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성 지키기
1. 제자리 이사
by문두Jun 26. 2023
여름이 되면서 창문을 열어놓고 지내자 아래층 베란다에서 피우는 담배냄새가 온 집안을 수시로 점령해 버렸다. 소통의 기술이 부족한 나는 그냥 이사를 가고 싶어 들썩거렸다. 그러자 이 집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들이 수십 가지가 생겨났다. 당장 이사를 해야 될 사람처럼 마음이 급해져 집을 여기저기 보러 다녔다. 사실 이런 바람은 공동주택이 불편해질 때마다, 아니 텃밭과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 그리워질 때마다, 계절이 바뀌거나 직장을 그만둘 때마다 생기는 고질병이었다.
소요산과 마차산 사이에서 사는 우리는 몇 년 전에 이사 나갈 집도 제대로 구하지 않은 상태로 언니의 권유로 우리 동네 ‘유명한부동산’에 집을 내보았다. 그랬더니 거의 매매가 없다고 했는데 덜컥 사겠다는 사람이 생겨 난감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원하는 단독주택에 갈 수 있는 형편은 안 되고, 시내의 집들은 현재 살고 있는 집보다 작고 불편해도 돈을 더 주어야 하고, 우리 집에 들어올 사람은 임자가 나섰을 때 싸게 내라며 오히려 가격을 더 깎으려 하니 이사를 포기했었다.
부동산중개를 했던 언니 내외는 나의 집에 대한 갈증을 알고 가끔 싸게 나오는 매물을 소개해주었다. 이번에는 지은 지 30년이 넘은 생연동의 ○○빌라를 소개해주었다. 이곳은 내가 20여 년 전에 의정부에서 동두천으로 이사 올 때도 보러 온 적이 있었다. 어르신이 오랫동안 혼자 살다 돌아가시면서 자녀들이 급하게 정리하는 집이었다. 고인의 전성기에 썼던 장롱, 소파 등 묵은 살림들이 고스란히 있었다.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집은 곰팡이냄새도 한 살림이었다. 집을 제대로 보려면 환할 때와 어두울 때의 느낌을 다 알아야 할 것 같아 비밀번호를 부탁해 우리 집인 냥 낮에도 가보고 밤에도 가보았다. 그러자 우리들은 또다시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이 가장 깨끗하고 안전하며 최선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집은 결혼하고 다섯 번째로 이사 온 집으로, 2005년 1월 18일부터 17년째 살고 있는 우리 소유의 첫 집이다. 1997년도 11월 5일에 등기되었는데, 건축할 때 제부와 사돈(동생의 큰 시누)이 같은 층의 두 집을 분양받아 살던 집이었다. 마침 사돈네가 이사 나가고 빈집으로 있을 때 동생 옆에 살고 싶어 남편을 졸라 이사를 왔다. 동생네는 옆집에 한 십 년을 같이 살다 이사를 나가고, 이제는 우리만 남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집에 그대로 주저앉기 위해서는 들떴던 마음을 꾹 눌러주는 큰 공사가 필요했다. 완전히 다른 집으로 바꾸어 제자리 이사를 하기로 했다. 도망치려던 마음을 바꿔 당당히 맞서기로, 다음으로 미루어왔던 일을 당장 하기로 했다. 먼저 이웃을 대하는 내 마음부터 리모델링해야 했다. 용기를 내 아래층에 선물 받은 귀한 술을 한 병들고 찾아갔다. 여름에는 창문을 열지 않을 수 없으니 담배를 베란다에서 피우지 말고 밖에서 피우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리고 집수리를 시작하게 되어 당분간 시끄러울 것 같다고 양해를 구했다.
