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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반백년 인생이 지역에 대충 드러난 이상 시나브로 반낮에, 보완된 소설하나 올려드립니다>
막시무스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가평군의 깊은 산골이었습니다. 말이 경기도지 실은 붙어있는 강원도의
산세와 비슷해서 사람들은 경기도로 보지도 않는 곳입니다.
부모님은 막시무스를 포함하여 1남3녀를 두셨습니다. 막시무스가 사내녀석이니 밑으로만 여동생 셋을
둔겁니다. 그러다보니 할머니가 막시무스를 애지중지하여 씹으시던 콩조차 입으로 넣어주시곤 했습니다.
아버님은 막시무스가 태어나던 60년대 중반부터 반농반잡의 일을 해오셨습니다. 잡이란 시골 이장일을
줄창 해오신건데 박통시절 내내 그일을 해왔다고 보면 얼추 맞을것 같습니다. 막시무스가 국민학교
(현 초등학교)시절 새마을 운동이니 뭐니를 아버지가 동네에서 추진하던 것을 내내 보아 왔으니까요.
아버님은 호연지기가 컸던 분인것 같습니다. 일제 보통학교 두어해를 다닌게 면학의 전부이지만 17세에는
홀로 만주를 향해 갔더랬습니다. 속뜻이야 독립군을 향한 행보라고 하시지만 내용은 만주의 마적떼와
어울리셨는지 흑룡강이나 길림즈음의 주먹패거리와 어울리셨는지는 알길이 없고 당시에 벗들과 의리로
어깨에 같은 용문신을 했다고 한 것을 어려서부터 막시무스가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6.25 전란시 동네에 경성제대 다니던 형과 어울리다 그 형이 월북하자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가
(그 동네형은 월북했다고 합니다) 결국 인민군이 동네를 점령했을때 의용군으로 끌려가셨답니다. 동네에서
몇몇이 끌려갔는데 전란중 도망을 치셨다는군요. 동네에 와서 다시 국군을 지원하여 명예를 회복하려고
하셨던것 같습니다. 혈서로 당시 군수에게 요청했다고 하셨습니다. 예전 사진을 보면 꺽기 계급이 두어개
있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아마 부사관 즈음 하시고 제대를 하셨나 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불같은 격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막시무스의 숙부가 제사에 불참했다고 50줄에 들어선
동생을 60줄에서 작대기로 두들겨 패주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그럴때는 꼭 미친사람 같았습니다.
막시무스가 인근의 청평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처음으로 막시무스에게 책을 선물했습니다.
'맥아더 회상록' 이었습니다. 막시무스의 외갓집이 인천이었는데 아버지가 막시무스를 처음 인천에 데려
갔을때 자유공원으로 데려가 맥아더 동상 밑에서 주변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로 그 동상에 새겨진 비문을
크게 읽어보라고 시킨적도 있습니다. 눈은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분이셨습니다. 90이 다된 지금도 그러합니다.
중학교 입학후 어머님은 큰 결단을 내리십니다.
막시무스보고 인천으로 같이 올라가서 공부하자고 하셨던 겁니다. 동생 세녀석은 이미 가기로 결정을 한
모양입니다. 한치의 고민도 없이 막시무스는 안가겠노라고 했습니다. 아마 낮선 환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동생들보다 더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우선 동생 둘을 먼저 데리고 올라가셨고 막내 녀석은
한두해 뒤 아버지와 더불어 올라갔습니다.
막시무스는 청평중학교를 졸업한뒤 가평종합고등학교로 진학합니다. 친구들이 이미 형성되었던 시기고
당시 철도공고등 공업계 고등학교 열풍이 적지 않았던 때라 아버지도 왠만하면 그쪽으로 가길 원했던것 같았
는데 담임선생님이 어머니를 설득하여 인문계로 진학하게 된겁니다.
