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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시 모음 25편
《1》
겨울 선유도
김영미
민박집의 발목은
밀물에 젖어 있었다
헤집는 난로의 불씨로도
돌이킬 수 없는 어둠
아주머니는 우럭매운탕을 끓이며
까나리액젓에 겉절이를 무치며
허름한 등대가 되어간다
그녀는 오래된 버릇인 듯 생선을 손질한다
비린내나는 일상은 비늘로 덮여있다
가시가 박혀 퍼득이는 그녀의 지느러미가 보인다.
먼데 섬의 집들이 젖은 눈을 껌벅인다
그녀의 목소리도 물 너울에 잠겨간다
사는 일이란
막막한 시간을 소금 뿌려 절이며
가시조차 꾸욱 삼켜 보는 것
억류된 수평선
배들은 더 이상 길을 떠나지 않는다
등대는 이제 바닷길을
알려주지 못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담아둔
개조개가 갑갑한 듯 길게 혀를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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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화차 설화(說話)
김영미
낮 꿈처럼 짧은 생
운수 행각 하던 한 스님
오늘 입적하시다
바다가 보이는 산길
바다를 향해
마음 흐드러진 적 있었지
눈 시리게 바라보다
스스로 제 빛깔에 겨워 깊어진 죄,
촘촘한 바늘 같은 가을 햇살아래
말하고 말았어
차가운 이슬에 젖은 밤을
부르트게 걷고 나서야
마음을 다 해도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지
무릎을 꺾는 그 순간, 아찔한 향기의 죽비
내리친다
후드득 샛노란 말씀의 소나기
바다의 실핏줄이
훤히 드러난
그 산길 노오란 산국
오늘 한지위에서 온몸을 내어 말린다
지상에서 가장 고요한 다비식
바스락, 적멸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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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의 잠
김영미
어디선가 짓무른 과일의 향기가
베어나는 봄날 오후
부산했던 시장 한 모퉁이
근대 한 바구니 시들어 간다
꾸역꾸역 몰려있는 좌판에 쭈그린 노모
허옇게 세어 가는 머리가
쏟아지는 잠을
바구니에 꾸벅인다
시들어 가는 근대와 지쳐 가는 노모의 잠은
한 바구니 안에 얼크러져
서로의 볼을 부비며 위로한다
고단했던 무명의 시간들, 오래 걸었다
지나간 날은 먼지로 흐려지는
한 바구니 근대일 뿐
노모는 쭉정이만 남은 잠을
바구니에 넘치게 담는다
파장이다
처진 어깨를 늘어뜨리며
근대는 생의 마지막을 견디고 있다
한 뼘 남은 햇살이
노모의 등에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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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끊어진 길의 마디를 찾고 있다
김영미
버스를 놓치고
잠시 길이 끊어지고
그녀는 멈추었다
기대고 섰던 공간 몇 개
사각으로 비껴 선다
순발력있게 탑승해버린
그녀의 목적지가 멀어져가고 있다
길들이 망설이는 사이
도로변 윈도우,
환한 불빛을 들고 달려 나온다
그녀는 금새 진열되고 만다
바튼 발 사이
보도 블록 한 칸이 주목받고 있다
세상의 각도를 실루엣으로 처리한 채
그녀는 천천히 인도로 올라선다
지나가던 바람이 길을 흔들어
그녀를 섞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
공모를 시침떼고 이제
그녀는 물러섰다
떠나는 자와
떠나려는 자를 보고 있다
정류소 노선 목록을 훑으며
가야할 길 위에 놓인
자신의 목록을 읽고 있다
끊어진 길의 마디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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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의 바깥
김영미
사는 일이
사람을 만나거나 이 길 저 길 걷는 길이지만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걸은 길은 빙산의 일각
나머지 빙산은
내가 만나지 않은 사람들 속에 있고
걷지 못할 길 위에 있고 북극에 있고 남극에 있어
나는 모른다
문득 발 앞을 막아서는
노란 민들레꽃
또한 가 닿을 수 없는
나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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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의 여름
김영미
올해 첫 맨발
푸른 핏줄과 작은 발톱들
먼 심장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것들
가로수의 잎은 날마다 두꺼워진다
여름엔 추운 나라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
발등에 올려놓은 얼음은 참 여러 갈래로 길을 만든다
입과 입이 포개지면서 만들어지는 그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의 여름은 차갑게 갈라지는 너의 뒷면
비밀을 전해들은 나무가 어떻게 시들어 가는지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모으면 이미 지나간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뭉치고 뭉쳐
문지방에 가만히 올려두는 일
먼 심장으로부터
나의 맨발은 발끝을 오므린다
한여름의 수목 아래 낙엽이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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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달팽이
김영미
달팽이 한 마리 기어 나와
수저를 놓고 그릇에 밥을 담는다
말없는 가족이 젖은 잎사귀에 앉아
축축한 침묵을 나눈다
빈 그릇에 남긴 서늘한 더듬이의 흔적들
