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제9강이었던 노성두의 서양미술강좌 '신화와 종교'는 그 전주에 강의가 없었던 이후라 강좌를
잊고 듣질 못하고 말았다. 그리스 로마미술과 관련하여 많은 내용을 전달해주려 한 강의였다고들
전해주었다.
오늘 강의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인 김영나 교수였다. 역시 국립춘천박물관장이 소개의 말을 하였다. 초대
관장이었던 김재원 선생의 둘째 딸로 부녀가 국중박 관장을 지낸 최초의 사례이며 지난 강의의 김리나
동생이기도 한 미술사학자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학위를 하고 덕성여대를 거쳐 서울대 고고미술
사학과에 교수로 있다가 201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재직중이다. 강의 후 춘천관장 왈, 같은
박물관 직원의 강의라 강사료는 없다 라면서 공표까지 하였다.
오늘 강의 주제는 우리나라의 근현대미술을 개괄하는 것이다. 강의 내내 위의 사진처럼 그 자리에 서서
마이크를 들고 쉬지 않고 화면에 비춰지는 그림을 보며 설명을 이어나가는 열강이었다. 청중석이 듬성
듬성 성길 만큼 수강자 수가 줄었으나 모두 조용히 경청하며 알아듣고 공감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근
현대라는 시간적인 밀접함이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연배가 있으심에도 아직은 다소 앳된 목소리로
들려서 그런지 설명들도 대체로 야무지고 구체적이었다. 근현대를 아우르는 100년 미술사를 한 강의에
다 담으려니 바쁘게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였다. 어려운 내용은 없어 보였고 수강자들도
대체로 흡족하게 여기는 듯 종료 후에는 박수가 저절로 나왔다.
강의 요약문에서는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아래와 같이 구성하였다.
I. 근대화단의 성립
II. 조선미술전람회
III. 추상미술의 전개
IV. 모노크롬 회화와 민중미술
V. 글로발 시대의 한국미술
위 목차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대체적인 줄거리는 다단한 미술사를 아카데미즘의 학술적 입장에서
다소 보수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점은 강의에서 묘사하는 용어에서도 드러나 보이는
듯하였다.
두 시간의 강의 중 처음에 해방공간까지 하고 잠시 휴식을 가진 다음 1950년대부터 다뤘다.
처음은 당연히 근대의 시작을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시작하였다. 안중식의 <백악춘효>(1905년)를 겸재
정선의 그림과 대비하며 원근법이 적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이하 사진들은 모두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네이버의 검색에 의한 것임을 밝혀둠!]
또한 채용신의 <운낭자상>(1902년)도 조선시대의 그림에서는 불가능한 도상이라며 서양의 종교화에서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과 견줘보였다.
서양 그림의 유입은 성서에 삽입된 중국의 목판화 그림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고 하였고, 이는 과거의
관념산수처럼 그림을 머릿속이 아니라 실제 사생을 통해 그리는 것이라는 인식도 심어주게 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초등교과서에서 야외의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담은 삽화를 보여주며
이런 변화가 대중들에게 널리 자리잡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는 서양의 화가도 와서 그림을 더러
그렸다며,휴벗 보스(Hubert Vos)라는 네덜란드계 미국인이 그린 고종의 초상화는 미국에 가 있다가
국내에 대여해왔었고 지금은 다시 돌아갔는데, 그 화가는 중국에 가서 서태후의 초상도 그렸지만
황제를 그린 그림 같다기보다는 유럽박람회에서 인종 전시관에 전시되었던 것처럼 당시의 제국주의적
시선이 개입된 것으로 보았다.
다음은 실제로 서양화를 공부한 화가들 이야기로 이어졌다.
다 알다시피 서양화의 선구였던 고희동과 김관호 그림을 보여주었다. 특히 고희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며 화가의 자의식이나 당시의 인식을 짚어주었다.
둘 다 1915년의 자화상이지만 왼편은 동경예대를 졸업하며 자화상을 남기는 관행에 따라 남긴 것이다.
고희동은 법어(프랑스어)학교를 나와 주사라는 관직에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그림을 배우러 일본으로
갔으나, 푸른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정자관을 쓴 모습이다. 사대부들이나 썼던 관을 자신에게 씌워
놓은 셈이다. 오른편은 여러 모로 파격적이란 설명이다. 그림만으로는 이것이 화가의 자화상인지 알 수
가 없다. 다만 책을 보고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임은 배경 그림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왼편 상단의 사인도 영문으로 해놓았다. 더구나 초상화라는 형식에서도 이처럼 세모시 옷을 풀어헤치고 가슴팍을
드러낸 예는 파격에 속한다는 말이었다. 고희동 자신은 그럼에도 결국 서양화 공부한 것을 내려두고
동양화로 돌아섰다고 하였다.(이 자화상과 위의 안중식, 채용신의 그림은 작년인가에 모두 문화재로
등록되어 원본 필름이 보존되었다.)
