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심양 땅에서 1
심양은 많은 이름을 갖은 도시다. 심양 남부에는 훈허(渾河)라는 강이 흐르는데 옛 이름 심수(瀋水)의 북쪽에 있다는 심수지양(沈水之阳)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7200년에 이르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며, 구석기에 취락 했던 신락 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앞서 말한 선비족의 발원이라는 알선동이나 라마동 고분이 지척에 있음이다. 17세기 초반,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누르하치는 심양을 점령하고 1625년 후금의 수도로 정했고 1634년에는 성경(盛京)(만주어: 묵던)으로 개칭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심양 편을 바로 성경 잡지라 칭하고 글을 이어갔었다. 그 후 청나라로 이름을 고친 후금은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국을 점령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변경하지만, 심양은 제2의 수도 대접을 받아 1657년에는 봉천부라고 명명되었고, 형식적이나마 중앙정부에 준거한 관제를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지금도 시내 한복판에 심양고궁이 버젓이 남아 있기도 한 것이다. 심양은 중국에서는 열외로 19세기 후반까지 정부에서조차 한족들의 이동을 권장하지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었다. 그러다가 만주는 러시아 제국의 남하정책으로 인해 지역을 개방하자 심양은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고 심양은 지역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여, 동북삼성을 묶는 관청도 설치되었다. 도시로서 심양이 크게 팽창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1905년 러일전쟁 중에는 당시 사상 최대 규모의 야전을 치렀고 일본군은 3월 10일 심양에 입성하게도 된다. 1912년 청조 멸망 후에는 장쭤린이나 장쉐량 등의 심양 군벌의 거점이 되었고, 1923년 심양 시 정부가 설치되고 시정이 시행되어 1929년 장쉐량에 의해서 심양 시라고 개칭되었다. 1924년에 대한민국의 독립군 삼부 중의 하나인 정의부가 지린 성과 심양을 중심으로 형성되기도 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수많은 독립지사가 망명하여 활동했던 시기이며, 우리에게는 당시 '만주 봉천'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역을 중심으로 하는 시가지의 대부분은 남만주 철도의 부속지로 여겨져 일본이 행정권이나 경찰권을 쥐고 있었다. 1931년 만주 사변에 의해서 일본의 관동군에 점령되면서, 그 이름을 펑톈이라고 하였고, 1945년의 일본의 패전 후에는 심양이라는 이름을 회복하였다. 한족의 입장에서 펑톈이라는 지명은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도시명이며, 만주국 봉천군관학교가 있었던 일제 시대의 주요 거점 도시였던 것이다. 한 도시의 이름의 변천사, 우리에게는 봉천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심양이라는 곳, 심양, 봉천 선양 평텐, 그리고 다시 심양, 흘러간 도시이름의 시대가 역사를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심양 한복판에는 일본 식 건물이 많다. 우리가 내린 심양역은 거의 옛 서울역 모습과 그대로 닮아 있다. 중국 정부가 한 때 거들 떠 보지도 않았던 때 러시아가 밀려오고 일본이 쳐들어오는 생난리를 치루는 와중에 승자는 일본이었고 그들은 물자 수송을 할 목적으로 철도를 부지런히 깔았는데 몽매한 인간들은 허허벌판 동네가 발전한다고 일본 입성을 환영하기도 했다하니 나라가 망해가는 마당에 그 누구를 탓할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심양 역에 도착해 이제는 엣 명물로 자리매김한 심양 역을 멋있다고 사진을 찍어댔다.
혼잡한 도심 한 복판, 이동이 만만치 않음을 나는 바로 직시 했다. 지하철이 닿지 않는 애매한 동네 서탑, 나는 씨이타를 외쳐대며 겨우 택시 하나를 잡았다. 그 무지막지한 놈이 요구한 금액은 60위안, 연길 서역에서 택시기사는 이놈에 비하면 가히 양반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 꽉 막힌 곳을 헤치는 데는 이런 막가 파 기사가 제 격이란 것을 나는 좀 안다. 예전 장춘에서도 비슷한 놈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막아선 금지 팻말을 부러트리듯 사뿐히 밀어 제치더니 무사통과하여 거기서 270도 회전 길에 편승하여 거꾸로 돌려서는 마구 질주를 감행하였다. 법도 소용없는 아주 몹쓸 놈이지만은 우리로선 아주 뜻밖의 귀인을 만난 셈도 된다. 정대 광명이란 말이 무기력하다싶은 중국 도시의 거리, 도시를 횡보하다보면 자연 알게 된다. 정대광명이란 말, 사실 이 말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어디 쉬운가. 하지만 공인들이라면 누구보다도 이 말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런 무법의 녀석은 눈도 광채가 나 여자 알아보는 눈도 범상치가 않은 법, 운전을 마구 몰면서도 녀석은 휴대폰 인터넷을 마구 후비더니 왠 묘령의 여자를 하나 끄집어 올렸다. 노래가 구성진 게 누군가 했더니만 요즘 샛별처럼 뜬다는 트로트 여가수 홍진영인가...그런 녀석은 자기 할아버지 이름도 모를 것이다 싶은 데 여가수 그것도 한국 여가수 이름은 공손히 잘 알고도 있었다. 나느 그놈 옆좌석에 앉았는데 내릴 때까지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운전을 하는 건지 가수만 바라보는 것인지, 침만 안 흘렸을 뿐 녀석은 푹 그녀에게 빠져 있었다. 그런 녀석은 한국이 주는 온정을 제대로 알까 모르겠다. 3배도 넘는 엄청난 택시비에 미모의 여가수까지.