달팽이는 개수대에 물을 붓는다
견딜 수 없는 눅눅함을 씻어내려
그릇들은 부딪치며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
각기 제 집 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닫아 건 저녁
달팽이 한 마리 숨겨둔 촉수를 꺼내
숲을 찾아 나선다
거친 길을 엎디어 느리게 지나간 흔적
한 걸음 건너뛰는 법 없이 낮고 깊어지는 슬픔
단단한 껍질 때문에 서로를 안아줄 수 없는 삶
이제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집을 벗어 던진 달팽이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집 속에 감춰둔 말들이 하나 둘 기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문장을
고통스럽게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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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담쟁이 넝쿨
김영미
담쟁이가 푸른 길을 가꾸고 있다
학교 벽면에,
바람이 자꾸만 방해를 한다
그러나 담쟁이는 굳굳하다
묵묵히 자기의 갈 길을 간다
바람이 떠난 자리
담쟁이가 그린 초록지도가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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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김영미
억새가 바람에게 몸을 맡기는
경주로 가을이 걷습니다
천마총 지나
소나무 숲 사잇길
슬그머니 비켜 가는 햇살 한 줌
천 년의 바람과 구름이 품은 설렘
갸우뚱거리는 첨성대 지나
계림으로 느릿느릿 향합니다
물푸레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울창한 그늘에서 마시는 천 년의 숲
언덕길 오르면
반월성터에서 피어나는
무수한 별 무리
흐르는 강변 따라
푸른 풀꽃의 노래가 새겨 가는
나무의 나이테
천 년이 오고 가도
그곳에서 기다리는 당신에게
오늘의 날씨를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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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리코더
너에 대해 말하기 위해
김영미
불었지
사라져서 다행인 여기
입김에서 밤의 냄새가 나
구멍을 다 막고 나야 들리지 중저음의 숨결
가슴 아래서 진동벨이 울리는데
보면대 앞을 서성이는 말들은
부적합하지
내서는 안 되는 소리의 목록이지
밤은 흘러내리고 발목이 조여 오고
불지 마
발끝에서 자라난 뱀들이 목을 향해 오잖아
쇄골 깊숙이 턱을 묻고
밤은 그냥 밤에게 묻고
혀끝이 갈라질 때마다 달라지는 리듬이야
마룻바닥을 치는 슬리퍼야
너에게
너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높은 도와 낮은 도
이런 도덕률의 사이에서
분리되는 몸통이지
온몸의 수분을 다 빼야 잠잠해지는
목의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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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모란꽃 살 문
김영미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 살 문에
봄이 오네요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
깊은 잠을 털어내면
모란꽃 살 문 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
달그락 달그락
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려요
시들어 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네요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요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
지그시 웃네요
묻고 싶어져요
울고 있는 바리공주가 보이는지
이곳은 거친 바다예요
가시밭길에서 나무를 해요,
불씨 없는 불을 때고 있어요
가위눌린 꿈이어요, 다시 돌아갈게요
물을 길어 밥을 지을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아주 조금만
전 아직 한해살이 꽃이라도
한철 흐드러지게 피고 싶어요
어리석은 아픔을 조각해요
탁한 세상은
승선교를 지나고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바람이 불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풍화하는 시간 속으로
봄을 건너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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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별을 지나서
김영미
최면 의자에 앉는다
백 년 전 당신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신은 무엇이었습니까
최근에 나는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왔다
밝혀지지 않은 어떤 프로그램에 의해
테마가 있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취미는
원조 찾기이다
미래의 꿈은
기록 이전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
나무와 풀, 풀과 바람, 최초의 구름이 자리 잡기 전
나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최면술이 아니더라도
나의 과거는 밝혀져 있다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다
별!
