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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레포트를 쓰는데 도움이 되는 글을 올립니다.
우리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일기와 기록
여러분은 요즘 일기를 쓰고 있습니까? 쓴다면 얼마나 솔직하게 쓰나요? 혹시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순간적으로 둘러댄 일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쓰나요?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대목이 정확하기는 한 겁니까?
요즘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들은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봅시다. 일기장을 매일, 혹은 일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께 검사받던 그 시절 말입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희미한 기억뿐이라면 여드름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사춘기를 떠올려봅시다. 그때 여러분은 아주 정직하게 그날 일어난 일들을 기록했던가요?
저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제 일기장이 거짓말투성이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만약 다른 사람이 제 일기장을 읽었을 때 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거나 도덕성에 심각한 흠을 남길 수 있겠다 싶은 대목만 아예 빼놓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의 어린 시절 일기장에는 남이 알아도 조금밖에 상관없는 저의 고민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들로 꽉 차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저는 다른 사람의 일기에 대해서도 자주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특히 책으로 출간된 일기(日記)류를 읽다 보면 마치 짙은 화장으로 자신의 기미와 주름살을 감춘 여인을 만난 듯 연민의 정(情)부터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대개의 경우, 일기는 비밀을 전제로 자신과 관련된 각종 진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가장 솔질한 고백록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공개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는 이기심과 자기보호본능이 작용할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왜 그토록 심하게 화를 내었는지, 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변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심지어 어떤 사실은 아예 의도적으로 은폐할 수도 있겠지요.
개인의 비밀스러운 일기가 그럴진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반드시 읽게 될 기록을 남기는 경우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다행히 자기에 관한 사항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져서 어는 정도 객관적일 수 있겠지만, 이제는 사건을 보는 그 사람의 능력과 성격이 문제됩니다.
같은 일을 겪고서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불순한 목적에서 어느 한쪽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해 말과 기록이 다른 경우도 있지만, 각자 나름대로 겪고 생각한 바를 사심 없이 이야기하는 데도 원인과 결과 그리고 향후 대책 등 의견이 많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자시중심적인 사고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계는 기록을 통해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런데 역사는 기본적으로 기록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가의 기록과 평가를 맹신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사람은 모두 주관적으로 사고한다는 사실, 그리고 객관적이며 종합적인가 혹은 신봉하는 역사가의 분석... 평가 역시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나면, 이제 우리의 눈은 달라집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의의가 단순히 단답형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기록과 역사
우리는 지금 역사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근대 이전의 동양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간단하게 사(史)라고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통을 되살려 요즈음도 많은 대학에서 역사학과라는 명칭 대신 사학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는 본래 '기록하는 사람'을 뜻하는 상형문자였다고 합니다. 이는 '태사공기'('태사공이 기록한 책'이라는 뜻으로, 태사공서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사기'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은 중국의 삼국시대라고 한다. 태사공은 사마천을 가리킨다.)를 줄인 것이 바로 사기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재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글자의 뜻은 조금씩 변해 '사람'보다는 '기록'이라는 의미로 더 자주 쓰였습니다. 그 결과, 기록하는 사람을 뜻할 때에는 가나 관 같은 글자를 덧붙여 가가 혹은 사관이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역사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명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역'의 뜻은 '지나다'이므로, '역사'는 '지나간 일에 대한 기록을 뜻하는 셈이 되는데, 사실 이것은 의미가 중복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록은 그 자체로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굳이 역사라는 용어를 새로이 쓰게 된 데에는 서양의 Historyfksms 단어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번역어라는 것이지요.
History의 어원은 라틴어의 Historea입니다. Historea는 '쓰다'라는 뜻의 Hi와 '이야기'를 뜻하는 Storea를 합성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를 쓰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의 사와 같으면서도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를까요?
