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연극마을 연바람 소극장 8월 3일 ~ 12일까지 평일/7시 30분 주말,휴일 오후 5시 총9회공연 ☎ : 062 - 232 - 2446
무대는 허름한 사설 라디오 방송국 안. 사람이 사는 듯 간단한 가재도구가 놓여있다. 낡은 방송 시스템 일부와 난로와 침대가 놓여 있다. 벽에는 멈춰있는 시계와 2000년을 표시한 달력이 걸려있다. 그리고 나머지 몇 개.
관객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오면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이 흐르고 있다. 잠시 후 효섭 무대로 나온다. 그는 전기 스탠드를 켜고 방송을 시작한다.
효섭 : 낡고 상처 입은 오늘은 오늘로 족합니다. 우리들에겐 내일이 있습니다. 희망의 소리, 여기는 라디오 파라다이스! 여기는 라디오 파라다이스입니다. (음악 흐른다) 여러분의 아픈 사연 응어리 그늘진 이야기 늘 저희들이 함께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언제라도 연락 주세요. 직접 찾아오시면 더욱 환영합니다. (음악 흐른다) 잘 들으셨는지요? 서정과 비장의 하모니! 차이코프스키이었습니다. 1812년 겨울, 황량한 러시아 벌판에 쓰러진 수많은 시체들 사이로 지금 우리의 이웃, 다 아시죠? 쥐들이 있었습니다. 쥐! 그들은 우리들의 친구입니다. 우리들의 거울에 비친 상처죠. 여기 우리들이 있습니다. 음악이 있습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슬퍼하지 마십시오. 힘들어 마세요. 우리 곁에 당신이 있고 당신 곁에 음악이 있습니다. 어제의 역사는 하늘로 사라지는 고무풍선이 아니라 오늘의 빵 인 것을 우리가 알고 또 알고 되새기면 우리는 존재합니다. 우리는 건재합니다. 우리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음악 들려 드리겠습니다. 희망과 환희의 역설! 어어부 밴드!
어어부의 음악이 흐르면서 객석은 어두워지고 무대 밝아온다. 효섭과 정하 사랑의 눈빛을 머금고 춤을 추다가 무대의 앞부분에 누워. 긴 사이. 정하 : 바닥이 차요 효섭 : 곧 따뜻해지겠지 정하 : 그렇지만 춥지는 않아요 파란 바다 속에 빠져 있는것 같아요. 몽롱하게... 몸 속 마디마디에 투명한 물들이 흐르는게 느껴져요. 꿈처럼. 들어보세요? 여보. 효섭 : 들려. 해초들 사이를 미끌미끌 흐르는 유연한 물결. 부슬부슬 피어오르는 말간 물방울들.... 그리고 그 물방울이 퐁퐁 터지며 당신의 몸 사이사이에 응어리지며 달라붙는 것들도 보여. 정하 : 행복해요. 보고 느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없어도 좋아요 (사이) 손 좀 만져줘요.
효섭, 천천히 정하의 손을 잡아준다.
효섭 : 사랑해! 아무도 없다는 거, 우리 둘만 있다는 거, 그 공간, 그 깊이, 이해하겠어? (사이) 당신은 바다, 나는 그 위를 넘실대는 파도, 고요한 만남, 사랑해. 정하 : 와이키키 해변의 윈드서핑 수은등 아래 레슬링 경기장에서 뒹글 뒹글 양정모가 누구한테 이겨서 금메달을 땄죠? 몽고의 그 청춘! (웃음) 효섭 : 이기진 못했지. 정하 : 그거나 그거. 져도 금메달, 이겨도 눈물! 갑자기 짜장면이 생각나요. 양파와 양배추가 짜장에 버무려진 기름진 그 면발.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효섭 : 당신만을 정하 : 저도요. 눈을 감으세요. 이대로 영원히.
사이, 잠시 후 희정, 씩씩거리며 창고에서 나오며.
희정 :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쥐새끼 밤낮 제 집 드나들 듯 하니... 효섭 : 또 뭐가 없어졌어요? 희정 : 없어지고 뭐고가 아니다. 아예 싸그리 털렸다. 도저히 여기서는 못 살겠다. 아예 아침에 이사를 가던지 해야지 효섭 : 가긴 여기서 또 어디로 가요? 여기가 마지막 이예요. 여기가 끝이에요. 희정 : 답답해서 그런다. 효섭 : 곧 끝날거야요. 희정 : 언제? 언제? 효섭 : 모르죠. 난들 언제 끝인지 알면 이러구 있겠어요? 정하 : (혼자말로) 이 비가 언제 그칠까요.
희정, 효섭에게 물 양동이를 건내주며
희정 : 받아라. 효섭 : 이게 단가요? 희정 : 어제보다 한 뼘은 더 차 올랐다. 꾸역꾸역 올라온다. 정하 : 어떻하죠, 어머니? 여보! 여기도 곧 물에 잠기겠네요? 효섭 : 하! (사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이따 아래쪽 배수관을 뚫어 놓으면 좀 나아질 거야. 희정 : 남은 건 이게 다다. 다행히 오늘내일은 견디겠지만 이게 도대체 몇 번째냐? 번번히 남 좋은 일만 하구... 효섭 : 대책을 마련해야겠어요. 근본적인. 희정 : 그놈들을 모조리 잡아 박살을 내던지, 아니면 아예 창문이고 문이구 뭐고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아 버리던가 하던지. 정하 : 숨쉴 구멍도 없이요? 효섭 : 설마 우리가 숨쉴 구멍이 없다고 어떻게 되겠어? 희정 : 그러게 말이다. 효섭 : 놀라지 말아 여보? 정하 : 아뇨, 겁나지 않아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단지 뱃속의 아이가 걱정될 뿐 이예요.