우리는 밍주삥관 (명주여관)에 곧바로 도착을 했다. 바로 3년전 묵었던 그 숙소다. 민박 아줌마는 일찍이 2000년도에 서울에 와 돈을 벌어 그 돈으로 민박집을 차린 시대운대를 철저히 이용한 여자이다. 아마 지금 서울에 온다해도 그런 아파트는 소유하기가 힘들 것이다. 시세차익이란 게 이제는 다 글러먹은 도찐 개찐인 서울과 심양의 처지인 셈이다. 나는 그녀에게 김 2 톳을 선사했다. 거기에도 김은 있지만 가치가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지난 번 알아 봤기에 챙겨온 김이다. 그녀 표정이 대번 달라진다. 나는 내일 동행할 렌트카 아저씨를 급히 섭외하고 저녁을 먹자고 심양에서 제일 번화하다는 중가로 나섰다. 백화점이 연이은 중가 한 복판, 찍어 둔 곳이 있는데 찾는 집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겨우 찾아서 식사를 했는데 점수로 쳐 70점 정도나 될까. 입맛이 까다로운 일행 중 한 사람은 곤욕을 치루는 듯 보였다, 사실 맛이 어떨지 몰라 인터넷 사진을 그대로 들고 가 사진을 보여주었는데도 영 맛은 개운치는 않았다. 내가 기대를 한 동파육은 정말 기대 밖이었다. 소동파의 서호를 아시는지. 소동파는 항저우로 좌천돼 서호 뚝 방을 고치고 끼고 살 무렵 여가가 날 때마다 틈틈이 돼지고기를 쪄서 먹곤 했다고 전해진다. 요리를 하던 중에 오랜 친구가 그를 방문해서 바둑을 두곤 했다. 소동파는 바둑에 열중해서 타는 냄새가 나도록 고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내 놓은 것이 바로 동파육(東坡肉)이라고 하여 거지닭(叫花鷄)과 함께 항저우의 유명한 음식으로 말들을 하는데 이곳 동파육은 전혀 달랐다. 여느 때 먹었던 장조림같은 고소함은커녕 니글니글하여 콜라가 대번 생각이 났다.
우리는 서탑 조선족 동네 가까이 있는 야시장을 찾았다. 택시 운전사는 목소리가 하도 우렁차 미처 거스름돈을 다 못 챙기고 내렸다. 시장 초입에서 과일을 사고 꼬치라도 하나 물어뜯자 했더니 어느 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니 으스스 몸도 떨려 왔다. 우리는 그쯤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일의 바쁜 여정을 위해.이른 아침 3년 전과 똑같이 나는 오애라 하는 도매시장을 또 다녀왔다. 우리 등산용품이라든지 일상용품이 모두 중국산임을 나는 그때 알았었다. 이번 기회에 자전거 타는 취미를 갖은 동료들에게 소개해 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살펴본다고 간 길인데 옷이나 신발 가게는 그대로인데 잡화 쪽이 많이 달라져 있어서 짧은 시간 내 영업장소를 찾는 것은 무리였다. 아침식사를 하고 렌트카 아저씨를 8시에 만났다. 민박 숙식비가 이틀을 해 600위안인데 그에 비해서는 많은 거지만 하루 일당이 800위안이니 한국 돈으로 쳐서는 그렇게 많다고 할 돈은 아니다. 오늘 여행 길은 예전 코스와 별반 다르지 않는데 오전에는 북릉공원을 돌고 신양고궁을 들른 후 바로 고속도로를 타고 안산으로 가 옥불원을 들르고 오는 길에 요동에 백탑과 광우사를 볼 예정이다.
