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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문학관 아카데미 21기-11강 합평자료(10월 30일 용)
1. 못돌이 /금우동
하반신 통증이 심각하다.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통이 마치 죽을 것처럼 아프고 고통스럽다. 밤새워 끙끙 앓았다. 날이 밝아오자 진통제를 사 먹었다. 조금 차도가 있긴 하였으나 몸살기와 함께 근육통은 계속이다. 온종일 누워 뒹굴다 일어났다 하면서 견디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진통이 또 심하게 계속 몰려온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코로나 간이검사 키트로 테스트를 하니 양성반응이었다. 즉시 KF94 마스크를 장착하고 내방에 격리 유폐시킨다. 문고리부터 소지품 일체를 소독 세탁하고, 음식물을 1회 용기에 담아 방까지 배달해준다. 화장실도 따로 쓴다. 늦게 팔자에 없는 호강이다. 온갖 부산을 떨었는데도 결국 연휴가 끝난 이틀 후에는 가족 모두가 양성반응이다. 동네병원에서 코로나 PCR 검사로 확진과 함께 5일간 자가격리와 치료제 복용을 시작했다. 5일 후 음성판정으로 치료가 종결되었다. 코로나 예방접종을 5차에 걸쳐 실시하고 그동안 한 번도 코로나에 걸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호되게 신고식을 하게 되었다.
이번 코로나 증세는 유독 근육통이 심했고, 특히 하반신 종아리와 허벅지 통증이 더욱 심각하게 아팠다. 이를 견디기 위해 KF94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수성못 둘래길을 맨발 걷기로 오전 오후 각 한 바퀴씩 매일 돌았다. 체중이 고도비만 직전의 비만인 데다 처음 맨발 걷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1주일 2주일 계속 걷기를 하니 편해졌다. 이제 6개월 정도 계속했더니 체중을 비만에서 과체중으로 조정되었다. 평소에도 종아리 허벅지 근육통이 잦았었는데 이제 하반신 근육통은 해방이 된 듯하다. 허리도 척추측만증 수술로 평소에 진통과 불편감이 가끔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수성못 둘레길을 돌면서 좋아진 것은 하반신 통증과 허리만이 아니다. 자동으로 걷기 명상의 효과도 덤으로 얻고 있다. 일상의 복잡한 생각의 갈래도 정리하고, 수성못 4계의 변화에 따른 감상도 쏠쏠하다. 봄꽃이 피고, 섬에는 까마귀 떼와 두루미 떼가 영역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여름에는 수달이 헤엄치고, 부들과 갈대숲에는 가끔은 자라가 못가에 나와 쉬기도 하고, 분수가 음악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잉어 떼가 노닐고 청둥오리와 큰고니가 노니는 것도 볼만하다. 가을에는 수변 무대 곳곳에는 버스킹공연도 자주 벌어진다. 배롱나무꽃과 코스모스길도 운치를 더한다.
수성못을 중심으로 주변은 생활 밀착형 인근 주민을 비롯한 대구시민의 여가문화 장소로 발전하고 있는 모양새다. 진밭골을 비롯하여 범물동 용지봉과 범어 뒷산은 지역주민의 가까운 산책로로 사랑받고 있다. 들안길 먹거리촌과 카페촌이 발달해 있고, 수성아트피아를 비롯한 용학도서관 등 문화시설도 제법 갖추고 있다. 앞으로 수성못은 수상 무대도 만들고 스카이브릿지도 놓을 계획이라고 한다.
이런 문화자원을 어우르는 수성못 문화프로그램을 한 번 기획해볼만 하지 않을까 하고 엉뚱한 상상을 한다. 해마다 경주에서는 신라의 달밤 “탑돌이” 행사가 강강수월래와 함께 펼쳐진다는 데, 수성못은 “못돌이” 행사를 기획해 보면 어떨까 한다. 수성못 주변과 신천변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소재지인 유서 깊은 동네가 아니던가. ‘다 같이 손잡고 동네 한 바퀴’나 수성못을 중심으로 ‘장애인 인권과 차별금지를 위한 인간 띠 잇기 운동’ 등이다. 또한, 지역주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만민공동회’, 찾아가는 상담활동-아웃리치 등 수성못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간 공동체 운동을 기획해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다. 지금도 자연발생적으로 수성못 둘레길 걷기운동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해 가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이를 지역주민의 복합문화행사로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다만 일시에 지나치게 사람이 많이 모여 교통난을 일으키는 과중한 밀집행사는 지양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떻게 행사를 디자인하고 조율하고 질서를 잡아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함께했으면 한다.
