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0년 더 지난 과거의 시간 속을 걸어 들어간다. 그즈음 포항에서 탈북민 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A 목사는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를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의 힘으로 맨땅에 헤딩하듯 수년간 지난한 세월을 견디어 온 까닭이다. A 목사가 북한이탈주민이라고 불리는 북한 동포들을 처음부터 만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의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혀 중국의 조선족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려 했고, 옷이나 아이들 학용품 같은 것을 나눠주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조선족들에게 선교비와 물품을 전하면서 그들을 위로했고, 성경책을 전해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조선족들을 돕던 일들이 북한 사람들을 돕는 쪽으로 바뀌게 되었다. 1996년 김정일 정권에서 고난의 행군 때 200만명의 사망자들이 생겨나며 북한 경제가 파탄에 이를 지경이었다. 정권 차원의 배급은 일찌감치 끊어졌고 배급만으로는 입에 풀칠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자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물자나 음식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북한 정권의 붕괴 위기까지 거론되던 그즈음 A 목사가 나눠준 옷가지나 학용품들이 북한 동포들에게도 일부분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불경죄에 걸려 사형당할 수 있는 성경책까지 북에 들어간 사실을 나중에 탈북민에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조선족의 소개로 자연스레 북한의 사람들을 접촉하게 되었고, A 목사는 이런 일련의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 공부의 과정을 거쳐 목사 안수를 받고, 포항 남구에서 탈북민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북한 정권에서 세뇌받고 자라난 사람들은 몸은 비록 남한에 있지만 사상이나 철학이 이미 북한 체제에 순응하도록 길든 상태다 보니 두 개의 세상에서 방황하는 모습도 많이 노출했다.
교회에 정착한 탈북민들은 교회 출석과 찬양이나 기도는 잘 하지만 헌금을 많이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정든 고향 땅을 등지고 왔으니 어느 것도 섣불리 못 믿고, 탈북민에게 돈은 목숨줄이나 다름없었다. 30여명의 사람들을 이끌던 A 목사는 교회 재정의 모든 부분을 감당해야 했다. 탈북민들은 은행 계좌 개설이나 주민센터에 서류 떼는 것이나 집 안의 유리창에 깨졌을 때 어디에 전화해야 할지를 모르니 이 모든 걸 A 목사가 일일이 가르쳐줘야 했다. 또 식당의 설거지나 대리운전으로 생계까지 감당해야 하니 집에 돌아와 베게에 머리만 갖다 대도 바로 잠들어버렸다.
전기나 수도가 끊긴다고 계고장이 날아오고, 경제적 어려움은 갈수록 커졌다. 어느 날 A 목사의 교회에서 탈북민들과 한마음 한뜻이 돼 통일 기도회를 개최하면서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함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크게 은혜를 받게 되었다. `미리 와 있는 통일`이나 다름없는 탈북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우리가 너무 몰랐다고 하면서 탈북민들을 돕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때마침 포항 교계 뉴스에 탈북민교회 사역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뉴스의 반향은 컸다. 교계와 단체에서 의료지원과 학업 지원 및 생활의 어려움을 도와주면서 함께 꾸준한 모임을 이어가게 되었다.
교회가 더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A 목사를 초청하게 되었고, A 목사는 설교를 통해서 탈북민들의 정착을 도울 것을 호소했다. 북한 정권의 박해와 탈북 과정의 지난한 이야기에 감동한 사람들은 A 목사와 탈북민교회에 많은 힘을 보태주었다. 그래서 북한선교예술단이 조직돼 공연을 통해 노래와 춤과 악기 연주를 선보이면서 신앙 안에서 멋진 하모니를 이루어 가게 되었다. 필자는 A 목사의 목회 사역과 탈북민교회 성도들을 10년 넘게 지켜보고 있는데 이제 그들도 훌륭한 신앙의 사람으로 어엿이 성장하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이 땅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탈북민들은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고향 땅을 그리워하면서 하루빨리 복음 안에서 통일을 이루어달라고 염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