북릉공원에는 많은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나와 제 묘기를 뽐내듯 운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3년 전에 본 할아버지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묘기 부리듯 가죽 자켓에 가죽구두까지 신고 폼을 잡는 유별난 모습으로 여전히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우리는 웬만해서는 쑥스러워서도 나서지 못할 것인데 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묘기백출에 열중이었다. 우리는 홍타이지 무덤을 보고 바로 심양고궁으로 향했다. 관람 소감은 앞선 여행길에서 이미 소개를 하였기에 이 참에는 심양고궁 숭정전에 내걸린 정대광명이란 편액에 대해서 말을 조금 할까 싶다. 이정대광명이라는 편액은 순치제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다음 순번인 강희제로부터 청나라 역사는 돋보이기 시작한다. 중국사의 전성기를 말할 때 '강·옹·건 시대'를 뺄 수 없다. 청나라 4대 강희제부터 아들 옹정제, 손자 건륭제에 이르는 134년이다. 지금 중국의 엄청난 땅덩어리는 이때 정해졌다. 6000만 명이던 인구도 이 기간 2억 명으로 늘었다. 강희제와 건륭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라는 명예도 함께 누린다. 그러나 옹정제에겐 유독 '잔인한 독재자'의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나는 그런 평을 듣는 그가 좀 아깝고 아쉽다.
강희제는 아들이 서른다섯이나 됐다. 강희제가 일찌감치 둘째아들을 황태자로 지명하자 신하들이 아들에게 줄 서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황태자를 폐위했다. 황자(皇子)들 간에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툼이 뜨거웠다. 서로 헐뜯고 고자질했다. 1722년 강희제가 죽게 되자 아들들이 모였다. 대신(大臣) 롱고도가 방에 들어가 황제의 뜻을 받아왔다. 계승자는 넷째 아들, 훗날 옹정제였다. 옹정제는 몸을 돌보지 않고 일했지만 후계 지명을 둘러싼 음모설에 시달렸다. 음모설은 이랬다. "강희제는 원래 열넷째 아들에게 제위를 준다는 뜻으로 롱고도의 손바닥에 '十四(십사)'라고 썼다. 옹정제에게 매수된 롱고도가 방을 나오면서 '十四'에서 '十'을 혀로 핥아 지우고 '四'만 남겼다." 강희제가 '열넷째 아들에게 넘겨준다(傳位十四子)'고 종이에 써둔 것을 옹정제가 훔쳐 위조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十四'의 十을 '~에게'를 뜻하는 어조사 于(우)로 바꿔 "넷째 아들에게 준다"가 되게 했다는 얘기다.
옹정제는 소문을 퍼뜨린 이복형제들을 '개' '돼지'라 부르고 감옥에 가둬 죽게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황태자를 발표하지 않았다. 자금성 건청궁의 어좌 위에는 '정대광명'이라는 큰 글씨를 쓴 편액이 결려 있다. 황실의 제위를 둘러싼 갈등을 몸소 경험한 옹정제는 황태자를 세우지 않고 태자밀건법이라 하여 황위계승자의 이름을 적어 이 편액 뒤에 넣어 두고 자신의 사후에 열어 보게 하는 전통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기존에 적어놓은 후계자가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면 수시로 후계자를 바꿀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이후 황자들은 경쟁을 통해 훌륭한 황제 감으로 평가받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옹정제 자신은 자식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지 못하고 쭉 편애했던 홍력에게 황위를 이어주는 실수를 범해 자신이 낸 아이디어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후 황자들은 아버지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황제가 되기 위한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옹정제식 황위 세습 제도는 청나라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2011년도던가 이곳 랴오닝 성에서 옹정제의 '황위 찬탈' 누명을 벗겨줄 강희제의 유서가 발견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유서에는 "넷째 아들은 인품이 남다르고 생각이 깊어 대통(大統)을 이을 만하다"고 써 있었다고 한다. 유서는 만주어와 몽골어로도 쓰여 있어 한자 몇 글자 고치는 것으로는 내용을 바꾸기 어렵게 돼 있다고 한다. 300년 전 중국 황실 깊숙한 곳에서 벌어졌던 음모와 다툼이 새삼 권력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싶기도 하고 그들의 정대광명이란 게 단지 말뿐이 아니라 만주족이나 한족이나 똑같이 동등하게 적용했다는 것이고 이에는 황제 간택도 예외일 수 없다는 뜻으로서도 깊이 받아들이게도 된다. 이 세상은 현재도 그 광명정대로 늘 말썽이고 또 그 광명정대 때문 경을 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점에서 어느 시대든 새겨 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싶기도 한 것이다.
