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시간
팍팍한 길을 접어 아궁이에 밀어넣고
그네에 매달리면 물병자리 출렁인다
그 사이 잠은 달아나
밤이 너무 밍밍하다
거리의 통점들은 여지껏 물큰한데
떠나간 시를 찾아 한 달도 더 헤맸다
이제는 네가 날 불러
어르고 달랠 시간
양초가 몸을 녹여 제 키를 낮출 적에
은유는 쭉정이다, 날것들의 비린 변명
안으로 깊이 스며야
심장에 가 닿는 것을
향천3리
하나 남은 금붙이도 시장에 내다 팔고
민들레, 고들빼기, 냉이 캐러 들어온 곳
밤이면 개구리 소리
달을 당겨올리는
홍매화 매운 울음 가지 끝에 매어놓고
꽃잎의 속사정을 하나둘 듣다 보면
어느새 눈꽃이 피어
사계절이 꽃밭이네
이제는 초대하자 떠돌이별 시든 꽃도
허벅진 달빛 아래 된장국 끓여놓고
여리고 시린 노래도
쓱쓱 비벼 나눠 먹자
벗, 꽃, 지다
그대 누운 저 언덕이
하르르 무너지네
켜켜이 쌓인 꽃잎
봄날의 장례 미사
죽음도
예쁠 수 있나니
정겨울 수 있나니
동백섬
눈 감고 외면해도
심장은 또 붉어져서
철없이 터진 울음
앞섶을 다 적십니다
바다가
다녀갔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연화지 연잎에는 눈물이 반짝인다
새벽을 실어나른 연못의 푸른 여자
치마폭에 열린 이슬 물끄러미 바라본다
좌우로 몸을 흔들면
산란하는 무지개
더 크고 탄력있는 온음표가 되고 싶어
물방울은 물방울을 찐덥게 껴안았다
기우뚱, 흔들린 중심
풍덩 빠져 버린 사랑
하나가 되려는 건 쓸쓸의 함정이다
달팽이도 홀로 가는 이 길은 자드락길
맨발로 꽃대를 밀어
꽃봉오리 앉히는
살구나무 붕대
베내려고 꺾어놓은 가지 끝에 핀 살구꽃
끊어질 듯 아슬하게 사랑을 꽃피웠다
그마저 꺾을 순 없어 꼭꼭 싸매주었다
상처도 향기로운 저 사랑 만난 뒤로
정답과 오답 사이 벽이 하나 무너졌다
죽음도 까무룩 잊은 저 단단한 결기 앞에
빨래의 인문학
명치끝 시리도록 허공을 감아쥐고
덴바람 다스리는 핼쑥한 묵언 행자
이제는 흔들리지 말자
바지춤을 추킨다
때로는 헐렁하게 가끔은 암팡지게
구겨진 이력들을 펴주고 말려준다
얼룩진 지난밤 꿈도
툭툭 털어 깔끔하게
울음을 꽉 짜내어 더 울 수 없을 적에
빨래는 초연하게 제 자리로 돌아오고
더이상 옷이 아니다
어깨를 건 길동무
달 반 물 반
모두 다 안으려고
허리 낮춘 물의 마음
더 멀리 비추고자
높이 솟은 달의 마음
두 마음
하나가 되어
호수는 달 반 물 반
나 이미 나를 잊고
너 또한 널 떠났으니
천 갈래 만 갈래
물비늘로 부서져도
이 세상
한 모퉁이는
환히 밝아서 좋아라
고요에 눕다
고요의 칼을 갈아 비늘을 건드리면
소리는 움츠리며 거친 숨을 몰아쉰다
단숨에 소리를 잡는
고요의 놀라운 힘
풀죽은 낮달처럼 스러지는 소리에는
부끄러운 지난날의 변명이 묻어있다
꽃으로 피지 못해서
꽃을 감은 덩굴 같은
철옹의 넘사벽을 꼭 한 번 넘으려고
따가운 채찍으로 나를 키운 소리들아
보아라,
범종소리도
고요 아래 눕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유선철 시인의 두 번재 시집을 읽으며 그에 대한 많은 선입견이 사라졌다. 또한
순수나 참여문학 같은 세간의 개념도 무너졌고 좌우로 나눠 대립했던 정파적 편
집도 흐려졌다. 활달한 상상력가 깊은 서정이 올린 그의 시가 가르쳐 주었다. 세
상의 모든 사물을 하늘처럼 받든 수운 선생의 시천주侍天主를 다시 만
나는 느낌이었다.
극진하게 모시는 시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작품 곳곳에 스며 있는 꽃대는 튼
실하고도 아름다웠다. 등단 십 년이 지나 나오게 된 유선철 시인의 두 번째 시
집은 이미 이달균 선생이 예견한 대로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의 넉넉한 마
음과 다감한 품이 돋보이는 작품 한 편을 되뇌며 설레며 써 내린 벅찬 글을 마
친다. 온 세상이 「향천3리」 비빔밥 같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초대하자 떠돌이별 시든 꽃도
허벅진 달빛 아래 된장국 끓어놓고
여리고 시린노래도
쓱쓱 비벼 나눠 먹자
「향천3리」부분
-정용국(시인)
- 유선철 시집 『슬픔은 별보다 많지』(2023.4.1.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