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국가 | 지배기간 | 지배종교 |
포르투갈 | 1505~1658(153년) | 로마 가톨릭 |
네덜란드 | 1658~1796(135년) | 개신교 |
영국 | 1815~1948(133년) | 침례교, 감리교등 개신교 |
출처; 마성스님의 ‘스리랑카 불교 법난사’
스리랑카의 불교 법난사-마성스님.docx
스리랑카의 불교 법난사-마성스님.pdf
대체 이 기간동안 스리랑카에서는 종교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를 지배국가별로 법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스리랑카 법난의 내용
법난 | 내 용 | 비 고 |
포르투갈인에 의한 법난 | -모든 사찰의 소득을 카톨릭교 전도를 위해 용도를 전환 -싱할라의 민족종교를 억압하고, 개종 시키는 작업 -권유가 실패했을 때에는 잔인하게 응징 - 높은 지위를 얻고자하려면 개종해야 하고, 이름도 성경에서 따온 것으로 새로 바꿈 -황색 가사를 입은 스님들은 모조리 죽임 -불교 사원과 교육기관은 모두 파괴 | 왕조유지, 주로 해안 지방을 점령 |
네덜란드인에 의한 법난 | -교육 제도를 통해 그 선교목적을 달성하려함 -학교 건물은 교회와 학교를 겸함 -학교 교사는 선생과 종교 사절의 역할을 담당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을 때에는 범죄자로 취급 -개신교 신자가 아니면 공무원이 될 수 없었음 | 왕조유지, 주로 해안 지방을 점령 |
영국인에 의한 법난 | -불교도 내부의 분열을 조장 -스님과 신도간의 갈등을 조장 -기독교 선교 활동을 적극 지원함 -교육의 기독교화 정책 -제도적으로 불교도들에게 불이익을 줌 -기독교인만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함 | 왕조멸망, 전영토 지배 |
출처; 마성스님의 ‘스리랑카 불교 법난사’
잔인한 포루투갈
스리랑카법난의 특징은 불교를 탄압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가장 잔인한 나라가 포르투갈이었는데, 서세동점시절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에게 만행을 저질렀던 것처럼 그들은 불교도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강요하고, 이를 어겼을 때 잔인하게 응징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색가사’를 입은 스님을 죽이고 경전을 불살라버리고 사원을 파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처럼 잔인한 정책을 취한 포르투갈과 달리 새로운 지배자인 네덜란드는 좀 더 지능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였다.
스리랑카의 비구들
2006년 삼보디사의 웨삭
사진 ; 악깍까소(Akakkaso)비구의 사이트에서 가져옴,
지능적인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종교정책은 교육제도를 통하여 목표를 달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시키면서 동시에 개신교를 전파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워서 전도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내륙을 제외한 요지를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교육을 통하여 배출된 인재를 관리로 등용하였는데, 모두 개신교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개신교를 믿지 않으면 출세할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스리랑카 불자들
2006년 삼보디사의 웨삭
사진 ; 악깍까소(Akakkaso)비구의 사이트에서 가져옴,
영국의 교묘한 불교말살정책
네덜란드의 바톤을 이어받은 나라는 영국이다. 그 때 당시 세계최강 영국인 인도를 지배하고 있었고 이른바 영국에 의한 세계질서가 형성된 ‘팍스브리태니카’시대이었다. 마치 오늘날 미국처럼 ‘경찰국가’역할을 하였던 영국의 스리랑카에 대한 종교정책은 네덜란드와 크게 차이가 없다.
영국은 노골적으로 불교를 박해 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 매우 지능적으로 치밀하게 불교말살정책을 편것이다. 그 예로서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불교도 내부의 분열을 조장
둘째, 기독교의 선교활동을 적극지원하여 국교화
셋째, 교육을 통하여 불교는 저속한 종교, 기독교는 문명의 종교라고 세뇌교육
넷째, 불교도에게 불이익을 주고, 기독교를 우대하는 정책
위의 정책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는 것 같다. 미국의 실질적인 지배하에 있는 우리나라는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를 믿어야 출세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국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었던 스리랑카 역시 기독교를 믿어야 공무원이 될 수 있고,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를 믿으면 ‘불이익’을 주고, 기독교를 믿으면 ‘혜택’을 주는 것이 영국지배하의 정책이었는데, 그들의 최종목표는 결국 스리랑카를 완전한 기독교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교를 말살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그런 방법중의 하나가 불교의 내부분열을 조장하였다는 사실이다.