35.중국 안산이라는 곳에 장학량
지난 번 여행에서 말한 대로 안산에는 옥불원이라는 큰 옥이 나온 동네다. 하지만 옥으로서 안산을 대변한다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안산시는 심양의 부중심도시로 지방입법권이 중국에서 가장 큰 성시로써 마안이란 산이 있어 안산이라 하고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동북 최대의 철강공업지로서 유명을 달리 한 동네이다. 지금도 안산은 중국에서 경제실력 30대 도시 안에 들고 앞서 가 본 대로 천산의 미려한 경치와 온천성시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한때 한나라에 속한 땅이었지만 남북조시대에 당연 고구려의 강역이 되었던 곳, 안산.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 시 임시 행궁 터로 쓰이던 곳으로 그곳 철광은 일본과 중공초기의 대량개척에도 불구하고 아직 100억 톤이 지하에 남아 무궁한 자원의 보고로 알려진 엄청난 부의 축적지대인 곳이기도 한 것이다. 듣자니 프로트악티늄이란 광물이 23억톤 ,활석광이 23억 톤으로 세계생산량의 25%를 점하고 수암경내의 옥석광은 중국 4대옥산지로 42종의 옥석이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뿐이랴 안산지역의 대리석은 최고의 품질로 홍 황 흑 백 록의 다양한 색상이고 고박전아하다는 평이고 최고의 건축재료이며 석회석의 대산지이기도 하다. 어디 그 뿐이랴, 동식물자원의 보고이자 동북콩과 연초 옥수수등 배와 사과 밤의 대산지이며 목초지가 4300여경에 이르러 황우생산기지이자 융산 양의 육종기지이다. 이런 땅이 고구려 정기를 이어받은 여전히 튼실한 우리 땅이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들은 장학량이란 분을 아는지. 그는 바로 안산시 행정구역 안에 들어간 우리 고구려의 산성이 유독 많은 혜성시( 하이청 시(한국어: 해성시, 중국어: 海城市)출신인 인물이다. 그를 얘기하자면 장개석을 말해야 하고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에서 등장하는 화청지를 또 말해야 한다. 화청지는 당 현종이 우연한 기회에 현종 앞에서 펼친 춤사위를 시작으로 현종의 사랑을 받게 된 양귀비를 위해 궁을 지었다는 서안의 명승지이다. 알지 않는가.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여겼던 서안이 엣 당의 수도 장안이었다는 것을. 그런 서안 사변 때, 장학량이 장개석을 납치하여 감금했던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왜 그는 그를 감금해야 했을까. 이야기가 좀 길다. 앞서 위만 황궁에서 장쩌민 주석이 9월 18일을 잊지 말자란 글을 그곳에 비석으로 새겨 두었음을 이미 서술한 바 있다. 9웗 18일이 무슨 날이기에 그가 그 글을 남겨둔 것일까. 화청지와 9월 18일. 실제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은 알고 보면 또 무관타고만은 할 수는 없다.
1931년 9월 18일 저녁10시 일본 관동군은 심양 동북군 제7려 북대영을 공격한다. 이를 9 18사건이라 하는데 국민정부는 무저항 정책으로 일본은 신속히 동북을 점령하는데 3천 만의 동북민들은 국가를 잃는다. 우리 독립군도 마찬가지지만 그로부터 동북에선 항일의 열기로 무수한 피를 흘리는데 동북항일연군이 결성되고 이후 14년간의 분투가 이어지고 항일유격전쟁에 돌입한다. 요양의 일 관동군 제2사단은 심양으로 진격하고 항공처 비행장 병공창을 점령한다. 심양에 군수물자등 군수기지가 많았다는 게 그래서 나온 말이고 모두 장학령의 군수처였다. 하루 밤사이에 일군은 심양을 점령하는데 사람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단순히 일본군의 군사훈련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이날이후 일본군의 14년간의 동북통치가 시작되고 소화6년의 포고령이 내려지고 남만철도를 기점으로 일본군들이 집합한다.
돌이켜보면 1929년 말은 세계경제위기의 폭발로 전 자본주의 세계는 침중한 타격을 입게 된 그 무렵이었다. 자원의 부족으로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의 경제는 액운을 맞는데 은행은 도산하고 중소기업은 파산한다. 이는 일본정부로 하여금 대규모 침략전쟁을 도모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된 것이다. 일본은 전통의 무사도 정신에 입각하여 군국주의의 주체정신으로 민중들의 신령숭배사상을 군국주의를 이용하여 천황을 신격화 하고 천왕을 중심으로 충성심을 북돋는다. 그렇게 그들은 황국과 성전이라는 구호 속에 인근 국가를 침략하는 군국주의의 길에 매진했다. 러일전쟁 후 양국은 중국의 장춘을 경계로 교전하여 남북으로 대치하고 러시아가 통제하는 남만철도를 대련까지 연장하여 일본에 할양하는데 일본은 이를 남만철도라 한다. 하얼빈에 서구식 건물이 많은 것도 장춘이 교통중심이 된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이는 단순한 철도 부설이 아니라 일본의 중국경제침탈의 총본부가 되어 만몽의 경제약탈에 광분함을 의미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장작림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장학량의 아비지다. 일본은 봉계군벌 장작림을 농락하여 1918년 9월 동삼성순열사에 임명된 장을 통제하여 동북왕으로 육성한다. 장은 1924년 북경에서 안국군정부를 발족하고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에 취임한다. 장과 일본은 적과의 동침이라 이라 할까, 동북은 안정되었지만 사로의 실리가 달랐다. 일본은 채광권등으로 기어코 장작림과 충돌한다. 그러자 장이 북경서 심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고둔 부근에서 폭사 당하고 만다. 이를 이어받은 장학량은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복종하여 삼민주의를 제창하는데 문제는 일본정부의 대립각 의견이 장개석과는 달랐다는데 있다.
