | ▪ 수필의 표현 | 홍억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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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 | 5/23 | 월 | ▪ 서두 본문 결말 쓰기 | 홍억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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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 5/30 | 월 | ▪ 문학적 형상화 | 박기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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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 6/12 | 일 | ▪ 좋은 수필 | 신현식 | |
9강 | 6/20 | 월 | ▪ 특강-김용옥 | 김용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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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 | 6/27 | 월 | ▪ 좋은 수필의 요건 | 홍억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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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강 | 7/11 | 월 | ▪수필이론 정리 및 첨삭 | 홍억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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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강 | 7/18 | 월 | ▪정리 및 평가 | 홍억선 | 수료 |
* 상기 계획서 사정에 따라 조정이 있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