“너는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엄마는 지금도 너를 찾으며 청다리 밑에서 울고 있을 거야.”
어릴 때 이웃 어르신들이 놀리며 하던 이야기다. 놀림을 당할 때마다 울면서 다리 밑에서 나를 기다릴 엄마 생각으로 애태우고 실제의 엄마 때문에 또 애태웠던 기억이 새롭다.
“세상의 모든 아이는 어머니의 다리 밑에서 주워온 것이 분명하다” 무궁화 박사 유달영씨의 고백이다. 그는 이 말이 진리임을 환갑이 넘어서 어느 날 불현 듯 깨달았다고 한다.
“리비도는 다리의 교접을 욕망한다.” 프로이트의 주장이다. 인간의 생존 욕망 중에서 가장 강력한 원천이 ‘리비도’임을 설파했다. 리비도 또는 에로스는 어머니의 다리와 아버지의 다리가 서로 교차하면서 유지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리로 사랑을 성취했다. 사랑의 오작교가 성취한 역사, 리비도를 통하여 욕망했던 다리의 역사다. 직립보행의 다리를 가진 인간의 역사는 다리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간다. 두 다리로 이웃과 소통하고 길을 내며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연결하는 가교의 다리를 건너며 살아간다.
오늘도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맨발 걷기를 마치고, 발 씻기를 하면서 옛 선현들의 탁족을 흉내 내본다. 우선은 수성못 맨발 걷기를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아침저녁으로 바쁜 걸음을 약 40여 분간 하고 나서 발 씻고 집에 오면 개운하기도 하고 점점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인간은 직립보행의 동물이다. 36억 년의 지구역사에서 호모사피엔스의 역사는 3만여 년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는가. 직립보행의 생명체로 발전해 온 인간 생명은 본질적으로 걸어야 하고 두 다리가 튼튼해야 한다. ‘못돌이’의 축복이다.
2. 나무가 쓰러지다. / 김병연(4)
1)지난밤 불어닥친 폭풍우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문득 집 앞 야산에 서 있는 이름 모를 나무 한 그루가 생각났다. 틈틈이 시간 내서 오르내리던 길 양옆으로 우아하게 넓게 펼쳐져 있는 무성한 잎들이 무척이나 인상 깊게 느껴졌던 나무였다. 그 나무의 안부가 궁금하여 이튿날 바로 찾아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나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형체로 나뒹굴고 있었다. 중간 부분이 반쯤 꺾여진 채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니 나무 몸통 여기저기에서 폭풍우가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족히 30여 년 수령된 나무인 것 같은데 하루아침에 폭삭 사그라져 버렸으니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등산 도중 흐르는 땀을 식히기 위해 나무 밑에서 가끔 머무르곤 했던 귀한 쉼터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폭풍우에 처참한 일격을 당하고 말았으니, 나무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었던가. 나무는 자라면서 그동안 숱한 풍파를 겪고 견디면서 땅속 깊숙이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고고히 성장했을 터이다. 하지만 곧 서서히 고사 상태가 되어 명을 다하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주변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고 등산로마저 막혀버렸다.
2) 그런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몇 달 전 일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30여 년간 함께 한 친구에 관한 일이다. 2년 전 갑자기 그 친구가 개인 사정상 친구들 단톡방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탈퇴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2년 후 어느날 불쑥 나타났다. 떠날 때처럼 돌아올 때도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사실은 반갑기 그지 없었다. 친구는 그간의 사정은 묻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예전으로 돌아가고자 부탁하였고 나는 흔쾌히 수락하였다. 다른 친구들도 이에 동의하였다.
3)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또 일이 생기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얼마 전 나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4인의 골프회가 구성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인 행사를 진행하기로 하고 이후 순조롭게 모임은 흘러갔다. 그런데 영업상 나는 VIP 고객 상대로 골프 라운딩을 가끔 주선하곤 했는데 친구 골프 모임은 당분간 중단하고 몇 달간 그쪽으로 라운딩하게 되었다고 내 사정을 설명하였다.
4)그런데 그 친구가 이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나왔다. 친구 사이에 한 번 약속한 것은 절대 무효화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잠시만 그러하니 양해해달라고 협조를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였다. 친구끼리의 약속을 헌신짝 내버리듯이 한다면서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5)한동안 친구의 집요한 책임 추궁이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나 때문에 골프회가 깨지게 되었다면서 당분간 연락을 끊자고 하였다. 듣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토록 오매불망 사랑하며 지내던 애인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는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뭐, 이따위 녀석이 다 있어!’ 하면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삼켰다.
