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령포 장릉 탐방 후기 <1>
<2024년 3월 23일>
◀ 청령포 ▶
강원도 영월 땅 남한강 상류, 서강의 감입곡류가 만든 육지의 섬 청령포.
조선의 6대 왕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사육신 중심의 왕위 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이듬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길,
1457년 6월 22일(음력) 창덕궁을 떠나 6월 28일 이곳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그해 8월 홍수로 인해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길 때까지
두 달 정도 이곳에서의 유배생활 흔적을 찾아 보며 그의 아픔과 슬픔을,
그리움과 눈물을, 충정과 권력욕이 저버린 인륜을 함께 곱씹어 본다.
일정 : 청령포 ~ 왕방연 시조비 ~ (관풍헌) ~ 낙화암 ~ 노루조각공원 ~ <중식> ~ 장릉 ~ 선돌관광지 ~ 한반도지형 전망대
어젯밤 늦게까지 비가 내리더니 아침 해가 이미 높이 솟았건만 아직도 안개가 자욱하다.
고속터미널 GS칼텍스주유소 앞, 오늘은 버스 두 대로 탐방.
열시 오십분, 청령포 주차장 도착, 예정 시각보다 20여 분 늦었다.
작가 송주철의 [오백년만의 해후(邂后)]
*** 청계천 영도교에서 영영 돌아갈 수 없는 생이별을 한 단종과 정순왕후, 재회의 염원을 담았단다.
남녀의 교차형상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결합과 재회를 의미하고, 가로 원판의 수직 반복은 영원성과 점층적인 역사의 흐름,
그리고 녹이나는 조형물 재료는 시간의 흐름과 역사를 암시한다고 하네요. 생이별 후, 금년이면 벌써 567년의 세월이 흘렀네.
시간 여유가 없어, 동강할미꽃 전시회를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쳤네. 딱 3일간만 하는 전시회인데 ~~~.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은 강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은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육지의 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읽기가 불편하여 지난번 탐방 때 찍은 사진을 소환. (2022. 7.) *** 구하도(舊河道)는 한자를 같이 써주면 좋을 텐데 ~~~.
오늘은 [청령호]가 운행하네. 정원 42명. 우리 일행이 56명이니 어차피 나누어 탈 수 밖에 ~~~.
다음 배편 도착을 기다리며 즐거운 담소.
강 건너 가운데, 십여 그루의 노송 숲에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비가 서 있다.
단종 어소로 ~~~.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전망대 ~ 노산대 ~ 금표비
단종 어소 담 바깥에 뿌리를 둔 소나무가 단종이 계신 어소 방향으로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고 있다.
하여, 백성들은 충신松, 충의松이라 부르며 [엄흥도 소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종 어소는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으나, 과연 그럴까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긴 하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세조실록과 숙종실록이 서로 다르기도 하니까, 더더욱 그런 것 같다.)
※ 세조실록
세조 3년 10월 21일, 노산군이 장인 송현수와 금성대군의 죽음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졸(卒)하여 禮로서 장사 지냈다.
※ 숙종실록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드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통인(通引)이 뒤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
*** 通引은 조선 시대, 지방관아에 딸려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던 사람.
※ 참고로, 정사가 아닌 야사, 즉,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1457년 10월 24일 활줄을 이용하여 노산군을 교살한 상황을
아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단종 어소 기와집과 궁녀와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초가집)는 모두 2000년 4월에 새로 건립했다
영조 39년(1763)에 세운 '단종이 계시던 옛터'라는 뜻의 비석,
烏石에 [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영조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궁녀와 관노들이 기거하던 행랑채.
관음송으로 향한다.
[관음송(觀音松)]
*** 단종의 처량한 모습을 보았으며(觀), 시를 읊고 때로는 오열하는 울음소리를 들었다(音) 하여 [관음송]이라 부른다.
*** 198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 높이는 30m로 우리나라 소나무 중 최고, 둘레는 5m, 수령 600년으로 추정.
단종이 두 갈래로 갈라진 소나무에 걸터 앉아 쉬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단다,(당시 소나무 수령은 60년 전후)
망향탑 가는 길에 만난 생강나무 꽃.
