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불상의 이모저모
강희정(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원)
우리나라 전 역사를 통틀어 불교가 가장 융성하고 발달하였던 때는 고려시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석굴암을 꼽는 사람은 많아도 고려시대의 상상을 떠올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면 고려시대에 불교미술이 융성하지 못했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흔히 ‘고려’하면 연상되는 청자나 각종 공예품을 기억한다면, 고려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치지하였던 고려 불교미술의 미적 수준이 낮았다고 단정할 아무런 근거는 없다. 불상만 놓고 본다면, 통일신라에 비하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뒤지지 않을 고려가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통일신라 중대의 불교미술을 한국미술사의 고전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상화된 인체 묘사, 자신감 넘치는 역동적인 선은 물론 후대까지 미술 창작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고려의 불상이나 보살상도 통일신라와는 다른 시대정신과 미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세련된 미적 완결성을 추구하던 통일신라기의 불교미술이 고려로 넘어오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였을까? 무엇보다도 서민적이고 한층 대형화된 ‘거대한 불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거대한 불상의 시대
여느 예술과 마찬가지로 불교미술도 제작 당시의 시회적 분위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고려 불상에도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성과 새로운 기운을 반영하려는 진취성이 뒤섞여 있는데, 대체로 13세기를 전후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려 전기 불상의 특징은 대형화 추세이다. 높이 18미터의 관촉사석 조보살상은 이러한 흐름을 웅변해 준다. 흔히 은진미륵으로 알려진 이 거대한 석상은 규모나 돌덩어리처럼 단순한 형체가 영국의 스톤헨지를 연상시킨다. 높은 원통형의 보관 위에 풍경이 달린 천개를 덮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고 얼굴이나 신체에도 이전 시기의 조각에서 볼 수 있던 굴곡과 양감이 표현되지 않았다.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기괴한 얼굴 묘사와 그에 걸맞게 두툼한 손 모습이 두드러진다. 미륵으로 알려져 있지만 길다란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일 가능성이 높다.
보통 몇 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을 찾기가 쉽지 않으므로 이런 종류의 불상을 만들 때에는 일반적으로 다리, 몸통, 상반신과 얼굴 등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조각을 한 뒤 맞춰 세운다. 그런데 은진미륵은 어떻게 세웠을까? 이 궁금증을 풀어 줄 만한 이야기가 관촉사에 전해 내려온다.
은진미륵을 만든 스님이 고민에 빠졌다.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세운담! 깜빡 잠이 든 스님의 꿈에 너댓 살 먹은 어린아이들이 자기들 키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진흙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 만들어 볕에 말렸다. “요녀석들이 저걸 어떻게 하나 보자”며 스님이 멀찍이서 지켜보는데, 발과 다리 부분을 세운 어린아이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모래를 잔뜩 날라오기 시작하였다.
먼저 똑바로 세운 다리 주위를 모래로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모래 위에 물을 뿌려 단단하게 다지더니 비스듬한 모래 사면위로 몸통 부분을 끌고 올라가 다리 위에 올려 세웠다. 같은 방식으로 머리를 세우더니 스님을 돌아보고 씩 웃는 게 아닌가. 그 미소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스님의 옷에 난데없이 물에 젖은 모래가 붙어 있었다. 그제서야 스님은 “아, 우둔한 나를 깨우치려고 관음보살님이 몸을 바꾸어 나타나셨던 게로구나”하고는 꿈에서 배운대로 은진미륵을 무사히 세울 수 있었다.
이 설화는 은진미륵도 선사시대의 고인돌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슷한 방식으로 세워졌음을 시사한다. 18미터에 이르는 거상을 제대로 세우기 위하여 모래나 푸석푸석한 흙을 동원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은진미륵과 같은 불상은 고려 전 시기에 걸쳐 조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 대조사의 석조보살입상, 예산 삽교리의 석조보살입상, 당진 안국사지의 석조삼존불입상 등이 좋은 예이다. 이들 조각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양감을 잃어 비석이나 장승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다. 크기는 관촉사불상보다 훨씬 작은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몸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한 뒤 차례로 올려 세우는 방법은 같았을 것이다.
바위에 새긴 불상
거대한 석상의 또 다른 예로 마애불이 있다. 커다란 바위나 암벽에 낮은 부조나 선각으로 불상을 조각한 마애불은 3에서 4미터에 이르는 자연 암벽을 몸체로 사용하고 머리 부분은 별도의 돌로 만들어 올린 혼합형과 머리까지 암벽에 새긴 완전한 마애불의 두 종류가 있다.