마침 남편은 일하다가 포클레인에 손목을 다쳐서 쉬고 있었다. 손목은 거의 회복된 상태이지만 비 오는 날이 많아 집안일을 할 수 있는 짬이 생겼다. 코로나로 나와 딸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남편을 보조할 수 있었다. 적금통장 하나를 정리하니 천오백 정도가 되었다. 시간의 여유와 돈을 준비했으니 마음 놓고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번 공사의 주제는 화이트하우스였다. 이 집의 가장 큰 아쉬움은 옆 건물과의 좁은 간격으로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아 어두운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내를 밝은 흰색으로 바꾸기로 했다. 도배지와 장판지, 방문, 천장몰딩, 싱크대, 신발장, 베란다 창틀을 모두 흰색으로 선택했다. 우리 부부의 마음이 언제 이렇게 잘 맞은 적이 있었나 싶었다. 이른 아침 눈뜰 때부터 늦은 밤, 잠들 때까지 틈만 나면 얘기를 나누고 또 나누었다. 여태껏 미루며 쌓아놓은 집에 대한 크고 작은 바람들을 모두 꺼내놓았다. 공사가 진행되면서 계속 더 좋은 생각들을 해내며 의기투합했다. 무엇을 내버릴 것인지, 어떻게 바꿀 것인지, 새로 구입할 것인지 일일이 함께 쫓아다니며 알아보고, 결정하고, 실행해 내는 것이 즐거웠다. 때로는 의견이 다르거나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여태껏 함께한 세월의 힘으로 평화롭게 조율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제대로 한 팀이었고, 동지였고, 동료였고, 전우였다.
우리 집에서 제일 작은 딸내미 방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먼저 방에 있는 살림을 모두 거실로 들어냈다. 방안에 있던 장롱은 상태가 안 좋아 버리기로 했다. 장롱 문짝에 딸이 어릴 때 그려놓은 귀엽고 깜찍한 그림들은 벽에 있는 낙서와 함께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아들방의 장롱과 안방의 책상도 함께 대형폐기물 처리하는 곳에 연락하고 밖에 내놓았다. 미루어 왔던 폐가전 정리도 무상으로 수거하는 곳에 연락해 깔끔하게 처리했다. 합법적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으니 차근차근 더 버릴 것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정확하게 버리는 방법을 모르거나, 물건이 너무 커서 엄두를 못 내거나, 아직은 쓸 만하다는 생각이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거나, 내 돈 주고 사서 아깝다는 생각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살았는데 막상 정리하고 보니 속이 후련해졌다.
방 하나 공사가 집 전체 공사의 축소판이었다. 천장 몰딩과 방문은 사포로 문질러 흰색 수성페인트칠을 했다. 페인트와 칠을 위한 용품들은 두 군데서 구입했다. 유림사거리에 있는 그린페인트의 친절하고 생기 넘치는 젊은 직원과, 유머감각 넘치는 삼화특수도료 사장님의 도움을 받았다. 장판지는 큰시장로의 연륜 있는 대영지물포 사장님의 도움을 받아 골랐다. 직접 공사를 한다고 하니 자상하게 장판지를 접착제로 붙이는 요령을 알려주셨다. 도배지는 중앙로의 사근사근하신 유성지물포 사모님의 도움을 받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도배 또한 직접 한다고 하니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며칠 동안 천장과 벽의 헌 도배지를 뜯어내고, 새 도배지를 발랐다. 헌 장판지도 걷어내고 방바닥을 깨끗이 한 다음 새 장판지를 깔았다. 세 식구가 함께 힘을 합쳐 딸내미 방 공사를 끝냈다. 재료만 사서 우리 힘으로 공사를 하니 비용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딸내미가 기분이 좋아 방들이를 하자고 했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까지 시켜 먹으며 앞으로 방 하나가 끝날 때마다 이렇게 방들이를 하자며 웃었다.
딸의 방에 들어갈 살림을 정리할 수 있도록 장롱 뺀 자리에 커튼이 있는 조립식 행거를 구입해 설치해 주었다. 거실의 천장까지 닿는 책장 하나를 들여와 책을 정리해 주고, 학용품 등 소품을 정리할 수 있는 5단짜리 투명정리함도 마련해 주었다. 가지고 싶어 하던 전신거울도 하나 장만해 주었다.
두 번째 공사는 서재 겸 아들 방이었다. 공사가 끝나고 물건들이 방에 들어가기 전 남편은 큰 아주머니가 췌장암으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게 되어 딸과 전주에 내려갔다. 나는 난장판인 집을 팽개치고 따라나설 수 없었다. 딸을 전주에 두고 남편이 다음날 올라올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방 정리를 했다. 나에게 이렇게 일할 수 있는 열정과 힘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 집에서 제일 많은 살림살이가 책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살림살이가 어느덧 산더미처럼 쌓여 내버리지 않으면 그것들에 치여 방바닥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식들을 낳고 살며 이루어놓은 놀라운 업적 중 하나이다. 아이들 어릴 때 보던 책을 꽤 정리했지만 내가 가져다 놓은 책이 더 많았다. 혼자서 큰 책장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바닥이 상하지 않도록 얇은 이불을 깔고 옮겼다. 책장에 아이들의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모아놓은 그림과 책과 상장과 성적표와 노트와 여러 물건들을 하루 종일 내버릴 것과 간직할 것을 분류해 정리했다.
