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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이종환을 사랑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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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는 이야기 스크랩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
해돋이 추천 0 조회 108 13.02.06 16:54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76년 9월 18일 오후 아버지와 함께 서울역에 내렸다.

경상도 중학생 여름 교복이던 반바지와 모자를 쓰고 아버지와 함께 동대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왔다.

오전에 탄 무궁화호는 대전을 지나 천안, 평택을 거쳐 수원을 지났다. 오후의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광경. 

모를 심어놓은 경기평야의 광활한 들판에 해가 지고 있는 모습을 난생처음 보았다. 툭터인 평야도 처음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해보니 반바지를 입은 학생은 나밖에 없었다. 조금 어색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75년 서부경남 명문고교 시험에 낙방, 중학교를 4년차 다니다가 9월 갑자기 서울로 오게되었다.

형이 당시 서울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며 밥벌이 하고 있었고 연대세정문앞의 독수리다방 뒷집에 하숙을 하고 잇었다. 

 

이미 하숙집엔 대입에 낙방한 재수생인 외사촌 형이 한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형은 일본제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카세트 라디오를 갖고 있었다.  카세트 라디오를 통해 형은 영어회화를 익혔다. 아침이면

민병철 생활영어를 따라했다.  

이 일제 라디오에서 나오는 그 맑고 청아한 소리에 나는 단박에 매료되었다. 그 옛날 아바지가 갖고 있던 일제 소형 전파라디오와는

전혀 다른 음질에 나는 숨이 막혔다.

기막힌 음질이 우선 마음에 들었다. 시골집 국산 트랜지스터에서 나오는 잡소리 가득한 라디오와는 전혀다른 음질.

아나운서의 침넘어가는 소리, 방송원고 넘기는 소리까지 들렸다.

 

형은 주로  FM을 들었다. 팝송보다는 가곡이나 클래식등을 들었는데 이 때 한국가곡을 많이 알았고 들었고 부를 줄 알게 되었다.

방송에서는 미도파 백화점 광고가 나왔는데 매우 인상적인 광고 CM송이었다.

고1때 역촌동으로 이사를 가고 시내버스로 통학하던 코스가 미도파 백화점을 경유하는 노선이었다. 이때 건물 외벽이 타원형이고

뭔가 벽에 구멍이 숭숭뚤린 조각을 붙인 미도파 백화점을 하염없이 보고 다녔다. 

 

이 무렵 저녁 프로그램에는 '박원웅과 함께'와 '별이 빛나는 밤에'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등이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었다. 특히, 저녁 8시에서 10시 무렵의 팝 음악 방송인 별밤과 박원웅은 애청자엽서를 뽑아

사연을 들려주거나 상품을 주었고 전시회도 여는 인기프로그램이었다. 김광한의 팝송도 인기있었다.

 

나의 고교동창 김용진의 동생 용선은 엽서를 보낸 후 받은 선물로 방 하나 가득 채울 정도 였다고 했다.

실제 내가 고3때 연남동 그의 단독 주택 집에 갔었는데 이태리식 단독저택 1층의 거대한 방 전체를 LP와

카세트 테이프로 채워져 있었다.    

 

이 때 나는 최헌의 오동잎을 배웠고,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진미령의 소녀와 가로등 등을 배우고 불렀다.

 

박원웅과함께,김기덕입니다.이광한의 팝스 등은 70-80세대의 영원한 안식처이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는 대학 들어가고 80년 초부터 거의 매일 청취했다.

군대에서도 라디오를 통해 애청했다. 85년 제대 후 거의 매일 청취했다. 이종환씨가 읽어주는 청취자 편지는

심금을 울렸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의 목소리 그의 멘트 그이 선곡이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애청자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간히 들려주는 팝송과 재즈,가요.....늦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젊은 청춘은 이종환의 목소리에 울고 웃었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는 가요와 팝을 함께 틀어주었고 무엇보다도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고 신청곡을 보내주는 코너가 인기를

끌었다. 배경음악이 깔린 가운데 애청자가 보낸 사연을 읽어나갈 때 이종환은 그냥 '신'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3번 긴 사연을 보냈다. 3번 모두 방송 되었다. 두번은 내가 녹음을 했고 한번은 방송을 들은 사람이 편지나 소식을 알려주어 알게되었다.