춘추와 춘추필법
현존하는 동양 최초의 사서는 춘추입니다. 봄과 가을을 책의 이름으로 삼은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춘추는 춘추시대 제후국의 하나인 노나라와 관련된 각종 사건을 날짜별로 기록한 책입니다. 전하는 말로는 공자의 저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춘추는 역사서라기보다 일종의 경전으로 취급되어 이른바 오경의 한자리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춘추가 쓰일 무렵에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서 나무를 알맞게 깎고 그곳에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춘추는 매우 간단한 서술이 돋보입니다. 좌씨춘추전(左氏春秋傳)과 같은 주석서가 후대에 필요해진 이유도 춘추의 글이 너무 짧은 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하튼 몹시 제한된 지면 탓에 춘추는 그저 보고 들은 사실을 짤막하게 가감 없이 기술하는 방법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읽더라도 똑같은 도덕적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복잡한 시기였습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주나라 왕실의 힘이 미약해지자 각지에서 왕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던 봉건 제후들이 왕실의 권귀를 공공연히 무시하던 패자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쿠데타와 같은 하극상이 빈번히 일어나고, '실리'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각종 타협과 야합이 횡행하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기기를 살면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정명과 존왕양이였습니다. 정명은 명분을 바로 세우자는 것이고, 존왕양이는 왕을 높이 받들고 도전세력을 물리치자는 뜻입니다.
공자의 이러한 사상은 춘추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대로 적는다'라는 춘추의 편찬 방침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부도덕한 이들의 행위를 세상에 널리 알려 뭇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포폄(포상과 폄하. 포는 칭찬, 폄은 비방을 뜻함)을 보이지 않는 서술의 기준으로 삼은 셈이지요.
따라서 춘추에서는 은연중 감상의 윤리가 강조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춘추는 마치 사실과 도덕의 결합체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춘추의 서술방식을 우리는 흔히 춘추필법이라고 하는데, 춘추필법은 중국의 송나라 때 성리학을 주도한 주희를 통해 크게 강조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명분론이 횡행하던 조선 후기에 맹위를 떨쳤습니다.
고대의 중국에서는 정부의 관료가 역사 기록과 역사서 편찬을 전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관직 중에는 그 일을 전담하는 자리가 있어, 그 자리를 맡아 일하는 사람을 흔히 사관이라고 했습니다. 사관은 전문직이었습니다. 춘추가 일종의 역사서이긴 하지만, 전문적인 역사서는 못 됩니다. 그래서 춘추의 편찬자라고 하는 공자를 일반적인 역사가로 분류하지는 않습니다.
사기와 정통역사서
전문적인 역사가, 곧 사관이 쓴 최초의 역사서는 사기입니다. 한나라 무제 때 사마천이라는 사람이 아버지 사마담의 작업을 이어받아 태초부터 한나라 당시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지요. 사기는 당시로서는 정말 특이한 형태의 역사서였습니다. 본기...표...서...세가...열전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본기는 제왕의 사적을 시대 순으로 기록한 곳이며, 표는 제왕과 제추의 출생...즉위...중요 활동 등을 요약 기재한 곳입니다. 서에는 예법...형법...음악...경제 등 시대별 사회상을 적어놓았고, 세가에는 제후에 관한 사항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열전은 신하와 백성 중 특기할 만한 사람들에 대해 적어놓은 부분입니다. 이러한 체제의 역사 서술방식을 우리는 보통 기전체라고 부릅니다. 본기와 열전으로 구성되었다는 뜻이지요. 풍부한 정보를 수록한 사기의 체제...구성과 분향은 이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하는 역사서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기전체는 정치 중심의 역사의식을 철저하게 반영한 서술방식입니다. 맨 앞을 차지하는 본기라는 단어에서도 짐작되듯이, 제왕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그들의 활동을 전하는 일에 모든 촉각을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신하들의 각종 행위를 기록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제왕과 신하, 권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각종 정치적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이 역사가의 본분이요 역사서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역사서란 일종의 정치 자료...기록인 셈이지요.
