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집
나의 고향은 나주시내에서 4km 정도 떨어진 산골이다 나주에서 넘어 갈려면 '맛재'라는
재를 넘어서 우리마을로 들어선다. 읍내하고 떨어진 산으로만 둘러 쌓인 산촌이다.
봄이면 진달레가 지천으로 피고 머언데서 꿩소리가 들리고 토끼도 겨울철이면 사냥을
다니기도 하였다. 길이라고 하면 돌뿌리에 걸리고 풀들이 무수히 나 있는 산길을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중.고등학교 까지 책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때 어려운 시절이라 시골에서 나주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다니는것은 상당히 교육열이
있는 집안이었다. 외가집에서 주신 논.과 밭 살아가는 삶의 원천이다.
우리집은 땅은 선영땅 위에 할아버지께서 집을 지으시고 자녀들을 두시고 한 평생을 살아오신
것 같다. 집이라고 하여 보아야 상당히 큰 집이지만 초가집이다. 주위에 우리 집안의 집성촌이다.
주위에는 대대로 내려 오는 선산에는 윗대부터 차례데로 묘지들이 있어 항상 가을이면 시제를
지내는 일이 제일 큰 일이다.
선산주변에는 윗대 할아버지의 묘소들이 차례데로 주욱 이루어져 언제나 산소를 관리하는일
이 제일 큰 일이다. 물론 '산지기'라는 관리를 하는 집이 있지만 후손들은 이 일이 제일 큰 일이다.
전부 마을이 광산김씨 집안의 종가집을 위시하여 큰집 작은 집 당숙네 집 다 그렇게 마을이 이
루어지고 있다. 어떤 당숙모는 땅은 한 마지기도 없어 문중의 논을 벌어서 살아 가시는 것이다.
그것도 천수답이다. 하늘만 쳐다 보면서 농사를 지으시는 것이다 . 일년에 문중에다 그 사용료를
내야한다.
이러한 산골의 우리집은 비록 선산의 선영땅에 집을 짓고 살지만 집주위가 대나무로 쌓여 있고
살구나무도 있고 ,앵두나무도 있어 우리들에게 곧 잘 간식 거리이기도 하다. 사랑방이 있는 동쪽
으로 크나 큰 감나무(대봉)가 두주가 아주 크게 커서 많은 감이 열리면 우리집은 아주 풍요로운
집안처럼 마음이 든든하다 .이게 나의 등록금의 밑천이다.
삼밭사이에는 보리앵두로 아에 울타리를 하여 그곳에 보리앵두가 주황색처럼 익어가면 나는
학교에 갔다 와서 이곳에서 나혼자 실큰 따 먹고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하였다. 고등학교때에는 감
나무밑에다 평행봉과 역기를 만들어 놓고 건강한 신체를 다지곤 하였다. 감나무 주변에는 머
우대가 상당히 많이 있어 가끔 나물로 먹기도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그 머우대를 즐겨 먹는다.
비록 학교에 갔다오면 소깔을 지게를 지고 풀을 베로 다니지만 당연히 하는 일로 생각하고 소죽을
쓰고 하여 소를 길렀다. 소를 기르는 외양간에는 눈을 크게 뜨고 껌벅거리는 황소는 우리 집안의
커다란 재산이다. 나는 커서는 아버지하고 사랑방에서 공부를 하고 잠도 같이 자곤 하였다.
학교에 다녀 와서 소깔을 베고 소죽을 써 주고 저녁 밥을 먹고나면 책상에서 졸리기가 일쑤이다.
아버지는 내가 잠을 못자게 만들고 공부를 하라는 표시로 계속에서 화투페를 맞추시면서 나를
잠을 못자고 공부를 하라고 무언의 강요를 하신다. 그런데 나는 이미 눈껍풀이 까칠 해 지면서
잠이 오고 있다. 그래도 중학교때 이미 서당에서 천자문을 다 배웠으며 지방이나 축문을 한문으로
쓸정도가 되었으며 ,고등학교때 산골에서 한국일보와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알수는
있었는거 같다.
나는 이러한 농촌의 환경에서 커서 자랐고 공부를 하기 위하여 나주로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니
나는 그 순진무구한 마음씨는 여기서 자란 토양일 것이다. 사시사철 소나무와 대나무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봄이면 진달레꽃이 피고 개천가에 메어둔 송아지가 움메하며 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실개천에서 흐르는 맑은물을 바라보며 가재를 잡기도 하였으며 이웃 마을의 영애도 그리워 해보고
사랑하는 마음도 생겼을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마음이 나의 노후에 문학을 하는 토양이 되고 서정적인 감성을 갖게 되기도 하였으며
맑고 티없는 젊은 청소년기를 맞이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서는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본다.
첫댓글 1960년대 70년대는 거의 비슷한 농촌풍경이 그랬을거 같아요
유리조각 줏으러 다녔던일
송충이 잡으러 다녔던일
무우꼬랑지에 잿물묻혀서 쥐 꼬랑지라고 거짓말하고 학교에 제출하던일,..
아니 무꼬랑지~쥐꼬랑지~
그런. 거짓말을~
놀람~댓글 읽다가~ㅎ
감사합니다
그때 가난하고 살림은 어려워도 그래도 그때가 좋았더거 같습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되어 살기는 좋은지는 몰라도 인간미가 없고 물질이 더중시되는 사회]몰인정한
사회가 너무 합니다
농촌 풍경이 그대로
그려지네요.
아름다와요~
감사합니다
간나해도 그때가 좋았습니다 부모님의 밑에서 편안히 즐겁게 살았던
추억이 아름답습니다
참 정감이 가는 집이애요 ㅎㅎ
농경사회는 정이 있는 사회이지요
그때 그시절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옛날 농촌의 부자집이 연상됩니다.
