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책속의죽비소리 - (1449) 행복이 머무는 자리 - ④ 행복한 삶은 어디에서 오는가/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김형석

[화룡이(이창모)]

행복이 머무는 자리

티스토리/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④ 행복한 삶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교수 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모두 가난하게 살았다. 재벌 총수나 정치가들이 본다면 웃음거리도 못 되는 비자금을 가지고 아내들과 희비극을 벌이면서 살아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대학 신문의 편집을 맡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학생 기자들에게, 학교에서 원고료가 나오면 지체하지 말고 필자 교수들에게 전해드리라고 당부를 했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부작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 학생이 신과대학의 K 교수님에게 고료를 드리러 갔는데, 연구실 문이 잠겨 있었다. 그 학생은 옆방에 있는 E 교수님을 찾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E 교수는, “저 언덕 뒤 사택에 사시니 직접 전달하면 되겠다”라고 가르쳐주었다.

학생이 K 교수댁을 찾아갔더니 사모님만 계셨다. 사모님께 원고료를 가져왔으니 받으시고 영수증에 도장이나 사인을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설명을 드렸다.

사모님은 “대학 신문에도 고료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학생은 많지는 않지만 고료는 꼭 지불한다고 대답했다. 사모님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도장을 찍어주고는 “전에도 고료를 드리곤 했나요?”라고 확인했다. 물론 학생은 “네, 교수님이 직접 찾아가신 때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그날 늦게 K 교수가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따져야 할 일이 있으니, 거기 좀 않으세요.”

아무 것도 모르는 K 교수는 “무슨 일인데요? 애들은 다 돌아왔어요?”라고 물으며 자리에 앉았다.

“대학 신문에 고료가 있어요, 없어요?”

대뜸 따지고 드는 아내의 말에 K 교수는 속으로 ‘큰 사건은 아니로구나’ 생각하고는 시치미를 뗐다.

“우리 대학인데 교수에게 무슨 고료가 있나? 학교 밖의 사람이 썼다면 모르지만……. 그런 건 없어.”

딱 잘라 대답하는 K 교수에게 아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받은 적 없지요?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라고 재차 물었다. K 교수는 돌아서기에는 늦었다는 생각에 얼른 답을 던졌다.

“별걸 가지고 다 야단이야.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걱정 마.”

K 교수는 옷을 벗으려고 일어서는데, 아내가 그를 말렸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보여줄 것이 있으니까…….”

아내는 영수증의 한쪽을 내밀었다.

물증이 나오자 K 교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건성으로 “그거 참 이상하다. 그런 일이 없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면서 얼른 자리를 떴다. 화가 치민 아내는 “다른 교수도 아니고 목사님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다음 날 학교에 온 K 교수는 자초지종을 짐작하게 되었다. 나에게 전화를 걸더니 아내에게 혼났다는 얘기를 하면서, 자신 같은 경우가 또 생길지 모르니까 학생들에게 본인에게 직접 전달하도록 주의를 주라는 부탁까지 해왔다.

지금 K 교수는 정년을 넘기고 지방 모 대학의 총장직을 맡은 지 오래다. 총장이 된 지금은 고료를 가지고 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몇 푼 안 되는 고료를 가지고 아내와 말다툼을 하던 그 시절의 행복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혹시 손자들에게 우리는 그때 그렇게 살았단다, 라고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손자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중에 누가 이겼어요?”라고 물으면 “죄 지은 사람이 지는 법이지……”라면서 온 가족이 웃었을 것 같다.

고려대학교의 조 교수는 널리 알려진 경제학자다.

어느 날 그는 대학 후배도 있는 자리에서 하소연을 했다.

“요사이는 비자금을 숨길 곳이 없어졌다니까. 바지, 시계 주머니에 두었다가 들켰지, 사전 속에 숨겨두었는데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또 빼앗겼지, 감출 곳이 없어.”

대학 후배였던 정 교수가 말했다.

“좋은 곳을 가르쳐드릴까요? 모자 안쪽 땀받이 테두리에 돈을 접어 넣으면 감쪽같답니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모자를 쓰고 다녔다. 조 교수는 웃으며 말했다.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 그 방법을 써봐야겠군. 마누라가 한두 번 찾아내더니 이젠 도둑 잡는 형사같이 그 연구만 하는 것 같아.”

얼마가 지난 뒤 몇몇 교수가 다방에서 함께 차를 마시게 되었다. 누군가가 찻값을 내야겠는데, 정 교수 생각에 선배인 조 교수의 모자에 비자금이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조 교수가 화장실에 간 틈에 그의 모자 땀받이를 보니 지폐가 몇 장 들어 있었다. 한쪽에 있는 지폐 두 장을 빼 가지고 있다가 정 교수가 계산대로 가며 말했다.

“오늘 찻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다른 교수들이 “혼자 내면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라고 말하는데 조 교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후배가 내는 것이 좋겠어.”

그리고 한 달쯤 지났다. 조 교수가 정 교수에게 와 투덜댔다.

“또 들켰어. 모자 안까지 뒤질 줄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쪽 것만 빼내고 다른 쪽의 돈은 그대로 두었단 말이야. 이거 안 되겠다 싶어 나머지는 양말 속에 넣고 다녔지.”

정 교수는 웃음이 났지만 내가 그랬다고 할 수도 없고, 사모님께 들킨 것으로 믿고 있는 선배에게 계속해서 숨기기도 애매했다. 언젠가는 찻값을 도로 넣어주려고 했던 계획도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나한테 그런 사연을 털어놓은 정 교수는, 후에 그 사실을 밝히면서 선배 교수에게 저녁 대접이라도 했을 것이다. 선배의 돈으로 생색을 내고 모르는 체할 정 교수는 아니니까.

