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5일(수)
안양문화원 문화유산해설사회 17분의 선생님과 학예사님이 아침 7시 문화원을 출발하여 강릉 역사탐방길에 올랐습니다.
세 시간을 달려서 첫 탐방지인 굴산사지 당간지주에 도착 하였습니다.
# 굴산사(堀山寺)는 신라 문성왕(文聖王) 13년(851) 범일국사(梵日國師, 810~889)가 창건한 사찰로, 우리나라 9산선문(九山禪門) 중의 하나인 사굴산문(闍堀山門)의 중심 사찰이었다.
굴산사는 고려시대에는 지방 호족들의 지원하에 번성한 후 조선 초 이후의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 이후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86호), 범일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릉 굴산사지 승탑(僧塔, 보물 제85호), 강릉 굴산사지 석불좌상(石佛坐像, 문화재자료 제38호) 등이 남아 있어 굴산사 당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두 개의 돌기둥,
고대 사찰에서는 법회 등의 중요한 행사를 할 때 불화를 그린 깃발을 높이 매달아 행사를 널리 알렸다.
천이나 종이에 그린 불화를 당(幢:깃발)이라 하고, 당을 다는 긴 막대를 간(竿:깃대)이라고
합니다.
이 당간을 받쳐 세우는 두 개의 돌기둥이 당간지주(幢竿支柱)입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다듬지 않은 거친 표면이 그대로 드러나게 만들어서 세웠습니다.
경전(經典)의 가르침과 교리(敎理)를 중요시하는 교종(敎宗)과 달리 선종(禪宗)은 참선(參禪)을 수행하여 깨달음(頓悟, 돈오)을 얻는 것을 중요시하여서 선종은 경전, 장엄, 법식 등을 거부하고 장엄물(莊嚴物)을 세우지 않았고 만약 세운다고 하여도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추구하였습니다.
당간지주를 양쪽에서 바라보면 위아래에 당간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두 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이를 간공(竿孔) 이라고 부릅니다.
간공을 통해서 보면 양쪽 기둥을 통과하여 반대편이 훤히 보이도록 수평으로 뚫었습니다.
당간지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합니다.
학산(鶴山) 마을 표석.
명주학산(溟州鶴山) 오독떼기는 무형문화재 제5호로,
범일국사 탄신지(梵日國師誕辰地)는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고,
학산은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의 수호신(守護神)입니다.
학산 서낭당(鶴山城隍堂)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 대관령국사성황(大關嶺國師城隍) 범일국사가 태어난 학산의 서낭당으로 매년 음력 4월 15일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 때 국사성황행차가 대관령산신당(大關嶺山神堂)을 출발하여 대관령국사성황사(城隍祠), 구산(邱山)서낭당을 지나 대관령국사여성황사(女城隍祠)로 가기 전 잠시 머물러 굿을 하고 제례(祭禮)를 올리는 곳입니다.
석천(石泉)
석천 우물은 강릉단오제 주신인 범일국사를 잉태하게 한 우물로 전한다.
옛날 이 마을에 양가집 처녀가 있었는데, 하루는 물을 길러 가서 바가지에 물을 뜨니. 해(日)가 바가지에 담기는 것이었다.
물을 쏫아내고 다시 떠기를 반복하였는데 이상하게 바가지에 해가 떠 있는 것이었다.
그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 뒤 처녀는 배가 불러오고 14개월 만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범일국사(梵日國師)라고 전한다.
석천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조당집과 임영지(臨瀛誌) 등 강릉지역 향토지에 전하고 있다.
강릉 굴산사지 승탑(僧塔, 보물 제85호)
승탑은 스님의 사리(舍利)나 유골(遺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이다.
강릉 굴산사지 승탑은 선종구산 중 하나인 사굴산문을 세운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이라고 전한다.
이 승탑은 보물 제85호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승탑은 모든 부분의 평면이 8각을 기본으로 하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세 단으로 이루어진 기단부(基壇部)의 맨 아래부분은 사자(獅子)를 돋을새김한 지댓돌이 있고,
그 위에 접시 모양의 팔각 수반(八角水盤)으로 만들었고,
3층 기단은 구름모양의 받침 위에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을 새기고 그 위에 위로 향해 핀 연꽃문양(仰蓮, 앙련)을 새겼습니다.
