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교회 김다위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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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부활주일
이미 역사하는 부활의 능력으로 살라
고전 15:20-22, 엡 1:19-21
최근 한국 베스트셀러 1위로 오른 책이 모건 하우절이 쓴 “불변의 법칙 Same as Ever”입니다.
이 책의 주장은 수시로 변하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으며,
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에 대한 이야기다라는 겁니다.
아마존의 창업자가 자주 받았던 질문은 이것이랍니다.
“앞으로 십 년 동안 무엇이 변할까요?”
그런데 반대로 “앞으로 10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물론 바뀌는 것들도 알아야 합니다. 변화에도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기에 무엇이 바뀔지만 알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주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것들은 무엇인가?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불변의 진리 중 하나는 사람은 모두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본인의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도 죽음을 말합니다.
(고전 15:21)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
여기서 초점은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죽음이 보편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있습니다.
즉, 육신의 죽음을 피해갈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생명과 죽음이 공존합니다.
게다가 곳곳에 전쟁과 테러가 벌어져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좋은 세상이지만, 동시에 죄로 인해 깨어진 세상, 망가진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롬 8:22] 피조물(the whole creation)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신음하며 탄식하는 피조물과 세상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여리고를 지나던 예수님께 바디매오가 외쳤지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이들이 그를 꾸짖고 잠잠하라 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소리를 들으셨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라갑니다.
신음하고 아파하는 이 세상과 사람들을 구원하고 회복시키고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신 일입니다.
바로 그 죄가 모든 고통과 괴로움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사망과 죽음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십자가에서 모든 죗값이 치러졌습니다. “다 이루었다!” 죗값은 영원히, 완전히 치러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망과 어둠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왜 부활하셔야만 했는가?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다시 살아나셔야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도 부활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 그랬습니다.
아니, 어차피 우리 죄를 사하셨다고 하는데, 굳이 다시 예수님이 살아나셔야 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 제사를 드릴 때 양이 희생제물로 바쳐집니다. 양이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어요.
그렇다고 그 어린 양이 다시 살아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죄를 짊어지고 죽었으니까요.
그러므로 예수님도 그냥 죽으신 채로 무덤에 있으시면 안 되는 걸까요?
아마 어쩌면 지금도 이 부분이 명확히 이해가 안 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에 대한 답변을 모르셨다면 오늘 이후로 분명히 아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뜻은 죄의 삯인 영원한 죽음이 영원히 처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사망을 패배시키셨다는 뜻입니다.
그 뜻은 이제 우리의 죄는 완전히 처리되었고 죗값은 확실히 지불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월세로 살던 집 부엌에서 수도가 터진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온 가족은 밖에 나가 있었고, 집에 들어와 보니 바닥에서 약 3-4cm 정도
물이 출렁출렁하는 겁니다. 문제는 그 집이 2층이었습니다. 물이 새면서 아랫집 1층까지 피해를 준 겁니다. 미국은 집을 주로 나무로 짓기 때문에 그 피해는 더 심각했던 것이지요.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사고 원인은 정수기였습니다.
정수기와 수도가 연결된 부위가 터지면서 물이 샌 겁니다.
저희 집과 아래 집의 피해를 보상하려면 당시 수만 불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하나도 내지 않았습니다. 왜죠? 손해보험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피해 비용 청구서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험회사에서 처리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입니다.
[골 2:1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모른 척하며 저에게 비용을 청구하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죠?
이미 다 처리되었다는 영수증입니다. 여러분, 죄의 삯인 사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죽음 이후 더 이상 죄의 삯인 사망이 없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사망이 삼키지 못합니다.
이미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그분과 연합된 우리는 그분의 부활 생명이 곧 우리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불변의 진리입니다. 10년이 지나도, 20년, 30년이 지나도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20-21절 보세요.
(고전 15:21) 21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예수)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첫째 아담은 죽음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왔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부활을 세상에 가져오셨습니다.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의 산 소망입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로 비유했습니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여기서 첫 열매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다가올 많은 대추수의 첫 열매라는 뜻이지요.
그 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아 부활하게 될
사람들의 완전한 추수가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입니다.
첫 열매가 있으면 완전한 추수가 있듯이, 죽은 신자들의 부활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첫 열매라는 것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같은 몸의 부활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시대는 죄의 옛 시대와 부활의 새 시대가 중첩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는 죽음을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죽음은 있을지라도
영원한 죽음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것이 22절의 메시지입니다.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 그냥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20절에는 그들을 “잠든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잠든 사람들이란, 예수님을 믿고 죽어서 현재 낙원, 곧 천국에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옆에 있던 한 강도에게 말씀하시기를,
[눅 23: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죽으면 신자의 영혼은 아무 의식 없는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낙원은 끝이 아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여 부활이 있기까지 머무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그 뒤에 있고, 이 땅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이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창조Creation로 시작해서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인 “새로운 창조New Creation”로 끝이 납니다.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죽음도 없고 아픔과 눈물도 없을 것입니다.
[계 21: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는 이유는 부활이 사망 권세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작년과 올해에도 많은 성도님들의 장례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를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자녀를 먼저 보내야 했던 부모님들도 계셨습니다.
도대체 그 무엇으로 먼저 죽은 자녀로 인한 상실감과 아픔을 치유할 수 있을까요?
산 소망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입니다.
저희 부모님께서 1977년 당시 응암교회라는 곳에서 부목사로 섬기던 때의 일입니다.
부목사로 계시다가 개척교회로 나가게 되셨어요. 그 당시 부목사로 계시던 분이
예배 때 개척 광고를 잊어버리고 하지 않아서 개척헌금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개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거의 유일하게 개척헌금을 하신 분이 계셨는데 김순남 권사님이라는 분이셨다고 해요.
