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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13> 2011년 2월 18일(금)
<개역> 사 33:6.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표준역> 사 33:6. 주께서 너로 안정된 시대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주께서 늘 백성을 구원하시고, 지혜와 지식을 주신다. 주를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보배다.
<NIV> 사 33:6. He will be the sure foundation for your times, a rich store of salvation and wisdom and knowledge; the fear of the LORD is the key to this treasure.
아침 일찍 국회 귀빈 식당으로 향한다. 희망포럼의 식구들이 김영진 장로 초청으로 조찬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전병금 목사의 “누가 큰 인물인가?”라는 설교도 명 설교였지만, 총무 이치우 목사님이 한 구절 읽어주신 이사야의 말씀이 귀에 쏙 들어온다.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사 33:6) 오늘의 말씀으로 모처럼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을 선택해본다. 주님, 제게 평안을 주시고, 구원과 지혜와 지식을 풍성하게 하시며, 주를 경외함을 제 보배로 삼게 하옵소서. 아멘.
2월 14일(월) 1960년대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으로 알려진 영화 <하녀>를 봤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하녀는 자살을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인생을 즐긴다. 그것이 감독이 말하려는 의도였을까? 대학 시절 연극을 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오신 예수>라는 제목의 극을 올리며 마지막 앤딩곡으로 <비 내리는 영동교>를 썼던 기억이 났다. 사람들이 내게 와서 왜 앤딩곡을 <할렐루야>와 같은 가스펠 송이나 찬양으로 하지 않았느냐며 물었을 때, 나와 감독의 대답은 주님이 다녀가셔도 여전히 세상을 제 갈 길로 돌아간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그 기분을 오늘 영화 <하녀>를 보면서 다시금 느끼는 것이다. 무력한 분노라고 할까?
내일 모레면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루 종일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책을 읽었다. 산상수훈에 대한 책이었다. 제자도를 강조하는 책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고, 지금의 내 신앙여정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우선 책을 읽으면서 귀국하여 하여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생각났다.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윤종석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00)
636. 『하나님의 모략』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3장: 현대 문화의 모습을 진단하고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가 처해있는 여러 현상과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하나님의 세계에서 누리를 풍성한 삶을 보여준다.
3-7장: 산상수훈에서 발견되는 예수의 핵심 가르침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8-10장: 예수 학교의 제자들이 도제가 되어 변화 받는 길을 제시한다.
15. 인간의 마음이 갈망하는 참된 자유 - 선이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선을 알고 행하는 능력 - 를 누리는 자들이다.
23. 아무리 멀어 보여도 우리의 미래는 현재를 살아가는 믿음과 현재 맛보고 있는 삶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다. 영원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좋든 싫든 우리도 그 영원과 함께 가고 있다.
1장. 영원한 삶의 현재성
34. 정당화할 필요가 없는 관념이야말로 진정 위력 있는 관념이다.
37. 배 안에서 바람과 파도에 떠밀리면서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유일하고도 중요한 질문에 “어디로든 가고 있다”고 밖에 답할 수 없는 사람 꼴이었다.
42. 천재성이란 뻔한 것을 캐묻는 능력
43. 기막힌 보험이 있는 고장 난 차와 제대로 달리는 차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44. 인간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해지거나 옳은 일을 더욱 더 잘 행하게 된다.
47. 인간이란 누구나 한 번쯤은 언젠가는 “15분의 명성”을 누리게 돼 있다. - 앤디 워홀
48. 물은 아래로 흐르도록 지음을 받았고 우리는 중요한 존재가 되도록 지음 받았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중요한 존재가 되도록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특별한 환경에 처하게 하셨다.
56.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 하신 이유는 그들 자신이 크다는 말이 아니라 더 큰 능력이 그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 크다”는 것은 우리의 본질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57. 우리가 세상의 적정 영역을 다스리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이요 피조물인 인간의 기본 숙명이다. ... “나라”란 한 마디로 우리의 의지가 유효한 영역이다. 우리가 진정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일마다 우리의 나라 안에 있다.
65. 이웃 사랑은 자신의 통치를 하나님의 통치와 연합시키는 것을 우선 목표로 삼을 때만 가능하다.
71. 가까이 있는 전기를 쓸 수 없는 사람
2장. 죄 관리의 복음
77. 바코드 신앙
78. 믿음과 스캐너 통과의 보상은 죽을 때와 그 이후에 찾아온다. 바코드 기능이 있는 한 현재 살아있는 삶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필수적인 관계가 전혀 없다.
78. 값싼 은혜, 화재 보험 등과 같은 신앙 = 바코드 신앙
81. 식품이나 음료 광고에 나오는 유명인들이 정말 그 제품을 사용할까 궁금할 때가 많다.
84. 기독교의 선포 및 실천의 전체 스펙트럼을 보면 우익 신학의 본질이 되는 것은 개인의 죄 용서이다. 좌익의 경우에는 사회악이나 구조악의 제거에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은 죄 관리의 복음이 된다.
93. 성경 전체의 전통은 시작부터 끝까지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친밀한 개입, 혹은 소외에 있다.
97.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언제나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를 뜻한다.
101. “나는 고장 난 곳이나 고쳐주는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 - 제임스 파커 주교
103. 아메리칸 드림이란 “누구나 밀고 나가기만 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거나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105.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스승으로서의 예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07. 십계명은 기본적으로 건강한 인간 실존을 영위하는 길이 담긴 하나님의 최고의 정보다.