그다음부터 조 교수의 과에서는 과장실 조교에게 비자금을 맡겨놓고 찾아서 쓰곤 했다고 들었다. 사모님들은 당신네들끼리 또 연합작전을 펴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방법을 연구해냈던 것이다.

조 교수와 대학 동기였던 S 교수를 얼마 전에 만났다.

“요사이는 밖으로 외출하는 일이 많지 않으시지요? 역시 연세가 높으시니까.”

내 인사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박 대통령이 유비무환이라고 했는데 내가 그만 실수를 했답니다. 정년퇴직 이전에 비자금 통장을 하나 만들어두는 건데……. 믿을 사람은 마누라밖에 없으니 재정권을 다 맡겼지요. 그런데 주말마다 주는 용돈이 계속 줄어들더니 요사이는 택시 탈 돈도 안 주는 거예요. 그렇다고 아들이나 며느리한테 달랄 수도 없고. 수입이 있을 때 비자금 통장을 꼭 만들어두는 건데, 잘못했단 말이야. 경제학과 조 교수는 역시 경제학을 해서 그런지 비자금을 장만해두었다는군요. 그러니까 마누라한테 구걸하지 않아도 되고.”

S 교수는 짐짓 조 교수를 부러워하는 느낌으로 말했다. 웃는 모습이 청소년기의 밝은 표정을 그대로 풍기고 있었다.

요사이 직장인들에게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이야기다. 더욱이 돈 많은 사장들이 들으면 잠꼬대하느냐고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가난했기 때문에 행복했던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다.

그즈음, 서울대 문리과대학에서는 월급날이 되면 회계과 입구에 내역이 인쇄되어 있는 빈 봉투가 수십 통씩 따로 비치되어 있었다. 월급을 미리 가불해 썼기 때문에 집에 빈 봉투를 들고 들어섰다가는 체면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더 주요한 목적은 비자금을 떼어내기 위해서였다. 지급 항목에서 얼마씩 빼내고 다른 액수를 써넣어 아무도 눈치 못 채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옆집에서 가까이 드나드는 친구들은 항목과 액수를 사전에 맞추어가면서까지 비자금을 장만하곤 했다.

내가 있던 대학의 K 교수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살았다. 외국인 부인과 함께 귀국에서 우리 대학으로 부임해왔다. 그 당시에는 25일이면 월급봉투를 들고 집으로 갔다. 강의가 없는 교수도 그날은 모두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다. 월급 때문이었다. 교수 회의는 그날에 하면 출석률이 가장 좋았다. 안 나오는 교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경험을 처음 해본 K 교수의 이야기다.

“독일에 있을 때는 월급이 직접 은행 통장으로 들어오니까 마누라가 먼저 차지하고 나는 얻어 쓰는 신세였는데, 요사이는 월급날만 되면 마누라가 친절하고 곰살맞게 군다니까요. 한 달 내내 기를 펴지 못하고 살다가 25일만 되면 어깨를 펴고 큰소리 한번 쳐보는 재미가 괜찮아요. 월급 타고 사나흘은 마누라가 꼼짝 못하거든요.”

역시 한국식이 최고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비자금 빼내는 방법을 가르쳐준 모양이었다. 몇 가지 방법을 들은 K 교수는 슬그머니 비자금을 장만해 과 조교에게 맡겨두고는 필요할 때마다 찾아 쓰곤 했다. 그 비자금 덕택에 나도 몇 차례 커피를 얻어 마시곤 했다.

그런던 것이 몇 해 뒤부터는 우리 대학도 통장에 급여를 입금시키는 제도로 바뀌고 말았다. K 교수는 섭섭한 듯이 웃으며 말했다.

“독일식이 되어버리면 한 달에 한 번씩 어깨를 펴고 들어가던 권위가 사라지겠는데…….”

지금은 그도 정년퇴직을 하고 평소 염원해오던 번역에 전념하고 있다. 아마 지금은 비자금이 필요 없을 것이다. 생활수준도 높아졌고, 부인도 한국식 풍토를 잘 알기 때문에 그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부인에게 전에 있었던 비자금 사건을 알려주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비밀을 지키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지금은 교수들의 사회적 지위가 자리 잡혔고, 안정된 봉급생활을 하며 65세까지 생계가 보장되니 사모님들의 불만도 적어졌을 것이다.

요즘 TV나 신문에는 온통 돈벌이 이야기뿐이다. 신지식인은 돈 버는 방법을 창출해내는 기술자들로 바뀌고 말았다. 그렇다고 지금 활동하는 사람들이 비자금을 숨기면서 살던 그 세대의 지성인들보다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때로는 가난했어도 행복했던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가난했어도 돈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던 생활이었다. 물질적으로는 아쉬움이 있었어도 정신적 풍요로움을 만끽하면서 살던 시절이었다. 돈을 버는 신지식은 아니었어도, 사상적 뿌리를 잃지 않았기에 목적 없이 갈팡질팡하는 정신적 빈곤은 없던 삶이었다.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한 삶은 물질적 빈곤 속에서 정신적 부를 창출해내는 일이었다. 그것은 적게 소유하더라도 많은 것을 나누어줄 수 있는 값진 인생이었다. 그 뜻이 있었기에 오늘의 물질적 풍요함이 열매 맺지 않았을까. <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김형석, 열림원, 2023.)’에서 옮겨 적음. (2024. 6.17. 화룡이) >

[의초 이정석]

가장 행복한 삶은 물질적 빈곤
속에서 정신적 부를 창출해내는 일이었다.

동양 철학은 인격을 높이는 것이
더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화룡이(이창모)]

오늘의 물질적 풍요가
어디서 왔는지 알 듯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