이분의 남편은 해외에서 사업을 하시며 돈을 많이 버신 분이었습니다.
이 권사님께 아들이 있었는데 18세가 되던 해에 아들이 그렇게 조르고 조르던 오토바이를 사주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얼마나 신났을까요? 신나게 오토바이를 몰고 나간 아들은 바로 그날 교통사고로 죽게 됩니다. 세상은 아름답고 멋진 곳이지만, 동시에 죄로 인해 깨어지고 망가진 세상입니다.
의인이었던 욥마저도 끔찍한 고난을 당하잖아요.
이 김 권사님께서 아들을 잃고 거의 매일 눈물로 살았다고 해요.
그러던 중에 어느 날 이 분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하는 아들이 신나게 사람들과 공놀이하며 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한 천사 같은 사람이 곁에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해주더랍니다.
“아들이 이렇게 천국에서 잘 지내는 것 모르고 계셨죠? 그러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이 꿈에서 깬 이후 김 권사님은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낙원에 있구나, 천국에 있구나.”
그날 이후로 권사님은 다시는 울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천국의 소망, 부활의 소망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감사함으로 1977년 그 당시 100만 원을 교회개척헌금으로 내신 거예요.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47년이 지난 지금은 강남에서 화성시로 이사 간 주사랑감리교회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계 14:13a]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
세상의 불청객인 죽음과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천국의 소망이며,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고린도전서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부활의 능력은 먼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활의 능력은 지금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는 부활이 미래에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그것은 먼 미래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몸의 부활은 미래에 있을지라도, 영적인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부활의 권능이 이미 역사한다는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나사로의 소생입니다.
소생은 부활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소생은 부활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고,
예수님은 나사로의 소생이라는 표적을 통해 아직 not yet 완전히는 아니지만,
부활의 권능은 오늘, 이미 already 임했고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이미 믿는 자들 안에 현재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의 말씀이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엡 1:19-20) 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20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20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일한 능력이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에베소 성도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간절히 기도했던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부활의 능력이 이미 역사하고 있음을 알기 바랍니다.”
지난 2월에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한 가정의 천국환송예배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5살 때부터 진단받은 근육병의 일종인 '진행성 근이영양증' 때문에,
고난이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공부보다 신앙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아들이었습니다.
대학 입시를 1년 남겨두었을 때에도, 공부보다 신앙이 중요하기에 아빠한테 성경공부 시켜달라고 했던 아들입니다. “아빠, 컴퓨터보다 신앙을 게을리 하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게 일찍이 십대부터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살던 아들입니다.
그 이후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의 질병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그가 어느 날 이렇게 일기에 고백했습니다.
“더 이상은 이 고통과 싸우는 치열한 삶을 감당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럴 때 하나님은 믿음의 끈을 붙잡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그 은혜로 인하여 인내하면서 달려갔을 때, 내 안에 가득한 절망과 두려움보다
더 큰 성령님의 능력으로 달음박질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날마다, 날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병이 빼앗아간 것을 대신하여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다.
고통당한 자들만이 볼 수 있는 우리 주님의 얼굴을 나는 보았다.
나의 영혼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아름답고 찬란한 영광'을 보게 되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영광의 하나님이 영원하신 팔로 나를 안아주시고 계셨다.
이 순간 내가 흘렸던 모든 절망의 눈물은 완전한 기쁨과 평안으로 바뀌어 버렸다.
"내 아들아, 수고했다! 수고했어!"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내가 흘린 눈물의 수고를 기억하시고 나를 항상 안아주시고 계셨다.
비록 지금은 내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내 몸이 온전치 않고 불편할지라도
내 생이 다하는 그날, 내가 저 천성의 '열두 진주문'을 지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온전히 보며 기쁨으로 뛰노는 모습을 바라볼 때, 내 남은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불태울 수 있으리라.”
그 아들은 그 질병과 아픔 중에서도 그의 영혼 안에 이미 강한 힘으로 역사하며 활동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 부활의 그 능력을 경험하였던 겁니다.
결국 이 아들은 그 이후 7년 8개월 동안 의식불명에 빠졌다가 지난 2월 말,
39세의 나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며칠 뒤 그의 아버님께서 예수동행일기에 자신의 고백을 기록하셨고 추천일기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일기에는 온통 감사의 고백뿐이었습니다.
”2024년 2월 17일, 아들이 의식불명 7년 8개월 만에 갑작스런 심정지로 육신의 부모 곁을 떠나서
하늘아버지 품에 영원히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분들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위로와 사랑을 받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좋은 때에 아들을 근육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완전한 치유를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해 낡은 옷을 벗어버리듯, 장차 부활의 신령한 몸을 덧입기 위해
주님께서는 아들을 약하고 병든 몸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내에게 생생한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아들이 천국에서 건강한 몸으로 밝고
기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아들을 보고 싶은 그리움이 클수록 주님이 계신 천국에 아들이 함께 있기에 천국을 더 가까이,
더 간절히 소망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아들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기에, 아들의 삶을 통해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보다 주님 보시기에 매일 매 순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얼마나 더 중요하고 그것이 주님의 최대의 관심임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경제적, 관계적, 신체적 고통으로 인해 힘들다, 어렵다, 침체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 누구보다도 상상할 수 없는 역경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술에는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이 넘쳐납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미 성령을 통해 그분과 연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부활의 능력이, 그 아들에게도, 그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이미 그들 안에 강한 힘으로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의 고백은 죽은 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일으키신 그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원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미 그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음을 알기 원했습니다.
[엡 1:19, 개정]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것이 바울의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부활주일, 이미 우리 가운데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시는 그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부활의 증인들의 간증을 듣겠습니다.
1,2부: 김찬회 성도
3,4부: 성준규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