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 신규
처음부터 ‘회갑’이라는 말 자체를 싫어했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으려는 안간힘일까. 회갑이야기만 나오면 남이 알까 싶다며 손사래를 쳤다. 자식들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친지들을 모시고 저녁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겠다고 했으나 아내는 극구 사양하였다. 바르게 자라서 잘 살아가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잔치는 무슨 잔치냐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가 자손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단다. 하는 수 없이 자식들이 준비하려던 아내의 회갑연은 없었던 일로 하고, 정작 그날은 덕유산 향적봉 산장(대피소)에서 나와 함께 새 아침을 맞이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한 달여 지났는데 자식들이 해외여행권 두 장을 가지고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넘기기가 서운해서 준비한 것이니 잘 다녀오시라는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아이들의 성의가 그러하니 다른 생각은 접어 두고 여행이나 즐겁게 다녀오자며 아내를 부추겼다.
완강하게 사양하던 아내가 막상 여행권을 받은 뒤부터는 걱정이 태산이다. 아니 걱정이라기보다 여행에 대한 즐거움으로 벌써부터 들떠 있다. 준비할 것도, 챙겨갈 것도 왜 그리 많은지 평소 같지 않게 수선을 떤다.
짐 싸기를 대충 마무리하고 여행사에서 보내온 여행 안내서를 무심코 읽다가 여행자 보험 약관의 사망에 관한 대목에서 멈칫 시선이 고정되고 말았다. 예전에는 읽어보지도 않았던 문구였지만 이제 관심이 가는 여행 준비 사항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기사가 떠올랐다. 의좋게 지내던 형제가 그리 많지 않은 유산을 가지고 다투다가 경찰에 고소했다는 것이다. 세상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형제들을 그토록 피폐하게 만들었을까.
지역 문화원이 발간한 잡지에서 유명 인사들이 작성한 ‘미리 써보는 유서’를 읽은 적이 있다. 불과 몇 년 전인데도 그때는 남의 이야기 같았지만 이제는 가슴에 와 닿는 일이다.
‘설마 우리 부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 자식들이야…….’ 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 왔지만 요즘 들어서는 무엇인가 말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평소 자식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차분히 정리해 쓰기 시작했다. 자랑스럽고 보람 있는 일보다 죄스럽고 미처 챙겨주지 못했던 인연들이 먼저 떠올랐다. 가슴이 울걱거렸다. 죽음을 가정하고 쓰는 글이라서인지 어느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숨어 있던 응어리가 복받쳤다. 마음을 가다듬고 겨우 초안을 만들어 아내와 함께 읽어 내려갔다. 아내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즐거운 여행을 앞두고 이 무슨 청승인가? 아니지 이렇게 인생을 정리하며 살자는 것이겠지. 아내가 겨우 감정을 추스르더니 몇 군데를 고쳐 썼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온 세상살이가 너무도 아쉬워서인지 우리 부부의 상기된 얼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거실에 나가 아내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티브이에서 장사익의 애끊는 노랫가락이 분수처럼 흘러나와 우리를 차분히 감싸 주었다.
죽음은 이제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일이 아니다. 이미 내 곁에 와 있으니 언제 함께하자고 할지도 모른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죽음이 언제든 어깨동무를 하자고 손을 내밀면 미련 없이 흔쾌하게 길을 나서야 한다. 내가 할 일은 그 길을 떠날 준비를 미리 해 두는 것이다. 그까짓 쓰고 남은 유산 몇 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진솔한 내 삶의 과정이다.
시민 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전의료(장례)의향서’ 실천 모임에 가입하고, 확인서와 함께 ‘남기는 글’을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겉봉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미·아비가 변고를 당하거든 너희 삼 남매가 모여 열어 보거라.”
이튿날 새벽, 우리 부부는 며늘아기가 정성껏 차린 조반상을 물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첫댓글 여행을 가끔 하는 저도 좀 멀리 떠나기 전에는 간단한 주변정리를 합니다.
부재시 연락할 전화번호도 적고, 적으나마 계좌정보도 남겨둡니다. 그러고 보니 편지를 남긴 적은
없군요. 워낙 별일이 다 일어나는 세상이라...
더 구체적으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갑을 맞는 제가 이 작품을 읽는 감회는 남다름니다. 아직 젊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문득 회갑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면 다리에 붙어 피를 빨던 거머리처럼 떼내고 싶습니다. 머잖아 여행보험에 서명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효도와 여행과 행복하게 지내시고 계신 글 잘 읽었습니다.
잘 지내시고 있는것 같아 저 마음이 오늘 좋은 봄날처럼 푸근합니다.
기행수필이 기다려집니다.
늘 건강하시고 선생님 넓으신 마음 만큼이나 행복하시길 빕니다.
회갑이란 의미가 예전과는 많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회갑은 제2의 인생 시작이라고 많이들 얘기하죠. 자식들 키워서 다 출가시키고 오븟하게 부부가 여행다니며 사는 삶이 참 좋지요. 항상 건강하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