고등학교 예비소집일부터 텃세를 부리던 아이들로부터 같은 중학교 친구들과 더불어 집단으로 동산에
끌려가 집단으로 구타를 당하기 시작한게 고등학교 출발시점입니다. 열명 남짓이 삼사십명에게 둘러쌓이니
별볼일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다 지나가고 3학년이 되어도 이과반 아이들이 차지를 않아 이과 지원만 해놓고 제대로
수업을 받지 못하다가 3학년 되어서야 강력한 요구에 의하여 이과반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무렵 막시무스는
'삼국지'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시중에 나온 국내 문호들의 출간서를 두루 아마 몇회독씩은 한것 같습니다.
고3때 독후감을 쓰다가 맨 마지막 글귀로 "큰 잔에 가득부어 다시한잔 취하리.." 라고 썼다가 국어 선생님에게
교무실에서 귀싸대기를 쳐맞은 다음 귀를 붙잡히고 교무실의 여러 선생님들이 다 들릴 정도로 '이녀석 글쓴
것좀 보세요' 라고 감탄인지 질책인지 모를 소리를 듣다가 나중에 교지에 올라간 내용을 보니 그 문장은 결국
선생님이 자의로 수정하여 고쳐버렸더랬습니다. 박종화 삼국지가 가장 맹랑하고 정비석 삼국지가 단출합니다.
나중 이문열의 평역 초판은 습자지로 형편없는 출간을 했었는데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무렵 군웅에 대한 환각이 막시무스를 사로잡게 만들었지 않았나 생각되어집니다.
그는 진로 목표를 육사로 정했습니다. 3학년때 해사를 지원했던 놈과 더불어 마지막 여름방학을 둘이 산속에
움막을 짓고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이 둘은 나중에 같은 대학을 진학하고 같이 학사장교를 지원합니다.
연좌제가 남아 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때 정했던 군을 향한 동경은 이후 대학을 졸업할때까지 유지
되었습니다.
인근의 춘천 강원대학교 공과대를 진학할 무렵 막시무스는 역시 담임 선생님의 학과 추천을 그대로 지원
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고등학교 3년을 통학했던 상황이 계속 이어지다가 할머니와 친구와 자취까지 해보기도
했습니다. 국립이라 학비가 저렴하기도 했지만 장학금 수혜가 넓어 4년간 학비로 나간 돈은 있는듯 없는듯
했습니다. 반농반잡 일을 하시던 부모님이 자녀 4명을 셋은 인천으로 조기유학까지 보내고 모두 대학을 보내
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유학갔던 세녀석중 둘은 인하대에 입학했고 막내녀석은 좀 특출나
서울대를 진학하였더랬습니다. 국립대를 간 고녀석도 기특하게 거기에서도 내내 장학금을 타내었습니다..
막시무스가 대학 4년을 회고할때 아쉬운것은 도대체 스스로 즐기지 못한 부분 때문입니다. 축제나 미팅에
나아가 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것 같습니다. 대신 술과 철학적 논쟁에는 강점을 세워 나간것 같습니다..
20대 청춘이 다가도록 여인을 멀리했던 정서는 다분히 아버지 영향이 있었던듯 합니다. 어린시절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드리워졌던 장막중 하나가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전 깊은 관계셨던 어느 여자분의 일이
막시무스가 어려서 드러내져 버렸던 겁니다. 막시무스가 국민학교를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 집으로 돌아
오는 길목에는 항상 어느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다가 무언가 사서 주시곤 했습니다.
통학길은 걸어서 40분~1시간 정도 되었습니다. 매일 그렇게 걸어서 등교와 하교를 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도 그런 관계를 모르시고 결혼을 하셨나 봅니다. 아버지가 그 여성분과 살림까지
하셨었고 아이를 가지지 못했었나 봅니다. 사실혼이 어머니와 결혼전에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는 그걸
어머니에게 속이고 결혼했던겁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몰매맞을 일이지만 그당시는 뭐 그런 이들이 왕왕했나
봅니다. 그당시 그일이 밝혀지고난뒤 집안은 영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분이 아버지를 대하는 면이 또 지고지순함이 있어 동네에서 떠나지도 않고 멀지않은 곳에
사셨더랬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는 언제 아버지가 그집에 갔니 아니니로 속을 끓이셨을게 뻔합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데리고 유학을 친정쪽으로 시킨다고 데려가시려고 했던 어머니 속내야 알만한 거지요.