서기 8년에 한나라가 멸망하고, 왕망의 신나라를 거쳐서, 서기 25년에는 광무제가 한나라를 재건했는데, 이를 이전의 한나라와 구분해 보통 후한이라고 부릅니다. 후한의 반고가 아버지 반표를 이어 전한의 역사를 사기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한서입니다. 한서는 본기...표...지...열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후한서는 남북조시대의 송나라 사람 범엽(范曄)이 지었고, 후한이 멸망한 뒤 전개된 삼국시대의 역사서 삼국지는 진나라의 진수라는 사람이 편찬했습니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한 왕조가 멸망하고 나면 왕조가 앞선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을 당연시했는데, 이처럼 국가가 주도해 만든 공식 역사서를 보통 정사라고 합니다. 정사는 모두 기전체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기전체는 사안별로 매우 자세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편찬방식입니다. 그러나 일목요연하게 읽어가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체제와 분량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완책이 나오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송나라 때의 사마광은 읽기 편한 역사서를 만들고자 했는데, 그 결과 바로 자치통감입니다. 역사상 중요한 사건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이른바 편년체의 역사서이지요. '자치통감'이라는 이름에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는 역사서'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군자의 정치적 교훈서인 셈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치통감은 교훈적이고 실용적인 성격을 매우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교훈적이기에 다분히 도적 지향적입니다. 그러면서도 편찬자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원칙을 세우고 있습니다. 즉, 사실 지향적이지요. 앞서 말한 춘추필법의 영향일 것입니다.
동양에서의 역사 개념
지금까지의 거론한 역사서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징은 이들 본뜬 후대의 동양 역사서들에서도 똑같이 발견되는 성격입니다. 이제 그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조와 지배자 중심의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입니다. 춘추, 사기, 자치통감 모두 위정자를 대상으로 했거나 그들을 위해 만든 책입니다.
또 한서, 후한서, 삼국지, 수서, 당서 등에서 보듯이 한 왕조를 단위로 삼아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정치사 중심의 역사 인식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동양의 역사서에서 평민에 관한 부분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둘째, 술이부작 정신이 서술의 원칙이었다는 점입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듣고 본 대로)기술하기는 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글을 쓰는데 자기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객관적 서술을 지향하는 태도는 역사서를 지금 당장 이용하기보다 후손들이 과거의 사실을 정확히 알고 평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 역사가가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고 싶으면 사론을 이용했는데. 사론은 역사가의 생각을 논술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평론과 유사합니다.
셋째, 유교적 역사관이 지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동양의 역사서는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강합니다. 그리고 역사서를 통해 포폄하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그리고 역사서를 통해 포폄하려는 의도가 강합니다. 이른바 춘추필법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따라서 동양의 역사서는 그 자체로 교육용 도덕 교과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신 사건의 인과관계를 밝히려는 노력은 크지 않아서 서양의 역사개념과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리스의 역사서
서양에서는 헤로도투스(Herodotus)의 히스토리아(Historia)가 가장 이른 시기의 역사서입니다. 히스토리아는 서기전 492~480년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Persia) 전쟁의 역사를 다루었는데,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그리스(Greece) 소도시연맹이 페르시아 대제국을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인지를 구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책입니다.
이를 위해 헤로도투스는 전쟁이 벌어진 곳의 지형과 풍물...기후 등을 직접 조사했습니다. 따라서 그 책에는 페르시아...이집트...그리스,...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한 경험이 다양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분히 실증적인 역사 서술태도이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문학적 설화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도 적지 않아서 시대적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서양 사람들은 헤로도투스를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공적을 높이 기린답니다.
