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
사무엘상: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8)
말씀이 제자리에 있게 하라
삼상 6:1-21 (봉독: 1-2, 6-13, 19-21)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미국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존경하는 유기성 원로목사님께서 금요성령집회에서 귀한 말씀 전해주시고,
또한 지난 주일에는 이용규 선교사님께서 은혜로운 말씀을 전해주셨지요.
지난 금요일에는 김은창 목사님께서 광주의 부흥의 소식들을 나눠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도 미국 현지에서 말씀을 들으며 큰 은혜를 누렸습니다.
종종 이렇게 자리를 비우면 성도님들께서 풍성한 외식을 하실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종종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
저는 이번에 캔자스시티에서 시작하여 달라스, 그리고 워싱턴 D.C.와 필라델피아까지 다녀왔습니다.
특히 워싱턴 D.C.에서는 중보기도해외아웃리치팀과 함께 하루 일정을 보내며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연방대법원 등을 돌며 기도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중보기도팀에서 화요중보기도회를 통해 성도님들에게 간증을 나눌 시간이 있게 되리라 싶습니다.
저는 이번 미국 일정을 돌면서 동시에 오늘 사무엘상 6장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중에서 붙잡게 된 구절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2절입니다.
[삼상 6: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제자리에 돌려보내야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떤 방법으로 제자리에 돌려보내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몇 주 전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궤는 여전히 블레셋 지역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벌써 7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악성 종양과 독종과 같은 전염병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으로 상징되는 언약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말씀을 경외함으로 대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말씀의 언약궤를 제자리로 돌려보내고 싶었던 겁니다.
저는 이 2절 말씀을 읽다가 이 구절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과연 우리 삶에는 말씀이 제자리에 있는가?”입니다.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은 이스라엘이 실로의 성소에 있던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언약궤를 마치 부적처럼 사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했던 잘못된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말씀이 그들의 삶에서 제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한다는 뜻이고,
또한 그 말씀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순종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지,
결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며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말씀이 그들의 삶의 중심에, 제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진단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하나님이 저주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어졌고, 어그러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며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아는 열매를 먹었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을 달리 말하면 “아담아 왜 네가 내 말씀의 자리에서 벗어났느냐?”
“아담아 왜 너의 삶에 말씀을 제자리에 두지 않았느냐? 제쳐 두었느냐?” 이 말씀입니다.
인류의 불행과 악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리에 두지 않은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리에 두지 않는 일들은 시대를 거쳐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달라스중앙교회 집회를 갔다가 한 가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연합감리교회 총회가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4월 23일에서 5월 3일까지 열리는데,
그런데 그 마지막 날 5월 3일에 교리와 장정 개정에 대한 투표가 있을 예정이라는 겁니다.
장정은 교단의 법과 같은 것인데, 현재 장정에는 결혼의 정의가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 성인의 결합으로, 즉 두 남자 혹은 두 여성의 결합으로 바꿀 것이냐에 대한 투표가 있을 예정이라는 겁니다. 이번에 바뀔지 안 바뀔지는 모르지만,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개정을 반대해온 이들의 많은 경우가 교단을 떠났거나 글로벌감리교회, GMC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개정안을 만드는 곳이 어디냐면 교단 총회 소속인 General Board of Church and Society라는 곳인데,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놀랍게도 이번 중보기도팀이 방문하고자 예정되었던 미국 연방대법원 건물 바로 옆입니다.
연방대법원은 2015년에 동성애 합헌 판결을 내렸던 곳이지요.
그래서 저희가 지난 3월 19일 화요일에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거쳐서 연방대법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있는 연합감리교회 Church and Society 빌딩 바로 앞에서 기도했습니다.
저는 본래 그 빌딩이 그곳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여정을 인도해주신 것이지요.
기도팀과 함께 기도하는데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리에 두어야 할 교회가 이제는 세상의 흐름과 트랜드에 발맞추어 결혼의 정의를 바꾸려고 한다는 사실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과연 장정을 개정하고 바꾸면 인간이 행복해지고, 교회의 선교가 활성화될까요?
이제는 교회마저도 말씀보다 인간의 경험을 더 위에 두고자 합니다. 말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달라스에서 주일 집회를 마치고 오후 4시에 어떤 미국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청년, 청장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들었습니다. 예배가 4시에 시작했는데, 글쎄 예배를 1시간 반을 드립니다. 요즘 미국 교회는 점점 죽어간다, 약해진다 그러는데 거긴 아니에요. 성찬을 포함하여 1시간 반 예배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금방 지나갔습니다. 1시간 반 내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기도하며 찬양하며 말씀을 들으며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몇 년 전에 LGBTQ 이슈에 대한 공식 입장을 홈페이지에 이렇게 발표했었습니다.