6) 나의 잘못도 있긴 할 것이다. 모임을 결성한 지 채 한달도 안되어 고객 운운하며 이해를 구하였으니까. 그래서 두 번이나 술자리를 마련하여 오해를 풀어보고자 시도하였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다 잊어버리기로 하고 그날 화해의 악수를 하면서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였다. 그런데 헤어진 후 밤 11시에 카톡이 왔다. 지금 그간의 잘못에 대하여 톡으로 사과의 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독촉하는게 아닌가.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미 끝난 일인데 뜬금없이 또 사과의 문자를 보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박하였다.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끈질기게 톡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가 반응이 없자 단박에 절교를 내뱉었다. ‘이렇게 우정이 깨어지는구나.’ 하면서 그 친구를 잊기로 작정했다.
7)연이어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어느 날 울산에 있는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사연은 부부 골프 라운딩 도중 경기 규칙에 대하여 다툼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끝내 그 친구가 양보하지 않고 경기 도중 갑자기 말없이 빠져나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친구의 그런 행동에 울산 친구는 쌓아온 우정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비참함도 동시에 느꼈다고 나에게 하소연하였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친구의 그런 돌발적인 행동에 대해서 망연자실했다고 했다. 그 친구와는 나보다 더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골프 친 횟수도 나보다 훨씬 많았다. 부부 동반 여행도 적잖게 갔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8)세계 최고 갑부인 워런 버핏은 이렇게 일갈한 적이 있다. "부를 쌓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여 년이 걸리지만 친구를 잃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분이면 족하다."라고.
돈독한 우정이 영글어지기까지에는 수십 년 세월을 거치기 마련이다. 다툼, 미움, 증오, 질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정이 동반되어 비로소 하나의 완전체가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무심하게 내뱉은 말 한마디로 인하여 그 튼튼하던 나무가 한순간의 폭풍우에 속절없이 쓰러지듯이 우정도 그렇게 거칠게 휘몰아치는 오해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게 된다. 절대 치유될 수 없는 깊디깊은 생채기를 남길 뿐이다. 쓰러져 버린 나무에서 만신창이 꼴로 남겨진 30년의 세월을 보고 있노라니 까닭 모를 눈물이 흘러내린다. 현재에 나하곤 전화 한 통조차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9) “친구여! 세월이 흘러 언제든지 내게 손을 내민다면 기꺼이 네 손을 잡아주마.” 사과도, 용서도 구하지 않아도 된다. 우정의 뿌리만큼은 다 패이지 않음을 우리 친구 모두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필리핀 바콜로드를 다녀와서 / 이호규
1. 얼마 전, 필리핀 중부 도시 ‘바콜로드’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매년 해외 봉사활동 지역으로 중앙아시아를 택했는데, 이번에는 섬나라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다녀오게 되었다.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직항이 없어 김해공항에서 저녁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 공항에 새벽에 내렸다. 공항 환승 대기장에서 장시간 기다렸다가 국내선으로 갈아탔다. 바콜로드 공항 도착 후 입국 절차를 마치고 호텔로 이동했다. 가는 길목엔 사탕수수밭이 지천으로 늘려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날씨는 무덥지 않았다. 숙소에 도착하니 이른 아침 시간이었다.
2. 바콜로드는 인구 60만 명의 중소도시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국내선으로 한 시간 거 리에 있고, 수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 중부지역 네그로스섬의 가장 큰 도시이다. 도시 규모는 적지만 교육 도시로 각종 어학원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어학연수를 많이 가는 곳이다. 관광도시 세부와 보라카이의 중간쯤 위치로 이해하면 쉽다. 우리가 방문하는 시기에 그 지역의 유명한 축제인 ‘마스카라’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3. 봉사대원은 7명으로 단출했다. 해안 갯벌에서 염생식물인 ‘맹글로브’ 묘목을 심는 것으로 봉사활동은 시작되었다. 지역 고아원(Bacolod Boy’s Home)을 방문하여 운동화와 학용품 을 전달하였다. 우리나라 목사님이 빈민촌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사업(녹녹 아카데미)을 펼치는 현장을 방문하여 교육 기자재를 전달했다. 교육사업 현장을 들어가는 양쪽은 허름 한 쪽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도 인상적인 것은 ‘만달라간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교 실에 설치할 TV 여러 대를 기증하는 순서였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한국-필리핀협회에서 는 여러 차례 방문했던 학교인 모양이었다.