헤로도투스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한 사람으로는 투키디데스(Tukidides)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역사를 알면 정치에 많은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에서 히스토리아를 집필했는데, 이 책은 투키디데스 자신이 경험한 펠로폰네소스(Peloponnesus) 전쟁사를 주로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서기전 431~404년에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스파르타(Sparta)와 아테네(Athene)가 벌인 전쟁입니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화와 전설을 배격하고 합리적으로 각종 자료를 검토한 것입니다. 따라서 투키디데스는 역사 사실을 초자연적인 사실과 구별하려고 한 최초의 과학적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경제적인 면을 도외시함으로써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로마(Rome) 제국의 폴리비우스(Polybius)는 로마가 융성하게 된 원인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역사를 교훈의 원천으로 인식해 역사 지식을 인간 행위의 귀감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폴리비우스를 서양 역사에 실용적 의미를 부여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문헌비판학과 근대사학
서양 역사에서는 서기 4세기 말 로마 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이후를 중세로 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서양의 중세는 봉건제와 농노제를 그 특징으로 합니다. 그리고 사회...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기독교가 유럽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을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역사관도 기독교의 교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학이 신학에 예속되었다고나 할까요?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기준을 둔 학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학문이 신에 기준을 둔 신학의 영향 하에 있었으니 학문 발전에 적지 않은 제약이 가해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은 조금씩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관련된 각종 사건과 믿음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사료를 수비하고 정리하는 일들이 한쪽에선 꾸준히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있는 근대적 의미의 역사학은 19세기에 독일의 랑케(Ranke: 1795~1886)와 그 제자들이 주장하고 추구하던 것입니다. 랑케는 사료를 경시한 18세기의 계몽주의 역사가들을 비판하면서 사료를 비판적으로 분석...연구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방법론은 17세기의 사료 수집...정리 경향을 이어받은 것으로서, 콩트(Conte: 1798~1857)의 실증주의로부터 영향 받은 바가 크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역사서 이외에도 회고록...일기...편지...외교문서 등을 사료로 채택함으로써 사료 부족의 골을 메우려 했습니다.
그는 역사학의 방법론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말을 남겼는데, 그중 "그것이 본래 있는 그대로"와 "사실의 엄격한 제시는 역사 서술의 최고 법률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끊임임없이 연구해 63권의 저작을 남긴 랑케를 서양 사람들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서양에서의 역사 개념
위에서 설명한 것을 다시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서양의 역사학은 동양과 달리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구명하고 해석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는 점입니다.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 그리고 폴리비우스에게서 확인되듯이 그들의 역사서 편찬은 개인의 호기심이 학문적으로 확대된 형태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서는 다분히 분석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동양처럼 당시의 정확한 기록을 남기는 기능을 소홀히 했고, 그것이 오늘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둘째, 문헌비판적 역사학이 발달했다는 점입니다. 종말론에 입각한 중세의 기독교사관은 종래의 순환가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했지만, 개인적 탐구열에 입각한 자유로운 분석...연구의 기회를 제한했습니다. 그러나 14세기경에 이르러 사람들의 생각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면서 인간의 자유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 동안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했던 각종 서적들을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활기를 띠게 됩니다. 한 대 그 활기에 대한 반작용이 유행을 타기도 했지만, 결국 19세기 이후에는 과학적 서술을 역사학의 원칙으로 삼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러한 문헌비판학이 역사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2) 역사의 주인
역사학의 대상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그 문화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역사학은 인문학의 한 분야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역사학자의 연구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것들은 제외하기 때문입니다. 개인 문제에 한정된 활동도 역시 제외하는 게 보통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학은 인간의 활동 가운데 사회적인 활동만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사회적 활동이 모두 역사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고파는 일도 사회적 활동이고, 옆집에 사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활동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역사가의 서술 범위에 들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 그럴까요? 역사가들은 사회의 변화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활동 중에서도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활동에 주목하는 것이 바로 역사학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의 실체를 '사실'이라고 합니다. 역사학은 이 사실을 밝히는 일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밝혀진 사실이 모두 역사서에 수록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가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 가운데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의미있고 가치있는 사실만을 뽑아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을 우리는 특별히 '사실'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사회적 가치가 역사학자의 서술기준이 되는 셈이지요, 이는 아마도 '역사=교훈'이라고 하는 관념때문일 것입니다.