그에 비해 김주경이나 오지호와 같은 그 다음 세대들은 달랐다. 이들은 산수화의 전통으로 쉽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인상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다. 유럽미술사에서 인상주의는 그 자체가 파격이었지만 일본
이나 거기서 서양화를 배운 조선의 학생들에게는 인상주의가 바로 서양화를 배우는 통로처럼 수용되
었다. 하지만 일본은 직접 프랑스에서 가서 배워오기도 하면서 서양화가 정착되는 단계에 있었다.
아래는 오지호의 <남향집>(1939년)이다. 나무 그림자를 파랗게 그렸다!
그 사이 총독부는 1922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를 열었다. 이는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
내지인들의 행사였으나 조선에서 열리는 전람회는 격이 대만이나 만주에서 열린 것보다 높게 여겼
다고 하였다. 김은호나 이상범 같은 채색화와 수묵화를 소개하였다. 이상범은 승경의 경치 위주이던
산수화가 아니라 그저 주변의 평범한 풍경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 새로운 점을 평가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미술계에도 근대화의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김주경의 서울 풍경이나 장우성의
<화실>(1943년), 또 '신여성'을 많이 그린 김은호나 이인성을 예로 들며 설명하였다. 장우성의 그림
에서는 화가의 당연한 듯한 자부심이 배어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근대의 교양으로 독서하는 모습이라든지 음악을 듣는 모습, 그리고 당당한 여성의 모습으로
김인승의 <춘조(春調)>(1942년), 이유태의 <탐구>(1944년)를 보였다.
일제시대에는 선전을 통해 이른바 '향토색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인성, 장우성, 김지창 등의 그림에서
조선의 고유한 풍토와 색채가 나타나도록 그린 그림들을 두고 평론계에서 말이 많았고 이를 해석하는
말들도 많지만, 일단 일본의 전람회로서 그들이 바라는 그림이 바로 조선의 향토색이고 거기에 출품된
그림도 그렇게 보는 것이 맞다는 말이었다. 그 예가 바로 천재화가로 전쟁 직전 비명횡사한 이인성의
<가을 어느날>(1934년)이다. 이인성은 붉은 땅빛을 '적토'라 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보면
조선은 신문명의 세례도 받지 못한 나라라고 알 것이 아니겠느냐는 반격이 가능하단 말이다.
또 한 가지 당시 화단에는 유영국, 김환기를 통해 추상화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단 설명이 있었고, <대중
공론> 잡지 표지화를 보여주면서 프로미술도 잠깐이나마 소개하였다. 러시아혁명 후의 실험적 미술의
영향을 받은 대담한 타이포그라피라고 하였다.
당시 대부분이 미술을 공부할 수 있는 통로는 단연 일본이었는데, 미국이나 유럽에서 공부한 미술가도
있었다. 김대건 신부를 그린 천주교 집안 출신의 장발,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였
다가 전쟁 때 북한으로 간 배운성 예를 들었다. 배운성의 <가족도>(1930년대 전반)는 역시 근래에
문화재로 등록된 작품이다.(아래 그림은 다움까페에서!)
해방공간의 작가로는 이쾌대를 소개하였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48-49년)은 놀라운 자부심
으로 가득한 작품이라며 모나리자의 전형적인 삼각형 구도와 직접 대비하며 비교하였다. 심지어 왼편의
꼬불거리는 시골길을 그린 것까지 같다고!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작품은 바로 <군상>(1948년)이라며, 그림의 부분들 하나하나를 준비해서
그려야 하는 대작이라고 하였다. 이쾌대는 북으로 갔다가 전쟁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피난시 수도인
부산의 미술전시회에도 왔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이런 작품은 모두 80년대 후반 해금조치 이후
에나 알려질 수 있었다.
요약문에서는 이를 '박진감 넘치는 영웅적 누드 군상'이라고 하면서 "이들 작품들은 1948년에 제작된
것으로 정확한 제목이나 주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해방이나 일제 통치, 아니면 사회주의나 반미적
주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라고 애매한 표현만 해놓았다.
다음으로는 이중섭의 <소>를 화면에 띄워놓고 10분간 휴식이었다.