제 온기 하나만으로도 한없이 빛나는
그러나 미심쩍다
아무래도 내가 반짝이는 고유명사의 幻에
안주하려 드는 것 같다
다시 최면 의자에 앉는다
별을 지나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色이기 전에
空이기 전에
당신은 무엇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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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보타닉 가든
김영미
암탉의 배를 가르니
달걀이 크기 순서대로 정렬해 있다
알들은 줄을 서 자라나던 중이었다
껍질이 단단해지는 순서였다
내장을 들어내고 벽을 훑어내고
뱃속은 다른 곡식과 열매와 뿌리로 채워졌다
밑은 이쑤시개로 막혔다 엎드린 등에 버터가 발렸다 그리고
껍질이 바삭해지는 중이었다
접시는 정원의 잎사귀로 가득했다 무화과와 한련과 저녁의 단풍
언제나 부드러운 들꽃들의 몸
포크가 두 개씩 시옷자로 놓여 있다
닭들이 머리를 맞대고 물을 마시던 각도다
더는 못 먹겠어, ‘달걀처럼 배가 꼭 찼어’
사람들은 배를 두드렸다 두드릴 때마다 배에 금이 번졌다
금은 금마다 구근을 달고
빈 접시는 여전히 부드러운 들꽃들의 몸
식탁이 부풀어오르고 오븐이 식어 가는 사이였다
정원에 뼈다귀를 묻고
아이들은 병아리가 피어나기를 기다렸다
보타닉 가든 : 도자기 회사의 식기 컬렉션 이름.
출처 : 월간 《시인동네》 202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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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북경소묘
김영미
북경의 후퉁
겨울 안개가 또아리를 튼 골목안
인력거에 올랐다
우리는 사람들을 지나치고
그들은 이방인을 구경했다
끼니를 위해 푸성귀를 사는 이
무표정하게 눈길을 건네는 이
좁고 내장처럼 얽힌 길
골목은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노란 모자를 쓴 아이가 소리내어 울고
남루한 옷가지들이 빨랫줄에 지친 듯 걸쳐져 있다
늘어진 피부의 여인이 식어버린 두부를 산다
인력거가 삐걱인다 연탄이 쌓인 집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골목이 희미해지며
인력거꾼의 등만 보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몰을 향해 휘어지는
그의 등은 핍진한 하루를 녹여
상형문자를 그린다
안개는 골목의 모든 시간을 가라앉게 한다
다리를 덮은 때 묻은 담요에 깃든 마지막 햇살
허물어져 가는 풍경 속에서도
인력거꾼은
죽을힘을 다해
생의 바퀴를 굴린다
*후퉁-좁은 골목 이란 뜻으로 베이징의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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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비누
김영미
몽땅 형용사 덩어리죠
술술 술어로 풀어지기 전까지는
문제는 주어가 될 만한 주체가 없다는 거죠
물거품이 아니죠
날개이기도 하고 지느러미이기도 하고
미끈미끈한 파충류의 질감!
라벤다 쟈스민 로즈향이 퍼져요
얼굴을 씻고 손을 씻고
흰 도마뱀의 꼬리
우글우글 목욕탕 바닥을 기어다녀요
가장 솔직한 부위는 촉각이죠
부비기만 하면 주술처럼 풀려나오는 복화술
과거를 낱낱이 고백하죠
미래를 예언하죠
지느러미가 떨어져나가고
간과 심장이 조각나고 애간장이 녹아버리면
나머지 반도 사라지고 말죠
손바닥 위에 희생양 한 마리가
놓여 있어요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도 붙잡을 수 없는
말씀의 화두
미끈미끈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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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비단끈
김영미
삶보다는 죽음
죽음보다는 자살이란 말이
더 솔깃한 내게
누군가 비단끈이 없어 못 죽는다고 했다
나일론끈이면 어때서요 그냥 살고 싶다 그러지요
비아냥거리면서
비아냥거리면서
나는 그만 비단끈의 마력에 걸려들었다
우선 지도를 펼치고
머나먼 사마르칸트를 향해 길을 떠난다
구도의 길이었건
교역의 길이었건
목숨을 걸었던 꿈이면서 끈이었던
실크로드를 따라간다 터벅터벅 다리를 끌며 절며
비단길 비단천 비단꿈 비단끈
한 곡의 노래
한 줄의 싯구
때론 한 줄기 햇빛과 바람으로