역사의 주체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동...서양 모두 "역사는 정치 기록"이라는 인식이 전통적 역사관을 지배해왔습니다. 이는 기존의 역사가 지배픙 중심의 기록을 일관해온 사실에서 입증됩니다. 다만, 동양의 경우 유교 경전의 영향으로 백성 혹은 백성의 뜻을 중시했고, 심지어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와 같이 주권재민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백성이 통치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은 조세...군역...요역의 대상이요, 왕을 위시한 지배층의 생활 근거였으므로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다수 혹은 집단으로서의 백성은 중시되었어도 개별화된 백성은 홀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해온 사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영웅사관입니다. 영웅주의 또는 영웅중심사관이라고도 불리는 영웅사관은 어떤 한 사람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고, 그에 맞추어 해당 시대를 설명합니다. 영웅을 시대를 대표하는 일종의 상표로 인식한다고나 할까요? 예를 들자면,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와 같은 용어가 그에 해당됩니다. 우리 나날의 경우에는 광개토왕 시대, 세종대왕 시대라는 용어를 지적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나아가서는 조선왕조를 일컫는 이조라는 명칭도 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이 아주 특별한 공적을 세우거나 특출한 지도력을 발휘했을 때 그를 부각시킬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 사람도 사회 구성원의 하나이며, 사회의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에서 개인의 한계를 분명히 전제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도와 조직 그리고 인력 등의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영웅사관은 이 점을 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웅사관에는 한 사람이 시대 혹은 사건에 대한 공적을 독차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전통에서 승리하고 난 뒤, 지휘관 한 사람만 훈장을 받는 등 각종 포상을 독차지하고 나머지 병사들의 공적이 무시된다면 이처럼 불공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웅사관 하에서는 이런 일이 공공연히 일어납니다. 살수대첩-을지문덕, 귀주대첩-강감찬, 한산대첩-이순신 등의 역사 인식은 그 대표적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시대 상황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들을 한 사람의 능력으로만 설명하게 되면,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거기에는 거대한 물줄기를 연상시티는 그 무엇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개인이 아닙니다.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흐름이 있는 것입니다.
민중사관
영웅사관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면서 주목을 받은 것이 이른바 민중사관입니다.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것입니다. 역사 인식의 폭을 넓혔다는 점에서 민중사관은 영웅사관에 비해 한 단계 발전한 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민중'의 범위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민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누구를 민주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보총 민중과 피지배층을 같은 뜻으로 이해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민중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피지배층의 범위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피지배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주류는 일당 하층민입니다. 그리고 서기에 중류층이 포함될 수 있겠지요. 따라서 민주이란 보통 하층민과 중류층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말뜻만으로 본다면 대부분의 상류층 역시 지배자는 아니기에 민중과 유리될 수 없습니다. 크게 보아서는 지배층도 민중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오늘날 자신을 민중과 무관한 존재로 보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비록 분명하게 분류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역사상 누구를 민중이라 할 수 있을지 관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중심에는 일반 서민들이 자리하고 잇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제 그들 서민층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그들의 역할을 강조해야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을수록 한 자기 심각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합니다.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동...서양 모두 정치사 중심의 역사 지속되는 동안 피지배층에 대한 관심이 전무 하다시피 했고, 그에 따라 민중에 관한 문헌자료가 빈곤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그들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인데 그나마도 쉽지는 않습니다.
설령 자료가 충분하다 해도 역사의 주체를 항시 민중으로 보는 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인간 사회의 변화에 어느 정도나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점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 가까워질수록 민중의 역할은 강조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들의 덩치는 점점 작아집니다. 왜 그럴까요?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민중은 물론 소중한 존재이지만, 역사상 그들을 무한정 강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 종말론의 비밀-필연과 우연
기독교의 종말론