3장. 예수가 알았던 세상: 하나님 충만한 세상
129. 인간 생활의 가장 소중한 것들은 거의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
134. “성장한다”는 것은 대체로 얼굴과 눈과 언어 뒤로 자신의 영혼을 숨기는 법을 배우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135. 하나님과 공간의 관계는 인간과 몸의 관계와 같다.
135. 사랑이란 언제나 상대에게 알려지기 원하는 법이다.
137. 마음의 점진적 깨달음과 환희의 경험
141. 하나님은 물론 인간 영혼의 구심점은 자기 결정력, 즉 자유와 창의력에 있다.
145. “자아와 환경으로부터의 도피 욕구는 거의 언제나 모든 사람 안에 있다.” - 올더스 헉슬리
146. 영혼의 마음이 생명과 평안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 아래에서 끊임없이 창의적인 존재라는 인간 본질에 적합한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반면 육신의 마음은 살아 있는 죽음이다.
146. 생존을 위해 자기의 양심을 끊임없이 짓밟아야 하는 세상
147.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는 존재의 종말이 허용되지 않는다.
152. “이제 끝이네. 하지만 나한테는 이것이 삶의 시작이네.” - 교수대로 향하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
154. 위대한 반전
154. 인간이란 하나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 높임 받을 수 없을 만큼 낮은 위치에 있는 자도 없고,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견해를 무시해도 좋을 만큼 높은 위치에 처한 자도 없다.
158. 사랑 자체는 사랑하지만 생활 속에서 실제로 사랑할 줄은 모르는 현대 문화
158. 기도를 믿으며 좋게 생각할지 몰라도 실제 믿음으로 기도할 수는 없으며, 따라서 정말 기도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160. “전기불과 무선 전신과 현대 의료 및 외과의 발견물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영혼과 기적이 있는 신약성경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루돌프 불투만
160. 예수 시대 이후로 궁극적 실체와 인간 자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4장. 참된 부요를 누리는 자: 팔복
177.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씀이 일상생활보다 묘비에 더 많이 새겨지는 이유는 그것을 정상적인 인간 실존과 단절시키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느끼기 때문이다.
186. 예수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는 질문을 보기좋게 물리치시고 대신 이 상황에 타당한 유일한 질문인 “나는 누구에게 이웃이 될 것인가?”로 초점을 바꾸신다.
187. 예수 시대의 유명한 스승들의 목표가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있지 않고 듣는 이들의 삶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는 데 있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189.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청중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건과 연결시키셨다.
194. 무력한 분노
196. 화평케 하는 자가 상대하는 자들은 정확히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다.
197. 인간 삶의 대부분의 불의는 법으로 처리될 수 없는 것들이다.
200. 하나님 안에서의 신분 변화를 강조하는 중요한 성경본문들: 출 15장, 삼상 1장, 삼상 17장, 대하 20장, 눅 1장, 시 34, 37, 107편 등.
201.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그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 정작 하나님 앞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할 때가 많음을 예수는 알고 있었다.
204. 하늘이 치유할 수 없는 땅의 슬픔은 없다.
5장. 천국 마음의 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
211. 온전하라는 계명은 이상주의의 허영이 아니며 실천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자로 빚으실 것이다. -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212. “악이여! 나의 선이 되라.” - 존 밀턴이 사탄의 입을 빌려 한 말
212. “거짓말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지만, 곤란할 때는 당장 도움이 되지요.” - 거짓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어느 주일학교 학생의 대답
219. 행동이 지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219. 거룩할 정도로 멍청하다.
223. “예수께서 영원으로부터 가져다주시는 이 말씀에 대한 유일하고도 올바른 반응은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 디트리히 본회퍼
223. 산상수훈의 구조
⑴. 기본전제: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삶(4:17-25)
⑵. 세상의 빛과 소금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복된 삶을 누리는 보통 사람들이다(5:1-20).
⑶. 천국 마음의 의: 구체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으로 묘사된다(5:21-48).
⑷. 경고: 잘못된 안전에 대하여(명예와 부)
⑸. 경고: 사람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정죄를 조작하는 것”에 대하여. 기도와 사랑의 공동체를 향한 부르심(7:1-12)
⑹. 경고: 강화가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지 않는 것과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7:13-27)
225.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다루시는 다양한 장면과 상황은 사실상 아가페 사랑의 삶을 향한 점진적 성장의 단계다. 복의 진정한 출처를 아는 것, 분노와 강박적 정욕을 버리는 것, 내 뜻을 이루려고 남들을 오도하지 않는 것 등이 단계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227. 유대교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식법의 준수를 더하려 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도덕법을 빼려한다. 믿음과 순종의 결합이야말로 21세기에 들어서는 교회들의 중대 과제다.
232. 정신적으로 유능하다는 것은 행동을 보고 마음을 분별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234. “디카이오쉬네”를 원뜻을 최대한 살려 옮기려면 “한 사람을 진정 옳거나 선한 존재로 되게 해 주는 그 무엇”이라고 풀어쓸 수밖에 없다. 간단히 “진정한 내면의 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은(소크라테스를 따라) 그 진정한 내면의 선의 정체를 정확하고 완전하게 밝히고자 했다. / 윤리 이해의 중심을 찾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스승 플라톤이 사용한 “디카오이쉬네” 대신 흔히 “덕”(virtue)로 번역되는 “아레테”(arete)라는 말을 사용했다. 역사상 아리스토텔레스는 용어 싸움에서 이겼고, 그리하여 덕은 인간의 의로운 마음을 지칭하는 말로 그 어떤 단어보다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왔다. 덕이란 기술과 지혜와 힘과 선의 의지를 종합한 것으로, 이런 것들이 덕의 가치를 더해준다. / 구약 잠언은 사실 “디카이오쉬네”보다 “아레테”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아레테”는 빌립보서 4:8, 베드로후서 1:3-5 등 신약에도 등장한다. 그럼에도 히브리 전통과 신약 전통에서 더 높이 취급되는 단어는 “디카이오쉬네”다. 그것은 아마 “아레테”가 주로 인간 자체의 능력과 성취를 강조하는 반면, “디카이오쉬네”에는 영혼과 하나님의 관계를 중시하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현대 윤리학자 가운데 “의”의 문제에 몰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반면 덕은 최근 이 분야에서 부흥 분위기를 타고 있다. / 235. 플라톤 이후 2세기쯤 지나 분명 주전 285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여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그 산물이 소위 70인역이다. “쩨다오카오”(tsedawkaw)와 “쩨데크”(tsehdek)라는 히브리 단어가 “디카이오쉬네”라는 말로 옮겨졌고, 이 말은 흔히 “의”(righteousness)로 번역된다.
