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어떤 분들은 ‘옛날이 좋았는데’ 그런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의 뜻 안에는 지금의 삶이 좋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므두셀라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가장 오래 산 사람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심리 현상을 말하는 심리학적 용어입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아버지 므두셀라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아 장수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로, 타락한 인간 세계를 지켜보면서 과거가 더 좋았다는 한탄을 멈추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과거를 실제보다 아름답게 포장해 추억하는 것을 '므두셀라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그런가하면 파랑새 증후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까운 데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비현실적인 계획이나 꿈을 세워놓고 멀리 있는 행복을 찾아 헤매는 것을 빗대어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예측을 하고 산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예측한 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합니다.
옛날이 좋았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해당될 것입니다. 또 다가올 미래에 대해 막연하게 기대를 하는 것도 누구에게나 해당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이전과 다르게 우리는 다른 면에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죄는 우리를 깊은 늪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해방되었는데 말말입니다.
첫째, 강제로 비교당하고 살고 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과거 대부분 가난할 때는 오히려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몇몇 사람들이 가난을 벗어서 부유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안 보이는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동네에서 말입니다.
입는 옷이 달라졌고, 먹는 음식이 달라졌습니다. 말하는 것도 달라졌고,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비교의 대상으로 놓기 시작합니다.
경제의 발전은 좋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살면 더 이상 보리고개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쟁하며 비교를 당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월급이 많아졌고 전보다 생활을 위해 더 많은 것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옆집에 성공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을 구입할 수 있다는 말에 좌절감은 더 커졌습니다.
이전에는 자식들과 아내에게 그럭저럭 열심히 사는 아버지로 남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초라한 아버지와 남편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나는 그대로인데 주변에 사람들이 바뀌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있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조리원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 산모들이 더 좋은 곳을 사용하려고 애를 씁니다. 유치원을 다닐 때 사립인지 공립인지, 어느 지역인지를 비교당하며 다닙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을 가도 서울이나, 지방이냐, 어떤 과를 다니느냐 하며 비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직장은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자영업이냐 기술직이냐 하며 비교를 합니다. 차를 사도 그 차에 따른 비교를 합니다.
그 어느 것 하나 비교 당하지 않는 것이 없을 지경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조차도 비교의 대상이 됩니다.
자연스럽게 나는 나를 위한 삶을 살기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그 삶을 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씁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봐주느냐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내 신앙이 문제는 내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봐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새벽 기도회에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젊어 목회를 할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는 무조건 잘 살아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잘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자식들도 부모님들도 형제도 잘 살아서,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고 간증거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젊을 때는 그렇게 되어야 은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생각을 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믿지 않는 형제보다 더 잘살아야 한다거나, 믿지 않는 친구들보다 더 낫게 보여야 한다든지, 그런 생각말입니다.
남과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삶을 당연하게 살았습니다. 지금도 어쩌면 그렇게 살지 모르겠습니다. 되도록 안 좋은 것은 숨기고 좋은 것 만, 보여주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 말입니다.
참 불행하지만 그래서 생긴 짐들이 무겁습니다. 짓누르고 마음 한 곳에 불안함이 몰래 숨어 때가 되면 가슴을 누르기도 하고 불규칙으로 뛰게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선포하면서도 여전히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죄는 우리를 그렇게 몰아넣어 비교하며 비교당하며 살면서 불행하게 만듭니다. 끊임없이 비교의 노예로 만들어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한 자리로 밀어 넣습니다. 그래서 매일 더 노력합니다. 비교에서 우위를 차지하려고 말입니다. 어리석습니다.
둘째, 강제로 차별당하고 살고 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살면서 누군가 내 앞에 자꾸 끼어 들어 새치기를 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일어나자 피해의식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해의식은 분노로 표출됩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차별이 있습니다. 단지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습니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습니다.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에 첫 번째 문제는 바로 그 차별이었습니다.
행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과부들 중에 헬라파 유대인들은 히브리파 과부들이 매일 받는 구제에서 빼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원망하였습니다. 차별을 받은 것입니다.