20세기가 끝날 무렵이 되니까 요즘 인류의 종말에 관한 주장 등이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제기되고 거의 모든 종교에는 종말에고나한 교리가 잇고 그것이 가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줍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종말에 가까우면 세상은 악의 세력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착한 사람들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악마의 세력들이 그리스도가 이끄는 천사의 군대와 결전을 벌이게 되고, 결국 악마의 세력은 영원히 소멸하게 된다고 합니다. 선과 악이 충돌해 선이 영원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죠, 이러한 줄거리는 이미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예정되어 있으므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를 믿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기본적으로 역사의 진행 방향을 필연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결정해놓은 각본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사는 필연으로 점철되어온 셈입니다. 삼국 통일은 신라가 이룰 수밖에 없었고, 임진왜란도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겠지요,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과 남북 분단 등은 이미 예정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전쟁의 시발점을 살펴보면 아주 작은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마치 우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의 마차가 우연히 그 길을 지나던 시민에게 발각됨으로써 루이 16세의 망명이 실패했고, 그것이 결국 일개 장교에 불과하던 나폴레옹의 황제등극으로 까지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우연한 사건의 파급효과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물론 이를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필연과 우연을 가늠케 하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무심코 들은 아이의 방 침대 밑에서 수개월이 지난 아들의 빵점자리 시험지를 발견한 뒤 아내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원인이 1년 전에 끊은 담배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갔는데 가게 앞에서 그 동안 소식을 모르던 동창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근처 술집에서 친구와 술을 거나하게 마신 남자는 집으로 돌아오던 중 무단횡단 하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 많은 대목에 우연이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수개월이나 지난 시험지가 왜 하필 그때 거기 떨어져 있었는지, 그날따라 아내의 신경은 왜 곤두서 있었는지, 어쩌자고 그 차는 시내에서 과속을 했는지 등등..........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남자의 죽음을 숙명으로 여기고 앞서의 과정을 빈틈없이 짜인 프로그램의 일부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필연 - 역사의 법칙성
만약 필연을 믿는다면, 역사의 진행 방향에 대해 일종의 법칙을 적용하려는 시도도 가증합니다. 맹자라는 책에는 맹자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5백 년마다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왕조의 흥망성쇠가 반복된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전통 깊은 사관을 우리는 흔히 순환사관이라고 부릅니다. 단순 반복으로 보느냐, 아니면 나선형으로 진행되는 순환으로 보느냐에 따라 순환사관을 다시 둘로 나누기도 하지만, 역사행로를 생명체와 동질시 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겠습니다.
순환사관은 신국으로의 단선 진행이라는 시각에서 역사를 이해한 기독교 사관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한 예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직접 목격한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류 역사는 6시대로 구분되는데, (1)아담부터 노아의 홍수까지 (2)노아의 홍수부터 아브라함가지 (3)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4) 다윗부터 바빌론 유수까지 (5) 바빌론 유수부터 그리스도 탄생까지 (6)그리스도 탄생부터 최후 심판까지라고 합니다.
그때에 들어와서 서양에서는 진보주의사관이 등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역사는 고대에서 중세로 퇴보했지만 다시 근대로 진보했으며 앞으로는 계속 진보만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학에서 진보...퇴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정신활동과 관련될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철학...문학...예술분야에서 진보라는 용어는 매우 어색하다고 하겠습니다.
진보사관을 수정...발전시킨 것이 발전사관입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발전한다고 보는 입장인데, 헤겔과 마르크스의 이론이 대표적입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란 자유가 확대되는 과정이었습니다. 고대에는 군주 한 사람만 자유로웠던 반면, 중세에는 귀족들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그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모든 사람이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기준은 다분히 추상적이어서 명확한 실체를 제시하기가 어렵고, 구분점도 모호합니다. 보다 분명한 기준은 없을까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마르크스는 경제라는 기준을 찾아냈습니다. 특히 생산수단에 기준을 두어 (1) 원시공산체사회 (2) 노예제사회 (3) 봉건 농노제사회 (4) 자본주의사회 (5) 공산주의사회 등으로 도식화했습니다. 여기에서 (2) 노예제사회는 고대, (3) 봉건 농노제사회는 중세, (4) 자본주의사회는 근대와 각각 대응한다고 하는데, 이 같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유물사관이라고 부릅니다. 경제를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파악했다는 것이지요.
마르크스의 이론은 인류 역사의 핵심을 정확하게 찾아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양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한국...중국 등의 동양 역사에 적용한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국의 고대는 그리스...로마의 경제체제와는 달라서 노예가 기본적인 생산을 담당하지 않았으며, 중세 역시 봉건영주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의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동양의 고대를 '아시아적 생산양식' 그리고 중세를 '중앙집권적 봉건사회'라고 명명함으로써 동...서양간의 차이를 봉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서양 중심으로 역사를 이해해 서양은 전형, 한국들의 동양은 변형이라는 자기비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주목되는 것은 역사의 미래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결국 지구상의 인구 중 절반을 사회주의 체제 속으로 인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적어도 논리의 일관성만큼은 인정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역사학은 미래를 예견하게 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학은 다만 과거에 비추어 미래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또한 시기구분이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과도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4) 국사를 왜 배우는가?