또한 이중섭이 불운한 생애를 마쳤다면, 같은 시기에 배우지 못하고 힘든 생활을 하였던 박수근의 그림
에서는 '소시민'의 모습이 담겨 있고 '노동하는 여성들'이 많이 등장한다고 설명하였다. 오광수나 최열
등의 '서민적 주제'라는 표현보다 훨씬 보수적인 용어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어 보였다. 박수근 그림
으로는 <귀로>라는 아래 작품을 보여주었다.
앙상한 나무가 상징하는 시대의 현실이라든지 팔뚝을 질끈 걷어부친 한복 차림의 아낙네들의 머릿짐
들이 드러내는 힘겨운 일상과 같은 내용적 해석, 화강암 표면과 같은 마티에르 기법 등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작품은 200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65억 7천만 달러(약
6억 5천만원)에 낙찰되었다는 신문기사가 있었던 작품으로, 60년대에 미국인 노파가 입양수속을 하러
왔다가 단돈 20달러에 사가지고 갔던 그림이란 설명이 보였다.
대신 다음엔 박서보 김창렬 등의 앵포르멜운동을 소개하였다. 이때는 미국의 잭슨 폴록의 작품도
화면에 함께 보여주었다. 이들을 통해 국제적인 조류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요약문에서는
훨씬 자세한데, "이들은 구태의연한 사실주의를 계속하고 있는 국전을 못마땅하게 보았고 그들이
체험한 한국전쟁의 경험, 전후의 정신적 방황, 기존 화단의 권위에 대한 불신, 그리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열정이 복합되어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갈구"한 것이라고 하였고 유럽의 앵포르멜이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는 달리 "색채는 어둡고 탁하고 무거웠다"고 하였다.
조각 분야에 대해서도 잠시 김세중의 광화문 이순신 동상 이야기를 하였으나 그 이상의 언급은 없이,
원효로에 쌓여 있던 폐철들을 사용하여 철조각을 하는 것이 근대나 전쟁의 이미지와 닿아 있었다는
말만 했다. 송영수의 철조각 이야기였다.
이어서 최욱경, 김환기, 이응노의 외국 유학 이야기를 하였다.
김환기는 먼저 프랑스로 가 보고서야 우리것, 한국적인 것의 중요함을 깨우쳤다고 하였다. <새와 항아리
>(1957년)을 소개하면서 '달항아리'라는 말도 아마 김환기에게서부터 쓰인 말이지 싶다고 하였다.
원래는 그냥 '백자대호(大壺)'라고 했으니까.(보여줬던 그림을 찾느라 한참 찾았는데, 아래 사진은
갤러리현대의 <김환기전> 도록에 보인 것을 찍은 것임!)
좌우의 둥그런 선은 항아리이고 가운데 빨강의 동그라미는 달이다. 매화가지가 가로지른 위에는 학이
날고 매화꽃 위에는 구름인지 매화향인지 선들이 섞여 있다. 이 푸른 색조는 김환기가 '불법으로' 미국
뉴욕에 가 있으면서도 이어졌다. 훨씬 더 추상화되고 짙은 푸른색의 점으로! 이를 김영나 선생은 '동양
의 수묵적 느낌으로 회귀'한다고 표현하였고 "화면은 작은 점의 파동이 합쳐져 광대한 우주의 비밀
스러운 소용돌이와 에너지를 내재한 듯 보인다"고 표현하였다. 한국화단 최고의 모더니스트였던 그는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최근 이충렬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는 탄생 100주년 기념 평전은 부인 김향안이 바로 이상의 애인이었던 변동림이었다는 '폭로'와 함께
타계한 정황에 대해서도 상세히 서술하여 환기미술관과 갈등 속에 소송까지 걸려 있다).
박서보, 윤명노 등의 중성적 색채를 쓴 모노크롬 이야기도 잠시 하였고, 그것이 "서양미술의 추종일변도
에서 좀더 동양적인 과묵한 색채와 뉘앙스, 극소의 표현을 함으로써 전통문화에서의 자연과 정신성,
수묵회화, 문인화의 정신을 계승하였고 이것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한국적 모더니즘의 모델로 평가'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들 그림은 내겐 관심 밖이었다.
대신 민중미술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는 귀가 솔깃하였다. 우선 그 특성으로 "주제와 서사성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구상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 "민족적 전통의 형식으로 민화, 불화, 목판, 걸개그림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주제를 현실 비판과 민중을 주체로 하는 역사의 재해석이라
하면서도 굳이 '반미적 성향'을 지적하며 "현실을 풍자하고 야유 경멸하는 점"이 핵심이라고 표현한
점이나, 오윤의 <지옥도>(1980년)에서는 그림 속의 칼찬 사람들이 바로 '현실과 발언' 그룹들인 누구
누구라고까지 해석(!)까지 해보이는 등 다소 엉뚱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 지적도 하였다.