내부동조자로 인하여
어느 나라든지 법난이 일어날 때 내부의 동조자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국가든지 외부침입으로 망하기 보다 내부의 적에 의하여 무너진 경우가 많은데, 불교 역시 내부의 적에 의하여 무너진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마치 사자의 몸속에 있는 벌레가 사자의 몸을 썩게 하여 무너뜨리는 ‘사자충’처럼 불교계 내부에서 외도들과의 동조자로 인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변형되어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영국지배자들이 불교도의 내부분열을 조장한 것도 불교를 말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처럼 불교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스리랑카의 승단과 불자들은 어떤 조치를 취하였을까. 힘의 열세를 인정하며 유일신교도 진리라고 인정하며 평화공존을 바라는 선언을 하였을까.
파아나두라(Panadura, 1873년)논쟁
이렇게 스리랑카 불교가 위태롭고 암울한 시기에 스리랑카 불교도들은 불교말살정책에 굴하지 않고 이에 맞서 법난을 극복하였는데, 그 도화선이 된 것이 유명한 ‘파아나두라(Panadura, 1873년)논쟁’이다.
파아나두라 논쟁(The Panadura Debate)
1873년 스리랑카 파아나두라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세기적 논쟁이 열렸다.
출처 ; Colonel Olcott
스리랑카 장로비구는 기독교와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고 연기법으로서 기독교의 교리를 논파하였다. 불교를 단지 미신행위나 우상숭배정도로 여기고 있었던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에 맞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패배시킨것이다. 이 파아나두라의 논쟁에 대하여 인터넷검색결과 자료를 확보 할 수 있었다. 그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증거로서도 (점성학에 의해서) 전생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들에게는 전생이 있다고 하는 불교의 교리가 틀리지 않는 올바른 종교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전생이 없다고 부정하는 기독교는 참 종교가 아닌 그릇된 종교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다사쿠마라차리타(Da akum racarita)라는 시를 지은 당대의 시성(詩聖) 단딘(Da in)의 저술인 <카비야다르샤(K vy dar a)>103)에 의할 것 같으면, 불타의 말씀은 오직 진리뿐이며, 추호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교를 찬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행무상이라고 불타가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닌 분명한 진리이다"라고 하며, 이것을 주석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멸하고 생한다는 진리는 불타의 가르침이다"라고 불교의 참 진리성을 찬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그 어느 종교보다도 수승한 종교임을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타 문헌에서도 얼마든지 증명해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월등히 수승한 진정한 종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으로서 불교와 기독교를 이해하시는 데는 충분한 자료와 논증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여러분들이 지금 당장 기독교를 버리고 진정한 진리의 종교인 불교를 신앙하시고 실천수행 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에 의한 반론을 승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가 대론 , 석오진 역/운주사)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에 의한 반론을 승려 .docx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에 의한 반론을 승려 .pdf
파아나두라논쟁은 1873년 8월 28일에 열렸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모홋띠왔떼 구나난다(Mohottivatte Gunananda) 장로비구가 영국의 데이비드 드 실바 목사와 사리만나 전도사를 상대로 기독교 교리의 모순과 불교에 대한 그들의 비하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이다.
모홋띠왔떼 구나난다(Mohottivatte Gunananda)장로비구상
연기법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논파하였다.
출처 ; The City of Panadura
사두, 사두(Sadhu, Sadhu)
이 논쟁은 그 때 당시 영자신문인 실론타임즈(The Ceylon Times)에 토론과정이 실렸는데, 이 논쟁에서 장로비구는 기독교인들이 전지전능하다고 말하는 유일신교의 교리에 대하여 ‘연기’의 논리로 논파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그릇된 종교라고 하였고, 하루 빨리 거짓의 종교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 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렇다면 이 논쟁은 누가 이겼을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이 끝나자 1만여 명의 불교, 기독교 신자들이 일제히 사두, 사두(Sadhu, Sadhu)104)라고 소리 높여서 제창했다. 어느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행동에 불쾌감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불교인들, 기독교인들 그 어느 쪽에서도 소동과 난동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평온했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과 목사님이 청중들에게 정숙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군중들은 완전히 조용해졌다. 그때 불교 신자들은 대단한 기쁨에 차서 집회에서 해산했고 기독교 신자들은 불만이 끓어올라 울분을 참지 못하는 듯한 기분으로 집회장을 떠났다.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에 의한 반론을 승려 모호티왓테 구나난다가 대론 , 석오진 역/운주사)
불교측의 완전한 승리로 끝난 것이다. 불교도들은 일제히 ‘사두, 사두(Sadhu, Sadhu)’라고 소리 높이 외쳤다고 한다. 불교도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지만, 기독교도들은 울분을 감추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세기에 대결에서 불교가 승리함으로서 스리랑카의 불교도들은 자신감과 활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 논쟁으로 인하여 스리랑카 불교가 극적으로 회생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올코트(Henry Steele Olcott)’ 대령과 ‘다르마팔라’에게도 영향을 주어 스리랑카 불교부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진리로서 삿된견해를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논쟁은 오래 전에 결판났다. 불교측의 승리이었다. 그것도불교측의 완전한 승리로 결판난 것이다. 그런 승리의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이 설한 ‘근본가르침’때문이다. 특히 ‘연기법’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논파하였는데, 그것은 진리로서 삿된견해를 부순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삿된견해 즉 사견(邪見)은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말한다.