“교회는 ...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성경이 말하는 것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성경이 왜 성소수자의 적극적인 삶을 긍정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긍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평생 결합입니다(창 2:18, 마 19:4-9, 엡 5:31-33). 성, 생물학적 성별,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설계의 축복을 경험하며(시 1:1-3; 128:1-4), 결혼, 성, 성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변경, 수정하려는 결정은 인간의 타락의 일부이며 절망으로 이어집니다(롬 1:21-22; 약 1:14-1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는 시대와 문화의 시험을 견디며,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 속에서 그분과 함께합니다.”
결국 성경과 말씀이 말하는 바를 지키려는 노력 때문에 그 교회에서 약 3천여 명이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말씀을 제자리에 있게 하려고 했을 때, 큰 대가를 치른 겁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 만큼 새로운 성도들을 보내주셨고 계속해서 청장년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역사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제자리에 두느냐 않느냐의 역사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블레셋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지만,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궤를 돌려보내고 싶었습니다. 놀랍게도 블레셋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던 역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바로 왕처럼 고집부리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다만 그들은 언약궤를 보내기 앞서서 마지막으로 이 한 가지를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악성 종양과 독종이 정말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맞을까? 아니면 우연인가?
이것을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떠나보내면서 짜낸 아이디어가 이것이었습니다.
첫째, 새 수레를 만들어서 소가 끌고 가게 하되, 수레를 전혀 끌어본 적이 없는 소에 수레를 메게 하자.
둘째, 그냥 소가 아니라 젖 먹는 송아지 딸린 암소를 쓰자. 그리고 그 새끼 송아지는 집에 가두자. 그러면 암소가 새끼를 두고 갈리는 없지요.
셋째,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를 쓰자.
상식적으로, 수레를 끌어 본 적이 없는 소가 멍에를 메고 끌고 갈 리가 없지요. 또한, 젖 먹는 새끼를 둔 암소가 새끼를 버리고 갈 리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설령 그렇다고 해도 한 마리는 그럴 수 있지만 두 마리 모두 갈리는 없습니다. 즉 정상적인 소들이라면 이 수레는 벳세메스로 갈 수 없습니다.
벳세메스로 갈 수 없는 여건을 세 가지나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이렇게 한 상태에서 만일 이 두 암소들이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이곳에서 가까운 이스라엘의 성읍인 벳세메스로 가면, 지금까지의 재앙은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은 우연히 생긴 것이다.
과연 소들이 갈까요? 놀랍게도 그 소들이 이스라엘의 땅 벳세메스로 갑니다.
[삼상 6:12] 그 암소들은 벳세메스 쪽으로 가는 길로 곧장 걸어갔다. 그 소들은 큰길에서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벗어나지 않고, 울음소리를 내면서 똑바로 길만 따라서 갔고 ...
이 암소들이 큰 길에서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벗어나지 않고 갑니다.
울음소리를 내며 갑니다. 왜 울었을까요? 새끼들 때문입니다.
새끼들을 두고 갈 수 없지요. 그래서 우는 겁니다. 그러나 울면서도 똑바로 갑니다.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머뭇거리지도 않고 갑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이 본문에 나오는 벧세메스의 암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많이 해석이 되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 10:37]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제자도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대가를 치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내일부터 십자가특별새벽부흥회가 시작됩니다. 십자가에는 세 가지 방면이 있습니다:
나의 죄가 처리된 십자가, 나의 자아가 죽은 십자가, 내가 져야 할 십자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제자리에 두기 위해서는 때로는 희생과 박해를 감내해야 된다는 겁니다.
당장 선교사님들을 생각해보세요. 해외에 나가 계시면서 선교를 하다보면 한국에 자주 못 들어오십니다.
작년에 한 선교사님 아버님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중환자실에 계셨는데, 아들이 선교사시니까 잠시 귀국하여 병간호를 하셨지만, 선교지를 위해 곧 출국하셔야 했습니다. 교회에서 돌봐드리고 섬길 테니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렸으나, 아픈 아버지를 두고 나가셔야 하는 그 아들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복음을 위하여 져야 할 십자가와 대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말씀을 제자리에 두어 순종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으며 어떤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까?
때로는 동물들이 사람보다 낫다
벧세메스의 암소들은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꺾고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울면서 벧세메스로 갑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풍자입니다.
짐승들도 하나님의 강권하심과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을 제자리에 두는데,
어찌 사람이 말씀에 불순종하여 제멋대로 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 본문을 묵상하다보면 사실 부끄럽습니다. 과연 우리의 순종은 이 암소들보다 나은가?