238. 분노의 주요 기능은 내 의지의 방해 세력에 대한 경고를 통해 나로 하여금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즉각 경계와 저항으로 맞서게 하는 것이다.
242. 분노와 원한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옹호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 분노로 되는 일도 없고 분노가 없어 악화되는 일도 없다.
244. 멸시는 분노보다 더 심하게 사회적 유대 관계를 깨뜨린다.
244. 비속어 사용의 급증현상
246. 주변의 모임에 속하고 싶은 욕망과 거기서 배제되는 것에 대한 공포
247. 성경의 미련한 자란 어리석은 고집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태도, 그리고 지각 있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모든 것에 역행하는 자세를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260.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이기에 친밀함은 강요될 수 없으며 수동적인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또한 우리는 극도로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친밀함은 반드시 배타성을 띠어야 한다.
260. 위반할 언약이 없는 마당에 위반을 걱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261. 친밀함이란 인간 영혼의 굶주림이며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262. 반드시 잘못된 일이나 죄악이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결코 유익하지 않은 일들이 참으로 많다.
284. 율법의 방식은 결정의 책임을 회피한다.
286. 분노가 분노를 부른다면, 인내의 선은 대개 상대의 분노를 식히게 마련이다.
287. 내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을 자들
291. 바리새인들은 행위가 자연스럽게 율법에 부합되는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291. (아가페 사랑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되어진, 앞으로 될 수 있는 우리 존재의 핵심이다.
6장. 천국 투자: 명예와 부의 기만을 피하여
295. 인간의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여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복된 자이다.
295. 진정 선한 사람이란 가장 깊은 이해와 동정의 차원으로부터 자신이 대하는 모든 이들(물론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의 유익을 전심으로 도모하는 자다.
296. 마태복음 6장에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끊임없이 동행하는 삶과 그 나라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두 가지 주요 문제를 일깨워주신다. 하나는 특히 자신의 경건함에 대해 타인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고, 또 하나는 물질적 부를 통해 자신의 안전을 꾀하려는 욕망이다.
299. 하나님은 우리가 임재를 원하지 않을 때에는 임재를 꺼리신다.
301. (예수께서 위선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 내면의 도덕정 중요성을 남다르게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303.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베풀며 자신조차 특별한 일이나 거창한 일로 느끼지 못하는 자, 그가 바로 하나님의 시선을 사로잡는 자요, 하나님의 선행에 창조적으로 동참하는 자다.
304. 은밀한 곳이 하나님이 계신느 곳이다. 거기서 우리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선다(시 91편).
304. 기도란 진정한 신학 연구의 방편,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는 길이다.
306. 천국의 기도와 그 효력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정직하게 열려있는 존재의 내면의 문제다. 기도란 전 존재를 다해 말하는 것이며, 결연한 의지와 분명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행동에 합류해 들어가는 것이다.
306. 산상수훈이 율법이 아니라 삶 - 하나님의 진정한 율법이 궁극적으로 자연스럽게 완성될 삶 - 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반복해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312. 조지 산타야나는 종교란 “삶의 짐에 대한 서정적 탄식” 즉 잠시 짜릿한 감정에 빠지는 것 정도로 보았다.
314.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과 남이 볼까 두려워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이 똑같다.
316.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 중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는 시간과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생각하는 시간을 솔직히 양으로 따져 비교해본다면 우리는 아마 충격을 받을 것이다.
322.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는 것은 가슴에 깊이 와 닿는 천국 생활의 이 모든 측면, 즉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시는 모든 일을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328. 우리에게는 생계의 필요에 관한한 단순히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
330. 영혼의 내적 미가 빠진 아름다움은 한낱 번들거리는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
333. 16세기 네델란드의 메노파 교인들은 범죄자 취급을 받아 대개 잡히는 대로 처형되었다. 그중 한 사람인 더크 윌렌스가 빙판 위에서 쫓기고 있을 때 쫓던 자가 얼음이 깨져 물에 빠졌다. 살려 달라는 소리를 듣고 윌렌스는 다시 돌아와 그를 물에서 건져주었다. 쫓던 자는 윌렌스의 그런 행동이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의무인지라 그를 체포했다. 며칠 후 윌렌스는 아스페렌 마을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리스도를 닮은 바로 그 모습 때문에 처형된 것이다.
7장. 기도와 사랑의 공동체
341. 회복을 돕는 자는 회복되는 자가 죄에 빠진 상태에서 느끼는 부담 즉 짐을 함께 공감하려 노력해야 한다.
341. 가족들이 서로를 대할 때 초면의 손님 대하듯 존중하는 마음만 품어도 대부분의 가정은 훨씬 건강하고 행복해질 것이다.