희정, 정하의 배를 만지며
희정 : 놀랬니? 내가 주책이다. 그만한 일 가지고 소란을 피워. 이 애미가 미안하구나. 정하 :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머니. 희정 : 아무렇지도 않기는, 안색이 안좋다. 그대로 있어라 움직이지 말고
정하의 배에개 귀를 대고
희정 : 아가야! 불쌍한 것! 기운을 내야지! 운동을 하자! 운동을! 헛! 헛! 헛! 꿈적도 않네. 아주 깊이 잠이 들었구나. 정하 : 힘드시죠? 어머니. 희정 : 아니다. 오히려 나보다야 네가 더 맘 고생이다. 내가 괜한 얘기를 해서 네 몸이 덧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정하 : 아니예요, 어머니 그렇지 않아도 벅찬 살림. 저까지 이런 몸이라 뵐 낯이 없습니다. 희정 : 큰일날 소리를 하는구나. 너는 우리 집에 중심이다. 우리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우리 가족의 희망이다. 다시는 그런 소리 입 밖에도 내지 마라. 네가 건강해야 아이가 건강한 거고 그래야 우리 가족이 건강한 거다. 정하 :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희정 : 산후조리보다 중요한게 산전 조리지. 지금이 제일 중요할 땐데... 그나저나 얘들은 어디서 뭘하냐? 효섭 : 곧 돌아들 오겠죠 뭐 희정 : 멀리들 나갔나 보구나. 효섭 : 강둑 으로 나갔으니 무슨 소식이 있겠죠. 희정 : 거기 뭐 먹을게 있다고 그렇게들 멀리 나갔누. 온통 쥐똥 투성이에 썩은 냄새나는 것들만 버려졌을 텐데. 아! 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이토록 하루 하루가 힘들지는 않았을 거다 최소한 썩은 콩나물에 신 김치라도 떨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잘 들어라. 너도 곧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란 곧 근엄하되 책임질 줄 아는 사람만이 지니는 호칭이다. 아버지와 그 주변에는 언제나 풍성한 수확과 넉넉한 인심이 있지. 그립다!
희정, 다시 창고의 물 푸러 나간다.
정하 : 여보, 아버님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알고 싶어요. 효섭 : 아버지? 정하 : 예,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계시던 방에서는 먹 냄새가 났어요. 아무도 그 방 근처에서는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았어요. 아버진 책을 무척 좋아하셨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은 아버지가 하얀 목장갑을 끼고... 망치소리가 집안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는게..... 알고 싶어요, 당신의 아버님을. 효섭 : 아버지? 정하 : 예, 듣고 싶어요? 효섭 : 글쎄? ... 기억이 별로 없어. 정하 : 그분도 당신처럼 자상했나요? 효섭 : 내가 자상한가? 정하 : 그분도 어머님처럼 강인했나요? 효섭 : 어머니가 강인하셔? 정하 : 그분도 저처럼 힘드셨나요? 효섭 : 당신 지금 힘들어? 정하 : 아니요, 조금요. 효섭 :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단지, 정하 : 우리 아이에게 할아버지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효섭 : 그게 가능할까? 정하 : 그렇겠죠. 효섭 : 기억이 않나.
사이, 효섭 방송을 한다.
효섭 : 기억을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누군가 부릅니다. 안개! (사이) 기억나는 게 있기는 해. 어느 날 밤인가 겨울인데, 흰 눈이 오는 날인데 몇 달 만인가 아버지가 오셨지. 양손에 한 마리씩 회색 토끼를 들고 어머니는 맨발로 아버지를 마중 나갔고, 그때는 모두가 어려울 때 였지, 아버지는 곧장 우리들에게 오셨어, 양어깨에는 하얀 눈을 훈장처럼 달고서, 하이칼라 머리에서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천막 안에서 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을 한참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토끼를 우리 형제들에게 한 마리씩 나누어주고... 나와 내 동생들은 생전처음 대하는 토끼를 가지고 밤새 뛰어 놀고... 정하 : 왜 하필이면 토끼를 가지고 오셨어요? 효섭 : 글쎄, 그때는 전쟁이 막 끝났을 때지 사람들이 강가에 몰려들고 판자로 얼기설기 대충 집을 짓고 살 때야, 모두가 힘들 때였어 강둑 여기저기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할 일없이 몰려다니고... 아이들은 해가 지면 무서워서 어머니 품속에서 꼼짝도 않고 웅크리고들 있었지 정하 : 지금 처럼요? 효섭 : 지금보다야 나았지. 먹을 것이 없었지만 희망이 있었지. 희망이. 정하 : 지금 처럼요? 효섭 : 지금? 당신은 희망이 있어? (사이) 암튼 아버지는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우리 형제들의 놀이감으로 토끼를 구해다 주셨지 다른 아버지들하고는 달랐어. 아버지는 달랐어. 정하 : 그 토끼는 어떻게 됐어요? 효섭 : 먹었어 정하 : 먹다니요? 효섭 : 아침에 일어나니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풍겼어. 어딘가 하고 천막을 나서니 백사장 앞에 어머니가 널따란 양푼 대야에다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썰어 넣고... 오랜만에 들어오신 아버님을 위하여... 정하 : 끔찍해요, 그만하세요 효섭 : 끔찍하다니? 우린 양푼 대야 속의 그 토끼가 너무나 맛있게 보였어. 털을 다 뽑지도 않았지만 둥둥 떠있는 기름 속에 파묻힌 그 고기 덩어리. 그 날 아버지는 사라졌어.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야. (사이) 아버지가 사라지고 난 뒤 어머니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강변의 피난민 촌을 다 뒤졌지만 어디에도 아버지는 없었어. 며칠 후에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 오셨지. 그때 우리 가족은 놀랐어. 갑자기 어머니의 키가 30센티미터는 줄어들었지. 정하 : (놀란다) 효섭 : 오그라들었어. 며칠 사이에 한 인간이 작아진 거야. 그때부터 우리들은 토끼는 쳐다보지도 않았지. 아무리 굶주려도 정하 : 졸려요, 나는 왜 누워 있으면 잠이 오지요? 효섭 : 그럼 좀 자.
효섭, 정하의 배를 쓰다듬어 준다. 무언가 느낌이 오는지.