안동 이천동의 마애불은 앞의 방식을 따랐다. 신체는 두루뭉실 엉성하게 조각하고 머리만 원각으로 따로 새겨 얹은 형상인데, 낮은 보관과 천개를 올린 것이 흥미롭다. 보살상이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당대의 실제 복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여성화 경향이 더욱 현저해진 고려의 보살상은 특히 오대, 복송, 원으로 이어지는 중국왕실의 지체 높은 여인네들의 장신구나 머리 꾸밈에 많은 힌트를 얻은 듯하다. 물론 이는 고려만의 일은 아니다. 중국 내부나 일본에 이르기까지 인도적 모델을 찾기 어려웠던 시기에 폭넓게 사용되었던 방법 중 하나였다.
고려시대 석불 중 두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개이다. 고인돌의 뚜껑돌처럼 생긴 천개는 말 그대로 ‘하늘 뚜껑’인 셈인데 기능에 대한 정설은 없다. 보통 노천에 세워진 석불이나 마애불에 직접적으로 눈비가 닿는 것을 막기 위해 모자처럼 불상머리 위에 얹은 것으로 생각된다. 천개는 모양을 내서 곱게 다듬기도 했으나 납작한 판석을 그대로 올려놓은 것도 있다. 또 은진미륵처럼 불상 조성 당시에 미리 천개를 고려하여 만든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전 시대의 조각에 천개만을 따로 만들어 얹은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쪽이든 천개는 법당이 아닌 야외에 세워진 고려석불의 중요한 특징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충주 월악산 덕주사의 마애불, 천원 삼대리의 마애불은 높이가 각각 13미터와 7미터에 이르는 대불이다. 역시 얼굴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만 얕은 부조를 하고 나머지는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덕주사에는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이 자리에서 회한의 눈물을 뿌렸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규모와 수법은 통일신라의 것과 거리가 있어 실제 절의 창건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이들 거대한 석조불상은 통일신라기에 비해 조형적 완성도가 떨어진다. 이는 조각가의 솜씨가 통일신라기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지만 미의식보다는 불상의 규모를 더욱 중시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통일신라기와 달리 중앙의 미의식이 지방의 미술을 좌우할 만큼 파급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지방민의 종교적 열의가 자유롭게 분출된 결과물이다.
불상의 대형화 움직임은 신라하대인 9세기경부터 전국 각지에서 태동하여 고려 건국과 더불어 한층 강화되었다. 충분히 중앙집권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앙정부로는 새로 일으켜 세운 불교국가의 위상과 저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지방세력가는 부처님의 힘을 빌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방편에서, 경쟁적으로 더 큰 불상을 세웠던 것이다. 부처의 위신을 빌어 힘을 키우려는 세력가나, 대중들에게 부처의 위엄을 보여 주려는 교단의 바람이 영험 있어 보이는 거대한 석불상을 양산하였던 것이다.
지방색 짙은 불상
전기 불상의 대형화는 석불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철조여래좌상은 하남시 하사창동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높이 2.8미터 규모로 철불 가운데에서 작은 크기는 아니다. 신체 비례와 자세, 옷자락 처리는 석굴암 본존불을 모방하였다.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굴암 본존불은 철불이건 석불이건 간에 불상의 재료에 상관없이 이미 신라 하대부터 다른 불상의 모델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철을 불상의 재료로 사용한 것은 8세기경으로 신라하대에 들어 널리 보급되었는데, 10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철불을 안면과 가슴에 양감은 있되 탄력이 줄어 역동적인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 눈도 길고 가늘게 치켜 올라간 반면 콧날이 평평하고 입이 지나치게 작아 통일신라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이전 시기 불상의 자비로운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거칠고 근엄한 인상이다.
별로 크기 않으나 한송사의 석조보살좌상은 고려전기 불상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흔치 않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조각수법도 특이하다. 높이 원통형의 보관과 장신구, 눈썹 밑을 깊이 파서 눈두덩이 와의 경계를 분명히 한 점, 작고 합죽한 입매 등은 분명 신라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신라 보살상의 당당한 가슴에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미와 달리 이 보살상은 어깨가 좁고 가파르며 몸매는 통통하고 둥글게 처리되어 있다. 그래서 같은 시기인 중국 오대의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보살상이 강릉 신복사지와 오대산 월정사에 전래되고 있어, 강원도 일대의 특수한 지역양상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고려시대는 특히 석불의 경우, 지방마다 고유색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앞에서 언급한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석불도 지방유파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고려석불이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 점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조각이 대체로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석불은 청동불이나 철불과 달리 특별한 기술이나 용광로와 같은 시설이 따로 필요치 않으며 비용도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훨씬 제작이 쉬웠을 것이다.