341. “부모를 대하는 자녀들의 나쁜 매너보다 자녀를 대하는 부모들의 나쁜 매너에 훨씬 깊은 인상을 받았다.” - 가족 간의 사랑인 “스토르게”에 대한 C. S. 루이스의 말
346. 정죄당한 자가 바람직한 방법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348. 정죄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하기까지는 결코 상대를 진정으로 돕는 길을 알 수 없다.
360. 요청이란 본질상 양쪽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반대로 일방적인 요구는 즉시 사람을 이간시킨다. 이 특유의 동반의 세계가 바로 천국의 특성이요 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도록 지어진 곳이다.
361. 구하고 요청하는 행동은 본질상 상대가 거부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362. 기도란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본연의 방식이다.
362. 구하는 것의 위력은 너무도 커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불편을 느낄 정도이다. 부탁을 잘하는 사람을 일부러 피해 다니는 이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 자기 집 개가 보는 앞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363.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마땅히 대해야 할 모습으로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367. 관계를 떠난 영성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런 관계들 안에서 영성을 구해야 한다.
368. 웃음은 구속의 상징
370.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인과 법칙이 있다. 하나는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 하에 있다. 또 하나는 요청을 통해 작동하는 것으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 C. S. 루이스
374. 기도란 구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단순히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 관계, 즉 체험적 상호작용이 전제된다.
374. 기도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행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다.
375. 기도는 내 삶의 관심사(하나님의 관심사이기도 한)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나누는 것이다. 물론 그분은 내 관심사에 관심이 있으시며 특히 우리의 관심사는 그분의 관심사와 일치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다. 거기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379. 설득 당하시는 하나님
380 삼위일체적인 우주 - 다수이기에는 너무나 하나이고, 하나이기에는 너무나 다수인 인격 상호간의 연합이라는 궁극적 실체에 바탕을 둔
382. 기도란 길 없는 길과 같다.
385. 기도란 무엇보다도 성품을 형성하는 길이다.
388. 기도가 인격과 인격 간의 관계의 방식으로 진행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388. 기도란 언제나 인격적 협상이다.
389. 플라톤은 신이 “제물과 기도에 의해 뜻을 바꾸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나님을 향한 교만의 한 형태로 봤다.
390. 인격의 세계에서는 뜻을 바꿀 수 있으면서도 최초의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큰 것이다.
390. 움직이지 않는 동인 - 가장 많이 움직인 동인
392. 우리는 그분이 주신 말을 사용하여 하늘 아버지께 지식과 사랑을 좇아 말씀드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397. 주기도의 요청 5가지
⑴. “하나님”의 이름이 최고의 존중과 사랑을 받을 것
⑵. 그분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하는 것
⑶. 우리의 오늘의 필요가 오늘 채워지는 것
⑷.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 대신 용서를 받는 것
⑸. 우리에게 시련(시험)이 허용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397.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유일무이한 것으로 존중한다는 뜻이다.
401. 그분의 통치는 “영원한 지금”이다.
402. 미래의 안전을 거기(내일의 양식)에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의 참된 안전은 거기에 있지 않다. 오직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있을 뿐이다.
407. 용서를 구하면서 자존심이 건드려지지 않는다면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다. 용서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408. (주기도의) 첫 요청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으로 시작됐다면 마지막 요청은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난다.
409.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유혹과 악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특별한 기능이 있다.
411. 마르키드 하나님. 인간에 대한 큰 사랑을 형벌로 표현할 준비가 돼 있는 자.
8장. 예수의 제자 또는 학생이 되는 법
419.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상적인 순종과 실천이 산상수훈의 마지막 주제이다.
422. 예수의 제자들의 내면의 변화를 설명한 본문들: 고전 13장, 골 3장, 벧전 2장, 벧후 1:1-15; 요일 3:1-5:5.
422. 중심평가기준은 언제나 우리 인격의 핵심적 특징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이다.
426. 가시적인 지위가 없는 능력
427. 천국 생활의 실체는 내면적인 것이다. “은밀한 곳에 계신 아버지”와 함께 숨겨진 것이다.
436. 민감하면서도 주제넘게 나서거나 참견하거나 아첨하지 않는 자세로 다른 이들을 섬기고 동시에 모두가 아는 잘못된 일들에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협조를 거부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공개적인 일상 태도가 돼야 한다.
439. 복음서에 열거된 예수 사역의 세 가지 측면
⑴. 선포
⑵. 현시
⑶. 가르침
442. (예수의 가르침의 방식이란) 평범한 삶의 정황들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본질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9장.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교육과정
475. 천국의 순종은 천국의 풍요다.
479. 믿음과 순종의 단절이라는 복병
482. 정답만 알면 제대로 배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의 문화다.
486. 훈련과정에서 주요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는 네 가지
⑴. 예수께서 가르치신 말씀에 대해서 외형적으로만 동조하는 것
⑵. 정확한 교리를 완벽하게 고백하는 것
⑶. 교회 활동이나 기타 외적인 종교 행위나 온갖 영적인 일에 충성을 독려하는 것
⑷. 특별한 마음의 상태나 황홀한 체험을 추구하는 것
487. 훈련과정의 두 가지 주요 목표
⑴. 제자들이 예수를 통해 이 땅에 찾아오신 하늘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늘 기뻐하며 또한 그분의 선하신 뜻과 그 뜻을 이루시는 능력에 함정과 제한이 없으심을 확신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
⑵. 하나님 나라에 역행하는 우리의 자동적인 반응들을 제거하는 것
488. “우리가 저(예수)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요일 1:5)의 문장 뒷부분을 우리 자신이 채운다면, 우리가 보는바 예수께서 주신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495. 명확히 알아야 할 세 영역
⑴.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⑵. 예수와 그 백성의 하나님
⑶. 제자의 인생여정에 나타는 하나님의 손길
496. “감사를 아는 겸허한 마음에는 무엇이든 단 한 가지 피조물로도 신의 섭리의 증거로 충분하다.” -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투스
509.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면 세상 어느 것도 멋있어 보이거나 탐나지 않게 된다오.” - 브레넌 메닝이 프란체스코회에 입회하던 날 한 나이든 수사가 그에게 한 말
512. 인생여정에 찾아들 수 있는 모든 악과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의 우선적인 뜻은 언제나 우리의 유익에 있다는 확신이다.