어쨌든 그때 막시무스에게 이미지 각인된 것이 "여자란 요물이다"..라는 편견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대학 4년 내낸 미팅한번 여자 한번 안사귀어 본것은 돌이켜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어찌어찌 먼저 접근해오던 여학생들조차 외면하고 무시해버리기 일쑤였으니 병적인데가 좀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막시무스가 그당시 국민학교 앞에서 무얼 사서 기다리시던 그분의 차례상까지 올립니다.
세월이 막시무스를 많이 교화시킨 것은 맞습니다..
군에 대한 동경이 작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rotc(학군)에 지원하지 않은 것은 간단합니다.
캠퍼스를 제복으로 물들이는 광경은 보기 좋지 않았습니다. 왜 자유와 면학의 전당에 제복이 때를
입히나 싶었습니다.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성적 조건이야 문제될 것이 없어 학사장교에 지원해습니다.
원스타 면접관에게 과거 육사를 지원했던 일이며 아버님의 전력이며를 소상하게 말했는데 고3때 남아있던
연좌제에 대한 의혹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꼭 허락이 되어야만 하는 개인적 포부를 밝혔습니다.
2대독자이면서 징집대상으로는 6개월 보충역이면 될일을 그렇게 막시무스는 육군장교의 훈련을 거쳐
소위로 임관합니다. 전공관련 야전포병을 지원하였고 전투병과 학교에서 포병전술을 읶힙니다.
87년도에 임관하고 그해 가을녘 막시무스는 파주로 부임됩니다. 지금의 곰시(마지리)일대 철책사단
야전포병 대대입니다. 대학때 병영체험을 동부철책 양구에서, 소위 임관후 소대장 실습을 중부철책
백골사단에서, 그리고 부임지를 서부 철책전선으로 받았으니 휴전선 동부와 중부,서부 일대를 다 돌은겁니다.
선배들의 술집을 통틀어 빌린 신고식과 취중에 부딪친 여인들이 허무하게 시작된 막시무스의 여인 연계사
시발점입니다.
비무장지대 안의 GP근무 자원을 하여 몇개월 고립상태로 지내보기도 했었고 포병여단으로 차출되어 작전
상황실 브리핑을 전담하기도 했는데 GP에서 간간히 방문하는 스타들을 상대로 한 브리핑의 연작이었습니다.
중위 말년에는 대대 참모로 일하다가 전역하였는데 장기근무를 계속 권고하던 대대장과 부대대장을 뿌리쳤던
근본 사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남아 군에 있어도 아마 내 군경력 생전에 이곳의 전장이란 없을 것이다'.. 라는 확신이었고
그러하다보니 군생활 자체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던 겁니다. 질풍노도기부터 환상을 가졌던 군에대한 동경
제1 그림자는 "군웅"이었으니까요. 막시무스는 최근에 '에르빈 롬멜'에 관한 서적을 독파한 적이 있는데
철저히 느끼는 바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이론에 대하여 다시한번 공감한 바가 있습니다..
군 장교 단기 전역자들에 대하여는 당시 많은 기업들이 특채들을 했습니다.
막시무스도 몇군데 면접을 보고 어데로 갈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전공을 따라 간다면 포항으로 갔을겁니다.
롯데호텔에서 면접을 보는데 아마 느낌상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에는 퇴임하였던 박태준 전회장도 면접장
한켠을 지켰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외국계 기업 한곳과 보험사 스텝등이 있었는데 집에서 가장 가까운
근무지를 선택하다보니 교보생명 주안영업국 스텝으로 입사하게 된겁니다. 당시에는 부모님이 인천에서
이미 몇년차 계셨던 터라 가평 시골에 남아있던 것들을 모두 정리하신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군에서 생뚱맞게 여인들을 알게 되었지만 이당시도 그렇게 근본 정서가 변화되지는 않았습니다.