세 번째 공사는 거실과 부엌, 현관이었다. 거실 천장 전등이 달린 네모난 공간과 현관 벽 아래쪽은 지물포에서 풀칠할 때 깔고 쓰라고 주신 인디언핑크색 실크벽지로 포인트를 주었더니 산뜻했다. 천장 도배할 때는 머리까지 동원해 남편과 둘이 몸부림치며 해냈다. 일을 끝내고 보니 얼마나 넓고 환한 지 다른 집에 온 것 같았다. 이번 공사는 워낙 규모가 커서 우리 스스로가 대견하고 흐뭇해져 동생과 언니 내외까지 불러 방들이를 했다. 마침 집안의 어수선한 것들이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인 다음날 시댁에서 시아주버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전주에 며칠 다녀왔다.
네 번째 공사는 안방이었다. 안방 살림을 거실에 다 꺼내놓고 보니 공사판도 보통 공사판이 아니었다. 이사하고 한 번도 방밖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큰 장롱 세 짝을 버리기로 했다.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사다리차를 불러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들이 군에서 휴가를 나와 온 가족이 힘을 합쳐 현관문으로 들어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어린 날에 함께했던 살림들을 정리하며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자랐는지, 아이들이 우리에게서 독립할 날이 멀지 않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정리한 옷과 책을 한 차 가득 실어 고물상에 가져다주니 이만 원 정도를 주었다. 늘 버리면서 느끼는 것은 애초에 너무 많이 갖지 말아야 된다는 것, 꼭 필요한 것만 구입하도록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은 남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온 물건들도 많았다. 필요하지 않다면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하고 미안해도 받아온 물건을 버릴 줄도 알아야겠다.
이번에 가장 큰 고민은 친정엄마가 해주신 솜이불이었다. 너무 무거워서 덮지 않고 장롱만 차지했던 이불 세 채를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 솜을 타서 얇은 이불 열여섯 개를 만들었다. 이불공사는 어쩌다 보니 가장 큰 공사가 되었다.
다섯 번째 공사는 싱크대와 신발장 공사였다. 금슬이 좋은 보루네오 싱크대 사장님 내외는 플라스틱 의자를 뒤집어 그 속에 연장들을 정리해 들고 다니셨다. 바퀴 달린 여행가방도 훌륭한 공구함으로 쓰고 계셨다. 입담 좋은 사모님과 친절한 사장님은 기분 좋게 일을 끝내주셨다. 특히 부엌 창문을 가리던 싱크대 상부 수납장의 길이를 줄여 창문을 다 드러나게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식탁에 앉으면 멀리 있는 산과 하늘까지 시야에 들어와 마음이 환해졌다.
여섯 번째 공사는 앞뒤 베란다 창문공사였다. 까만색 알루미늄 새시를 환하고 단열도 좋은 이중유리 하얀색 새시로 바꾸는 공사였다. 칠십 대 노장이신 성우샷시 사장님은 깐깐하기가 호랑이셨다. 자신의 일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고 꼼꼼하게 일을 잘하셔서 동네 분들에게도 소개해드렸다. 베란다에 하얀색 페인트칠을 하고 천장에 빨래 건조대도 달았다. 방문과 현관문을 하얀색 필름을 입히거나 하얀색 페인트칠을 하고, 문고리도 다 교체했다. 화장실 문은 맞추어서 직접 달았고, 창문마다 블라인드를 설치했다. 동원인테리어, 이진 목재, 소요산건축자재 등을 찾아다니며 일을 봤다.
내버리기도 어려웠는데 빈자리에 적당한 살림을 들이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장롱 대신 쓸 조립식 하얀 철제선반과 옷걸이, 거실의 소파와 부엌의 원목식탁, 안방의 이단 서랍장등을 여러 군데 둘러보고 결정했다. 소파는 너무 고민하다 정말 원했던 것이 팔려버려 아쉽지만 그냥 무난한 것으로 구입했다. 그밖에 빨래 정리함, 바구니, 가구모서리 보호대 등 여러 가지 소품들을 장만했다.