516.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예수의 신실하심을 지금 내 모습 안에서 찾아야 한다.
523. 훈련은 누가 대신해 주지 않는다.
525. 영적 성장의 황금 삼각형
성령의 활동(요 3:5; 롬 8:10-13; 갈 5:22-26)
↓
중심: 그리스도의 마음(빌 2:12-15; 롬 13:14)
↙ ↘
일상의 평범한 사건 “시험” // 새 마음을 입기 위한 계획된 훈련
(약 1:2-4; 롬 5:1-5) // (골 3:12-17; 벧후 1:5-10)
528. 평범한 실존의 “시련”을 임마누엘 하나님의 통치를 살아있는 실체로 체험하고 발견하는 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의 마음으로 자라는 데 절대적인 필수 요소다.
536. 훈련된 사람이란 필요한 때에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자이다.
537. 아무리 오래 계속할지라도 5분 간격으로 물 한 방울씩 떨어뜨려서는 목욕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한꺼번에 많은 물과 충분히 긴 시간이필요하다.
537. 성경읽기와 기도에 강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적절한 강도를 위해서 한 번에 장시간 방해받지 않고 몰두해야 한다.
538. 절제를 통한 두 훈련: 고독과 침묵
540. 영적으로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능력이다.
540.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이 한 가지 사실, 즉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 파스칼
540.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잘못된 일을 삼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올바른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543. 적극적 행위를 통한 두 훈련: 공부와 예배
544. 공부는 질서의 내면화를 가능케 하는 주요수단이다.
546. 예배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는 몸짓이다
552. 영원한 삶의 다섯 단계
⑴. 예수를 믿고 의지함
⑵. 그의 제자가 되고 싶은 열망
⑶. 순종
⑷. 마음과 영혼 전체의 내적 변화
⑸. 천국 일을 수행하는 능력
560. 교회성장을 싫어하는 이들을 위한 교회성장
10장. 만물의 회복
563. 인간의 삶과 의식은 본질상 미래를 내다보고 싶도록 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그 미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다.
566.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입히셔서 우주 안에 자유로이 놓아두기 원하신다.
568. 인간의 방법으로 선한 질서를 창출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570. 이 땅의 평화를 지키고 유지하는 수단인 풍습과 법과 제도의 다양성을 꺼리지 않으며 오히려 아무리 다양해도 그것들이 다 이 땅의 평화라는 동일한 목표를 위한 것임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이 도성은 이런 다양성을 폐기하거나 철폐하기는커녕 최고이자 참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오히려 그것을 보존하여 조화를 이루게 한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582. 존재의 종식의 개념에서 구원을 찾는 것은 역사상 언제나 있어왔던 주제다.
추천도서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대한기독교서회
_______________,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윌리암 윌버포스, 진정한 기독교, 생명의 말씀사
에블린 언더힐, 실천적 신비주의, 은성
프란시스 쉐퍼, 진정한 영적생활, 생명의 말씀사
_____________, 이성에서의 도피, 생명의 말씀사
주
601. “오늘날 민주주의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서로 간에 뭔가를 요구하는 것 자체에 대한 저항이다.” - 크리스토퍼 래쉬
601. “배웠다는 사람들의 윤리적 무지” - 고든 케이스 채머스
602. 한스 큉, 왜 그리스도인인가? 분도
603. 성경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나라의 개념의 최소한 세 가지 필수 요소를 지닌 총체적 상황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충분한 권위와 힘이 있는 통치자요, 둘째는 통치영역 즉 백성이요, 셋째는 통치적 기능의 실제적 행사다. - 알바 맥클레인,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
603. 벤델 윌리스, 하나님의 나라, 솔로몬
603. 제임스 S. 스튜워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 컨콜디아
604. “구원론으로 흡수된 기독론” - 칼 바르트
604. 자신의 죄를 위해 약간의 피만을 원하는 “뱀파이어 그리스도인” ... 엄격한 사회적 자기 의에 빠지는 바리새주의
605.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한길사
606. “하나님 나라를 천국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시작되어 계속적인 믿음의 성장을 통해 날마다 자라가는 영적인 삶이다.” - 쟝 칼뱅
607. “유일한 도덕적 가치는 선한 의지다.” - 칸트
609. “그리스도는 학교가 아니라 나라를 세우러 오셨다. 체제를 창시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교제를 시작하러 오셨다.” - 알프레드 에더샤임
610. 복이란 상황과 무관하게 지금 모든 이에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복음의 희망이다.
611. “산상수훈은 현대의 양심에 하나의 수수께끼다.” - 보먼
611. “분명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합당한 행위는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산상수훈도 순종하라는 뜻으로 주신 것이다(마 7:24ff.). 행할 때에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다. - 디트리히 본회퍼
613. 최근 윤리 이론의 중요한 경향은 윤리적 규범의 기초를 전적으로 자유로운 합리적 존재들 사이의 대화 가능성이라는 조건에 두려한다.