이 벧세메스의 암소와 비견되는 동물이 있는데 바로 민수기에 나오는 ‘나귀’입니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발람 선지자가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갑니다.
발람이 나귀를 타고 가고 있는데 이상하게 나귀가 가던 길을 자꾸 벗어나서 밭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나귀는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주님의 천사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발람은 그 천사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길을 벗어나는 나귀를 막 때리지요.
이런 비슷한 일이 세 번이나 벌어집니다. 그러다가 천사가 드디어 발람을 혼냅니다.
[민 22:32-33] 32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물었다. "너는 왜 너의 나귀를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리느냐? 네가 가서는 안 될 길이기에 너를 막으려고 이렇게 왔다. 33 나귀는 나를 보고, 나에게서 세 번이나 비켜섰다. 다행히 나귀가 비켜섰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나귀는 살렸겠지만, 너는 분명히 죽였을 것이다."
발람이 가서는 안 될 길이기에 막아섰다는 겁니다. 가지 말아라! 그러나 발람은 못 알아듣고 보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이 가라는 곳에는 가지 않고, 가지 말라는 곳에는 가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지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자리에, 제자리에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자리에 말씀이 희귀하기 때문입니다. 나귀는 길을 막는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보지 못합니다. 동물이 사람보다 나아요. 하나님은 동물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도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최근에 자꾸 일이 막히십니까? 혹시 여러분이 가서는 안 될 길 아닌가요? 하나님이 나귀를 통해 막고 계시는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벧세메스 사람들
결국 하나님의 궤는 암소들을 통해 벧세메스에 도착합니다.
이것으로서 블레셋에 일어났던 재앙들은 하나님이 내린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들어오는 것을 벧세메스 사람들이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나무 수레를 쪼개 장작으로 삼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살라서 주님께 바칩니다(14절).
봄철에 블레셋 진영으로 갔던 궤가 가을이 되어 돌아온 겁니다.
언약궤가 돌아온 벧세메스라는 이름은 “태양의 집”이라는 뜻인데, 이곳은 제사장의 도시입니다.
여호수아 21장 16절에 보면 레위인들을 위해서 준 성읍이 바로 벧세메스입니다.
자 그렇다면 레위인들이라면 말씀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지요?
그래야했지만, 시대가 사사기 시대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도 했지만, 무지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거룩하기에 함부로 열거나 봐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궤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죽은 겁니다.
[삼상 6:19] 그 때에 벳세메스 사람들이 주님의 궤 속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백성 가운데서 오만 칠십 명이나 쳐서 죽이셨다. 주님께서 그 백성을 그렇게 크게 치셨기 때문에, 그들은 슬피 울었다.
오만 칠십 명이라는 숫자는 사본의 표기에 따라 70명으로 표기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으로 보면 대개 70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님의 궤를 구경거리로 삼아 보다가 죽었다는 점입니다.
그 언약궤는 7개월 전까지만 해도 실로의 성소에 안치되어 있던 신성한 물건이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가 멈춘 장소를 거룩히 구분하고 제사장들이 그곳에서 그 궤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죽 말씀을 몰랐으면 제사장들의 마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말씀대로 살지 않았을 때 그들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말씀이 제자리에 있게 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말씀이 제자리에 있게 하지 못하여 치르는 대가도 있습니다.
이때는 레위인이라는 하나님의 사람들마저도 말씀의 기준에서 벗어났던 시대입니다.
그때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는 교회와 교단이 앞장서서 결혼의 기준을 바꾸려는 시대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너무 거룩하시니 그 말씀을 계속해서 밀어내려는 시대입니다.
이 벳세메스 사람들이 뭐라 하지요?
[삼상 6:20] 벳세메스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렇게 거룩하신 주 하나님을 누가 감히 모실 수 있겠는가? 이 궤를 어디로 보내어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할까?"
이게 기가 막힌 말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거룩하시니 그렇게 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하자.
지금 시대가 그렇지 않나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가르치면
사람들이 떠나간다. 누가 교회에 오겠나? 그러므로 사람들이 교회에 올 수 있도록 말씀을 바꾸자.
우리는 지금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려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말씀을 떠나보내지 말고, 회개하고 말씀을 중심에 모시라는 겁니다.
백성들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열심
정작 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 제자리는 어디인가요? 백성들의 삶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5장과 6장에 걸쳐 사람들은 계속해서 언약궤를 떠나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역사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에게로 돌아오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시대가 악하고 어두워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해서 백성들의 삶의 중심에, 제자리에 임하십니다.