[망향탑]
서강이 내려다 보이는 층암절벽 위에 단종이 한양에 머물고 있을 정순왕후 송씨를 그리워하며 막돌을 쌓아 올렸다는 돌탑
*** 단종이 직접 쌓아 만든 유일한 유적이다.
[전망대] 에서 바라본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
언제였던가, [나바론의 요새] 영화 장면이 뜬금없이 떠올라 다시 한 컷.
GREGORY PECK, DAVID NIVEN, ANTHONY QUINN, 참 멋진 영화였었는데 ~~~.
[노산대] 단종(노산군)이 유배생활 중 시름에 잠길 때마다 이곳에 올라 한양땅을 바라보았단다.
'몇 번이나 올랐을까',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도 참 대책이 없구나!' 싶어 실소를 하고 만다.
[금표비] 영조 2년(1726) 단종이 계시던 곳이라 하여 일반 백성의 출입을 금지하는 표석을 세운다. [淸泠浦 禁標]
동서로 3백척(91m), 남북으로 490척(148m) 출입 금지. 그리 넓은 면적은 아니네.
이번에도 두번에 나누어 승선
배 시간을 기다리며 '물수제비' 놀이도 하고 ~~~, 그런데 마땅한 돌들이 거의 없어 아주 멋진 장면이 나오질 않네.
강변을 따라 잠시 걷기도 하며 ~~~.
지난번 왔을 때는 이 [관풍호]를 탔었지.
[왕방연 시조비] 가는 길
잠시 왕방연이 되어 서강 냇가에 앉아본다. 마음으로만 ~~~.
저리로 휘돌아 가는 물길은 청령포역을 지나 동강과 합류하여 [남한강]이란 이름표로 흘러흘러간다.
[단종 유배길] 한양 창덕궁에서 청령포 까지 마을길 뱃길 산길 700리, 창덕궁을 떠난지 7일만에 청령포에 도착한다.
*** 현재 도로 기준으로 창덕궁에서 청령포까지의 거리는 175km.
*** 단종의 승하일이 세조 실록은 10월 21일, 숙종실록과 영조 때 세운 장릉 표석에는 10월 24일로 3일 차이가 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에서도 제각각이다. '조선왕릉과 왕실계보'에는 10월 21일로,
영월 장릉의 모든 표지판이나, 다른 유인물들에는 10월 24일로 기재하고 있다.)
◀ 일정 진행 상, 관풍헌 탐방은 그냥 지나치고 [낙화암]으로 향한다. ▶
1457년 6월 28일부터 두 달 가량 유배지 청령포에서, 8월 홍수를 피해 영월부 동헌의 객사였던 [관풍헌]으로 移御,
1457년 10월 24일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유배 4개월만에 1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노산군(단종)이 관풍헌에 머무는 동안, 세종 10년에 창건한 매죽루(梅竹樓)에 올라 자규사(子規詞)와
자규시(子規詩)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어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으며, 반대편에는 [매죽루] 현판이 걸려 있다.
단종의 자규사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슬피 울 제 / 시름 못 잊어 누대에 머리 기대니 / 울음소리 하도 슬퍼 나 괴롭구나 /
네 소리 없다면 내 시름 잊으련만 / 세상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단종의 자규시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외로운 몸 짝 잃은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밤마다 잠 청해도 잠들 길 바이없고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
울음소리 새벽 산에 끊어지면 그믐달이 비추고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러 꽃 붉게 떨어지는구나.
하늘은 귀먹어서 저 하소연 못 듣는데 어쩌다 서러운 이 몸의 귀만 홀로 밝았는고.
이후, 낙화암 탐방 등 사진 기록은 [영월 청령포 장릉 탐방 <2>]편에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청파님의 후기는 최고의 역사탐방서 입니다
매번 보고읽을때마다 감탄하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걷는 길, 덕분에 늘 즐겁습니다.
좋았던 봄날씨에 숨어있는 유적지들을 다 볼수 있어서 즐거웠던 시간이었어요
지난번 갔었던 정업원과 이번의 청령포 탐방은 최고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너무 슬펐던 그 부부의 스토리를 되새기게 됩니다
언제나지만 자상한 해설에 감사드려요
고맙습니다.
말씀대로, 당일치기 일정으로 많은 유적을 돌아보았네요.
일박쯤이면 창절사, 영모전에 보덕사까지 둘러볼텐데 ~~~.
단종애사, 슬픔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그저 먹먹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