 

첫번째는 군 제대 직 후인 85년 겨울 고향마을 합천 외삼학에서 보낸 편지다.

밤 12시가 다 된 시각에 낭독된 사연이다.  면소재지에 가서 친구와 소주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라디오에서 내 사연이 소개되고 있어 급히 녹음한 경우이다. 나는 잡음이 심한 이 녹음 테잎을 지금도 가끔 들으며 쓴 웃음을 짓는다. 꾀 긴 편지였는데 아주 멋지게 읽어주었다.

 

사연을 듣고 종로서적에 근무하는 아가씨의 편지도 받고, 책도 선물받은 기억이 난다. 종로서점 옆 종로 복떡집에서 만나 우유와 떡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 어색한 광경이 눈에 어린다. 예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젊은 처자. 나의 사연을 듣고 감명받았고 편지를 보내고 만나고

싶었다는 말.....수줍었고 착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어떤 부담.....이런 걸 주려는 사람은 아니었다.

 

두번째는 1987년 4월 교생실습 하던 경기도 부천시 소래종합고등학교에서 보낸 사연이다.

교생실습을 하면서 고교 1학년 여학생들과 함께 1개월동안 교생실습을 하면서 보낸 사연이다.

교생실습 한 달이 너무 즐거웠고 재미있었다. 지금 아내의 반대(?)만 없었다면 나는 교사가 되었으리라. 

나는 이 방송을 듣지 못했는데 학생 몇몇이 이 방송을 듣고 이튿날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나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고 반기던 때가 있었다.

지난번 편지를 읽어 준 이종환씨가 다시 나를 기억하고 읽어주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1988년 1월초.

나는 아내와의 13년 연애를 더 연장하려고 결혼을 준비했다. 취업도 되었고, 2월부터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터에 1월 24일 날짜를 잡았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아내와 아주대학교 앞에 형이 준 300만원과 아내의 돈 200만원을 합쳐 단칸 셋방을 500만원에 얻었다.

단독 주택집의 뒷방하나를 전세얻었다.

 

결혼과 대학졸업 그리고 취업을 앞두고 나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에 장문의 편지를 썼다. 내 기억으로는 편지지 5장 정도의 분량이다.

1월 26일 밤에 읽어 달라고 했다. 1월 24일 결혼을 하고 그날 경주로 신혼여행을 떠나 2박3일후 26일 저녁에 방송을 해다라는 부탁을 했는데 방송되지 않았다.

 

그러고는 2월부터 회사출근 매일 야근하는 생활이 2월 내내 이어졌다. 그래도 우리는 라디오를 고정하고 밤에 이종환......을 들었다.

광화문에서 출발해서 시청에서 전철을 타고 수원역에 도착, 다시 용인행  버스를 타고 아주대앞에서 내려야 하는 코스.

결혼 후 1개월 쯤 지난 2월 말경 늦은 밤 야근과 저녁 회식을 한 뒤 집에오니 아내는 잠들지 않고 있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이 불이 당겨져 회사마다 노사문제로 골치를 앓던 시절이었다. 밤12시가 다되어가는 무렵에 집에 도착했는데 아내가

밤의디스크쇼에 방송된 사연을 녹음했다고 한다. 그것도 와전 풀 타임으로......

라디오를 틀어놓고 방을 정리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우리둘의 이름과 집 주소를 읽으면서 주의를 환기?더라는 것. 미리 내가 준비해 둔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100% 온전히 녹음한 것이다. 기뻤다. 그리고 너무 고마웠다.

 

바그너의 로엔그린의 축혼행진곡을 배경음악으로 한 이종환의 편지낭독은 약 10분내외의 분량이다. 편지지 4-5장을 가득 메운 사연이니 말이다. 이종환씨는 기념으로 월간엣세이 잡지 1년 정기구독권을 보내주었다. 다시 나는 이 월간지에 회사생활을 담은 엣세이를 투고해서 게재되었다.

