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토빗기의 말씀 12,1.5-15.20
그 무렵
1 토빗은 자기 아들 토비야를 불러 말하였다.
“얘야, 너와 함께 갔던 사람에게 품삯을 주고 또 품삯 외에 더 얹어 주도록 배려하여라.”
5 그리하여 토비야는 라파엘을 불러, “그대가 가지고 온 모든 것의 절반을 품삯으로 받고 안녕히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때에 라파엘이 그 두 사람을 은밀히 불러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잘해 주셨으니, 살아 있는 모든 이 앞에서 그분을 찬미하고 찬양하여라.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고 찬송하여라.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그분을 찬양하기를 게을리하지 마라.
7 임금의 비밀은 감추는 것이 좋고, 하느님의 업적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 좋다.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악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8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
9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
10 그러나 죄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바로 저희 자신에게 원수가 된다.
11 나는 이제 너희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진실을 모두 밝히겠다.
나는 이미 너희에게 ‘임금의 비밀은 감추는 것이 좋고, 하느님의 업적은 공경하는 마음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다.’ 하고 분명히 밝혔다.
12 자 이제 보라, 너와 사라가 기도할 때에 너희의 기도를 영광스러운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
네가 죽은 이들을 묻어 줄 때에도 그러하였다.
13 그리고 네가 주저하지 않고 잔치 음식을 놓아둔 채 일어나 가서 죽은 이를 매장해 줄 때,
14 너를 시험하도록 파견된 자도 나였다.
또 하느님께서는 나를 파견하시어 너와 네 며느리 사라를 고쳐 주게 하셨다.
15 나는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대기하고 또 그분 앞으로 들어가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인 라파엘이다.
20 이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자, 나는 나를 파견하신 분께 올라간다.
너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해 두어라.”
그러고 나서 라파엘은 올라갔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남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찾으며, 약한 자들의 재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는 오래 바치는 위선의 삶을 질책하십니다.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부자들은 나름대로 여분의 것에서 일부를 바쳤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에 가장 큰 봉헌을 한 것이라고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이는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봉헌과 나눔도 바로 이러한 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모금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곳곳에서 약한 자와 억울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강조하십니다.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참된 봉헌’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또한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가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의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 일리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지라도 사랑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지향’이 얼마나 순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 카시아누스가 수도승의 목표로 제시한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수한 마음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오직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남겨두지 않고>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
내가 바치는 모든 것,
그것도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돌려드리는 것.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진정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 복음의 과부처럼 그걸 자기의 것으로 꿍쳐 놓지 않고 모두 다 바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저께 복음인 12장 28절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인 12장 38-44절의 얘기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비교하며 가난한 과부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친 사람이라고 하심으로써 가난한 과부가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께서 주셔서,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자기를 위해 남겨두지 않고 다 바친 사람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가 바로 과부와 같은 삶을 산 분입니다.
그의 가난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 돌려드리고 자기의 것으로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은 자의 가난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두지 마십시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일부는 전부보다 많을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숙제로 ‘우리 집 자랑거리’를 써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를 보니 “아파트가 넓다, 차가 좋다. 대형스크린 텔레비전이 있다.”등 물질적인 것들을 적어 온 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핸드폰도 최고급 사양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 왕따당한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AI 로봇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큰돈,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단위의 최소 단위입니다.
그렇다면 금전적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하찮은 금액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이유를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가진 것 중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 전부를 내었습니다.
일부는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는 많을 수 없습니다.
전부는 액수가 적어도 부분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사랑을 봉헌한 것과 생색내기로 봉헌한 것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2코린 8,9)
세상은 돈을 좋아합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좇아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벌써 물질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민첩하게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과부의 헌금이 소중한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남김없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할 수 있을지…
무엇을 봉헌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계야 어찌 되든 재산을 다 팔아 성당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손희송)
오래전 일입니다.
컨테이너 박스에 거처를 삼으시고 살고 계시는 아가다 할머니로부터 귀중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네잎 클로버입니다.
전날 들에서 발견했는데 신부님께 행운의 복을 빌어주려고 가져오셨답니다.
시들까 봐 물컵에 담아서!
저는 아가다 할머니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네잎클로버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에게 언제나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시대 율법 학자들은 유다 사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녔던 입권 기관이자 사법기관이었던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 일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필사자, 혹은 편집자로 구약성경의 정경을 확정했고, 성경 원문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들은 나름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상류층, 식자층에 속했었고, 그러다보니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고 쓸 데 없는 우월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름 잘 나가고, 자칭 경건하고 훌륭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사정없이 ‘까’버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을 향해 던지는 말씀에는 때로 너무나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어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따발총처럼 다음과 같이 격한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그들을 바로 면전에 두고 말입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는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린 실상과 허례허식, 겉과 속이 다른 가식적인 삶을 공개석상에서 낱낱이 고발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은 율법 학자들을 향해 정면으로 던진 목숨을 건 도전장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이 위선자야, 이 눈먼 인도자야’ 하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 완벽하지는 않기에 크게 반성도 하겠지만, 우선 크게 ‘빈정’이 상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가 뭔데 내게 그런 말을 하나’ 하며 따지고 대들 것입니다.