“자아와 세상은 영속한다”고 보는 것이 ‘상견’이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보는 것이 ‘단견’이다. 부처님당시 상견에 해당되는 것은 창조론으로 설명되는 ‘브라만교’이었고, 단견에 해당되는 것은 육사외도중의 ‘숙명론’ ‘도덕부정론’ ‘유물론’이었다. 이 모두를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는데, 상견의 경우 원인없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해당된다.
연기법은 조건하여 일어나는 법을 말한다. 따라서 스스로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따라서 조건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원인 없이 존재하는 창조주는 거짓이 된다. 오직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일어나는 ‘정신-물질’의 작용으로 본다. 원인의 배후에 다른 ‘짓는 자(karaka)’가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또 행위에 의하여 과보가 일어나지만 짓는 자가 없으므로 과보를 경험하는 어떤 변치 않는 ‘자아’ 또는 ‘영혼’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로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상속이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자아 또는 영혼은 인습적인 표현일 뿐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것으로 본다.
청정도론에서
마찬가지로 원인을 갖지 않고 존재하는 창조주 역시 ‘토끼의 뿔’과 같은 것으로서 마음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실재하지도 않고 실체도 없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표현하였다.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고
순수한 법들만이 일어날 뿐이니 이것이 바르게 봄(見)이다.
이와 같이 업과 과보가 원인과 함께 나아갈 때
씨앗과 나무 등처럼 그 시작을 알 수 없다.
미래의 윤회에서도 [업과 과보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지 않는다.
외도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하여
그들의 견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중생이라는 인식(衆生想)을 가져
영원하거나 허무하다고 보아
서로서로 모순되는 62가지 견해를 가진다.
견해의 올가미에 묶인 그들은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님의 제자인 비구는 초월지로 이 심심하고
미묘하고 공한 조건을 통찰한다.
과보에 업이 없고, 업에 과보가 없어
그 둘은 각각 공하지만
업이 없이는 과보가 없다.
마치 태양과 보석과 소똥 속에
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밖에 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요
연료들로부터 생기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업 속에 과보가 없고
업을 떠나서도 없고
업이 과보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업은 과보가 공하고
업에 과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업을 의지하여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길 뿐
신도 없고 범천도 없고 윤회를 만드는 자도 없다.
원인과 조건 따라 순수한 법이 일어날 뿐이다.“
(청정도론, 제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20절)
이 게송은 연기법을 알지 못하였을 때 범할 수 있는 견해에 대한 것이다.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연기법을 알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자아와 이 세상은 영원하다거나 또는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62가지 견해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불교가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이와 같은 62가지 삿된 견해는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 D1)’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상견과 단견의 삿된 견해에 빠진자들에 대하여
업을 의지하여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길 뿐
신도 없고 범천도 없고 윤회를 만드는 자도 없다.
원인과 조건 따라 순수한 법이 일어날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일신교로 대표되는 상견을 논파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부처님은 오늘날 유일신교와 매우 흡사한 브라만교를 연기법으로 논파 하였다. 원인없이 존재하는 창조주는 있을 수 없고, 다만 있다면 원인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법만이 일어난 것이라 하였다. 바로 이것이 연기법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세기적 교리논쟁이 열렸던 19세기 스리랑카 파아나두라에서 불교가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따라서 유일신교의 영속론은 오로지 연기법으로만 논파 될 수 있는 것이다.
파아나두라에서 선사(禪師)가 토론하였다면
불교는 기독교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이 왜 나오게 되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모르거나 등한시해서 나온 결과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공존을 애걸하는 듯한 ‘항복선언’이 나온 것으로 본다.