승탑의 몸돌부는 앙련 받침 위에 8각의 몸돌을 배치하여 사리(舍利)를 안치하고 지붕돌인 옥개석(屋蓋石)을 올렸습니다.
탑의 머리 장식부에는 귀꽃(지붕돌의 추녀마루 끝에 꽃무늬를 새긴 장식)을 표현한 보개(寶蓋-머리 장식부에 놓인 지붕 모양의 장식)와 연꽃 무늬를 돌려 새긴 보주(寶珠)가 남아 있습니다.
금강산(金剛山)도 식후경(食後景)
입니다.
경포호(鏡浦湖) 인근에 있는 100년 전통 초당순두부 집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초당순두부는 삼척 부사로 부임한 조선 중기의 문신인 허엽(許曄, 1517~1580)이 집 앞의 샘물맛이 좋아 그 물로 콩을 가공, 깨끗한 바닷물로 간을
맞추어서 두부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후 두부 맛이 좋기로 소문나자 허엽이 자신의 호인 초당(草堂)을 붙여 초당두부의 이름이 탄생되었다고 합니다.
점심을 먹고 강릉의 새로운 명물로 떠오르는 안목항 커피거리를 찾았습니다.
안목항(강릉항)을 바라보면서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로움을 느껴봅니다.
초록 모자를 눌러 쓴 스머프 5남매
차 한 잔을 마시고 강릉항북방파제 빨간등대에서 기념촬영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이 아름답습니다
초당순두부로 배를 채우고, 안목항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경포대로 향했습니다.
경포대(鏡浦臺) 앞에서 경포호(鏡浦湖)를 바라보면서 해설을 하고 있는 박석환 부회장님
경포호(鏡浦湖)는 본래 주위가 12Km에 달하는 큰 호수였으나, 현재는 흘러드는 토사의 퇴적으로 주위가 4Km로 축소되고 수심도 1~2m 정도로 얕아졌습니다.
호반 서쪽의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경포대는 예로부터 경포호를 배경로 한 관동8경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다.
경포호는 호수 주위의 오래된 소나무 숲과 벚나무가 유명하며, 경포호를 바다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는 해안사주(海岸沙洲)는 경포해수욕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경포호를 마주하는 동쪽 창방(昌防)에 걸린 해서체(楷書體) 현판(懸板)은 이익회(李翊會, 1767~1834)의 글씨입니다.
경포호를 마주하는 동쪽 퇴칸(退間)은 단을 높여 마루를 만들고 남 , 북쪽에는 한 단을 더 높여 누마루를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3단의 마루로 구성하였습니다.
내부의 대들보(大樑) 아래에 걸려 있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은 명(明)나라 주지번(朱之蕃, 1546~1624)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 주지번은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때 조선에 와서 허균(許均, 1569~1618)으로부터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이 쓴 시를 받아서 중국으로 돌아가 <난설헌집(蘭雪軒集)>을 간행하였고, 이 책은 일본에도 전파되어 조선시대에 한류(韓流)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숙종어제(肅宗御製)
용무늬가 그려진 대들보 위에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임금이 지은 칠언절구(七言節句) 한 수(首)가 걸려 있습니다.
정란안지요서동(汀蘭岸芷繞西東)
십리연하영수중(十里煙霞暎水中)
조예석음천만상(朝曀夕陰千萬像)
임풍파주흥무궁(臨風把酒興無窮)
물가의 난초와 언덕의 지초가 동서로 둘러싸니,
십 리 뻗친 물안개 물속에 다 비치니.
아침 햇살 저녘 그늘 천만 가지 모습이요,
바람 맞으며 술잔을 드니 주흥이 끝없이 이네.
(정연봉 역)
그 옆에는 영조(英祖) 시대 강릉부사를 지낸 조하망(曺夏望)이 쓴 경포대상량문(鏡浦臺上樑文)이 걸려 있습니다.
경포대 낙양각(洛陽閣)을 통해 바라보는 경포호수
경포대 난간에 기대어 앉아서...