 

이 때가 1988년....... 지금 이글을 쓰는 2013년의 25년 전이다. 25년 동안 나는 매년 결혼 기념일에 이 테잎을 가족과 함께 듣는다.

아내와 자식 셋을 앞에 두고 우리는 1988년 결혼을 앞두고 보낸  편지를 함께 들으며 가족애를 키운다. 1976년부터 주고 받았던 아내와의 편지도 함께 꺼내놓고 읽는다. 내가 보낸 편지,아내가 보낸 편지가 셔츠박스에 한 박스 가득하다.  1970년대 우체국의 소인이 또렷이 찍혀있다. 

중학교 3학년때 처음 만나 13년 사귀다가 결혼을 하고 다시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힘들고 어려운 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 아내가 있어......  

 

그 후 이종환은 라디오에서 인기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한 바 있다. 내가 한창 직장생활을 하던 90년대 어느 여자 진행자와 하던 라디오 방송은 매우 인기가 있었지만 '밤의 디스크 쇼'에서 내가 흠뻑 취하던 그 분위기,감정,느낌,정서는 아니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연로하셔서 현역에선 은퇴했지만 나에겐 매우 소중한 인연의 방송인이다.

 

1983년 11월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나는 마산에서 가수 김정호의 '님'을 택시안에서 들었다. 그 택시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틀어놓고 있었다. 김정호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과 함께 '님'을 들려주면서 가수 자신의 마지막을 예고하는 곡으로 마지막 앨범에 수록했다고 말하던 이종환.....  그 후 나는 1년에 몇차례 그 당시에 아내에게 사 준 김정호의 '님'을 LP로 듣곤한다. 최대한 볼룸을 높혀 그의 애끓는 절창을 온 몸으로 음미한다.

 

나는 아직도 그이 이름만 들어도 아내와 라디오와 내 젊은 날의  밤을 생각한다.    

그리고 한 번 쯤 이런'이종환의 밤의디스크쇼'같이 늦은 밤 외롭고 고독한 영혼들에게 그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고, 쓰라린 상처를 치유해주고 진정시켜주는 심야방송의 DJ가 되고 싶다.

청취자의 영혼까지도 맑게해주던 이 프로그램과 함께 나는 외롭고 쓸쓸하고 아름답던 청춘의 강을 유유히 건널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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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2.06 18:07

    첫댓글 해돋이님 이곳은 선생님에 대한 예우로 모두가 실명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실명 전환 부탁 드립니다 올리신글 공감하고 잘 읽었습니다 추억이 깃든...정말 아련한....그 추억때문에 우리는 이곳에 모인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많은 활동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지역과 나이만큼은 공개를 해 주셔야 이 카페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됩니다 조심스럽게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13.02.06 18:35

    멋진글입니다.기본 글 쓰시면 원고4~5장은 하시겠네요.ㅎ
    자주 뵙겠습니다~^^

  • 13.02.06 22:58

    작은 미소가 담겨지네요...고운글 잘 읽었습니다~행복하세요^^

  • 13.02.07 03:0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다시금 그 좋은 시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돌아가고 싶습니다...그때 그 시간으로...

  • 13.02.07 07:47

    장문의글 감사히 그 시절 동감하며 잘~~읽었습니다~~*.*실명전환하시구 동시대의 삶의 이야기 풀어놓는 멋진공간 되시길 바랍니다~~~*.*^.^

  • 13.02.07 10:46

    덕분에 저 자신도 서울 송파구 잠실 옛 주공아파트 .. 주인 할머니 안방 사시고 저는 옆방을 월세로 얻어 살면서
    틈틈히 듣던 이종환 선생님의 밤의 디스크 쇼 ~~~ 해돋이님 덕분에 저 자신도 추억열차 잘 탔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글에 덧붙혀 이종환 선생님의 건강을 간절히 희망합니다 ~~~~~~~~

  • 13.02.07 21:11

    감사합니다.

  • 13.02.07 21:32

    저와 많은 부분의 추억이 교집합처럼 겹치네요...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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