만일 파아나두라 논쟁당시 불교측 대표가 테라와다불교를 신봉하는 비구가 아니라 ‘여래장 사상’을 기반으로 한 ‘선사’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장 사상은 ‘궁극적 실재’가 있디고 보는 ‘일원론’이고, 개별적인 영혼이 있다고 보는 유아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유일신교에 있어서 창조주와 변치 않는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는 유일신교와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기독교신학자들과 대승불교학자들의 주장을 들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8.23선언은 항복선언
불교평론에서 불교를 연구하는 기독교신학자들 즉, 길희성교수, 오강남교수, 김경재교수, 이찬수교수의 글을 읽어 보면, 길희성 교수는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실재가 바로 하느님이라 하였고, 오강남교수는 대승불교의 참나와 하느님은 같은것이라 하였고, 김경재 교수 역시 대승불교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찬수 교수는 아예 대승불교와 기독교는 ‘같은 종교’라고 하였다.
이에 거들기라도 하듯이 불교학자들 역시 같은 논리를 주장하였는데, 한형조교수는 모든 진리는 한 곳에서 만난다는 종교다원주의적 주장을 하였는데. 이는 전형적인 종교다원주의자인 길희성교수와 맥을 같이 한다. 이외도 서광스님은 대승기신론에서 비로자나, 야훼, 알라는 이름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같은 한마음(일심)이라 하였다. 이런 시각은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의 꿈의 예를 든 대승기신론의 한마음에 대한 설명도 동일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 기독교학자이건 불교학자이건 간에 모두 공통적으로 궁극적실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측에서 말하는 종교다원주의 사상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이다. 결국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8.23선언이 발표된 것으로 본다.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나라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즉 연기법에 따르면 현재의 유일신교의 교리는 ‘영속론’으로서 논파되어야 할 ‘삿된 견해’에 해당된다. 그런 사견은 이미 1873년 스리랑카의 ‘파아나두라’에서 논파되었다.
이처럼 세기의 대결에서 불교가 기독교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승리한 결과 식민지지배하에서 갖은 불이익을 받으며 살아가던 불교도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불교부흥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되어서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를 몰아내고 불교가 주류인 나라로 만들 수 있었다.
꽃공양을 하는 스리랑카 소녀
2006년 삼보디사의 웨삭
사진 ; 악깍까소(Akakkaso)비구의 사이트에서 가져옴,
그런 스리랑카는 ‘부처님의 눈물’과도 같고 ‘불교의 진주’와도 같은 나라이다. 고향을 그리워 하듯 부처님당시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스리랑카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스리랑카의 국민가수 ‘난다말리니’의 싱할라판 ‘자야망갈라가타’
2011-09-22
진흙속의연꽃
출처-http://blog.daum.net/bolee591/16155039
첫댓글 사두사두가 무슨 뜻인가요?
한국불교에서 "선재" "선재"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며, 즉 "아주아주 훟륭하고 훌륭하다."라는 뜻으로 받아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파아나두라 대논쟁에 대한 책을 구입해서 읽어보면 그때의 그장면들이 다들어 있습니다. _()_
제가 성경을 배워 이해하기로는, 위와같은 논쟁은, 잘못된 목자들과 전도자들의 행위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논쟁의 책을 보면, 그 당시 거의 모든 목자들은, 자기의 성경도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지금도 비슷하지만)
천지창조, 심판, 구원 등등의 의미는, 구약, 신약, 요한계시록까지 통찰해야 이해되는 것들이며, 철저히 성경의 근거로써만 이해되어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대논장에서, 성경을 잘못이해한 자들에게 논쟁으로 이겼다가 아니라, 평화적으로 법난을 슬기롭게 극복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면 기독교에서도 바르게 이해되는 날이 오면, 논쟁의 의미를 잃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보다는, 그 목자들과 전도자들의 잘못된 방식의 전도행위, 자기 성경도 제대로 이해못하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려는 행위 등을 봄으로써,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살펴서 자신을 반성하고 바르게 이해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 남에게도 자애와 연민과 관용과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취지로 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즉, 남의 실수를 교훈삼아, 우리 불제자도 부처님 원음을 열심히 공부하고, 마음챙김으로 깨어있음에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항시 서로간의 반목이나 성냄, 자만 등을 일으키는 말보다는, 화합을 위한 말을 하는 것이 바른 말의 계라고 생각합니다. _()_
도산님 말씀은 타종교인에 대한 불교인의 자세로서 부처님 가르침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파아나두라 논쟁은 정법수호차원에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하십니다. _()_
파아나두라 논쟁의 의의는 내가 믿는 종교(불교)가 당신들이 믿는 종교(기독교등)나 사상보다 낫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한국불교는 끊임없이 특정종교에 의해서 직. 간접적인 공격을 받고 있고, 대승불교가 주류인 한국불교내에서도 분명 중요한 부분 불법이 흐려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우리한테는 파아나두라논쟁은 큰 의미가 있고 초기불교를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고 어떻게 부처님 정법을 지켜나가야하는지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_()_
사-두! 사-두! 사-두!!! _()_
_()_()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