다시 벧세메스의 암소들을 보십시다. 이 소들이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면서 어디로 향하냐면
이스라엘 땅으로 향합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주인공은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이 아닙니다.
암소들이 아니라 그 암소들을 붙잡고 계속해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하나님은 멍에를 메어본 적이 없고 새끼를 둔 암소라는 불가능한 상황을 통해서라도, 말씀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언약궤는 벧세메스로, 이스라엘 땅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밀쳐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 암소들을 통해서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암소들이 울면서 갔다고 했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만 새끼들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도 내 자식들, 내 자녀들이 보고 싶어 가야겠다!
왜 그렇죠? 이사야 49장 14절에 보면,
[사 49:14-16] 14 그런데 시온이 말하기를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고,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는구나 15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16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 보고 있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재앙이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네, 재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지 않을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실 수 없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못하십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느냐?”
우리는 두 암소들을 통해서 벧세메스, 이스라엘 땅으로 스스로 돌아오는 언약궤를 보며 여전히 우리를 잊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제자리에 있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최근 말씀함께 홈페이지에 묵상의 유익을 올려주신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저희 교회 성도님이신데 현재 외국에서 공부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한국에 방문하셨다가 1월에 발간된 ‘말씀함께’를 받으시고 다시 외국으로 가셨어요.
그런데 속장님께서 EMS 택배로 2, 3월호를 보내주신 겁니다. (속장님의 열정에 박수를!)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외국에 나가신 성도님의 삶의 제자리에 있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지요. 택배를 받고 그렇게 감동이 되더랍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새벽기도회 말씀을 듣고 말씀함께를 통해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하셨대요. 40일 작정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말씀을 더 사모하며 기도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답니다. 한국에만 있었다면 현장예배의 감사함을 덜 느꼈겠지만, 외국에 살다보니 신앙생활에 많은 제약이 따르기에, 한국에 있을 때보다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더 사모하게 된다고 합니다.
매일 작은 방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말씀함께 묵상집을 통해 마음의 중심을 돌아보게 되고 예수님께서 마음에 와 계시다는 확신이 든다는 겁니다. 그분이 이렇게 고백하셨어요.
“말씀함께로 큐티를 하면서 얻은 유익은 너무나도 큽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중심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와 계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박사 논문과 졸업에 대한 스트레스도 많이 내려놓게 되었고, 제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계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어느새 제 마음에 평강이 자리 잡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큐티책을 형식적으로 사두기만 하고 매일 묵상하진 못했는데, 이곳에서 “말씀함께”로 매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의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해외에서, 힘들게 공부할 때에, 하나님은 그 속장님의 손길을 통해서 말씀이 그분의 삶의 중심에 있도록,
제자리에 있도록 계속 역사하셨습니다.
이번 해외아웃리치 중보기도팀이 미국에 가서 기도해야겠다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팀들이 갈 때 붙잡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18장 8절 말씀,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그것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오라”
이것은 작년에 여호수아 시리즈를 나누면서 들었던 말씀입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땅을 취하라!
왜, 하나님은 땅을 다니며 밟아야 하는지 이미 여호수아 1장 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발바닥에 닿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너희에게 이미 주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팀원들이 삶의 중심에 품고 순종하여 갔습니다.
워싱턴 D.C.에 갔다가 한 목사님에게 중보기도팀이 왔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작년 애즈베리 부흥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에, 한국에서 중보기도팀이 애즈베리에 와서 이곳에 부흥이 일어나도록 기도를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약 7-8개월 후에 정말 부흥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미국 동부에 가서 기도를 한다고 하니 미국 현지의 많은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도전을 받으셨어요.
팀의 차량 운전으로 섬기시는 분이 뉴저지에 사시는데 말씀하시기를,
“미국에 산지 32년이 넘었지만, 기도아웃리치를 위해 오시는 분들은 처음입니다.
미국에 사는 우리도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데,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미국을 위해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니 우리가 부끄럽습니다. 저희도 교회에서 땅을 밟으며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러시는 겁니다. 달라스에서도, 워싱턴에서도, 만나는 분들마다 우리가 더 열심을 내야겠다며 도전을 받으셨어요. 이미 부흥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이 나라의 중심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치, 경제, 교육, 각 영역 속 제자리에 있게 하소서.” “소수라도 하나님 말씀을 제자리에 두고,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자들을 일으켜 주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제자리에 있을 때 부흥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벧세메스의 암소를 통해서라도 우리의 삶 속에 오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말씀이 제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에 언약궤는 어디에 있습니까? 엉뚱한 블레셋 진영에 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이미 성령으로 우리에게 와 계신 말씀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흥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