2년여의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사직서를 낼 당시만 해도 어머니가 여차저차 회사에 한번 오셨을때 직원들은
어머니에게 막시무스를 빗대어 "여자를 돌로 보는 사람이다"..라고 했을 정도니 말입니다..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또다른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상의 수레바퀴 같은 고리타분함이 군과 별차이 없게 느껴지기 시작한 면도 있지만 서점에 한번 들어가
사법시험 합격자들의 2차 답안 원고들을 엮은 책을 우연히 들여다보다가 사법시험을 계속 준비하다 군에
들어왔던 학사장교 선배의 말이 떠올려졌습니다. 당시 막시무스 나이가 29세였습니다.
아주 먼 경험치 못한 세계가 꿈틀거리며 막시무스에게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우수 답안이라고 하는 수준들이
그 욕망을 꿈틀거리게 만들고 말은 겁니다. 결단은 아주 카리스마 넘치게 했습니다.
국장이 묻습니다. '왜 그만두려 하느냐'.. "아프리카에 가서 엽총들고 사파리 경호임무나 배워볼까 해서입니다"..
'가면 에이즈 걸린다, 그러지말고 이유를 말해'.. "공부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고시.."...
'회사 나오면서 공부해, 월급은 계속 나오게 할테니까'.. "어디 그럴수야 있습니까, 감사합니다만 몰입하렵니다"..
그만둔 당일날로 법서들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대학1학년 법학개론 들은게 전부인데 참 그런 돈키호테도
없었습니다. 모두 사모으니 책만 짐으로 한보따리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물색해 두었던 공부 장소를 향해
책 자루를 둘레메고 내려갔습니다.
가야산 남방으로는 해인사가 가깝고 북방으로는 김천방향인데 청암사라는 조용한 암자에서 여주지 스님이
고시생들을 몇명씩 묶게 한다고 확인한 바 있습니다.
아버지가 허락없이 회사를 그만둔다고 역정을 내시며 만류했지만 이미 장성해버린 자식의 행동이니 한계가
있으셨을 겁니다. 어머님의 걱정어린 눈길을 뒤로 그렇게 막시무스의 고시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김천 청암사 옆에는 비구니 대학처럼 보이는 큰 사찰이 있었습니다. 암자의 옆에는 인삼밭이고 동네에 필요
물건이라도 구입하려면 몇시간 걸어서 내려가야 했습니다. 암자에는 이미 몇년째 은거하여 사시에 매달리고
있던 서울법대 출신의 일명 '윤도사'가 40을 넘기며 또아리를 틀고 있었고 영남대 법대 출신의 동갑내기
한명, 그리고 세무사를 준비하시던 40중반의 공무원 출신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비구니 주지께서 '큰절에 설법 들으러 가자' 라고 카랑하게 외치면 이들은 스님을 따라 간혹 머리도 식힐겸
유명한 선승의 장지팡이로 법당을 후려치며 내뱉는 중후한 몇마디를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1년여를 보낸것 같습니다. 2년간의 회사 퇴직금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전체 목표기간 3년중 1/3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비법학도라서 학원부터라도 등록하여 진도를 나갔어야 하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계속 들기도 합니다. 홀로 교과서 독파와 이해 위주로 반복하면서 요령보다 깊이에 천착하려는
마음이 앞섰던것 같습니다. 시험삼아 1차 시험장을 처음 경험해 보기도 했습니다. 주변에서 격려도 많이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공부 장소를 계룡산으로 정했습니다. 신원사 방향의 소림원과 밑의 암자등에서
다시 1년을 보냈습니다. 운동을 한다고 슬리퍼를 신고 갑사로 동학사로 산을 넘어 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충남대 법대를 졸업한 공부로는 선배요 나이로는 잘따르는 후배를 만나 이후 서울의 신림동 고시원
일대까지 같이하게 됩니다.