그 무렵 일본의 침략 야욕은 거셌다. 1931년 3월 이들은 일본 군관학교에서 만몽침략의 당위성을 강연하고 제국의 자급자족을 위해 만몽의 침략을 강조한다. 1929년 7월부터 4차의 참모여행으로 만주각지를 돌아보고 정찰과 전술방안을 강구하고 동북 결전방안을 마련한 후였다. 일본내의 신형대포를 대련을 통해 심양에 배치하고 남만철도 연변에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거기에 일 군부는 만보산 사건등 여론을 조작하고 그해 7월부터 일본은 남만철도 연선의 안산 본계 연산관 공주령 장춘 봉천등지의 일군배치를 점검하고 수차의 군사연습을 마무리 하고 바로 북대영을 9월 18일 공격 감행한 것이다. 일본이 광분 하는 바로 그때 장학량은 월당일 북경에서 북벌전쟁과 중원대전 일주년을 기념하는 경극공연을 보고 외국공사들과 연회를 열고 있었다. 사실 손을 놓고 있었던 셈이다.
7천명의 북대영의 사병들은 취침 중 일본장교들이 사병 단 7명을 거느리고 심양역 부근의 류조호에서 남만철도에 폭약을 설치하고 10시20분 폭약을 터트리며 전투 개시를 알린다. 남만선과 안봉선 철도변에 주재하는 일군은 안동 봉황성 영구 장춘등지의 대도시를 신속히 점령한다. 이들은 3개 방향에서 북대영을 진격하여 잠든 북대영에 집중포격하여 19일 아침 5시에 북대영을 완전점령하기에 이른다. 쏜살같이 19일 심양성을 모두 점령하는데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동북군의 공군 260대의 비행기는 한 대도 날지 못했다. 장학량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병공창은 일군의 손에 들어가고 3091문의 대포도 모두 일군이 가져갔다. 거기에 군용기차 2600량 10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실탄을 모두 일군이 탈취했다. 그런 식으로 점령을 넓혀 9월말 신속히 장춘 길림을 점령한다. 병력 2만 명을 투입하여 진군하는데 동북삼성의 동북군 16만 명은 부전자퇴하고 만 것이다. 대부분의 동북군경은 패퇴하고 군중고관들은 일본에 투항하여 각지는 일본의 점령 하에 놓인다. 이미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일본에 수매되어 조종된 이들도 많아 길림의 희차는 아예 일군의 진주를 환영하는 촌극도 빚어졌다. 마침내 1932년 2월5일 하얼빈까지 농락당하고 일군은 4개월 18일 만에 동북의 주요도시를 모두 점령한다.
그 무렵 장개석은 남창의 행영에서 30만의 국민당부대는 공산당 토벌에 임한다고 했었다. 그는 공산당에만 열중을 했다. 바로 모택동의 공산당을 말한다. 장학량과 모택동 그리고 장개석. 화청지라는 곳, 여기서 역사의 갈림길이 생긴다. 장학량은 정말 항일애국투사인가. 이 의문도 따라 붙는다. 한마디로 장학량에 대해 중국인들의 시각은 "민족의 애국자"이다. 앞선 글에서 보았듯 일본 관동군의 음모로 아버지 장작림이 폭사한 후 장개석에게 투항하였고, 이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일본군보다 공산당 섬멸이 우선"이라는 장개석 때문에 항일을 포기하고 관내로 철수했으며 이후 장개석의 명령으로 공산군과 싸우지만 같은 동포와 싸우기보다 일본과 싸울 것을 장개석에게 건의했으나 장개석이 거부하자 장학량은 바로 부득이 "서안사변"을 일으켜 장개석을 화청지에 감금한 사건이 발생한 거다.