경포대 앞에서도 기념 촬영을 하였습니다.
남쪽 합각면 창방(昌防) 위에 걸린 전서체(篆書體)로 씌어진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유한지(兪漢芝, 1760~1834)의 글씨입니다.
※ 유한지는 정조(正祖)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 참배를 위해 건설한 안양 '만안교(萬安橋)' 비(碑)의 글씨를 쓴 인물입니다.
이번 탐방의 마지막 일정인 오죽헌(烏竹軒)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오죽헌 입구에서 반가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우리 지역 충훈고(忠勳高) 수학여행단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잘 생긴 선남선녀(善男善女)들입니다.
오죽헌 입구에는 '세계 최초 모자(母子) 화폐 인물 탄생지, 오죽헌'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오만원권 - 신사임당
오천원권 - 율곡 이이
어머니와 아들이 나란히 화폐의 인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오죽헌 입장료는 55,000원(?)입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율곡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견득사의(見得思義)
이득을 보거든, 옳은것인가를 생각하라.
德水 李珥 書
오죽헌 배치를 설명하는 박석환 부회장님
오죽헌의 동쪽문인 자경문으로 들어갑니다.
자경문(自警文)은,
율곡이 열여섯에 어머니를 여의고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유학(儒學)에 뜻을 품고 일 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때 강릉 외가로 와 외할머니 앞에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이라는 의미로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는데 거기서 따온 이름입니다.
강릉 임영관 삼문(江陵臨瀛館三門)을 본따서 지은 자경문을 들어 서면 <율곡선생유적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오죽헌 앞마당 광장에는 제62회대현율곡이선생제(大賢栗谷李先生祭) 준비로 한창 리허설 중입니다.
오죽헌으로 오르는 계단은 행사 준비로 무대를 설치해 놓아서 좌측의 살림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해서 들어갑니다.
오죽헌의 해설을 이어가는 박석환 부회장님
오죽헌(烏竹軒, 보물 제165호)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별당 건물입니다.
이곳 몽룡실에서 율곡선생이 태어났습니다.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는데 오른쪽 한 칸은 온돌방이고 왼쪽 두 칸은 마루로 되어 있습니다.
정면 세 칸 중 가운데 칸은 대청(大廳) 마루로 되어 있고 처마 아래와 안쪽에 각각 오죽헌(烏竹軒)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대청에는 율곡선생이 학문을 처음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책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의 한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비례물시(非禮勿視) :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비례물청(非禮勿聽) :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비례물언(非禮勿言) :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비례물동(非禮勿動) :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니,
사자수신지요야(四者修身之要也) : 이 네가지는 몸을 닦는 요점이다.
오른쪽 온돌방은 1536년(중종 31)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곳으로 몽룡실(夢龍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몽룡실 안에는 신사임당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고, 율곡선생제를 위한 제수상(祭需床)이 진설(陳設)되어 있습니다.
오죽헌은 주거건축물에서는 드물게 이익공식(二翼工式)을 취하고 있어서 주심포(柱心包)와 익공(翼工)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건물입니다.
익공이란 새의 날개 모양을 한 부재를 기둥 위에 설치한 장식을 이르는 말인데, 이익공식은 장식을 두 개 설치한 것입니다.
주로 궁궐이나 사찰의 격(格)이 높은 건물에 장식하는데 오죽헌에도 설치를 하였습니다.
율곡선생의 영정(影幀)을 모신 문성사(文聖祠) 앞에는 '대현율곡이선생제(大賢栗谷李先生祭)'의 중심 장소로 서제(序祭)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문성사 아래에는 율곡선생이 바라보면서 운치를 노래한 율곡송(栗谷松)이 자라고 있습니다.
문성사 앞마당에는 강릉 시화(市花)로 지정된 배롱나무(백일홍, 간지럼나무, 선비나무 로도 불려짐)가 자라고 있습니다.
신사임당과 율곡 모자가 어루만졌을 수령 600여 년을 넘긴 이 배롱나무는 율곡송과 함께 오죽헌을 지켜주는 수호목(守護木)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박정희대통령이 <율곡선생유적정화사업> 때 심은 주목(朱木)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율곡매(栗谷梅)는 600년 세월을 넘긴 지금도 해마다 봄이 오면 아름다운 홍매(紅梅)를 피웁니다.