국사란 자기 나라의 역사입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걸어온 길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분노, 성공과 좌절, 진취와 시련 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기쁨과 만족, 성공과 진취만 골라내어 가슴 뿌듯해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슬픔과 분노, 좌절과 시련 등을 은폐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과장시켜 분한 마음을 갖게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손으로 해를 가리는 일과 같으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을 되새김으로써 보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어야 합니다. 미래는 항상 불투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길을 되돌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 속에는 언제나 충분한 사고와 냉철한 판단으로 자신의 갈 길을 선택해야 나주에 후회가 없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을 강요당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선택 말입니다. 자신의 결정을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최선이 무엇인지를 정화가게 판단해내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국사는 역사의 범위를 자신의 문제로 한정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같습니다. 내 얼굴에 흉터가 있다고 해서 나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도 거울의 흉터 부분을 가린다고 해서 얼굴의 흉터가 정확히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양이고 얼마나 깊은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흉터가 왜 생겼는지를 곰곰이 따져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분석을 충실히 한 사람은 앞으로 다시는 똑같은 상처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흉터마저 잘 치료해 깨끗한 얼굴, 밝은 얼굴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국사는 차가운 머리로 배워야 합니다. 역사는 사실의 기초 위에 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자신의 희망대로 그릴 수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그림을 그려야 현대의 내 위치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냉철한 판단력과 분석력을 은연중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확한 좌표를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단답형 사고는 금물입니다. 이완용 때문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식의 생각은 당시의 많은 문제들을 호도할 수 있는 부정확한 판단입니다. 당시 조선의 정치...경제...사회상 그리고 일본 내부의 정치....경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문제에 답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국사를 배우는 데에는 따듯한 가슴도 필요합니다. 국사는 남의 나라 역사가 아니라 우리 역사입니다. 내 얘기인 것입니다. 내 얘기를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하게 말할 줄도 알아야만 하지만, 때론 자랑스러워하고 때론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착심을 함께 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국사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모진 풍파를 많이 겪는 우리의 어머니는 그 사이에 한족 눈과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밖에 나갈라치면 가끔은 남의 눈이 신경에 거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속이고 남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머니의 초상화를 만들 때, 두 눈을 예쁘게 그려 넣고, 두 다리를 멋있게 그려 놓거나 긴 치마로 다리를 가리는 방법은 옳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것은 또한 역경을 이겨온 어머니의 삶 자체에 대한 왜곡...부정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자식들은 모름지기 이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머니가 남다른 여건 속에서 얼마나 꿋꿋하게 살아오셨는지를 자랑하고, 남다른 자식 사랑을 자랑하며, 음식 솜씨를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짙은 화장으로 화사하게 멋을 낸 다른 사람의 어머니와 비교할 때, 눈이 성하지 못하고 다리가 성하지 못한 우리 어머니가 최선을 다해 자식들을 남부럽잖은 어엿한 성인으로 키워온 사실을 자못 반복하지 않는 법입니다. 자부심이 깊은 사람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관련해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나라'의 본질과 실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국사를 공부해야 것입니다.
근대 이전의 '나라'는 그 자제로 왕조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하늘아래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고,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나라'는 개인의 소유화된 영역, 개인의 노예화된 백성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에 개인의 소유로 인정될 수 있는 '나라'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코 존재해서도 안 됩니다. 단지 시간적...공간적...부문적으로 제한을 받는 '정권'이 있을 뿐입니다. 정권은 국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소수가 다수를 대표하여 일할 때 비로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원칙입니다. 그런 점에 볼 때, 이제 우리에게는 '통치'하는 사람도, '통치 받는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정권에 대한 사랑을 나라 사랑과 혼동하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애국심 곧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더 멀리 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국사 공부를 통해 여러분의 진정한 애국심이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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