율법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의 실제 생활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크게 분노했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도전장으로 여겼고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따로 모여 대책회의를 시작했고, 계속되는 예수님의 쌍날칼 같은 말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단 한 가지,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된 꼬투리 하나를 잡아 예수님을 고발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결국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율법학자들을 향한 진심 어린 사랑의 말씀, 그 말씀이 비록 너무 강경해서 받아들이기 힘든 점도 없지 않았으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빨리 하느님께로 돌아서라는 예수님의 눈물겨운 말씀은 더 이상 그들에게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가장 하느님을 잘 알고 가장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칭 하느님의 장자라고 여겼던 그들은 가장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느님 구원의 대상에서도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이 지속적인 자기 성찰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그리고 이웃들을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때로 받아들이기 힘들고 가슴 아프지만 내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 쓰라린 체험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떠남의 여정 - 찬미, 봉헌, 자선, 사랑이 답이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시편 119,147)
어제 피정중인 자매가 저녁 성무일도 시간을 앞둔 오후 5시쯤 갑작스럽게 집무실을 노크했고 궁금 사항을 질문했습니다.
왜 모세가 모압 평야를 건너 약속한 땅에 가지 못하고 죽고 여호수아가 건너갔느냐는 것입니다.
모세의 처지가 너무 안됐고 하느님이 너무 야속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의 요지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각자 역할이 있는 법입니다.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모세의 역할인 것입니다.
모세는 겸손과 순종의 믿음으로 지혜롭게 훌륭히 자기 역할의 책임을 다했고 후계자 여호수아가 그 뒤를 잇습니다.
마치 릴레이 경주시 바톤 터치와 같습니다.
혼자 계속 달릴 수는 없습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요?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부단한 떠남의 여정입니다.
제가 여기 요셉수도원에 부임한 해가 1988년 나이 40이었는데 35년이 지난 올해 2023년에는 나이 75입니다.
35년 동안 얼마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연미사를 드리다 보면 저보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너무 많이 접하게 됩니다.
‘아, 이분들이 얼마나 살고 싶어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래서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을 좌우명 삼아 살아가는 요즈음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 4,47)
주변의 자연환경도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의 교사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웠던 꽃들도 지나가면 다른 꽃들이 뒤를 잇습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 사라질 것입니다.
요즘 수도원 주차장에는 샛노란 금계국꽃이 한창입니다.
이제 곳곳에 피어나는 야생화 금계국 꽃들입니다.
꽃말은 “상쾌한 기분”의 금계국꽃입니다.
저절로 읊어지는 시였습니다.
“자리탓하지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내려
활짝 꽃피어 내어
하늘 담으면
거기가 바로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다”
그러니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아무것도 너를’ 이란 성가를 기억할 것입니다.
놀랍게도 가톨릭교회교리서 227항에도 소개되고 있는 성녀의 격려 말씀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할 것이며 신앙은 역경중에도 하느님을 신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에도 너 흔들리지 말며
그 무엇에도 너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께서만 변치 않으신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가진 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삶이 아름답고 중요합니다.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때 마지막 떠남의 죽음도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입니다.
바로 시종여일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물론이요 복음의 가난한 과부, 그리고 토빗기의 토빗과 라파엘 천사가 바로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멋지고 아름다운 떠남의 연속이요 마지막 죽음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자기 증여(self-giving)’의 삶입니다.
바로 이의 반대가 자기 중심의 ‘자기 섬김(self-serving)“의 삶이요,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이요, 부자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기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는 율법학자들입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요, 외적본능의 욕구대로 살아가는 허영의 사람들입니다. 외화내빈, 내적공허의 헛된 삶을 살아가는,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의 삶을 살아가는 본말전도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수 있겠는지요? 저는 셋으로 요약했습니다.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입니다.
첫째, “찬미의 삶”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하느님 찬미가 모두입니다.
찬미의 믿음, 사랑의 찬미, 찬미의 축복, 찬미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느님 찬미의 맛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토빗처럼 찬미로 살다가 찬미로 끝나는 해피엔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로서 끝나는 제1독서 토빗기를 통해 배우는 찬미의 삶입니다.
놀랍게도 라파엘이 수호천사처럼 토빗과 늘 함께 했음을 봅니다.
삶은 우연이 없고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섭리 안에 있음을 봅니다.
우리 하나하나와 함께 하는 수호천사도 분명있을 것입니다.
토비야가 귀가했을 때 라파엘은 은밀히 불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잘 해 주셨으니, 살아 있는 모든 이 앞에서 그분을 찬미하고 찬양하라.”고 격려합니다.
또 임무를 다 마치고 파견하신 분께 떠날 때도 토빗에게 당부합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자, 나는 나를 파견하신 분께 올라간다.”
둘째, “봉헌의 삶”입니다.
사랑의 봉헌입니다.
찬미란 말도 좋지만 봉헌이란 말도 좋습니다.
찬미의 봉헌입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루하루가 봉헌의 삶이요 마지막 거룩한 봉헌이 죽음입니다.
바로 봉헌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입니다.