아래는 오윤의 그림과 임옥상의 <보리밭>(1983년), 보안법에 걸린 신학철의 <모내기)(1987년), 그리고
괘불에서 형식을 따온 것이라고 말한 걸개그림으로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1987년)이다.
최병수의 걸개그림은 요약문에서 '아직도 일반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으면서도
강의에서는 다른 그림을 보여주었다.
강의에서는 마지막으로 백남준의 천재적인 비디오아트부터 현재의 강익중, 김수자, 홍경택, 사진작가인
김아타 등에 이르기까지 글로벌화한 시대의 눈에 두드러지는 작가들 이야기로 마무리 하였다. 요약문
에서는 '글로벌시대'라고 표현하였다. 끝나고도 질문 시간은 없었다.
개괄적인 설명의 흡족함 이면에서는 미술사를 다르게 본다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우선 해방공간에 월북하게 되었던 미술계 인사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좁아 보였다. 한국미술사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근원 김용준 같은 사람은 언급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돌이켜 보자면 김영나 같은 사람의 입장은 70년대를 해외유학으로 보내고 들어와서 80년대의 격동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고가 편견으로 굳어진 전형적인 스타일이라 여겨졌다. 이들의 일차적인 기준은
외국인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한국인이 드러내는 과격함이라든지 당시 파괴적인 면모를 현실 속에서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쉽게 외부인의 시선으로 단정해서 보고 표현한다는 점이다. 민중
미술을 '집단적 사회비판 미술'이라 표현하면 일단 학술적으로는 접합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회적
의미나 역사적 이해를 따지면 미술사관 자체가 함께 거론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작품을 놓고
보자는 소리도, 또 자본주의 시대에 미술시장에서 잘 팔리는 그림이 대세 아니냐는 말도 다 같은 범주에
속하는 소리일 것이다.
나는 우리 근현대미술사를 공부하면서 젊은 연구자들의 열정에 감동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근대
미술이 걸어온 길은 이제 비로소 그 결들이 펼쳐지고 해석되는 중이다! 아마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한국미술사는 이전 세대를 넘어서 더 깊고 포괄적인 면모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 논쟁과 마찬
가지의 판인 셈이다.
특히 앞서 이쾌대나 박수근의 평가에서도 보인 것처럼, 우리가 겪은 과거의 식민지 경험과 동족간의
전쟁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점이 훨씬 더 깊이 연구되고 파헤쳐져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근대를 거쳐오며 우리 미술에 대작다운 대작이 없었던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이기 때문
이다. 위에 등장하는 그림들만 보자면 후손들은 어쩌면, 역경의 일제강점기를 겪었다고들 하지만 뭐
살 만하였네?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말이다! 미술 분야에서는 우리 역사의 이 부분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그래서 해보게도 된다. 오늘 김영나 관장의 강의에도 우리의 근현대
미술사에서 어쩜 가장 있을 법한 이런 물음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중국미술을 공부하며 장조화(蔣兆和:1904-1986년)의 <유민도(流民圖)>(수묵담채. 200 X 1,202cm. 1943년. 중국미술관 소장)와 같은 눈물나는 감동의 대작을 보고, 왜 우리 미술에서는 이런
작품이 나오지 못했을까 매우 궁금한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참에 여기 올려 보니 함께 감상해
보도록 하자. (바로 아래 왼편은 나중에 다시 채색한 그림의 전체 모습이고 오른편은 장조화 모습이다.)
원본은 아래와 같다. 대단한 거폭의 그림이므로 오른쪽에서 왼편으로 이어가며 봐야 한다.[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중국 바이두(百度) 사이트에서!]
중국인민들이 항일전 시기에 겪었던 비애와 고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지 않는가?
[제1회 강원도/돗토리현 미술교류전]
박물관에서는 마침 10/12~10/17일까지 강원도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하는 "제1회 강원도/돗토리현
종합미술교류전"이 있어 들러서 둘러봤다. 일본 작가들이 나이 지긋한 세대라면 강원도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많아 보였다. 일본 측에는 공예품들이 많았고 서예작품도 있었던 데 비해 강원도측에선
서예는 보이지 않았고 회화나 조각 작품이 많았다.
아래는 문화재단 입주작가라고 도록에 소개한 조경훈의 <black eye!>란 재미난 아크릴 작품이다.
아래는 방산의 정두섭 양구백자박물관장 작품이다.
로비에는 또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문화재 그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첫댓글 궁금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림을 직접 보여주는데 의미가 있으므로 강의중에 본 그림을 인터넷에서 찾아 올리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 생각 아래 고르고 골라 선별해서 올린 그림들이란 점도 염두에 두고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