효섭 : 어머니! 어머니! (웃음) 이 소리 좀 들어보세요. 이녁석이 놀아요! 축구를 하나봐요. 이쪽 저쪽에서 뻥뻥 차는데요... 희정 : 그래? 정말이구나 정말 공 소리가 들린다. (사이) 그런데 이건 축구공 소리가 아닌데? 농구공 소리 같구나 잘 들어봐라 농구공 소리가 맞지? 효섭 : 축구공이에요. 희정 : 농구공이다. 효섭 : 축구공이라니까요.
함께 웃음, 희정, 효섭과 함께 정하의 배에 귀를 대어 본다.
희정 : 얘 안되겠다. 누워라 곧 나올 것 같구나 효섭 : 벌써요? 아직 7개월도 안됐을 텐데요? 희정 : 모르는 소리, 아이는 언제고 시도 때도 없이 나올 수 있는 거다. 시간을 너무 믿지마라. 이미 꽉 찼다. 효섭 : 차다니요? 희정 : 바보 같은 놈, 때가 된 거야. 열 달이 넘었어. 봐라. 뭐하니? 효섭 : 열 달이 넘었다구? 희정 : 아이가 나와서 처음 대하는 세상이니 만큼 따뜻하게, 너무 뜨거워서도 안되지 화끈한 것은 태어난 후에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가 있으니까 효섭 : 열 달이 넘었다구...
이때 제문과 지아 들어온다. 그들은 시무룩 지친 모습이다.
지아 : 다녀왔습니다. 제문 : 저희들 왔습니다. 너무 늦었지요. 효섭 : 고생! 희정 : 뭘 좀 구했냐? 지아 : 아뇨. 희정 : 하나도? 지아 : 사방팔방 다 뒤졌는데, 어떡하지 오빠? 제문 : 씨가 말랐어요. 혹시나 해서 여기저기 강둑을 싹 훑었는데 쭉정이 하나 없이... 죄송해요, 어머니. 미안해 형! 효섭 :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야? 제문 : 말이 되는 소리라니? 말이 안되면? 효섭 : 가족의 도리라는게 있어! 어떠한 경우에도! 내 말 이해해? 지아 : 응 이해해 효섭 : 계속 들어봐! 각자의 역할과 사명을 망각할 때 그 집단은 붕괴돼! 알지? 내말? 서서히 소리 없이 무너진단 말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란 말야. 제문 : 지금 무슨 소리야? 효섭 : 다시 말해, 너희는 우리 가족을 대표해서 밖으로 나갔어. 우리는 너희들을 믿기 때문에 너희 둘을 믿고, 나는 방송을 하고, 어머니는 쥐 떼들과 악전고투를 해가며 창고의 물을 퍼내고 네 형수는 아픈 배를 부여잡고 우리 가족의 대를 이으려고 하루종일 자기 자신과 씨름을 하며 싸웠단 말야. 그런데 너희들은 뭐야? 강둑에 나가 고즈넉이 산책을 즐기다 빈손으로! 이제야 빈손으로 나타나 에로틱한 표정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잖아? 안 그래요, 어머니? 희정 : 네 형수가 몸이 무겁다. 정하 : 오셨어요? 시장들 하시죠. 잠시만 계세요. 곧 준비할께요? 제문 : 아니예요, 형수님 지아 : 오느라고 왔는데... 제문 : 죄송해요, 형수님!
제문 소리내어 운다.
제문 : 하나밖에 없는 삼촌이 되서... 정하 : 그만 하세요. 제문 : 아니예요, 전, 저 같은 놈은 죽어야 해요. 지아 : 오빠! 정하 : 도련님!
제문 밖으로 나간다. 가족들 그를 부른다.
정하 : 너무해요 당신. 효섭 : 놔둬! 당신! 왜 쟤를 감싸는 거지? 정하 : 감싸다니요? 효섭 : 사사건건 왜 쟤 편만 드냐구? 정하 : 편을 들다뇨? 누가 누구 편을 들어요? 효섭 : 허허허허 나 원 참! 관둡시다. 정하 : 관 두자니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 이예요? 효섬 : 관 두자니까! 희정 : 그만들 해라! 효섭 : 죄송합니다.
다시 등장하는 제문과 지아. 지성을 데리고 들어온다. 지성 멍하니 제문을 따라와서 인형처럼 맹하니.
제문 : 짠 지아 : 짜자잔! 희정 : 어디서 이 귀한걸... 제문 : 어머니 제가 누굽니까? 정하 : 어머 도련님 (뽀뽀 해준다.) 고생하셨어요. 제문 : 고생은요 뭘 지아 : 자랑 좀 해봐! 작은오빠! 제문 : 자랑은 쑥스럽게... 희정 : 사내가 쑥스러워 하기는 어여 말해봐라. 강둑에서 구했니? 대문 : 아뇨. 하수구 아래쪽에서요. 효섭 : 그래 제문 : 예에 한참을 돌아다녔는데도 아무것도 없고 귓전에는 찬바람만 쌩쌩 부는게 에이 오늘도 허탕이구나 하고 돌아서는데 지아 : 그때 짠짠 제문 : 글쎄 발 아래가 뭔가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아 또 재수 없게 덫에 걸렸나 생각하고 얘한테 좀 치워 달랬더니... 이 자식이 머리통을 땅에 팍 파묻고 내 발을 곽 붙잡고 있는 거 아니겠어요. 처음엔 숨을 쉬지 않길래 아주 갔는 줄 알았어요. 근데 자세히 보니까 아직 숨이 붙어 있더라구요. 그래 일단 자세를 잡고 인공호흡으로 생명을 불어넣었죠. 지아 : 오빠가 죽은 걸 살렸어요. 제문 : 죽은 것과 산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아니요? 조금 마르긴 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죠? 지아 : 어젯밤 꿈이 맞긴 맞았어요. 효섭 : 꿈? 지아 : 동굴에서 내가 잠을 자는데 자꾸 아랫도리가 이상한거야. 희정 : 아랫도리? 지아 : 그래서 눈을 살며시 뜨고 요렇게 보니까 커다란 뱀이 내치마 속으로 들어 올려구 하는거야. 그래 무서워서 도망을 가는데 발은 떨어지지 않구, 한 발자국도! 근데 큰오빠가 어디서 나타났어. 그래서 오빠한테 살려달라고 하니까 큰오빠가 내 손을 잡고 한참을 도망쳐서 동굴을 빠져나왔어. 이젠 안심이다 해서 돌아보니까 큰오빠 얼굴이 둘째 오빠 얼굴로 바뀌더니 다시 아까 그 뱀의 얼굴로 바뀌어서... 정하 : 아가씨 그건 태몽 같은데요... 아가씨도 곧 어머니가 되네요. 축하드려요. 희경 : 겹경사구나. 수고들 했다. 축하한다 막내야! 너도 이제 여자 구실을 하는구나. 제문 : 근데 조금 빠삭한게 맛이 없어 보이죠? 희정 : 빠삭하기는? 내가 보기엔 제법 실하다. 그리구 맛이란 건 먹어 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다. 지아 : 눈이 좀 풀렸어 엄마? 제문 : 풀리다니. 다들 그래 임마. 봐? 지아 : 하긴 희정 : 이쪽이 조금 상했다. 괜찮을까? 제문 : 아무렴요. 다른데는 이상이 없어요. 효섭 : 괜찮겠어? 여보 정하 : 저야 뭐 상관없어요. 그리고 정 꺼림직 하시면 눈이야 빼내면 되죠. 제가 할까요?