615. “영적인 고전을 몇 권 찾아 그것이 나를 빚을 때까지 계속 섭취하는 것이 좋다.” - 리처드 포스터
616. 미카엘 J. 빌킨스, 제자도, 은성
618. 신자 자신의 통찰과 이해를 이끌어 내지 못할 때 그것은 신앙에 해가 된다. ... 기독교의 “정보”를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의 견고한 기초로 삼고자 하는 자라면...
621. 절제를 통한 훈련: 고독, 침묵, 금식, 청빈, 금욕, 은밀함, 희생, 관찰
621. 행위를 통한 훈련: 공부, 예배, 축제, 봉사, 기도, 교제, 고백, 순종
621. 절제를 통한 훈련은 하나님 나라에의 몰입에 방해가 되는 갖가지 일상의 위력을 약화시키거나 깨뜨리기 위한 것이며, 행위를 통한 훈련은 그 나라에 한 없이 깊이 잠기기 위한 것이다.
622. “세상에는 결코 보통 사람이 없다.” - C. S. 루이스
622. “기독교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 것은 인간 개개인에게 부여하는 무한한 가치이다.” - 체스터튼
스터디 가이드
638. “그분은 우리를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빚으려 하신다.” - C. S. 루이스
643. 글쓰기,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650.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주제는 그들의 상황 속에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손을 통해 맛보는 신분의 변화이다.
661. 마 11:28-30은 제자도로의 부르심이다. 오라, 멍에를 메라, 배우라. 201102150254
2월 15일(화) 딱히 할 일도 없는 터라 진 선생 책을 뒤져 소설 한권을 붙잡았다. 조영아,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서울: 한겨레출판, 2006).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었다. 밤새 읽느라고 잠을 자지 못하고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 다시금 책장을 뒤지다가 김우현, 『하늘언어』 (서울: 규장, 2007)이란 책을 붙잡았다. 과거 성령운동을 열심히 하던 때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ACTS를 위하여 기도하지 못한 내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 이번 학기 강의 개설의 여부를 떠나 학교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한 시간 이상 가지도록 하기로 하자.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나 홀로라도 기도하는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자. 그것이 비록 내가 이 학교를 떠나게 될지라도 내가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봉사일 수도 있을 터.
저녁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생들이 이 집을 방문하였다. 막 돌 지난 아들과 함께 왔다. 모처럼의 집안 분위기가 고조된다. 어린 생명 하나가 들어왔다고 집안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다. 중국어도 서툴고 영어도 어려운데 서로 의사소통이 쉽지는 않았지만 대화는 가능했다. 나는 내일 아침에 서울로 떠나고 그들은 모레 아침에 란주로 떠난단다. 진 선생이 전업주부로서 고생하게 생겼다. 201102150910
2월 18일(금) 수요일에 중국에서 귀국한 후 정신없이 보낸다. 한국에 있으면서 쉴 수가 없는 게 내 팔자다.
수요일(16일) 어제 저녁 늦게까지 영화 <반지의 제왕> 제 1편을 봤다. 규모에 있어서 한국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너무 길어서 조금 지루하기는 했다. 제 3편까지 보려면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다. 몇몇 눈에 띄는 대사와 장면이 있지만, 영어로 옮길 수도 없고, 화면을 정지시켜 그림을 복사해 봤다. 그런데 대사는 없이 그림만 떠 있다. 이거 원, ... 멋진 말이긴 했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른 아침, 중국에서 진 선생네 아이들에게 맛있는 식사 한 번 제대로 사주지 못한 미안함에, 그리고 진 선생이 아침마다 식사 준비하는 것이 미안하여 아침을 근처 맥도날드로 가기로 했다. 아침 식사라서 다른 때보다 싼 줄로 알고 갔는데, 호주에서 오신 선생이 아침 식사용을 사는 것이 아니라서, 비싼 식사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은 얼른 식사를 마치고 학교로 가고.
모처럼 아침 일찍 일어난 중국에서의 하루를 아파트 정원을 산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짐을 싼다. 집에서 나올 때는 짐 싸기가 쉽지 않지만, 집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짐 싸기가 쉽다. 집에서 나올 때에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집으로 들어갈 때에는 내 것만 가지고 오면 되니 짐 싸기가 쉬운 것이다.
아침 10시에 집을 출발, 공항에서 밀집된 사람들을 비집고 수속들을 밟고 비행기에 올라탄다. 다시 꽝조우에 내려서 이리저리 묻고 물어서 겨우 비행기를 타고나니 이제야 겨우 안심이다. 서울 도착은 오후 10시, 비행기 좀 싼 것 타려다가 귀국하는 데에 하루 종일 걸리는 것이다. 중국에서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해서인지 서울에 들어온 날 밤을 꼬박 새웠다. 잠을 자지 못하고 겨우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가 어린이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여의도로, 수유리로, 종로로, 다시 여의도로 움직인다. 귀국하자마자 다시 예전과 같은 일들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운전하고 사람만나고. ......
종로에서 다음 주에 북경으로 갈 목사님들을 만나 여행계획을 짠다. 그 모임의 회계를 맡은 나로서는 중국에 있는 동안 다른 분에게 부탁했던 일을 인수받고 준비하여야 했다. 그리고 다시 여의도로 달려가 노정렬 딸의 첫돌 잔치에 참석,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귀가하니 12시다. 들어오던 꼴로 쓰러졌다.
오늘(18일) 아침, 국회 귀빈식당에서 김영진 의원 초청으로 희망포럼 조찬이 있었다. 그리고 수유리 농협에 가서 월요일 여행을 위한 경비를 위엔화로 환전한다. 집에 와서 잠시 쉰 뒤, 송우리 강 전도사를 만나 3월 1일 목사임직예배에 대해서 상의한 후, 집에 올라와서 지난 일기를 정리한다.