4. 만달라간 초등학교는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씨에 골목을 몇 개 를 돌아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승합차에서 내리는 순간 뜻밖의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어릴 때의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운동장에는 교복을 입은 전교생이 양쪽 스탠드에 줄지어 앉아 있고 앞쪽 무대에는 봉사단이 기증할 대형 TV가 현 지 한인회 간부들의 협조로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아마도 학교에서는 큰 행사를 기획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쪽에는 공연을 준비한 듯 어린 학생들이 전통 복장으로 얼굴에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5. 축하 행사는 거창하게 진행되었다. 봉사대원 소개와 양쪽 대표의 인사, TV 기증식에 이어 학교에서 준비한 여러 팀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때 뒤쪽에서는 흥에 겨워 날렵한 동작 으로 춤을 추는 어린 친구도 보였다. 카메라를 학생들 얼굴 쪽으로 향하면 금방 환호성들 이 터져 나왔다. 학교 졸업생인듯한 청년 가수도 초대되어 노래 몇 곡으로 흥을 돋우었 다. 우리와 함께 갔던 한국인 어학연수생 몇 명이 답가라도 해야 할 분위기라 무대에 올 라갔다. 즉석에서 준비한 K-팝 몇 곡을 부르니 행사장은 완전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다. 현지 언론사에서도 취재차 방문하여 촬영하고 있었다.
6. 행사가 끝나자 싸인 무대가 펼쳐졌다. K-팝을 마무리하니 한국 K-팝 가수가 왔는냥 젊은 대학생들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을 함께 촬영한다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천진난만한 어린 학생들이 어디서 준비했는지 메모지를 가지고 한국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사인을 부 탁하고 다녔다. 운동장에서의 행사를 마무리하고 교실로 이동하여 TV를 설치하는 이벤트 도 하였다. 이동하는 우리에게도 메모지를 내밀며 사인을 부탁했다. 메모지가 없는 아이 는 손바닥에 사인해달라고까지 했다. 대학생들도 잠시 연예인이 된 기분을 느끼게 했고 우리도 생전 처음 사인을 해줘 보았다.
7. 학교 시설은 우리의 60년대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었다. 천정이 있는 무대와 작은 운동장 에 설치된 스탠드를 제외한 전반적인 시설은 낡은 편이었다. 습기가 많은 지역인지 초라 한 시설을 다양한 식물들이 보완해주고 있는 듯했다. 참관한 교실의 뒷줄 의자는 앉기가 불편할 정도로 낡아 있었다. 어떤 교실은 태풍으로 비가 새고 있었지만 손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외부에 있는 화장실도 예전 시골 초등학교의 오픈 식으로 냄새가 많이 났다. 학 교 전체 지형도 반듯한 곳이 아니라 경사진 곳에는 물이 고여 질퍽하였다.
8. 열악한 시설에 비해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한 점 불편함을 느낄 수 없이 해맑 은 모습으로 이방인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때 그 시절에는 아무 불편을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다. 교실이 모자라 이부제 수업을 하고, 첫 입학 때는 책상이 없어서 맨바닥 에서 수업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어떨 때는 수업을 미루고 냇가로 가서 모래와 자갈을 책보자기에 담아 학교로 가져왔었지만 왜 하는지조차 모르고 했었다. 이들을 보며 수십 년 전 십리 길을 어깨에 책보자기를 둘러메고 달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9. 7,600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필리핀. 역사의 질곡 속에서도 동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높은 경제 수준을 누렸던 나라가 일부 위정자들의 부패로 후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6.25 전란 전까지만 하여도 파병으로 우리를 도왔던 그들이다. 공직자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하 고 마약 범죄가 심하여 가는 곳마다 입구에는 총으로 무장한 경비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러나 그들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고, 현재의 삶에 만족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큰 도심의 도로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빈민촌이 있고, 우리나라 60년대 도시 외곽의 판자촌을 연상 케 하는 그들의 삶은 너무나 안타까워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아리게 했다.
10. 필리핀을 여러 번 다녀와도 그들의 깊숙한 생활 현장은 보지 못했다. 맹글로브 묘목을 심기 위해 지나쳤던 해안가 마을, 도심 속의 빈민촌, 낡은 시설의 초등학교 등을 둘러보 니 한 나라의 정치를 하는 위정자들의 중요성이 새삼 느껴졌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는 이념 정쟁이 끊이지 않고, 포퓰리즘이 판을 치고 있다. 근래에 들어 우리나라도 포퓰리 즘 정책으로 0%대 경제 성장 늪에 빠지고 있다고 학자들은 경고하고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만 아닌 듯하다.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도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다. 또한, 우 리국민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를 생각게 한다. 만달라간 학교를 떠나올 때 낡은 교 실 창가로 손을 흔들며 해맑은 미소를 보내던 아름다운 얼굴들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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