정하가 뾰족한 어떤 도구를 들고 지성의 곁으로 다가설 때 빗소리 들리며 무대 어두워진다.
잠시 후 무대에 다시 조명 들어오면 효섭과 제문 두 사람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지아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뜨개질을 한다.
제문 : 그래서? 효섭 :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제문 : 그러니까 지금 형수님의 아기가 내 애란 말 아니야? 효섭 : 난 그렇게는 말 안했어. 제문 : 결국 그 말이 그 말 아냐? 안 그러니? (지아는 잠자코 있다) 형수의 아이가 형의 애가 아니라는 말은 결국을 내 자식이란 말 아닌가? 효섭 : 그게 왜 그 말이야? 난 단지 네 형수와 잠을 잔게 7개월이 채 안 됐다는 말만했어. 제문 : 그럼 형수가 마리아라도 된단 말야? 남자와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임신을 했다! 그게 말이 돼? 형수가 그렇게 깨끗한 여잔가? 지아 : 아니 제문 : 그렇다면 이 집에 형하고 나 말고 또 다른 남자가 있었나? 지아 : 아니 제문 : 아니지. 그럼 내 아기란 말이야? 효섭 : 나야 모르지 제문 : 모르다니. 형이 모르면 누가 알아? 어쩜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할 수가 있어? 형이 돼 가지고. 지아 : 아! 짜증나! 가만 듣다보니까. 오빠들 정말 너무너무 한심한 사람들이야. 벌써 몇 시간째 같은 얘기를 가지고 콩 나와라. 팥 나와라.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인가? 우리 가족의 화제가 고작 그따위 얘기 거리야? 예전에 오빠들이 나누던 그 고상한 고담준론은 다 어디 가고. 실망했어. 실망해서 눈물이 다 나오려구 그래. 한 지붕아래 살면 같이 사는 사람 생각도 좀 해줘야 하는거 야냐? 효섭 : 미안하다. 널 힘들게 하려구 했던게 아닌데... 제문 : 이해해라. 우리도 오죽 답답하면 이럴까. 지아 : 좋아. 백번 양보해서 오빠들 말이 다 옳다해도 그 얘기가 이렇게까지 시간을 끌만한 화젠가? 잘 들어봐. 가만 들어보니까 문제는 7개월이냐 10개월이냐의 얘긴데. 그건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효섭 : 둘 중의 하나? 지아 : 그래. 신문 퍼즐 같은. 아주 쉽고 간단한 얘기지. 큰오빠가 날짜를 잘못 계산했거나 새 언니의 아기가 시간을 착각해서 출산 준비를 서두르거나. 내 말이 틀린가? 제문 : 아냐. 일리가 있어. 가능한 일이야. 지아 : 쉽게 생각해봐 큰오빠! 중요한 건 이 사건의 본질이야. 오빠들은 사건의 본질은 놓치고 껍데기만 붙들고 머리를 쥐어짜고 있단 말야.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아기의 아빠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그 아이의 가족들은 누구냐지. 결국 우리들 아냐? 효섭 : 그래도 최소한 아가 아빠의 성은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자아 : 잘 생각해봐 오빠. (사이) 오빠의 성과 작은 오빠의 성을. 다 같은 아버지의 성씨 아닌가?
효섭 자신의 머리를 친다. 제문과 지아를 포용하며 너털웃음들. 이때 희정 창고에서 양동이를 들고 무대에 나오며.
희정 : 얘기가 정리가 좀 됐냐? 효섭 : 예. 어머니. 제문 : 네 어머니. 넌 우리의 보배다. 얘도 너 닮아서 영특할 거야. 희정 : 너희들이 이렇게 곁에 있으니 든든하다. 맘을 넓게 가져라. 망망대해에서도 굳건하게. 너희들은 장부다. 기둥이 되야해! 아직 멀었니? 정하 : 다 되가요 어머니. 시장하시죠? 조금만 참으세요. 행복해요 여보. 오랜만에 집에 웃음소리가 들리니까 보기 좋네요 도련님. 여보! 음악 하나 내 보내지요? 밝고 따뜻한 걸로요. 효섭 : 오케이 지아 : 아! 다 됐다. 끝. 언니? 정하 : 이게 뭐예요? 지아 : 선물! 아기 발에 맞을까 모르겠어요. 정하 : 너무 예쁘다! 이거 뜨고 계셨어요? 아가씨! 너무 고마워요. 지아 : 맘에 들어요? 정하 : 맘에 들고 말고가 어딨어요. 효섭. 방송한다. 정하와 지아 식탁을 차린다. 효섭 : 여기는 희망의 소리. 라디오 파라다이스. 신청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태어날 아이들의 숙명을 위하여! 그리고 몸조리는 이 땅의 아버지들을 위하여 들려드리겠습니다. 슈베르트의 지그지그지그그
슈베르튼지 브라암슨지 음악 들려온다.