대미를 장식한 공사는 지붕공사였다. 안방 공사를 끝내고 장마가 절정일 때 도배를 해놓은 안방 천장에 물이 새 얼룩이 지며 검게 곰팡이 피는 곳이 생겼다. 천장을 뜯어내니 물이 줄줄 새서 양동이를 받쳐두고 일주일 넘게 자야 했다. 고민하다가 남편은 이동식 목욕 물통을 사다 잘라 물이 새는 천장 콘크리트에 접착시켰다. 물통에 모아진 물이 호스를 통해 베란다 배수로로 빠지게 벽을 뚫어 만들었다. 이렇게 단독으로 방수처리를 하고 난 뒤 공동으로 옥상에서부터 새는 방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상회를 열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러 번 개별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다행히 지붕공사에 모두 동의하게 되어 우리는 업자선정부터 수차례의 반상회 소집, 설명회 마련, 공사대금 취합, 계약서 작성 등 대표자 역할을 했다. 지붕공사는 성우샷시 사장님이 소개해주신 인품 좋은 동두천칼라강판 고경순사장님이 맡아 예쁘게 해 주셨다. 공사가 끝나고 우리 빌라에서 공사 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을 준 것이 미안해 팥 시루떡을 한 말해서 돌렸다. 지붕공사를 하셨던 사장님도 불러서 떡을 챙겨드렸더니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제 자리에서 짐을 그대로 두고 공사를 하는 것은 한 번에 끝나는 이사가 아니었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이사하는 거나 같았다. 그러나 비가 자주 오고 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도 전력을 다해 집안일을 하는 것이 모처럼 제대로 사람 사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울 때처럼 직접 땀 흘리며 일할 때, 시끌벅적 당당하게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됨을 알게 된다. 일하는 자는 큰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다. 창문새시공사를 했던 이들도, 지붕공사를 했던 이들도 자기 일에 집중해서 서로 소리를 질러 상황을 전달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연장을 거침없이 썼다. 특히 지붕공사를 할 때는 스카이라는 큰 장비를 쓰며 열 명이나 되는 인부들이 한 번에 일하는 망치소리가 대단했다. 그들이 길바닥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 것까지도 당당하게 보였다. 옛날 시골에서 농사일하며 먹었던 들밥이 떠올라 함께 먹고 싶었다.
현대의 우리들은 농경사회에서처럼 공동으로 하는 일이 없다 보니 이웃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도시의 공동주택에 사는 우리들은 오히려 이웃들과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 같다. 나를 그만큼 열어 보여야 되고, 내 시간과 마음과 힘을 나눠주어야 하기에 힘들어한다. 주고받고 울고불고 뒤엉켜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숨죽이며 살금살금 지낸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사는 모습에, 소리에 민감하게 더 신경을 쓰게 된다. 나는 언젠가는 상자 같은 이 편리한 공동주택애서 벗어나길 꿈꾼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자급자족의 일거리가 있는 단독주택에서 작은 텃밭이라도 일구며 살 수 있기를 꿈꾼다.
집안을 정리하고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넓고 예뻐져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살림살이까지 제빛이 났다. 또 무조건 사지 않고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적당한 자리에 활용해 딱 맞아떨어질 때 참 흐뭇했다. 여태껏 우리가 짐을 너무 많이 쌓아놓고 살다 보니 집이 아니고 창고였었다. 버리는 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인용 가죽소파는 아직 쓸 만했지만 다른 가족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원목으로 된 손잡이의 부드럽고 편안한 색감과 촉감은 아직도 내 가슴에 그대로 남아있다. 집을 고치고 보니 어울리지 않아서 버릴 수밖에 없는 물건도 있었다. 아끼던 물건 하나를 버리는 것은 고집 하나를 버리는 일처럼 힘이 들었다.
이번 제자리이사를 통해 아끼고 모아둔 돈을 제대로 쓰는 법을 배웠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가 의논하고 계획했던 일을 이것저것 알아보고, 추진해서 집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얼마나 보람찼는지 모른다. 돈을 쓰러 다니는 과정은 제대로 동두천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일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필요해서 찾아보니 동두천 구석구석에 전문가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생업을 가지고 동두천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한 분야에서 오래 동안 일하며 생계를 꾸려 오신 분들은 페인트가게든, 지물포든, 목재소든, 싱크대든, 새시공사든, 지붕공사든…. 그 일을 대하는 태도가 아름다울 만큼 진지했다. 그리고 전기·통신 기술자인 내 옆에 있는 이도 그중에 하나임을 실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