중국이 하나가 되어 항일에 나서게 한 인물, 이런 것이 장학량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로 공산당의 중국은 지금도 말을 한다. 이것이 중론이지만 달리 보는 견해도 많다. 정말로 장학량은 장개석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에 항거하지 못한 채 자신의 본거지를 포기하고 관내로 철수했던 것일까.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1928년, 장개석이 북경을 장악하고 장학량이 동북역치를 선포하여 일단 중국 군벌시대는 종식되고 통일을 이루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른바 "편견회의", 즉 군벌 군대의 대폭 축소와 장개석 일인 통치 강화에 염석산-풍옥상-이종인이 반발하였고 반장개석연합전선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29년~30년에 걸쳐 양측 100만이상이 동원되는 군벌시대 역사상 최대의 전쟁인 "중원대전"이 벌어지고 만다. 일본은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는데 참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양측의 세력은 팽팽했지만 장학량은 동북에서 상황을 지켜보며 어느 쪽이 유리한가 추를 재어보고 있었다. 장학량의 군사력은 여러 군벌 중 장개석 다음으로 강력했기에 그가 어느 쪽에 가세하는가에 따라 전황이 결정되기에 양측 모두 서로 장학량을 끌어들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었다. 급기야 장개석은 와이프인 송미령을 보내 장학량을 설득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사실 장학량은 "동북역치"라고 중앙(남경정부)에 귀속되었음을 형식상 선포했으나 실제로는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중앙에 의해 자신의 세력기반이 흡수될 것을 매우 우려했다. 이 때문에 장개석과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염석산-풍옥상이 산동으로 진출하고 북평-천진으로 세력을 넓히는 것은 장학량의 세력권을 위협하기에 더 큰 위험이 되었기도 했다. 무엇보다 장학량은 아버지를 이어 관내로 진출해 화북일대로 세력을 넓히는 야망이 있었다. 장학량이 저울질하다가 장개석을 선택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정치적 판단에 의해서였다. 그럼에도 장학량은 실제로는 장개석의 출병을 계속 거부하다 염석산의 산서군과 풍옥상의 국민군이 중앙군에 의해 패퇴가 거의 결정되었을 때서야 약 7만의 병력으로 산해관을 돌파해 거드는 척을 했을 뿐이다.
즉, 장학량의 개입은 장개석의 요청 때문이기 보다 자신의 욕심을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게 더 맞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후에도 병력을 지속 증강하여 15만까지 늘렸다. 바로 일본의 군사적 위협이 점점 팽창되고 있었던 그때를 말한다. 사실 장학량의 동북군 약 30만 명중 장학량의 직계군은 그 절반정도이고 나머지는 사실 동맹관계라 할 수 있는 방계였다. 일본의 만주침공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장학량으로서는 주력 부대가 산해관 이남에 주둔하고 있는데다 동북에 잔여한 부대들은 대부분 전투력을 상실한 상황이기에 일본군의 침공을 제대로 막아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세력 기반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주력부대를 다시 동북으로 이동시켜야 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어렵게 획득한 북경-천진과 화북일대의 신지반을 모두 포기하면서 일본군의 전면에 자신의 부대를 투입하는 모험이었다. 장학량으로서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장개석이 "일본을 자극하지말라"라고 한 이 말은 역사적으로 울림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이 말은 만주사변이 발발한 직후가 아니라 그 전에 있었던 나카무라사건(일본군 스파이인 나카무라대위를 현지 중국군이 즉결 사살한 사건), 만보산사건(길림성 만보산에서 조선-중국 농민들 간에 일어난 농토분쟁)을 때였으며 당시 장개석은 제3차 초공으로 한창 공산군을 패배직전까지 몰아붙일 때였고 따라서 일본의 의도적인 정치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시기적 수용 상에 문제가 따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면적인 만주 침공에 대해서도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지금까지도 대립하는 정치적 상반된 이념으로서 갖는 아전인수식 우매한 해석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후 일본군의 지속 공격을 받아 장학량의 금주정권이 무너지고 와해되어 화북에서도 세력을 잃게 된다. 장학량은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약 10만정도 남은 동북군을 이끌고 서안으로 이동했고 양호성의 제17로군과 연합해 공산군과 싸우지만 심각한 자금난에 허덕이게 된다. 또 공산군의 공격으로 2개사단이 괴멸하는 등 공산군과의 전쟁에서 자신의 남은 세력마저 모두 잃을 상황에 이르자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 싸우자고 외쳤다. 그러나 장개석 입장에서는 이는 실로 어이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장개석은 서안으로 와서 장학량에게 "공산군과 싸워 이기든지, 복건성으로 이동하든지 양자 택일 할 것"을 강요하자 장학량은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양호성과 짜고 1936년 12월 12일 ‘내전 중지, 일치 항일’을 주장하면서 장개석을 서안 화청지(華淸池)에 감금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킨다. 공산당 내에서는 장개석 처형 목소리가 높았지만 모택동(毛澤東)은 주은래(周恩來)를 서안으로 파견해 항일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조건으로 오히려 장개석의 석방을 종용했다. 참 기가 막힌 상황이다.
