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상대적 불이익. 相對的 不利益.
을지 소왕은 다음날 수련원으로 행차 하였다.
소왕의 공식적인 수련원 방문이다.
사정 수련생들의 수련 마감을 축하해 주기 위해 직접 방문한 것이다.
을지 소왕의 뒤를 따라 수련원으로 들어오는 이중부와 우문청아의 모습이 쑥스러워 보인다.
몇 명 되지 않지만, 수련생 모두가 중무장 重武裝 한 모습으로 엄숙히 수련원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는 흉노족의 밝은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소를 잡고 거위를 요리하고 아끼던 말린 물고기까지 가져오라 하여 축제를 열었다.
수련생 두 명을 지적하여 대련 시범을 요구하였다.
수련생 중 뒤늦게 합류한 서누리와 발렬 마호가 지명 指名받았다.
“그럼, 잠시 둘이 대련을 해볼 텐가?”
“어떻게요?”
“먼저 맨손 격투기를 해보고 다음 봉술이나 창술 대련을 해볼 수 있겠나?”
누리와 발렬 마호는 서로 마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둘이 무술 대련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다. 틈만 나면 하루에도 여러 번씩 겨뤄왔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다르다.
신중하다.
대련의 형태는 씨름의 원형 격인 샅바 없는 씨름이다.
손바닥으로 상대를 가격할 수는 있으나, 주먹은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가 다칠 수 있는 안면 타격은 가하지 않고, 밀고 당기는 힘과 기술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한쪽 어깨가 바닥에 먼저 닿는 자가 지는 것이다.
같은 동이족 고구려 수박도 手搏道와 흡사하며, 일본 스모의 원형 原型이기도 하다.
평시에는 보통 누리의 손바닥 공격으로 곧바로 대련이 시작되는데 지금은 다르다.
오늘은 처음 보는 관중들이 많다, 더구나 소왕이 직접 참관 參觀한다.
더구나 낭자들까지 큰 눈망울을 굴리며 호기심을 내비치고 있다.
천천히 빙글빙글 도는 탐색전이 이어진다.
두어 번 서로의 손바닥이 마주치는가 싶더니, 누리가 발을 옆으로 옮길 때 오른쪽 옆구리에 허점이 드러난다. 그러자 발렬 마호가 오른손으로 누리의 오른쪽 허리를 공격한다. 순간, 누리는 몸을 비틀어 마호의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든다. 오른손 공격은 상대를 속이는 허초식(虛招式)이었다. 마호는 누리의 우악스러운 완력을 익히 아는바, 맞겨루지 아니하고 왼쪽으로 몸을 가볍게 돌리더니 누리의 왼 다리를 잡고 누리가 공격하던 방향으로 그대로 밀어버린다.
상대의 공격을 힘 안 들이고 결대로 역이용하는 고단수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연습으로 몸에 밴 공격과 방어술이므로 누리도 상대를 양손으로 다잡고 자신의 왼쪽으로 힘껏 당겨 버린다.
누리의 역습에 ‘어이쿠’ 중심을 잃은 마호가 재빨리 두 팔로 땅바닥을 짚고, 상대가 당기는 힘을 이용하여 한 바퀴 공중 회전하는 덕수 넘이를 한다.
순간 구경하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모두 손뼉을 친다.
아주 고단수의 격투기 수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공격과 수비 겸 역공격, 거기에 또 방어술까지 완벽한 고수들의 매끄러운 몸놀림이다. 이를 보고 모두가 탄복한다.
이번엔 누리가 일어나는 발렬 마호의 허리를 부여잡고 왼발로 호미걸이를 시도한다. 누리는 오른발 뒤축을 걸고 상체를 마호의 가슴에 밀착시켜 왼편으로 밀어붙인다.
제대로 걸렸다. 누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마호가 호미걸이를 파하고자 만약, 오른발을 바닥에서 띄우면 그 즉시 몸이 중심을 잃고 상대의 의도대로 왼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발렬마호의 위기 상황이다.