삶과 죽음이 손바닥처럼 명쾌해질 때
순간, 내 눈앞에서 목을 조르고 달아나던
붉고 푸른 비단끈들
거울을 당긴다
그 속에 내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붉은 올가미
그가 점찍어 놓았다는 소나무도 보인다
꿈틀거리는 목줄기를 어루만지며
비단길 비단천 비단꿈 비단끈
내가 목매달았던 나무들
강가에 걸린 한 그루 미루나무였을지도
그저 한 그루 신기루였을지도
두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죽도록 사랑해요
서로의 팔을 목에다 두르고
바싹, 비단끈을 조으고 있다
붉은 노을이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흰바지
피의 파도가 그녀의 안팎에서 철썩댄다
심해어들은 죽어서야 발이 땅에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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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빗소리
김영미
토닥 토닥 고분을 캐는 소리
늑골을 파는 소리
흙을 떨궈 내고 빗방울 모양이 曲玉을 가려
머리에 귀에 팔에 온몸이 찰랑이는 빗방울 여자를 거느리고
박물관 지나 土城을 지나 힌두사원 너머 몽골고원 그 남자 청동빛
부푼 근육을 지나, 북아프리카 그 여자 검은 유두를 지나 지구가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 멀리 주술사가 두드리는 여음의 북소리를
따라
밤 내내 걸어가는 신라적 처녀를 따라 그녀가 채우는 놋쇠 요강의
질긴 가락을 따라, 백제 마을을 지나 백수광부를 부르는 여옥의 노래
소리를 따라, 열두줄 빗줄기로 두드리는 고구려적 그 여자 분첩소리를
따라, 여덟 구멍 강물로 이어지는 피리의 宮音을 따라 흐르고 흘러 여기
내 몸 속으로
토닥 토닥 고분을 파는 소리
내 몸을 캐는 소리
고생대적부터 나의 그리움이
잠인 듯 꿈인 듯 무덤인 듯
오, 봉분처럼 둥근 그대 늑골 속으로
☆★☆★☆★☆★☆★☆★☆★☆★☆★☆★☆★☆★
《18》
산수유 필 무렵
김영미
겨울은 시계수리공처럼 집요하게
창밖의 시간을 응시했다
누군가 겨울의 웅크린 어깨를 흔들었을 때
구례 산동 상위 마을에 산수유가 피기 시작했다
그 것은 핀 다기 보다
번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시계 수리공은 완고한 시간의 나사못 하나를 풀어
충만한 빛의 물결을 마을로 보냈다
그는 나무의 부름켜 속에
숨어 있던 물 소리를 끌어 낸 것이다
나무의 우듬지에 돋아 나서는
끝없이 소곤거리며
저 먼 숲
고치 속의 벌레들을 깨우는 것이다
창문 밖 해빙의 시간이 내게 걸어왔다
꽃의 얼굴, 나무의 얼굴이
지상의 어떤 기운으로도 메울 수 없는
겨울과 봄 사이의 균열과 간극을
쓸어내린다
☆★☆★☆★☆★☆★☆★☆★☆★☆★☆★☆★☆★
《19》
석양의 식탁
김영미
해는 꼭
주방 창문에 와서
떨어진다
그때는
내가 칼질에 몰두할 때다
토마토를 얇게 저미고
당근을 채 치고
김치전을 마름모꼴로
썰어낼 때다
그때마다 해는 꼭
내 칼질에 걸려들 뿐이다
나의 칼질에는
명분이 있어
똑 똑 소리나지만
눈동자를 향하는
칼끝은 막을 수 없어
나는 촛대에 해를 꽂는다
어떤 나라에선
초경을 축하하기 위해
팥밥을 지어먹는다지
흰 냅킨을 펼치며
나는 칼처럼 반듯해진다
☆★☆★☆★☆★☆★☆★☆★☆★☆★☆★☆★☆★
《20》
애인의 문장
김영미
하얀 사막에 찍힌
하얀 토끼의
하얀 발자국이다
당신이 하는 말은
당신의 마음을 잘 숨겨준다
당신의 반짝이는 손이
당신의 마음이다
당신의 말을 바라보면
또박또박
또각또각
대형 점자책이다
하얀 토끼는
당근을 먹는다
백지 속에서
붉음이 짧아진다
짧아지다 사라지는
혀다
가늘고 붉게 다문
입술이다
더듬거리다 말
당신이다
☆★☆★☆★☆★☆★☆★☆★☆★☆★☆★☆★☆★
《21》
저물녘1
김영미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뒤란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아버지가 싸리 꽃을 좋아 하시던지
달이 지나가는 구름을 잡아두고 얘기하는 것을
몰래 들으시는가 했다
어둠이 성큼 마당을 기웃거릴 때
가을비속에 뒤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잔잔한 빗줄기가 오리나무를
성글게 빗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레빗은 수그린 머리와
잔등을 쓸어 내리며
네 사는 건 어떤가 묻는 것이었다
나무는 잔기침을 하며
오소소 떨 뿐이었다
외등으로는 자꾸만 낡아 허물어지는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어둠을, 물리치지 못했으므로
