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독립운동 기념일 또는 학생의 날은 1929년 11월 3일,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난 항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대한민국의 기념일이다. 학생들의 독립 운동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애국심을 드높이기 위하여 매년 11월 3일 각종 기념 행사를 거행한다. 이 날은 젊은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해야 할 바를 마음에 되새기며 굳게 다짐하는 날이다.
학생의 날은 1929년 11월 3일 전라도 광주에서 한국인 고등보통학교(5년제 중학교) 학생들이 벌인 항일 독립운동을 기리고자 제정된 기념일로, 정식 명칭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항일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학생들의 자율 역량과 애국심을 함양시키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로 매년 11월 3일을 기념하고 있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1953년에 ‘학생의 날(學生-)’이라는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이래 부침을 거듭하다가, 2006년 2월 9일 국회에서 ‘학생독립운동기념일(學生獨立運動記念日)’로 명칭 변경이 의결되었다.
1953년 10월 국회의 의결을 거쳐 '학생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기념일이 되었다가, 1973년 3월 30일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할 목적으로 제정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폐지되었다. 그러나 1982년 9월 14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제정에 관한 건의안'이 국회에 상정되는 등 부활 운동이 일었고, 1984년에 다시 부활하였다. 2006년에 '학생독립운동기념일'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29년 11월 1일, 광주를 떠난 통학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여학생의 사촌 동생 박준채(朴準埰)가 항의하면서 조선과 일본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현장에 있던 학생 간의 패싸움으로 번진 이 사건은 결국 나흘 뒤인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의 시위로 번졌다. 이날 시위는 전국 194개교에서 5천400여 명의 학생이 참가,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운동으로 발전했다.[1]
이렇듯이 1929년에 일제에 항거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학생운동이 발생했다.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으로 명명되었던 이 사건은 1929년 11월에 광주에서 촉발되어 1930년 3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항일 학생운동은 1920년부터 지속적으로 발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활동들이 축적되어오다가 1929년 11월에 크게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1월 3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날 광주역 앞에서 한일 학생들 사이에 큰 충돌이 발생했고, 이를 이유로 일제가 10일 간의 휴교령을 내렸던 것에 기인한다.
광복 이후 11월 3일은 항일과 반제, 독립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의 기념일이 되어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1953년 10월에는 제2대 국회가 이날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면서 그 의미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학생의 날은 점차 억압되고 축소되었다. 이를 대신하여 군사정부는 1945년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新義州學生義擧)’를 기념하여 1956년에 11월 23일로 지정되었던 ‘반공학생의 날’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한동안 두 개의 학생의 날이 병존했으나, 1973년 3월 30일에 제정, 공포된 ‘각종기념일등에관한규정’에 따라 모든 학생의 날이 폐지되었다. 학생의 날이 폐지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로 1973년에 광주의 고등학생들이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학생의 날이 폐지된 이후에도 재야단체와 학생들이 이날을 전후하여 기념식을 거행하고, 반정부 시위를 벌이자 학생들의 기념탑 참배도 금지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학생의 날이 부활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등장하고, 학생들이 참여한 독립정신의 의미를 애국심의 증대로 발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4년 9월 22일에 학생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부활하였다. 학생의 날은 교육인적자원부가 주관하여 기념 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2006년에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애국심 함양을 고취하고 역사적 의미를 계승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다”는 이유로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29년의 학생독립운동 관련 기념 시설들은 주로 광주광역시 내에 집결되어 있다. 1954년 6월 10일에는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국민성금으로 마련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건립되었고, 1967년에는 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에 광주학생운동기념회관이 건립되었다.
1997년에는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광주학생운동기념역사관이 건립되었으며, 2005년에 는 1967년에 건립된 기념회관을 대체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중앙공원 내에 완공되었다. 이 밖에도 전남 나주시에 광주학생독립운동진원기념비(光州學生獨立運動震源記念碑)와 전라남도 시도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된 광주학생독립운동진원지나주역사(光州學生獨立運動震源地羅州驛舍)가 있다.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의 일부가 광주광역시 시도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학생의 날은 수차례의 부침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의미와 상징성이 부여되었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초기에는 항일과 독립운동, 애국정신 같은 의미가 강조되었으나, 박정희 군사정부 아래에서는 반공정신이 강조되었다. 한동안 폐지되었던 학생의 날은 1984년에 부활되었으나 방치된 것과 다름없었다. 이와는 다른 흐름으로 학생의 날의 의미와 의의를 반독재와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하고 실천하려는 활동이 있었다.
학생의 날은 다시 국가기념일이 되었으나 기념 행사는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같은 민간단체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광복 제50주년을 맞이하면서 광주광역시교육청이 기념 행사를 공동 주관하면서 다소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기념식은 주로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개최되었다.
1999년에 는 학생의 날 기념식이 가장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개최되었던 것이다. 이해의 기념식은 개식선언(開式宣言), 국민의례, 교육부장관의 식사(式辭), 학생독립운동동지회장의 기념사, 대통령의 치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전국의 194개 학교 가운데 북한 지역의 학교를 제외한 남한 지역 69개 학교 가운데 63개 학교의 대표와 기수단이 참여했다.
하지만 1929년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전국을 거쳐 해외로 확산되었던 국내 3대 독립운동 중 하나인 학생독립운동이 1953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가 1972년 제외되어 ‘광주의 일’로 축소됐던 적이 있다. 다행히 2006년 다시 회복되어 현재는 전국적으로 행사를 치르고 있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 43년이 지난 뒤에 기념일에서 빠졌던 것은 해방 이후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학교 또는 교육 관련 단체 주관으로 학생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다채롭게 진행되면서 항일정신뿐만 아니라 학생 자치 능력의 향상과 학생들의 권리 보장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1.역사 속의 인물‘나주역 사건’ 주역 박준채, 매일신문(2013.10.30)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