각지에서 다양한 성격의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진 것은 불상을 조성하도록 시주하고 발원한 사람들의 계층이 매우 다양해졌음을 말해 준다.
이국적인 불상
고려전기의 불교미술이 정치, 문화적 원심력으로 인해 지방색이 강하면서도 크고 소박한 불상을 양산한 반면, 중앙의 불교미술 흐름은 중·후기로 넘어가면서 세련된 고려청자에 못지않은 우아하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대표적이다. 14세기 작품으로 여겨지는 이 보살상은 갸름한 얼굴과 가늘고 긴 팔다리, 여윈 듯이 보이는 몸통의 굴곡이 인상적이다. 두 팔을 휘감아 내린 천의나 영락 장식까지 착착 휘감기는 선적인 조형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 불교조각의 귀족적 미의식을 엿보게 해준다. 비록 유물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개성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중심지에서는 이와 유사한 모습의 조각이 다양하게 제작되었을 것이다.
중기 이후 불상의 특징을 보여 주는 조각 가운데 충주의 철불2구와 호림박물관 소장의 금동대세지보살좌상이 있다. 충주 철불은 기하학적인 경향이 극도로 표현되어 추상성이 강조된 것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험상궂은 얼굴을 하였다. 2구의 형상이 매우 유사하여 같은 조불소(불상제작소)에서 조성되었던듯하다. 현재는 별다른 장식도 없고 금칠도 하지 않은 상태지만, 워낙 생김새가 험상궂어 밀교 의식을 위한 불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금동대세지보살좌상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예가 많지 않은 세지보살상인데다가 미적 특징 또한 티벳 불상과 매우 유사하여 과연 우리나라 작품인지 한 번쯤 의심하게 하는 상이다. 확실하지 않으나 금강산에서 출토되었다는 꼬리표가 오래 전부터 붙어 있다. 이 때문에 몽고족의 금강산숭배와 조심스럽게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들이 숭배한 금강산에 자기네가 만든 불상을 모셔 놓고 예배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온몸을 메운 과도한 영락과 목걸이 장식, 다부진 몸매와 경책(경전을 새긴 작은 두루마리나 그것을 담은 작은 상자)이 얹혀진 연꽃가지를 손에 든 정확한 도상의 표현에서 이국적인 라마미술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색다른 조각이다. 얼굴 생김새와 인체비례까지도 전형적인 티벳 불상과 상당히 닮아 있다.
같은 계열의 조각이지만 이보다는 고려적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예가 국립전주박물관 소장의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이다. 이들 두 상으로 미루어 몽고 미술이 고려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지만 고려화도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 가지 마음, 만 가지 불상
이렇듯 수적으로 결코 적지 않고 다양한 면모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불상에 대한 세간의 인지도가 낮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제작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상이 많지 않다는 데서 기인한다. 미술품의 제작 연대를 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미적 취향이나 감수성, 나아가 시대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고려불상에는 막연히 ‘고려’라고만 적혀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특정 시기를 못 박아 말할 수 없는 까닭에 그저 ‘고려’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불상의 외형적 아름다움이 통일신라기의 불상에 비하여 뒤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정신성이 약화되었다거나 예술성이 쇠퇴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문헌이나 명문에 대해 좀 더 정치한 고찰이 뒤따른다면 고려불상의 역사는 좀 더 체계화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성격 자체가 고려불상의 특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려 전 시기에 걸쳐 어느 하나의 잣대로 균일하게 평가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모습의 불상들이 제작되었다. 고려 불상에 대해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을 미적 가치판단의 잣대로 삼아 측량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갖가지 이유로 불상을 조성했다.
불교의 대중화만큼 불상 조성의 대중화가 이전보다 훨씬 폭넓고 뿌리 깊게 이루어진 셈이다. 세련되고 우아한 귀족적 미의식이 엿보이는 불상과 투박하고 조잡한 서민적인 불상으로 대별되겠지만, 이 역시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고려불상의 특징을 굳이 꼽는다면, 대중들에 의한 거대한 불상과 일관된 특징을 추출해 내기 어려운 각양각색의 불상에서 나타나는 ‘대형화와 다양화’라고 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