자랑스럽고 행복한 추억 소중 하시겠어요
아름 답습니다.
아이구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유실수를 많이 심어 항상 따먹고 지냈던 추억이 아주좋습니다
@만장봉 가난했다면 중등학교와 고등학교를 어이 보낼 생각도 못하셨을 거예요~
그정도면 부자 맞 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지금의 젊은이들하고 차원이 틀림니다 그만큼 순수하고
정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작금이야 부모들이 이혼하고 각박한 사회가 되니
젊은 이들도 각박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저희들은 농경사회에서 정겹게
살아서 부모님을 모셔야 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골냄새 물씬물씬
선배님 글속에 향수가
짙게 배여있습니다..
아버님의 화투놀이로 아들을
감시하는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하두 사회가 각박한 사회가 되어가는것같아
카페에서도 이러한 순수하고 정적인 글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어린시절을 회상하여 보았습니다 사회가 인간을 만든다고 너무나 각박한 사회
이혼과 초고령화 사회 , 부모가 애완견보다도 대접을 못받는 사회 .........
정말 집에 책한권없고 공부를 제대로 할수가 없는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의 도서관이나 책을 보니 눈이 확떠 올랐습니다 시야가 틀린것이지요 감사합니다
화려한 꽃 모란 와 넘 좋은데요
사진이 살아 있습니다
모란 작약 넘 좋아요
고향집 울타리만 봐도 좋다잖아요
그야말로 시골이였지만
어릴적 동심을 그대로 간직한 고향이 있음에
좋겠습니다
고향 없던 있던 시골에 아담하고 고풍스런 집한채 있음
휠링도 되고 좋겠어 마음 한구석 그냥 희망으로 담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그러데요 못산다고 채소라도 자급자족하려면 일해야되는데
힘들어 못살것이라구 이것들이 날 뭘로보구 ㅋㅋㅋ
고향 소개와 소식 감사드려요
한주간 열렸으니 매일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저기 저집은 강진에 있는 영랑의 생가입니다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를 써서 우리들에게 일제의 식민지의 지배에 있었던
가슴아픈 시를 이 모란에 비유하여 명작이 되었지요
고향과 농촌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의 토양입니다 감사합니다
서울 꼬방동네 출신보다
백배는 행복한 금수저이십니다~^^
서울의 문화속에 공부는 못했어도 마음만큼은 여유롭고
편안한 부모님들의 밑에서 자랐으니 행복했습니다
그러한 구김살없는 나의 삶이 서울시민의 봉사를 할수있는 공직으로 그리고 노후에는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 만든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겐 어린 시절 춥고 배고픈 고향의 기억뿐 건져 올릴거라곤
조밥 덩이처럼 부스스한 풍경이
고작
제 글의 소재로도 전혀 미화
시키고 싶지 않은 원망같은 앙금
고향이 그리운 모든 이들에게
늘 부러움 가득했던 날들
이제 세월이 쌓인 제 모습이
궁상스런 그 시절과 오버랩 되어
지니 살아온과정이야어쨌든지
늙은 육신의 모습은 고향과 닮아
가는 듯합니다.
운선작가님 .....
젊은날이 어려운 삶을 살으셨으니 그 환경의 지배를 받지요
그러나 그러한 삶이 한의 풀이로 그 정한을 작품으로 승화를 하시는것 같습니다
글이란 배부르고 편한 삶을 가진분들에게는 찾을수가 없고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서
삶의 고난을 헤쳐나온사람만이 글로 그 한을 풀어내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골에서 자란 분들이 감성도 풍부하시고
추억부자들이 많지요.
만장봉님의 글을 즐겨읽다보니 제 이웃사촌같이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베리꽃님의 주고받은 대화는 정감이 가지요
이제는 상당히 긴세월이었으니, 꼭 사촌여동생같은 정도 ...ㅎㅎ
만장봉 선생님의 고향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뻐꾸기와 꾀꼬리가 울어대던
밤이면 접동새(소쪽새)가 울어대던
그 고향.
바람개비나 굴렁쇠를 굴리며 내달리던
실개천 뚝방길에서 만나던 고추 나마리(잠자리).
정겨운 고향의 풍경이었지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농촌에서 살때가 좋았던 생각이 듭니다
이웃도 있고 한마을에서 서로 정감이 있는 서로 주고 받은 정 ,특히 같은 친척들이라
굉장히 다정했습니다 작은집, 당숙 그리고 형님들 누나들 .....
할아버지의 형제간이 3집이나 되어서 수많은 친척들이 오손돈손 살았슴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저의 고향도 저 아랫녁 바닷가 쪽이라
지지리 궁상맞은 못사는 동네지만 그래도 바다가있고 산이 있고 논 밭이 있는 고향 생각이 납니다
고향은 잊을수가 없지요
비록 가난한 삶이지만 그가윤데에 추억이 있고 .....
감사합니다.
유년시절 말씀대로
한폭의 풍경화 같은곳
좋은곳에서 지내셧군요.
요새는 집성촌도 거의
잊혀져가고 또 시제 묘제
지내는 풍습도 거의 없어
졋지마는, 고향에서는
아직 전통 풍속이 이어져
가고 있는 모양 입니다.
인제는 합리적인거 보다
불편하고 번거럽지만
고유의 옛풍속이 그리워져
갑니다.
대리만족 잘하고 갑니다.
늘 건강 하세요~
금박산님....
감사합니다 이제사 글을 보았습니다
유년의 추억을 한번그려 보았습니다 이제는 농경사회의 미풍양속도 거의 사라지고
삭막한 농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