정하 : 어머니? 희정 : 그래 들자구나. 정하 : 여보! 도련님! 제문 : 냄새 죽이는데! 효섭 : 끝내준다. 희정 : 오늘은 특별한 날이고 하니, 아가야 네가 기도를 하자. 정하 : 아이, 어머님이 하세요, 전 소질이 없어요. 희정 : 어디 그게 소질 가지고 하는 거니? 정성이지, 정성이 깃들면 다 이뤄지고 응답이 오기 마련이다. 제문 : 그러세요 형수님. 지아 : 그러세요 언니, 조금 짧게요. 정하 : 아니예요. 오늘은 아기씨가 아이를 밴걸 알게 된 의미 있는 날이잖아요. 아가씨께서도 각오가 새로울 테니까 오늘 기도는 아가씨가 하세요. 희정 : 그래 막내야. 지아 : 아이 나 그거 못해! 희정 : 음식 다 식는다! 지아 : 기도하시겠습니다. 오늘도 저희 가족을 돌보아 주시고 이렇듯 귀한 양식을 내리어 주신 당신이여 하루가 한 달처럼 벌판을 달려갑니다. 열망하는 자 그 시간이 아까울 것이고 남루한 생에 빠진 사람, 그 세월, 버거운 청춘일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 꼭지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납니다. 붙잡아 주세요. 버릴 것 버리고 가질 것 가지는 그대를 소망하나니 갈망하나니 우리의 생명 줄 잡아주시고 생명이 있는 한 생명을 바라보는 혜안을 던져주세요. 모든 것 바라나이다. 모두 : 모든 것 간절히 바라나이다. 희정 : 무척 어려운 기도를 하는구나. 자 들자. 효섭 : 여보! 정하 : 네.
모두 음식을 먹는다. 소리내지 않고 감격적으로. 이때 정하는 흐느낀다.
희정 : 왜 그러냐 아가? 효섭 : 여보! 정하 : 너무 맛있어요. 희정 : 얘야. 마저 먹고 울어라. 정하 : 네 어머님
사이, 다시들 음식을 먹는다.
제문 : 아이, 형수님 이게 뭐예요? 제가 이거 싫어하는 거 잘 알잖아요. 정하 : 어? 제가 일부로 도련님 그릇엔 뺐는데... 그릇이 바뀌었네요. 죄송해요. 지아 : 오빠는 참 식성도 까탈스러워. 남들 다 좋아하는 걸. 제문 : 내가 손톱 발톱 싫어하는 거 다 알면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 제문 문을 열어준다. 남루한 모습의 은경 지성의 신발을 들고 조심스레 들어온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연다.
은경 : 저어! 여기가 방송국 맞나요? 제문 : 네 그런데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은경 : 아이가, 아이가 없어졌어요.
무대에 테크노 음악이 흐르면서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 정하의 방송소리 들려온다.
정하 : 잃어버린 아이를 찾습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습니다. 아이를 찾습니다. 어제 밤 강둑에서 실종된 어린아이를 찾습니다. 푸른색 골덴 바지에 검은 폴라티를 입은 마른 키에 맨발의 사내아이를 찾습니다. 아이를 보시거나 보호하신 분은 저희 방송국으로 연락 바랍니다. 다시 한번말씀 드리겠습니다. 잃어버린 사내아이를 찾습니다.
무대에 다시 조명이 들어오면 은경과 희정 함께 앉아있다. 은경 스프 그릇을 앞에 놓고, 그 옆에 들고 온 운동화 한 켤래. 지아는 제문의 머리를 다듬어 준다. 희정 : 그럼. 아무 흔적도 없구 달랑 이 운동화만 하수구 옆에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그 말이세요? 은경 : 네. 희정 :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네. 그럼 자제 분이 어딜 갔을까요? 이런 일이 가끔 있었나요? 은경 : 아뇨. 이렇게 말 없이 사라진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희정 : 신발을 벗어놓은 걸 보면 혹시 수영을 하려고 한 게 아닐까요? 정하 : 설마 그 흙탕물에서 수영을 할까요? 희정 : 너 모르는 소리다.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하고 만다. 아드님이 고집이 센 편이지요? 은경 : 네. 조금 그런 축이예요. 희정 : 거 봐라. 지아 : 무슨 머리가 그렇게 뻣뻣해? 돼지 털 같애. 희정 : 뒷머리를 바싹 쳐라. 남자는 깔끔해야돼. 이 난리도 다 사람들이 청결치 못해 생긴거다. 매사에 소홀함이 있어선 안돼! 지아 : 알았어.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 은경 : 그런데 그 애는 수영을 못해요. 물이라면 질색을 하죠. 작년에 그 애 형이 물에 빠져 죽은 뒤로는.... 정하 : 어머 어쩜! 제문 : 쯔쯔쯧 혹시 형 생각이 나서 자살을 한 건 아닐까요? 은경 : 그 앤 먹고 자는 거 밖에 몰라요. 자살을 생각 할 만큼 영리한 애는 아니예요. 정하 : 그럼 도대체 어딜 갔을까요? 희정 : 그렇다면 뭐 별 일 있겠어요. 곧 나타나겠네요. 은경 : 고소하네요. 희정 : 드시기에 괜찮죠? 방금 만든 건데 뭐 양념도 없고 그냥 따뜻한 맛으로 드세요. 워낙 허기지신 것 같아서. 은경 : 이 은혜 정말 고맙습니다. 희정 : 아이구 이깟걸 가지고 무슨 은혜라뇨. 어여 드시구 한 그릇 더 하세요. 은경 : 아니예요. 아니예요. 이젠 됐습니다. 내가 이렇게 앉아 있을 때가 아닌데... 여기로 연락들이 오긴 오나요? 희정 : 걱정 말아요. 지금이라도 누가 봤다는 사람이 나타날테니. 은경 : 고소하네요. 희정 : 아가야! 정하 : 네 어머니 제문 : 아야! 살살 좀 해! 따갑잖아. 희정 : 짜증 좀 내지 마라. 복 달아난다. 제문 : 아프니까 그렇죠 지아 : 아이 관둬! 오빠 혼자 해! 희정 : 뭐하니 손님 앞에서 들. 죄송합니다. 애들이 워낙 지들끼리만 자라와서. 은경 : 아니예요. 전 신경쓰지 마시고 일들 보세요.