발렬마호가 힘으로 끝까지 버티며, 왼무릎을 순간적으로 살짝 굽히니 누리의 몸 중심이 흐트려진다. 그 찰라를 놓치지 않고 왼쪽으로 돌려치지를 시도하니, 상대방도 어쩔수 없이 같이 돌아간다.
그렇게 두 바퀴를 돌더니 둘이 동시에 모래사장에 넘어진다.
묘기에 가까운 두 사람의 씨름 솜씨에 감탄한 마당의 모든 사람이 손뼉을 친다.
그러나 승부가 난 것은 아니다.
마호가 먼저 손을 내밀어 누리의 오른손을 당기며 같이 일어났다.
그러자 을지 담열 소왕은 두 장정에게 “오늘 아주 좋은 실력을 구경했네, 드물게 보는 고수들이군, 자네들에게 좋은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더니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 기회에 또 만나기로 하세”
격투기 한 가지만 보아도 다른 무예는 짐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수련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늘 보고 받기 때문에 그 실력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실은, 사정 수련원의 운영은 처음부터 을지담열 소왕야의 계획이었다.
특정한 사부를 모시고 강제적 주입식으로 무예를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여러 형태의 적들이 습격하는 것처럼 하여, 이에 대응 방어하며 자발적으로 무술을 연마하고, 자력으로 문제점들을 해결 해나가는 과정을 시험해 보는 일종의 무예 실험장이었다.
물론 수련생들이 무예의 기본실력을 탄탄히 갖춘 고수 수준이기에 가능한 실험이었다.
대릉하를 떠나 이주할 때부터 사로국 무리와 청하문 패거리들의 두 무리가 어울려 싸우는 것을 야간에 우연히 목격한 을지 소왕야.
이에 관심을 갖고 남몰래 계속 지켜보니 서로의 실력이 일취월장 日就月將 진보하는 것을 보았다.
자발적으로 같은 무리끼리 뭉쳐 열중하니,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따라서 무예 실력도 나날이 발전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착안 着眼하여 사정 수련원에서 자율적인 수련을 할수 있도록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실험은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물론, 무리 중에 이중부와 박지형이라는 절정의 무술계 최고수들이 있기에 가능한 실험이었다.
더구나, 박지형과 이중부 남매는 귀중한 볼모들이다.
사로국으로 입국한 형제들 즉, 흉노족 3만여 명의 안위 安危를 보장받을 수 있는 일종의 담보물 擔保物인 것이다.
유일한 담보물인 볼모를 안전하게 잘 보살펴야만 한다.
수련원이란 외부와 격리된 장소에서
그 볼모를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더구나 그 볼모들이 여러 명의 특수한 전사를 육성시키는 괄목 刮目할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을지 소왕은 이처럼 일석이조 一石二鳥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중부 남매의 어머니를 남모르게 사로국으로 보낸 것도 볼모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이었다.
혈육이 떨어져 있어야만 볼모의 값어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한 가족을 모두 같이 데리고 있으면, 상대국에서는 크게 아쉽거나 답답해할 것이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볼모를 포기할 수도 있다.
그 집단이나 국가의 신의나 위상이 손상될 수는 있으나, 혈육을 그리워하는 핏줄의 정 情 보다는 그 강도 强度가 현격 懸隔히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볼모의 가족이나 그 혈육들이 목소리를 높여 상대국의 국정 國政에 개입하여야만 볼모의 근본적인 의미가 살아난다.
그러니 최고의 볼모 대상은 상대국 왕의 자녀인 왕자다.
왕자 중에도 장남인 태자 太子라면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조건이다.
국책회의 國策會議나 국론토의 國論討議시 자신의 피붙이 가족을, 귀중한 혈육을 상대국에게 보낸, 고위직 高位職의 발언에 대하여 이리저리 토 討를 달거나, 반대하기가 어렵다.