예수님이 극찬하는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의 봉헌의 삶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봉헌 삶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 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 우상들로부터 자유로운 '참사람' 하나 만나는 느낌입니다.
역설적으로 가난한 부자요, 참 자유인입니다.
참으로 최고의 살아 있는 보물인 하느님을 소유한 참부자, 참자유인 가난한 과부에게서 자기를 본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우리 봉헌의 삶을 부끄럽게, 분발하게 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셋째, “자선의 삶”입니다.
사랑의 자선입니다.
이웃 불우한 이들에게 하는 자선은 일종의 봉헌입니다.
자선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인색함보다 추하고 인간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도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이 권하는 수행 셋이 기도, 단식, 자선입니다.
라파엘이 자기 임무를 다하고 떠날 때 토빗과 토비야 부자에게 신신당부하는 자선의 실천입니다.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악이 너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죄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바로 저희 자신에게 원수가 된다.”
정말 오늘날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는 금과옥조의 말씀들입니다.
부자 나라들이 사람 죽이는 무기 만드는 데 쓰는 돈을 가난한 나라들에게 자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같은 생각도 해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의 찬미가, 사랑의 봉헌이, 사랑의 자선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로운, 참으로 부요한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아름다운 참부자, 참자유인으로 살게 하는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이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시편 117,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LA에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난 4월, 성지순례를 함께 했던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자매님께서 평화신문 후원금을 주셨습니다.
성지순례에서 은총을 많이 받았다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후원금을 내신다고 하였습니다.
우연히 자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물품 판매 봉사를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이익이 남으면 모두 본당으로 봉헌했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났을 때 이익금을 계산하니 상당히 많은 액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수고한 보답으로 성지순례를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그 성지순례의 비용도 기꺼이 봉헌하였다고 합니다.
성지순례 중에 하느님께 청원기도를 하였는데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후원금을 냈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봉헌하니 하느님께서도 축복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봉헌에 인색한 형제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집이 3채나 있고, 지금도 열심히 일해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형제님입니다.
아내는 형제님이 원하지 않아서 익명으로 봉헌한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나중에 가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돈을 아낀다고 합니다.
열심히 번다고 합니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마치 창고에 재물을 가득 쌓지만 결국 하느님께 가지 못하는 부자의 이야기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지난 ‘Mother’s Day’ 때였습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LA에 방문하면서 그동안 도움을 주셨던 분들에게 꽃다발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분들이 제게 주신 도움에 비하면 아주 약소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선물을 받으신 분들은 무척 기뻐해 주셨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부활절에는 축하카드를 많이 받았습니다.
환갑을 맞이한 생일이라고 축하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나누는 데는 소홀했지만 생각하니 저도 나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매일 아침 ‘복음 묵상’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넉넉한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저의 묵상이 영적인 깊이가 있지는 않지만 그저 가난한 과부의 정성이 담긴 헌금처럼 작은 나눔이 되면 좋겠습니다.
매달 신문사의 구독료 봉투 작업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나눔도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처럼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신앙인들은 신앙 안에서 천사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카엘 천사처럼 나의 신앙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의 뜻이나 나의 욕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파엘 천사처럼 신앙의 여정에 좋은 안내자가 되어야 하고, 상처 입은 이웃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가난하지만 선(善)을 쌓은 집안은 언젠가는 경사를 맞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악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는 글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지만, 20년 넘게 글을 쓰다 보니 오히려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써야지.’라고 마음을 먹는다고 곧바로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 생각을 돕는 것이 바로 일상의 단편들과 책 읽으면서 얻는 영감들입니다.
그래서 계속 메모합니다.
특히 포스트잇을 가지고 다니면서 제 생각을 메모합니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할 때, 이 메모를 띄었다 붙이면서 구성하고 정리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글을 완성합니다.
누구는 일반 메모지를 사용하지, 왜 훨씬 비싼 포스트잇을 쓰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이유는 포스트잇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잇은 적당한 접착력이 중요한데, 오래되면 자연스럽게 접착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접착력이 떨어지기 전에 모두 사용하기 위해 팍팍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포스트잇을 주신 분이 2016년 주님 곁으로 가신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구청에서 근무할 때, 연말에 마니또를 해서 선물을 나눴는데 그때 저의 마니또가 주교님이셨고, 제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포스트잇 뭉치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포스트잇을 쓸 때마다 주교님이 생각납니다.
워낙 글을 잘 쓰셨던 주교님이시라 저 역시 글을 쓸 때 도움을 받는 것만 같습니다.
본인에게 의미 있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좋은 의미는 미소를 띠게 됩니다.
저 역시 남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를, 화를 내게 하는 의미가 아닌 기쁨을 주는 의미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의미로 다가오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모범을 따라 이웃에게 의미 있게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자랑하듯 큰돈을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지요.
이를 보고 예수님께서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제물의 양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제물을 바치는 마음, 솔직함, 겸손함 등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부자는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욕심과 이기심을 봉헌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온 정성을 봉헌했습니다.
주님께 진정한 의미로 다가온 사람은 가난한 과부였던 것입니다.
남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를,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 주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