일명 '대구화상'이라는 형과 '상보'형을 동학으로 인상깊게 만났었는데 지금도 가끔 생각납니다..
그뒤 1년후 서울 신림동으로 오게된 후부터 그동안 회독수를 늘린 법서를 토대로 학원에서 전체적 점검을
받아 보고자 함이 있었습니다. 3년차 2차시험의 답안지에 막시무스는 그간 홀로 깊이를 판 구슬들이 독배로
작용함을 깨닳았습니다.
왜 '윤도사'가 40이 훨 넘도록 암자에 십수년을 기거하면서 강론을 펼칠때는 왠간한 교수들이나
변호사보다 우월해 보이는지..왜 그러면서도 번번히 2차 답안에 고배를 마시는지 그때서야 알듯 했습니다.
이 당시는 공부하는데 비용도 바닥이 나서 후배와 간혹 막일도 나갔습니다. 고시원비를 감당해야 했는데
시험이 많이 남아 있던 때를 이용하여 운동겸 한다고 하는 일이 횟수가 빈번해지기도 했습니다.
비록 30이 다된 나이에 시작했지만 늦은 꿈으로 '검사가 되어 풍광좋은 강릉등에서 죽도를 둘러메고 자전거로
도장과 검찰청을 오가며 지내야겠다'..라는 꿈이 만학의 설움으로 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전체 궤적상 돌이켜보면 고등학교때 이과가 아니라 문과를 선택해야 했나 봅니다.
독배를 마신 그해 몇개월후 아내를 만났습니다.
집안 어른들의 소개로 만났는데 어쩌면 고시 궤적 일탈의 서곡이었습니다. 혹 장기화되는것 아닐까 하는
우려감이 어른들의 긴장감을 조성했고 당시 막시무스 스스로 설정한 공부 기한이 아쉽게도 끝나고 있던
상황이라 그 스스로도 미련과 자신과의 약속에 대한 번민이 있던 상태에서 탈출구로 작용했는지도 모릅니다.
3년전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 서점에서 우연히 들추어보던 사시2차 모범 답안들을 보고 냉소하던 기개가
결국 그것들 보다 우월하고자 했던 공부방법으로 스스로 독배의 함정을 만들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그의
몇해를 거친 은둔 여정이 삶에 영 소득이 없는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다못해 법사상사와 법철학까지 천착하며
시야의 깊이를 더했으니까요..
막시무스의 처가쪽은 파주였습니다.
막시무스 장인이 당시 파주경찰서 교하 지서장을 하셨기에 모든것을 이에 맞춰 결혼도 당하리(현당하동)
예식장에서 했습니다. 지금도 그 건물이 있어 막시무스가 살고있는 현재의 집에서도 멀지 않습니다.
아이를 두면서 호구책으로 취득한 15회 공인중개사 자격으로 교하의 선배 사무실에서 잠시 일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2006년 운정신도시 한라비발디 분양에 임하게 되고 당시 운정신도시를 교하신도시로
바꿔버리려던 세력과 시장의 행태에 대하여 막시무스는 공분으로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운정연을 조직하고 파주GTX를 위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연합회장을 하면서 운정시도시를
복원시키고 GTX의 파주 물꼬를 담아내기 시작한겁니다. 2006년 말부터 현재까지니 8년의 세월입니다..
가족의 생계보다 신도시라는 도시브랜드 어쩌구 저쩌구로 또 몇년을 미쳐서 보내고 있으니 막시무스의
아내는 예전 그를 처음 만날 무렵의 반백수 형상이 떠올라 몇해를 전전긍긍 했을 겁니다.