당시 일본 정부와 군부는 서안사변의 기본적 성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당초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더욱 반공정책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반겼다.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인 장개석은 12월 25일 장학량과 함께 낙양(洛陽)으로 귀환하면서 중국인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고, 1937년 1월에는 모택동이 서안에 입성했다. 1937년 2월 국민당 3중전회는 내전 정지와 화북(華北)의 실지(失地) 회복을 결의했다. 이렇게 제2차 국공합작, 즉 항일민족연합전선 결성이 눈앞에 드러나면서 전 중국이 항일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여전히 중국을 얕보고 전쟁 확대에 나섰다. 이런 점에서 중일전쟁 발발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이런 면에서 장학량의 서안사변은 실상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적인 이유였다고 보는 측도 있다는 것이다. 남경정부는 장개석이 없다고 붕괴될 상황이 아니었고 중앙군은 동북군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만약 장개석이 남경으로 돌아간 후 장학량의 "병간"을 쿠테타로 규정한다면 장학량이 서안에 남아있더라도 중앙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 당했을 것이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장학량은 매우 정략적인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당시 대중 여론이 반 일적이었고 "항일을 위한 쿠테타"였으니 자신에게 동정적일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동북에서 전력을 다해 일본에 대항해 화북일대의 세력을 지키고 막강한 자신의 주력부대를 온존하게 지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지금 중국에서 장학량이 "국가와 민족의 영웅"으로 취급 받는 데는 다분히 서안사변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이 공산군이며 그들에게 장학량은 구세주나 다름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안사건으로 중국은 이후 사실 전략적으로 가장 불리한 시기에 일본과 전쟁을 하게도 된다.
서안 화청지 오간청.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서려 있던 이곳이 중국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런데 장학령하면 의외로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도올선생의 말을 빌린 이 이야기는 또 이렇다. 장학량이 국민당에 편입해서 총사령관인 장개석의 명령으로 퇴각할 때 “정주”에 비축해 놓은 엄청난 군수품을 불태우지 않고 퇴각하였을 때였다. 그대로 남아있던 군량미를 보며 적진의 백숭희가 쾌재를 부르며 의아해하고 있는데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내가 다리를 폭파하지 않은 것은 전 인민과 국가의 자산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전리품이라 생각하지 말고 빈민들의 구호품으로 사용해 달라. 우리는 형제며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장 학령의 또 다른 면을 보는 것이다. 그런 장학령에게 송미령이라니. 그의 핑크빛 러브스토리는 1925년 5.30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부(상해)에서 진압 조정을 위해 동북 군을 요청하자 장학량이 파티에 참석한다. 이 파티에서 장학량을 처음 본 송미령이 장 학령을 마음속으로 점찍어 놓았는데 이심전심으로 장학량도 송미령에게 기자회견 통역을 부탁한다. 그렇잖아도 호감이 갔던 장 학령의 연설은 송미령의 눈에 쏙 들어올 수밖에는 없었다. “나는 이들을 진압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조적 부패를 개선해야 한다.”
이후 일본군에게 폭삭을 당한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은 지 14일 만에 거지차림으로 나타난 상주, 장 학령은 철저한 항일의식을 곱씹는다. 이것이 바로 장 학령이 서안사변을 작심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측도 많다. 앞서 말한 대로 바야흐로 역치의 물결을 타고 100만 대군의 전쟁인 중원대전이 일어나면서 몸값이 높았던 장 학령(공군기270대, 30만 정예군, 민병대15만, )은 모든 군벌들로부터 러브 콜을 받는다. 장고 끝에 장 학령은 군벌 종식을 위하여 장 개석 밑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고 로컬사령관이 아닌 전군의 총부사령관이 된 장 학령이 남경 환송식을 하였는데 환영식 장에 나온 송미령과는 이미 오래전 서로 아는 사이였음이다. 혹자는 이들의 눈빛교환에 질투를 느낀 장 개석은 맨-붕이 왔는데 이후 죽을 때까지 갔다는 썰도 있다.
아무튼 나중에 1945년 8월에 항전이 승리한 후 장학량은 동북의 백성들이 자신을 열정적으로 대하는 것을 보고 매우 감동되어 다음과 같은 글을 일기장에 쓴다. “1946년 1월 3일. 오늘 아침에는 침대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고 이런저런 잡생각을 했다. 동북인민들이 나를 열정적으로 맞아주는 것을 보고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항전에 대해 말하면 나는 아무런 공헌도 없었다. 동북에 있을 때 나는 지방을 위해 좋은 일을 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한뜻으로 중앙을 옹호하고 중앙에 의뢰하다보니 문제가 생기게 되였고 로씨야와 맹목적으로 싸웠다. ‘9.18사변’에 대해서도 잘못 판단하고 잘못 대응했기에 부저항을 선택하게 되였으며 동북 동포들이 14년 동안이나 도탄 속에 허덕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였다. 오늘 그런 나를 열정적으로 환영하는 그들을 보고 나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장학량은 이 일기에서 “잘못 판단하고 잘못 대처했기에 부저항선택을 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밀지 않았다.
