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행 버스
신 진기
버스와 여자는 기다리면 온다. 사랑 연애 이런 말들이 뭐가 뭔지 모를 때, 울산과 부산을 이어 주는 소통 수단은 서다 가다를 반복하는 완행버스가 대세였다. 꼭 정해진 시간에만 기적 소리와 함께 오가는 기차는 너무 규칙 적이라 여간 상그럽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부는 바람처럼 완행은 타고 싶으면 신작로에 나가 잠시 기린 목을 하고 기다리면 쉽게 이용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열예닐곱 살 고교 시절에 대여섯 명이 한 조를 이뤄 경치가 좋은 곳이나 어른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나 할 것 없이 새끼다람쥐 모양 이곳저곳을 기웃 거리며 많이도 다녔다. 부산은 버스로 경주는 자전거로 포항은 기차로 주로 이용했고. 무슨 산지식을 얻고 견문을 넓힌다며 부단히도 움직였다. 폼 잡는 다도 등산 가방에 대병 소주 한 병 새우깡 몇 봉 라면 한두 개 기본이었고. 버너 코펠 텐트도 넣어 한 짐 만들어 지고 다녔다. 참새처럼 재잘 그리며 싱글벙글 한시 반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뭐라고 말하면서 다였다. 무슨 특권이라도 있는 것처럼 의시되며 천하가 다 우리 것인 량 생각하곤 했다. 물불 가리지 않고 싸돌아다니며, 도 넘는 짓을 종종 하곤 했다. 그게 그때 우리들만이 느끼고 즐기는 방식이라 생각하며 공부는 다음 순번이 돼버렸다. 공도 많이 차로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늦은 봄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어떤 단체와 축구시합을 마치고 울산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 뒷 자석은 경로석이 아니고 여학생보다 부끄러움이 더 많이 타는 남학생들이 선호했다. 밀물처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백합보다 희고 눈보다 시린 하얀 칼라를 한 교복을 입고 나무토막처럼 짧디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바른 자세로 턱 앉아 있었다. 그자태가 마치 한 마리 학이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숨이 탁 막혔다. 여자는 예쁜 얼굴과 교태 상냥함 부드러운 미소 얌전함 뒤에 늘 흉기를 감추고 있다가 한 순간에 내놓기도 한단다. 그게 여자의 인생일까.
차분하게 머리 정리를 하고 죽을힘을 다해 본격적으로 상대를 알기 위해 말을 걸었다. 교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머리가 짧을 걸 보니 모범생이군요. 심드렁해지면, 시답잖은 수작으로 이런 저런 얘기를 이어갔다. 학교는 부산에 있고 남쪽나라별을 연상하면 이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집은 곰 동내에 있으며 지금은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한다, 토요일 오후에 왔다가 월요일 첫 차로 학교를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이 나라 한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고2 울산에 있는 에이치 고에 다닌다고 소개하고, 집은 복산동에 있다고 말했다. 한 시간 남직 쉴 틈도 없이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최소한의 신상을 파악했다. 다음에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자고 하니 대답도 없이 여학생이 다 왔다면서 먼저 차에서 내였다. 나는 꼭 다 알아내리라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내 친구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친구들은 벌레 먹은 나무처럼 매가리가 없었다.
어떻게 이 난국을 타게 해야 할지 캄캄했다. 일단 곰 동내 사는 동기들을 수소문 했다. 두 명이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철환이란 동기가 그 여학생에 대해 아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쉬는 시간에 그 친구와 나는 서로서로 묻고 답하고 하며 점점 좁혀 가고 있었다. 동내 가서 알아오고 또 전해주고를 한 달 가령 했다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부산 대청동에서 하숙을 하며 키가 크고 공부를 잘하고 어른은 동네 유지라 했다. 끈기는 새로움을 만든다.
우리는 울산 시내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퍼모스트 집에서 처음 만났다. 숟가락으로 떠먹는 투게더를 시켜다, 농촌에서 이사를 왔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칠남매가 함께 사는 대 가족이라 그렇게 형편이 능력한 편이 아니라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이라 당황했다. 그래도 남자라 대충 대충 흉내만 내고 자리를 지키고 학교생활 얘기를 하면서 두어 시간 보냈다. 집이 곰 동내인 웅촌이라 울산에서 가려면 시외버스 정류소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부산 쪽으로 한 사십 분 내려가야 했다. 그래 그렇게 설레이고 학수고대한 첫 만남은 성사되고 편지로 서로 소통하기로 하고 아쉬운 을 가슴에 안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이별은 만남을 전제로 하는가.
한번은 집에 와서 자기가 카레라는 음식을 만들어 주겠노라 얘기해서 부모님께 허락을 얻었다. 우리 집은 상당이 개방적이고 형제가 많다 보니 보이지 않는 법이 있어 그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참 편안 하게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 좋고 우애 있는 집안이었다. 토요일 저녁에 우리 형제만 모여 내 여자 친구의 음식을 먹기로 했다. 열심히 뭔가를 만들었고 나는 멀지 감치서 보기만 했다. 이게 웬일인가. 아무도 카레 향을 이겨내지 못해 하나둘 숟가락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한 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대학 다니는 형님과 나는 할 수 없이 먹었고 동생 다섯은 라면을 왜치며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그 여자 친구 왈, ‘진짜 촌놈이네.’ 우정은 카레를 타고 점점 깊어 갔다.
그때 그 완행버스에서 만난 여학생과 나는 느림의 미학처럼 천천히 움직여 십년의 연애 기간을 거처 이십대 후반에 둘은 하나가 되어 삼십년을 알콩달콩 하며 딸 하나 놓고 울산에 터 잡아 똑 같은 일을 이십구 년간 하고 있다. 산도 정상까지 가야 올랐다고 할 수 있고 삶도 사랑도 마찬가지가 않을까. 완행버스처럼 느리게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며 꿈 너머 꿈을 꾼다. 뒷모습이 아름답고 싶어라.
2014 .03.03
첫댓글 자꼬 하믄 느는기 마이 있꼬....마이 만지다 보믄 점점 크는 거도 있꼬... 첫머리 "버스캉 여자는 기다리믄 온다"에 한표 찍고 글 잘읽고 갑니더.
느림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