오죽헌 주변에는 오죽헌(烏竹軒)의 당호(堂號)를 짓게 된 검은색 대나무인 오죽(烏竹)이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오죽은 어릴 때는 청색이다가 2~3년 후부터 검은색으로 변하였다가 60여 년이 지나면 흰색으로 변하면서 죽습니다.
별당채인 오죽헌에서 협문(夾門)으로 나가면 사랑채와 안채가 자리합니다.
사랑채와 안채는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1975년 정화사업 때 사랑채는 남겨 두고 건물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안채는 철거를 하였다가 후에 새로 지으면서 분리된 모습이 되었습니다.
안마당에 설치된 사랑채 굴뚝은 연도(煙道)를 통해서 연결된 기와 조각을 쌓아서 만든 와적굴뚝(瓦積煙家, 와적연가)입니다.
그을음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도록 지붕보다 높게 조성하였습니다.
'ㄱ'자 구조로 지어진 안채는 한옥(韓屋)의 핵심 공간으로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대부분의 집안 일이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안채의 굴뚝은 낮은 와적굴뚝으로 설치하였습니다.
주변에 오죽이 많이 보입니다.
안채 서쪽 담장의 운한문(雲漢門)으로 들어가면 어제각(御製閣)이 있습니다.
1788년(정조 12) 정조 임금은 율곡이 어린 시절에 사용하였던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궁궐로 가져오게 하여 친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지어 새기게 하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붙여 잘 보관하라고 하면서 돌려보냈습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은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어제각을 지었습니다.
어제각 현판은 건물의 안과 밖에 하나씩 두 개가 걸려 있습니다.
안쪽에 걸려 있는 현판은 임금을 상징하는 어(御)자는 높게 쓰여져 있습니다.
벼루의 뒷면에 새겨진 정조의 어제어필(御製御筆)
함무지(函婺池) : 무원 주지의 못에 적셔 내어,
상공석(象孔石) : 공자의 도를 본 받아,
보궐시(普厥施) : 널리 베풂이여,
용귀동(龍歸洞) : 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지만,
운발묵(雲潑墨) : 구름에 먹을 뿌려,
문재자(文在玆) : 학문은 여기 남아있구나.
어제각 앞에는 석류나무 한 그루가 심겨져 있습니다.
율곡이 세 살 때 외할머니가 마당의 석류를 가리키며 소감을 묻자,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裏碎紅珠)-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져 있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제각 운한문을 나오면 오죽헌 건물들이 한 눈에 보입니다.
바깥주인이 기거하면서 외부 손님을 접대하던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쪽 한 칸은 툇마루로 되어있고 툇마루 기둥의 주련(柱聯)은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의 글씨입니다.
구옥(舊屋, 사랑채)의 주련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 김정희가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의 포쇄관(曝曬官-사고에 보관된 서적을 점검하고 바람을 쐬어 말리는 일을 하는 벼슬)으로 가던 중 오죽헌에 들러서 명나라 진계유(陣繼儒)의 암서유사(巖棲幽事)에 나오는 싯구를 쓴 글입니다.
오죽헌 영역의 정면에 있는 솟을삼문으로 된 정문(正門)인 입지문(立志門)을 통해서 밖으로 나옵니다.
입지문 앞의 중앙광장에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동상(銅像)이 있습니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시, 그림, 글씨, 자수에 뛰어났던 예술가로 묵포도도, 산수도, 초충도, 초서 등의 작품과 '사친(思親)' 등의 한시를 남겼습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인 율곡 이이의 어머니 입니다.
사친(思親, 어머니를 그리며)
산 첩첩 내 고향은 여기서 천 리
꿈속에도 오로지 고향 생각 뿐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 가겠지
언제쯤 강릉 길 다시 밟아가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 할까!
첫댓글 강호인해설사님 강릉답사길 소중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면마다 적어주신 해설글 읽으며 강릉여행을 반추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의 명품 해설과 더불어서 강릉 답사길에서 더욱 소중한 추억을 가득 안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