저물어간다는 것이
왠지 두려웠고 내 얘길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음이 텅 비어버려서
아무 생각 없는 생각을 했다
싸리 꽃은 내 그림자위에
붉게 붉게 꽃을 토해내고 달 그림자는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늙은 나무를 오래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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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저물 녘 2
김영미
그 여자 꽃 분홍 시폰 블라우스 사이로
삐져 나오는 살을 가까스로 당기며
하이힐에 온 몸을 싣고
흘러가네 출렁이네
담장 위 막 지기 시작한 배롱꽃
바람에 부스스 몸을 떨고
지는 빛을 감추려
여자의 화장도 짙어진 것일까
삼거리 곱창집, 소주 잔 기울이던 남정네들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네
아무도 부르지 않아도 자꾸
돌아다보게 되는 저물 무렵의 골목길
그녀는 삐져 나오는 공허함을
허리춤에 잘도 숨기고
오래된 전파사 앞 트로트로 꺽인 내리막을
엇박자로 걸어가네
어쩐 일인지
꽃 분홍은 서글프게 흔들리고
하이힐에 지탱한 그녀의 하루가
이제 막 저무네
사그라든 배롱나무 가지에 걸린
석양빛을 보다가
그녀, 무작정 걸음을 멈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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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차마고도
김영미
티베트에서 윈난까지
마방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말이나 사람이나 말린 옥수수를 먹으며
길을 간다
우기에 접어든 차마고도
말들은 젖은 짐을 등에 싣고 고원을 지난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협곡을 지나간다
하늘과 가까운 길 차마고도
순례에 지친 어둠이 깃든다
언젠가 하나둘 하늘에 올라
별자리가 되고 마는 마방의 운명
하늘 한 귀퉁이 끌어 덮고 잠을 청한다
소금계곡을 간다 소금 한 줌 되지 못한 생
늙고 비루한 말이 되어
부스럼 그득한 몸을 이끌고
끊어질듯 이어지는 길을 간다
삶에서 죽음까지는 지난한 길
들판의 꽃을 따라 걷던 노새였던 짧은 순간과
남은 목숨을 바꾸러 간다
한 덩이의 차를 구하러 간다
길은 내게 남은 시간을 내어 놓으라 한다
도정의 끝에 바람보다 가벼운 죽음
걸음은 더디고 길이 흐려진다
*茶馬古道 차와 말을 교역하던 중국의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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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층층나무 아래
김영미
입술과 입술이 닿자 물이 멈췄다
오래 고여 있던 여름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위해
층층나무 아래 누웠다 엽선 사이로 환한 햇살
발끝이 저려왔다 못생긴 음악처럼 아이들은 시끄럽고 지루했다
플라스틱 와인 잔을 들며 너는 붉어졌다
드디어 여름이 가고 있어
가로로
혹은
세로로
층층이 그어놓은 칼자국, 여름은 또 오겠지
층층나무는 시간의 순서를 통째로 외워 이파리를 내밀었다
알아, 드디어 여름이 가고 있어
가로로
혹은
세로로
저무는 층층계였다
입술과 입술이 멀어지자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
《25》
허공
김영미
어디를 들이받는지 옷을 벗다보면
늘상 여기저기 피멍이다
통증이 피었다
진자리
떨어진 동백 서너 송이
어디에 심하게 받쳤는지
석달 열흘 내내 정신이 멍하다
장산역을 내렸을 때
필히 들고 와야 할 전화번호를
탁자 위에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멍청은 허공의 다른 말
멍청해진다는 것은
몸에
허공의 개수가 늘어난다는 말
내가 지금 나온 곳이 9번 출구 던가
오락가락 헤매기를 한참
7번 출구 밖 다리를 쉬었던 돌부리에
거적때기로 버려져 있다
그 속에
팔다리가 없는
몸뚱이 하나가 누워 있다
허공을 올려다보니
머리와 가슴이 없다
내가, 허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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