효섭 창고에서 내려온다.
정하 : 어떻게 되가요? 여보 효섭 : 응. 거의 다 돼가. 둘째야 올라와서 좀 거들어 줘야겠다. 제문 : 지금? 효섭 : 잠깐이면 돼. 제문 : 나 지금 이발하고 있는데. 효섭 : 금방이면 돼. 뭐해? 제문 : 나 참! 효섭 : 삽하고 연장 들고! 제문 : 알았어. 금방 올께. 그대로 놔둬. 지아 : 물이 맨 날 차 오르는데 왜 기를 쓰고 막으려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막아도 내일이면 또 올라올텐데... 희정 : 빈틈없이 꼭꼭 막아라. 제문 : 알았어요 엄마.
효섭과 제문 창고로 올라간다.
희정 : 지들리 가봐야 어딜 가겠어요? 어디 갈 데도 없을 거예요. 엄마 품 벗어 나봐야 그때 부모 그리운 거 느끼죠. 그냥 깜깜한데서 별 빛도 없이 까만 밖에서 몇 시간씩 떨면서 기다리다 저기 멀리서 그냥 이따만한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콰과광 하면서 눈앞으로 확 나타나는데 가만 가만 살펴보니까 그게 바로 어머닌 거죠. 아무 걱정 말아요. 그냥 눈물 질금질금 흘리면서 엄마 엄마. 다 똑같아요. 애들은.. 편하게 좀 앉아 계세요. 잠은 좀 주무셨나요? 은경 : 아 네! 고소하네요. 이제야 배가 좀 차네요. 제가 주책도 없이.... 희정 : 아니예요. 무슨 말씀을. 아가야! 다 있을 때 나눠 입고 나눠 먹는 거죠. 천금만금 있으면 뭘 하나요? 사람이 왜 사람이겠어요? 은경 : 전 무식해서...... 희정 : 사랑은 왜 사랑인진 아세요? 은경 : 사랑이나 사람이나 비슷비슷하네요. 희정 : 예. 바로 그거예요. 사람이 사랑이고 사랑이 사람이다 그 말씀이죠. 뭐 가지고 다니시는 종교는 없나요? 은경 : 네. 전 아직까지는 뭐.......... 희정 : 신념이 없으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모르죠. 갈 길을 모느니 우왕좌왕 언제나 제자리에서 결국 미쳐버리는 거예요. 죽은 거나 마찬가지죠. 나무가 뿌리가 없어봐요. 어떻게 되겠어요? 뿌리와 믿음! 신념! 은경 : 전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오늘 너무 고마웠습니다. 희정 : 아니 가시게요? 은경 : 네. 아무래도 방송을 못 들었나봐요. 제가 나가서 찾아 보는게 빠를 것 같네요. 저 그럼! 오늘 너무 폐만 끼쳤습니다. 희정 : 살펴 가세요. 정하 : 만일, 저, 아드님이 여기로 오시면 뭐라고.... 희정 : 어디로 가셨다구 얘길 할까요? 은경 : 방송을 들었으면 이리로 오겠죠? 희정 : 오다마다요. 지금 밖도 어두운데 괜히 나가셨다가 길이라도 엇갈리면... 정하 : 그러세요. 이왕 기다리신 거 조금 더 참고 계셔보세요. 여기가 불편하시면... 은경 : 불편하다니요. 오히려 저 때문에... 지아 : 지금쯤 집에 와 있는거 아닐까? 정하 : 설마요. 희정 : 자 자 이쪽으로 와요. 나도 오랜만에 말벗이 생겨서 심심찮던 참인데. 젊은 사람들 하구는 아무래도.... 왜 이리 춥냐? 아가야! 불 좀 살펴봐라. 따뜻하게! 정하 : 네. 어머님. 은경 : 저건 책이 아닌가요? 희정 : 네 맞아요. 책. 왜요? 뭐 잘못됐나요? 은경 : 아깝지 않으세요? 희정 : 아깝다니요. 책 이란게 한 그루 마른 나무만 못한 시대예요. 지금은 실용적이지 못하거든요. 그나마 땔나무가 없는데 책이라도 남아있으니 다행이지 뭐요. 다 소용없어요. 다! (사이) 그나저나 아주머니? 혼자시우? 은경 : 네. 희정 : 쯧쯧쯧! 외로울 땐 어떻게 때우세요? 은경 : 때우다니요. 뭘요? 희정 : 아이 다 아시면서 (작은 목소리로) 밤에? 밤에요? 은경 : 아이 이 나이에 뭘. 희정 : 나이라뇨? 그게 아니예요. 여자는 나이하고 상관이 없어요. 저는 요즘도 불컥 불컥 솟아나요. 새벽녘이면 별별 남성이 다 그리워진답니다. 정하 : 아가씨 이번엔 뭐 짜세요? 지아 : 우리 아기꺼요. 정하 : 아버지는 누구예요? 지아 : 아이, 언니는 뭘 그런걸 물어봐요. 다 알면서요.
정하, 지아 웃는다.