볼모로 보낸 혈육 간의 찢어진 아픔과 헤어짐의 괴로움을 누구도 감히 무시할 수가 없다.
다음 날,
금성부의 허락을 얻어 수련생 모두에게 이백 부장 貳百夫長의 죽패 竹牌를 수여하였다.
을지소왕이 말한 ‘좋은 선물’이었다.
박지형에게는 오백 부장의 동패 銅牌가 손에 쥐어졌다.
그러나 박지형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동패다.
적당한 기회가 오면 부모님이 계신 고향인 사로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박지형의 단순 생각에 불과했다.
박지형은 이곳에서 어떠한 구속감 拘束感도 없이 나름대로 자유롭게 행동하고, 각별한 대우도 받고 있지만, 사로국으로 입국한 흉노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종의 볼모 형태로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는 처지임을 자신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중부와 슬비도 같은 이유이다.
다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詩를 한 수씩 써 달라는 이상한 지시를 받았다.
박지형과 이중부 남매는 짧은 글솜씨에 시를 쓴다는 것이 난감 難堪하였으나,
어릴 때 보았던 몇 가지 글들을 조합 組合하여 을지소왕에게 제출하였다.
이슬비는 주로 그림을 그렸다.
계절에 따라 피어나는 꽃과 나무들을 그려서 제출하였다.
을지 소왕은 그들이 제출한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없이
말미 末尾에 적은 날짜와 각자의 署名에만 신경 쓰는 태도였다.
그들로서는 고난도 무예를 배우고 깨우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과제였다.
사정 수련원의 관리자. 설걸우 천부장은 이백 부장들에게는 평시에는 3기생의 조교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러자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준 백부장이다.
한준은 나름으로 열심히 수련생들을 지도하고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백 부장 직급 職級이었다.
그런데,
나이는 비슷한 또래지만, 무예 경력이나 실력은 새파란 어린 후배들이 자기보다 더 높은 이백 부장 직급으로 같은 직책 職責의 조교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수련 과정을 따진다면, 자기가 겪은 훈련의 반에도 채 못 미치는 자율수련 自律修練을 하고서는 더 높은 직급을 받다니...
그러니까, 평범한 일반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사정 수련생들의 무예 실력이 엄청
뛰어난 고수로 보일지 몰라도, 당대 최고의 무술가 십이지살과 혈창루 두 사부의 지도와 박달촌의 엄격한 수련 방식으로 3년 동안, 어렵고 힘들게 겪은 한준 백부장의 눈으로 볼 때는 그들은 놀면서 딴 직급이나 다름없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나이는 비슷할지 몰라도, 수련 강도나 일신의 무예 실력은 조족지혈 鳥足之血이라고 속으로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하의 단주에서부터 자신을 믿고 따라온, 단씨 형제들에게 조직 내에서 자신의 이러한 위축된 입지 立地를 보여주기가 계면쩍고 미안스럽다.
혈창루 모용척도 한준의 실력과 현재 처지 處地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이 간다. 하여, 을지 소왕에게 한준에 대한 배려를 건의하였다.
을지 소왕은 ‘알았다’라고 어렵지 않게 대답하였으나,
때마침, 소왕의 수하 手下 천부장 소속의 무리가 투후부 관할지역으로 월경 越境해 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평소부터 관계가 좋지 않았던 투후부는 자신들의 관할 구역을 무단 침범한 백부장 2명을 사로잡아 감금시키고는 을지 소왕에게 질책 叱責성 항의 抗議를 하였는바, 그 질책의 내용이나 방법이 예전과 달리 상당히 신랄 辛辣하였다.
그렇게 투후부와의 알력 軋轢으로 인하여, 그곳에 신경을 쓰느라, 그만 시기를 놓쳐 버린다.
을지소왕과 혈창루는 죽을 때까지 이를 두고두고 자책 自責하고 후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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