우선 갤럭시 탭에 저장해 두었던 메모들을 옮겨 놓기로 한다. 많은 글들을 썼지만, 잊지 말고 기억하며 계속 추진해야 할 일들도 많다. 오늘부터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되지 못했다. 내 스스로 무엇인가 하려는 생각을 포기하여야 하는데, 아직도 나는 내가하고자 하는 일들이 많다. 너무 많다.
귀국
어차피 내가 살아야 할 곳이 한국일진대 피하지 말자. 어차피 안고 살아야 할 문제들일진대 도망가지 말자. 어차피 부딪칠 사람들일진대 모른 체 하지 말자.
내 자신이 불완전 하면서 어찌 다른 사람들의 완전을 기대한단 말인가? 내 자신이 더러우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깨끗함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가자. 들어갈 때가 되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들어가서, 내가 할 일을 하고, 내가 해결할 문제들을 해결하고, 내가 만날 사람들을 만나자.
원망은 원망을 낳고,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는 법,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내 삶을 내 스스로 살아가자. 주님께 기도하며.
하고 싶은 일들
이렇게 하고 싶은 일들이 많으면서 무슨 안식년을 가진단 말인가?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도 죽기 전에 이 모든 것을 다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피한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면 부딪혀서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게 지혜로울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난 쉴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목사의 길
목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돈과 명예욕, 그리고 여자 문제라고 듣고 배웠는데, 나는 과연 그러한 들로부터 깨끗한가?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느는 건 욕심뿐이니,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깨끗할 수 있으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욕심들이 있던가? 누군가 나에게 영이 깨끗하다지만, 영이 깨끗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진 피터슨의 글을 읽으며, 목사이기 전의 신앙인으로서,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과연 헤롯이나 가야바나 요셉푸스와, 얼마나 다른 가치관과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와 이사야, 나는 그들을 얼마나 따라갈 수 있겠는가? 결국 예수를 닮기 위한 길이겠지만.
Imitatio Christi! 예수를 닮아가기 위한 몸부림, 그러한 몸부림이, 과연 내게 얼마나 남아 있는가?
오늘도 나는 잠을 못 이루며, 상념에 젖어본다.
노자
1, 도가도비상도
2, 공성이불거
3, 불상현 사민부쟁
4, 화광동진
5, 천지불인
6, 곡신불사시위현빈
7, 천장지구
8, 상선약수
9, 부귀이교
10, 애국치민능무위호
11, 유기지용 유실지용
12, 오색영인목맹
13, 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
14, 차삼자불가치힐
15, 예혜약동섭천
16, 지상왈명
17, 태상하지유지
18, 국가혼란유충신
19, 견소포박소사과욕
20, 아독민민
21, 공덕지용
22, 곡즉전
23, 희언자연
24, 기자불립
25, 도법자연
26, 중위경근
27, 선계불용주책
28, 대제불할
29, 천하신기 불가위야
30, 이도좌인주자
31, 부가병자불상지기
32, 천지상합이강감로
33, 사이불망자수
34, 대도핍혜
35, 시지불견족
36, 국지이기불가이시인
37, 도상무위
38, 상덕부덕시이위덕
39, 석지득일자
40, 반자도지동
41, 상사문도근이행지 대기만성
42,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43, 불언지교
44, 지족불욕 지지불태
45, 대변약눌
46, 고지족지족상족의
47, 불견이명 불위이성
48, 위학일익 위도일손
49, 성인무상심 이백성심위심
50, 출생입사
51, 생이불유
52, 천하유시 이위천하모
53, 행어대도
54, 이천하관천하
55, 지화왈상 지상왈명
56, 지자불언 언자부지
57, 이정치국 이기용병 이무사취천하
58, 광이불요
59, 치인사천막약색
60, 치대국약팽소선
61, 대국자하류 천하지교
62, 도자만물지오
63, 위무위 사무사 미무미
64, 학불학 복중인지소과
65, 민지난치 이기지다
66, 이기부쟁 고천하막능여지쟁
67, 천장구지이자위지
68, 부쟁지덕 용인지력
69, 용병유언
70, 지아자희 즉아자귀
71, 지부지상 부지지병
72, 민불외위 즉대위지
73, 천지도부쟁이선생
74, 민불외사
75, 민지난치이기상지유위
76, 유약자생지도
77, 천지도 손유여이박부족
78, 정언약반
79, 천도무친상여선인
80, 소국과민
81, 성인지도위이부쟁
아름다운 순간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과거의 아름다운 때보다 미래의 아름다운 때를 꿈꿀 수 있는 것은 아직 젊어서일까?
가장 괴로웠던 순간은 또 언제인가? 아름다웠던 순간보다 괴로웠던 때가 왜 더 많이 생각나는 걸까?
가장 슬펐던 때는 언제인가?
가장 분노 했던 때는?
그리고 가장 행복한 순간은?
그럼, 지금은 내 인생에서 어느 때에 속할까? 란주에서 청뚜로 달리는 삼층 침대에 누워 있는 지금, 나는 내 인생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
영화 <시>를 보면서 시를 쓰기 위하여 생각해 봐야할 과제를 나도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지만 선뜻 내세울 게 별로 없다. 그래서 불행한 인생일까?