은경 : 시누 올케 사이가 보기 좋네요. 정이 넘치네요. 희정 : 네. 그거 하나는 남들이 봐도 흉하지 않네요. 은경 : 몇 달짼가요? 며느님은요? 희정 : 오늘내일 해요. 은경 : 좋으시겠어요. 희정 : 좋다 마다요 은경 : 고추 같은데요. 희정 : 아니,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은경 : 배 모양이 사내 같은데요. 희정 : 배 모양이 그게 표시가 되나요? 은경 : 그럼요. 다 아들 딸 형태가 있죠. 정 못 미더우면 며느님을 한 번 불러보세요. 오른쪽으로 돌아보면 계집아이. 왼쪽으로 돌아보면 분명 사내아이죠. 희정 : 예. 아가야. 정하 : 예. 어머니 희정 : 정말 왼쪽으로 돌아보네요. 예 아가야! 축하한다. 축하해. 정하 : 뭘요? 희정 : 저 아주머니 말씀이 네가 아들을 가졌다는구나. 정하 : 정말로 그게 사실인가요?
희정 즐거워하며 이번엔 지아를 불러본다.
희정 : 막내야? 축하한다. 축하해. 은경 : 아니, 막내 따님도? 희정 : 예. 은경 : 저 색시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지아 : 그건 왜요? 은경 : 77년 뱀띠? 맞나요? 지아 : 엄마! 정하 : 어쩜! 은경 : 저 색시 이리 좀 앉아 보실래요? 지아 : 엄마! 무서워. 희정 : 뭐하니? 가서 앉지. 은경 : 배를 좀 올려 볼까요? 지아 : 엄마! 희정 : 뭐하니? 은경 : 숨을 편안하게 들이마시고 뱉으면서 하나 둘 이렇게 밀어봐요. 지아 : 하나 둘 . 아이, 간지러워요. 은경 : 쉿! 희정 : 아들이 확실 한가요? 은경 : 예. 아들이네요. 좋으시겠어요? 희정 : 어쩜 그렇게 용하세요. 원래 점을 보셨어요? 은경 : 동서남북 춘하추동이 있듯이 숨의 울림에도 다 음양이 있죠. 원래 저희 시어머니께서..... 희정 : 잘 오셨어요. 잘 오셨어요 저희 집에서 몇 일 푹 묵으시면서 은경 : 말씀은 고맙지만 그래도 애가 오면 집으로 가 봐 야죠 희정 : 애미 싫다고 집 나간 놈 찾으면 뭐해요. 그런 자식은 없느니만 못해요. 돌아오면 또 뭐하나요 제발로 또 나갈텐데요. 아예 이참에 여기서 우리랑 삽시다 이모! 정하 : 어머니 제가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감히 몇 말씀 올려도 되나요? 희정 : 그럼 되고 말고. 그래 무슨 얘기냐? 정하 : 여기 아주머니 말씀대로 이 아이가 아들이라도 좋고 또 설령 아들이 아니라도 이 아이를 낳으면 이 아주머니께 양자로 드리는 게 어떨까 해서요. 희정 : 양자? 정하 : 예. 저희야 아직 젊으니까 앞으로 아이를 얼마든지 가질 수도 있고 또 아가씨께서도 배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으니까 저희 가족의 대를 잇는 것은 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희정 : 네 남편하고는 상의를 해봤니? 정하 : 아뇨 아직 그이는 모르고 있어요. 먼지 그이하고 상의해보고 말을 꺼내는 것이 도리지만 그이도 충분히 이해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희정 : 하긴 네 남편이라면 충분히 승낙하고도 남지. 막내는 어떻게 생각하니? 네 새 언니 얘기를? 지아 : 저도 그 점은 언니 생각하고 같아요. 문제는 여기계신 아주머니 말씀대로 우리가 아들을 낳으면 몰라도 딸일 경우엔 아주머니가 선뜻 우리 애기를 맡아 주실지가.... 희정 : 그 점은 염려없다. 분명 아들이 맞지요? 은경 : 네. 하늘에 맹세코 백 프로 아들입니다. 지아 : 그래도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틀리 수도 있잖아. 그럼 어떡하지? 정하 : 그러게요. 어머님. 희정 : 얘들아! 너희들은 이 분이 원숭이라고 생각 하냐? 믿어라. 사람이 사람을 믿어야지 누굴 믿냐. 신뢰가 없다면 그건 짐승이지. 안 그래요. 이모? 은경 : 그런데 지금 하시는 얘기들이 무슨 말인지 전 도무지 감이 안 오네요. 희정 : 이모! 이럴 땐 그냥 잠자코 계시는게 상책 이예요. 아, 에미는 감격했다. 너희들이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돌아가신 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대견해 하실까? 너희가 내 딸이고 며느리인게 자랑스럽다. 정하 : 아니에요. 어머니. 오히려 저희들이 감사하지요. 어머님까지 선뜻 승낙해 주시니 어쩔 바를 모르겠네요. 그런데 어머님, 아버님이 돌아가셨나요? 그이 말로는...그냥 소리 없이 집을 나가셨다고. 희정 : 마음 속에서 지우면 죽은 거지 뭐 안 그래요? 고모?
제문 창고에서 내려온다.
희정 : 마무리가 다 됐니? 제문 : 네 당분간은 별탈 없을 거예요. 형! 뭐해. 빨리 안 내려오고. 효섭 : (소리만) 알았어. 제문 : 어! 춥다. 막내야! 어라! 이 아줌마 아직 여기 계시네. 은경 : 전 그만 일어나 봐야겠어요. 지아 : 엄마 일어 나신데. 희정 : 아니, 어딜 가시려구? 은경 : 아무래도 애가 여기로 올 것 같지가 않네요? 희정 : 아니, 얘들이 그렇게 까지 얘길 했는데, 아직 무슨 말인지 접수가 안됐수? 은경 : 그럼, 전 이만, 희정 : 다른 사람이 얘기할 땐 들어 주는 게 예의 아닌가? 말을 다 들어봐야 되는 거 아닌가요?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서 아이를 찾아요? 설령 늦은 시간이 아니래도 그렇지. 없는 아이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나요? 또 남의 성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아주머니 사정이 오죽 딱해 보였으면 애들이 자기 피붙이를 선뜻 내놓겠다는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그만 일어나신 다구요? 적반하장이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년! 애들아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한다. 오래 살아봐야 인생의 참 맛을 알지! 은경 : 그런 뜻이 아니라 전 제 아이만 찾으면 되요. 희정 : 방금 고소하다고 낼름 낼름 쳐먹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아이를 찾아. 자식 잡아먹은 년이 뻔뻔하기도 하지.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이기를 거부하려고 아주 발발발발 날라가는구나. 얘들아! 뭐하니? 이년 쳐죽이지 않고? 정하 : 도련님! 연장 준비하세요. 지아 : 오빠! 제문 : 벌써요? 희정 : 통통하니 아까 고놈보다는 연하겠다. 피를 쫙 빼라.