어느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입니다. 추석에 여직원이 선물로 식용유를 받았습니다. 좋아해야 하지만 그녀는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정규직 직원들의 책상에는 햄선물 세트가 올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급속하게 줄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결혼도 또 아이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차별입니다. 내 아이에게 불투명한 미래를 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점점 마음이 좁아집니다. 생각이 좁아집니다. 행동도 좁아집니다. 판단도 좁아집니다. 삶의 의욕은 사라지고 불평과 불만으로 남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기뻐하기보다 분노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회가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 같은 상황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랑의 결핍에 빠지게 됩니다. 늘 무언가에 쫓기고 부족하고 초조합니다. 분노는 이미 마음의 빈 공간이 없이 꽉 차버렸습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숨쉬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그 결핍과 차별을 자신의 외적 치장으로 대신하려고 애를 씁니다. 명품을 사서 두르고, 젊은이들 중에는 외제 차를 사서 과시하기 위해 알바를 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 할부 값을 내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집니다. 물론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발전하고 우리의 삶은 더 나아진 것 같고 분명합니다. 내가 어려서 살 때보다 훨씬 살기 편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장난감 하나 얻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명절에 새 옷 한 벌 선물 받으면 날아갈 듯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집집마다 아이들의 장난감은 넘쳐납니다. 책도 넘쳐납니다. 옷도 넘쳐납니다. 신발도 넘쳐납니다. 먹을 것이 넘쳐납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런데 애정이 결핍입니다. 사랑이 결핍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우정이 결핍입니다.
불안합니다. 열등감은 더 커졌습니다. 자신감은 사라지고 의존도는 더 높아졌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갈망합니다. 신체는 커졌지만 하는 행동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영적결핍에 빠졌습니다. 스스로 산에 올라 부르짖고 하나님을 찾던 그 뜨거움은 젊은이들에게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남은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고백하고 결단하는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 불안의 늪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자신감은 결여되고 앞에서 이끌고 가는 삶이 아닌 끌려가는 삶을 살면 안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나아진 듯보이지만 잃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육적인 욕구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영적 욕구는 더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런 순간들을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차별을 받으며 결핍의 웅덩이로 밀어 넣고 통쾌하게 여깁니다. 그 웅덩이에서 나오기란 너무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시대를 읽다라는 책에 소개하고 있는 글입니다.
2015년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90명의 대학생들을 유칼립투스 숲으로 데려갔습니다. 그중 절반의 학생들에게 고개를 들어 1분간 200피트에 이르는 나무를 올려다보게 하고, 나머지 절반에게 멀리 있는 건물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일 분 후에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설문자가 ‘실수로’ 펜을 떨어뜨립니다. 이 실험의 포인트는 설문의 내용이 아니라 펜을 떨어트린 사람을 얼마나 도와주는지 관찰하는 것입니다. 결과는 ‘고개를 들어 높다란 나무를 바라본 경험을 한 학생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남을 잘 돕고, 친절하다’였습니다. 연구자들은 경이적인 경험을 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중요성에 덜 집착하게 되며 좀 더 관대한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고 분석했습니다.
기독교의 예배도 비슷한 경험일 수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사람들이 키재기’ 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더 잘났는지, 누가 더 부자인지, 누가 더 뭘 잘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에게 집중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서 해방감을 갖습니다.
가난한 청년이 회사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집에는 동생들이 많습니다. 아버지가 통닭이라도 한 마리 사 오면 그날 형제들은 전쟁입니다.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그렇습니다. 그 청년이 회사를 다니며 회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맛있고 비싼 음식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동생들을 위해 이 청년은 피자와 통닭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동생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정신없이 동생들이 먹다가 배가 어느 정도 차자 갑자기 형이 전혀 음식을 먹지 않고 자신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자 궁금해졌습니다. “형은 안 먹어” 그 청년은 동생들에게 ‘너희 많이 먹어, 다음에 형이 더 맛있는 거 사다가 줄게!’ 동생들은 신났고 그리고 그 청년인 형이 대단하게 크게 보였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자신의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놔준 걸까요. 주변의 동료들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몇 번을 생각해도 하나님이 이런 찬스를 주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비무장에 용변을 보기 위해 굴에 들어와 있는 사울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를 죽일 기회에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냈습니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보인 대장부적 기질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막내로 태어났지만 큰 사람이었습니다. 집에서 형들은 단지 그가 태어난 순서로 막내로 여기며 무시했지만 그는 커다란 바위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모든 것을 용서하고 참으며 복음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그가 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이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천국을 봤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알고 있습니다.
고후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바울은 자신은 낙원에 이끌려 가서 이미 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어떤 것도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무엇도 그를 유혹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달려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에게 비교, 차별, 결핍, 열등감, 불평 이런 단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완전하게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좇고 얻기를 원하는 것에 함께 좇아가며 얻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세상의 명예보다 오늘의 하루를 소중하고 사용하며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고 알기를 더 힘을 쏟을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삶은 내일 영원한 삶을 향한 항해로 생각하여 감사와 은혜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영생을 얻은 우리가 이 땅에 삶에 집착하고 비교하고 차별하고 결핍의 열등감에 사로 잡혀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비우고 당당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가 크게 숨 한번 쉬고 가슴 펴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만하면 좋사오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답게 살기를 다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