그러다 2014년 주변의 시의원 출마권유까지 받고 무당으로 고집하여 지역의 정치판에 돌을 던져 실험을
해보기에 이른겁니다.왜 소지역이든 중앙이든 정치(입법기구) 세력들에는 늘 '법가'들이 필요한가도 이해
되었습니다. 2010년 지난 선거에 이미 막시무스는 출마권유를 받아왔던 상태였지만 조직화 초기에 그런
행보를 걷는다는 것에 스스로 위화감을 가졌었습니다.
막시무스의 이번 정치적 실험은 사실 공천제 폐지에 대한 당위성의 항거이기도 했으며 연합회등 그동안
일해온 궤적이 세간에 어느정도 접해져 홍보되었는지 들여다볼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무소속들이 기존정당의 틀을 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불가항력인가를 볼수 있었습니다.
막시무스는 안철수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마지못해 기성정당에 들어갔다가도 그의 정치적 신조 1순위 이슈인
공천제 폐지조차 그들 기득권 세력들의 이해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작은 지역의 풀뿌리 기초 의회마저 이렇게 크게 대중에 의해 정당에 물들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니
멘붕도 그런 멘붕이 없었습니다. 기초의회와 기초단체장이 정당일을 하는것이 아닐것이고 나아가 헌법상
보장된 정당제도에 대한 이념도 사실 국회 영역이면 충족될 일인데 너무 지역 구석구석까지 기득권 정치 세력
들의 발호가 이렇게 물들이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대중들이야 그저 세뇌된 정당 줄서기 정서에 의해 지역
구석구석까지 부화뇌동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막시무스는 많은 것을 확인하고 현실을 배우게 된겁니다.
겉으로는 동네 서민의 아저씨 이미지의 정치인도 정치 행태에서는 사악과 냉혹을 가슴에 숨기고 포장하고
있음을 엿보기도 했습니다. '정치는 잡놈들이나 하는 겁니다'..라는 그 선한 인상에 대비된 서늘한 입가의
움직임이 마치 촉수처럼 밤마다 막시무스를 핥고 있는듯 했습니다.
일어나면 습관처럼 늘 개운치 않은 정신으로 벽에 걸어 놓은 장검을 찿아 시선을 방황시킵니다.
이른 새벽, 게르만 침입로에서 로마의 북부군 사령관으로 전투 부대원들에게 묵직한 시선으로 도열하던
군웅의 비장함이 늘 막시무스의 아침을 깨우고 있습니다..
--- maximus / che gue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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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나는데 슬픈건 왜일까요,,,,ㅜ.ㅜ
이제 시작입니다
한번더 움직일 수 있독록 긴 호흡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글 잘 읽었읍니다
지금 부터 다시 준비해 보세요.
살아 있는 소설 잘 읽었습니다.
재주가 많으신 분입니다...글을 쓰셔도 될 정도로 ...그리고 투박하고 우직하고 저돌적이고 사내냄새가 물씬나는.......
잘 읽었습니다
예. 문장력 너무나 좋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보고 파주라는 동네의 특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온병을 가지고 탄피라 주장했던 모 국회의원은 지난 총선에서 3선에 무난히 당선하셨고
롯데 세분페스타를 적성쪽에(초창기에 지역균형발전을 운운하며) 옮겨야한다는 주장을 하신분도 새누리당이라는
정당의 옷을 입고 무난히 당선되었고 새누리당의 시의원 후보들은 가,나를 받은신 분들은 모두 시의원으로 입성하신것을 볼때 막시무스님께서도 이번의 결과를 보시고 아시겠지만 다음에(2년후가 됐던 4년후가 됐던) 새누리당에 입당하셔서 준비하시면 어떠실까 조심스레 의견드려봅니다.
오이를 썰거나 무를 다듬는 일에는 도끼를 쓰는 법이 아닙니다. 부엌칼이 하죠..
도끼를 쓰면 도마위의 도끼 모양새만 구겨집니다. 물론 도마 자체를 파괴할수는 있을겁니다..
(도마: 부엌칼들에게 요리를 해보라고 판을 깔아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