은경, 문으로 도망간다. 효섭 나타나며
효섭 : 가시게요? 정하 : 꽉 잡으세요. 지아 : 잠깐 잠깐만. 언니 오빠들! 엄마! 사람들이 나중에, 나중에 생각들이 트여서 우리를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 가족들의 얘길 노래하거나 글로 쓰게 될지도 모르잖아. 희정 : 글쎄다. 제문 : 근데 사람들이 그렇게 한가할까? 먹구 살기도 바쁠 텐데 그 따위 짓을 할려고? 정하 : 아니예요. 도련님. 그땐 지금하곤 전혀 세상이 딴 판일지도 몰라요. 지아 : 그래요 언니. 언니 말대로 전혀 딴 세상이 바뀌어 질거야. 그럼, 더 나아가서 우리 얘길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지도 모르고 희정 : 영화? 정하 : 그러게요. 어머님! 지아 :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언니. 그 동안은 오빠나 저희들이 너무 무작정 일에만 매달린거 같아요. 일 이라는게 좀 즐기면서 해야 능률도 오르고 참여하는 사람이 보람도 느끼는거 잖아요? 제문 : 보람과 능률? 효섭 : 영화나 연극? 지아 : 훗날 영화나 연극이 막이 오르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우리의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하다 못해 개 돼지를 잡을 때도 다 잡는 순서와 방법이 있는데 우리가 하는 일이 그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우리가 그런 동물농장 개 백정들하고 같을 수는 없는 거 아냐? 무언가 달라야지. 더군다나 스크린과 무대 위에서 우리 모습 그대로를 보인다는 건 빨가벗은 우리 몸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야. 우리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해야하지? 쪽팔리지도 않아요. 언니? 안 그래. 오빠들? 우리 식구들이 그렇게 바보들인가? 우리가 그렇게 어리석은 결론을 위해 오늘 소중한 하루를 사는 사람들인가? 제문 : 우리가 영화배우? 효섭 : 우리가 연극배우? 정하 : 저도 나올까요? 아가씨! 지아 : 물론이죠. 언니. 정하 : 이 아기 신발도요? 지아 : 그럴껄요. 아마. 제문 : 동감입니다. 어머니! 저도 그 말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맞아요. 어머니. 저희는 매번 격식도 없이 그냥그냥 준비가 너무 없었다고 생각되요, 이럴 때 아버지 얘길 꺼내서 죄송합니다만 아버지가 어머니와 싸움을 할 때도 다 순서가 있었어요. 생각해봐 형? 아버지가 먼저 주먹으로 어머니 얼굴을 서너 차례 갈긴 다음 효섭 : 얼굴에서 코피가 주르륵! 주르륵! 제문 : 머리채를 끄집어 땅바닥에 몇 번 내 팽게치고 효섭 : 그때 쯤 쓰러진 어머니 가슴팍을 발로차고 제문 : 마지막에야 구두발로 짓밟았지. 효섭 : 신나게! 제문 : 그러면 어머니는 하루종일 눈 탱이가 밤 탱이가 되가지고... 효섭 : 온종일 징징징징.. 제문 : 오해 마세요. 어머니!
희정 : 오해라니! 다 사실 아니니? 그러게. 너희들 얘길 들으니 우리가 공인이라는 생각이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 맞다. 우리는 공인이다. 공인은 타인에게 모범을 보여야지. 격식은 중요 한거다. 향을 피우자. 제문 : 향이 어딨어? 희정 : 그럼, 담배라도! 우아하게 예를 갖춰서... 우선 음악을 틀자. 효섭, 음악을 튼다.
희정 : 춤을 추듯이, 스크린을 꽉 채우자. 무대를 압도하자. 형식을 갖춰, 절도 있게, 질서 있게, 순서를 지켜가면서, 부위별로, 사랑스럽게
정하가 흉기를 들고 소리치며 은경 에게 달려들다가 갑자기
정하 : 아! 아이가! 모두 : 아이가! 정하 : 아! 아이가! 모두 : 아이가! 정하 : 아이가!
이때 제문 멘트하고 효섭은 그물로 은경을 옭아매 죽인다. 고조되는 음악, 모두가 춤을 추듯 나풀거린다. 잠시 후 조명 어두워진다.
다시 불이 들어오면 신발장에 놓여있는 은경의 신발. 그리고 그 옆에 아기의 신발이 보인다. 지아의 머리를 잘라주는 제문.
지아 : 바닥이 차가워. 제문 : 곧 따뜻해지겠지. 지아 : 그렇지만 춥지는 않아! 파란 바다 속에 빠져 있는 거 같아. 몽롱하게.. 몸 속 마디마디에 투명한 물들이 흐르는게 느껴져. 꿈처럼. 들어봐. 제문 : 들려. 해초들 사이를 미끌미끌 흐르는 유연한 물결 부슬부슬 피어오르는 말간 물방울들. 그리고 그 물방울이 퐁퐁 터지며 네 몸 사이사이에 응어리지며 달라붙는 것들도 보여. 지아 : 아! 배불러! 행복해! 보고 느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없어도 좋아. (사이) 손 좀 만져 줘. 오빠! 제문 : 정말로 사람들이 우릴 기억할까? 지아 : 우린 흔적도 없을 거야. 흔적도 없겠지? 제문 : 그렇겠지. 지아 : 그래도 좋아. 오빠! 노래 좀 불러 줘?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