안식
안식년이라며 한국을 도망치듯 빠져나왔지만, 나는 과연 안식하고 있는가? 과연 안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몸이 쉰다고 마음까지 쉴 수 있는 것은 아닐 터, 마음이 쉰다고 영혼까지 쉴 수 있으랴? 평안한 몸과 마음, 안식을 위한 조건일 터, 그것은 어찌 해야 이룰 수 있는가?
오늘 하루도 지나가지만, 나는 진정한 안식을 찾아 오늘도 헤맨다.
최악의 경우
최악의 경우가 죽는 것 말고 또 있으랴? 죽기 이전의 최악의 경우란, 비참해지는 것일 터, 그 비참이라는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
비참해지기 전의 상태라면, 뮈가 있을까? 바로 지금과 같은 상태일까?
나는 오늘도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본다. 최악의 경우를 그려본다. 고민하며 그려본다.
인생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것, 그것 자체가 곧 내 인생이고 내 삶이 아닐까?
새로운 만남을 꿈꾸고, 새로운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 그것 자체가 곧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닐까?
흐르는 세월 따라, 사람들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며, 새로운 만남 따라, 세월은 흘러왔다가 또 흘러간다.
그래,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그래, 그렇게 인생은 늙어 가는 것일 테지.
나는 오늘도 또 그렇게, 세월을 보내며, 나는 오늘도 또 그렇게, 사람을 보낸다.
현실
그리워 할 게 뭐 있으며, 아쉬울 게 또 뭐 있으랴?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지고, 바쁜 일상 따라 또 잊어가는, 그런 게 인생인 걸
되돌릴 수 없고, 바꿀 수 없고, 지울 수도 없는, 지나간 일은, 언제나 그리움과 아쉬움일 터. 배부른 인생, 다 허사다.
재롱잔치설교
새해는 언제 시작되는가? 새롭게 마음먹는 그 순간이 새해의 시작이 아닐까? 일신우일신, 오늘 새롭고 또 내일 새롭다는 공자의 말씀을 거론하지 않아도 마음먹기에 달렸다.
신묘년 새해는 입춘으로 시작된다. 2011년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구정은 한참 후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새해 인사, 세배를 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년 마지막 날, 이명박 사람들이 대거 청와대로 다시 들어갔다. MB맨들이다. 누구의 사람인가가 그 사람의 성향을 나타낸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거론된다. 피할 것은 피하고 따를 것은 따르며 싸울 것은 싸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돈을 사랑하고 돈의 노예가 되는 이것들을 피하고,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라.
조금 손해 볼지라도 정직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불의한 방법을 사용하여서라도 부자가 될 것인가를 묻는다면 어느 대답을 택하겠는가? 편리하지만 불행한 삶인가 아니면 조금 불편하지만 행복할 것인가?
주택과 교육, 그리고 의료복지의 완성.
새해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고민하는 우리가 되어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가 지기 전에 - 조동진 목사 주일설교
바울이 다메섹에서의 개과천선 후 전도 여행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체포, 로마 감옥으로 이송되어 있는 상황에서 서신을 기록한 것 중의 하나가 옥중서신인 에베소서. 바쁜 일상을 뒤로 하고 옥중에서 집필이 가능.
현대에는 김대중의 옥중서신과 본 회퍼의 옥중서신이 유명함.
항구도시인 에베소의 주요 종교는 아데미를 섬기며 부요함을 누리는 사치의 도시로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도시. 바울은 2년 3개월 복음을 전했던 이 교회에 로마 감옥에서 이 서신을 기록하는 것.
오늘 본문은 부모님으로부터 들었던 교훈이나 동양의 유교적 가르침과 별로 다르지 않지만 복수를 생활화하는 이슬람과는 달리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가르친다. 성도 간에, 이웃 간에 사랑을 베풀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마귀의 종이 되지 말고, 불로소득을 피하라는 등 평범한 교훈들이지만,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는 교훈을 잊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새해 한해가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하나님과 직접 기도하자. 종교개혁으로 찾은 축복 중의 하나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만인제사장 신앙이다. 2010. 12. 7.
이 많은 글들을 정리하고 나니 다시 졸린다. 이거, 원, 이렇게까지 또 망가져서야, 원. 201102181822
저녁이 되어서 다시 눈을 뜨고 별로 할 일도 없는지라 영화를 다시 틀어본다. 비행기 내에서 보다가 다 못 본 <반지의 제왕> 제 2편. 역시나 지루하기는 하지만, 그 규모나 장엄함은 나를 압도한다. 영상과 음악, 구성과 스토리. 내 머리가 나빠 등장인물들도 헷갈리고, 스토리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오늘 밤에는 <반지의 제왕> 제 3편이나 마저 보고 자야겠다.
20110219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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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도란 길없는 길~
마음에 와 닿았어요'
저는 기도하면서 제뜻대로가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찿게 되더라구요,
결국 마음을 비우는 작업에 들어 가게되더라구요,
그 작업이 삶을 살게하고 인생을 알게하고,, 그 모든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내안에 계시기에 오늘도 살고 내일도 살것같아요.
하느님은 내안에서 계시고 나는 그분의 임재를 순간 순간마다 깨어있어야만
느낄수있기에 수행을 하는 길을 가고있어요,
거창한게 아니라 나를 죽이는 수행인데요, 하느님은 아시죠~~
아버지 저 도와주세요,,
내가 사는것이 아니라 내안에 주님이 사시게요.
질리게 만드는... ^^;;
너~~~무 긴 내용이라..
바쁜 저로서는 읽다가 일하다가 읽다가 일...
앞의 내용도 잊어버기고 읽다가...
...
지금은... ^^;;
암튼,
잘~하고 계신다는... 느낌? ^^;;
주님의 사랑이 당연, 아직도 그나라님에게 있다는 마음만...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