하여튼 장 개석의 부저항 명령이 동북군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당덕강이 “우리는 50여차래 부저항명령은 모두 장 개석이 당신에게 내린 명령한 것이라고 들어왔습니다.”라고 언급했을 때도 장 학량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는 중앙의 일이 아니고 장 개석이 내린 명령도 아닙니다. 다 내가 내린 명령이었습니다. 부저항은 장 개석과는 관계가 없습니다.”라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밀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니 정말 괜찮은 인물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장 개석의 입장은 장 학량을 견제하기 위해 동북을 일본에게 넘겨줄 심산이었다는 설도 있다.
장학량의 오판 배경가운데 하나는 당시 장학량이 아편 중독이었다는 사실이다. 장학량의 여자들은 송미령 외에도 뭇솔리니의 딸 에다 같은 거물급들이었기 때문에 잘못 건들이면 국제 분쟁을 촉발할 만한 위험한 일이었는데 통 큰 장학량은 에다를 사귄다. 그리고 그들의 데이트를 송미령이 또 알게 된다. 이 일로 장 개석은 눈에 가시인 장학량을 제거한다. 그리고 벼랑 끝으로 추락하는 장 학량이 미국의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이 일로 온 몸의 살갗이 없는 것 같은 혹독한 고통을 참으면서 와신상담하던 학령이 죽을 때까지 아편을 하지 않았다(실제로 학령은101세까지 장수). 치료에 성공한 장학량은 부인 에다와 함께 처가살이를 하면서 유럽의 민족주의를 배운다. 당시 항일의식으로 와신상담하던 학령은 발톱을 숨기고 서북토비 사령관을 수락하면서 공산당이었던 주 은래 모택동에게서 중국의 비천을 걸게 된다. 이는 장 개석 입장에서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었다.
“공산당 박멸이 내소신이다“며 무력으로 학생을 진압하던 장 개석의 만행은 급기야 서안사변의 단초가 되었고 보스의 악행을 벼르던 학령이 기회가 오자 장 개석을 납치 구금하여 강제로 국공합작(국민당과 공산당 힘을 합치는)을 성립시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한 것이다. 하여간 이렇게 국공합작을 만들어낸 장 학량의 병법은 중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결과가 되었다.
이후 장개석과 함께 남경으로 온 장학량은 체포되고 감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나이 39살 이었다. 1949년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쫓겨 갈 때에도 장학량을 데려 갔는데, 이후 그는 타이완에서 감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중국 정부는 대만에 대해 장학량의 가택연금 해지와 중국으로의 송환을 요구했었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장학량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주의자이고 자신들의 구세주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개석의 원성을 피할 수 없었던 장학량은 그가 죽고 난 2년 후인 일흔이 넘은 1977년에야 연금생활 54년 만에 비로소 가택연금에서 풀려 났고, 이후 1993년에 정부로부터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 받자, 하와이로 가서 살다가 2001년 101세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갔다.
그런 그한테는 여자가 참 많이 따랐다. ‘주은래’는 술을 즐기고 담배는 멀리 했는데 79세까지 살았고, ‘모택동’은 술을 멀리하고 담배만 즐겼는데 84세까지 살았다. ‘등소평’은 술과 담배를 모두 즐겼는데도 94세까지 살았다. 그런데 장학량은 술, 담배에 여색도 가까이 했지만 104세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말년에 스스로 “평생 동안 아쉬운 일은 없으며 단지 여인을 좋아한 것일 뿐”이라고 토로했다고 하는데, 역사학자인 당덕강(唐德剛) 교수에게 “나의 여인 편력사를 책으로 내면 큰돈을 벌 것이다”고 언급할 정도로 관계가 알려진 여성만 해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렇지만 장학량은 두 번째 부인과 열렬한 사랑을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세기의 사랑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장학량의 두 번째 부인은 조일적(趙一荻, 자오이디, Edith Chao, 1912-2000)인데, 그녀와 장학량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듯이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다. 그녀의 깊은 애정은 54년 동안 연금생활을 했던 장학량으로 하여금 고독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건강장수에 매우 유익하게 작용했다. 중국의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주간신문 '환구시보(環球時報)'가 그녀의 일생을 소개했는데, ‘중국현대사에서 상당히 신비로운 여성인 조일적은 장학량과의 전설적 사랑이야기로 인구에 회자됐다’고 적었다. 조일적은 절강성(浙江省)의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이 중앙정부의 교통차관을 지냈다. 6남 4녀의 막내딸로서 선천적으로 미모와 총명을 겸비한 재원이었는데, 열너댓살 때 이미 ‘북양화보(北洋畵報)’란 잡지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천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1926년 채공관이라는 사교장에서 열린 그녀의 생일무도회에서 당시 ‘4대 공자(公子)’의 한 사람이자 청년원수로 불리던 장학량과 처음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다음 해 여름에 그녀는 가족과 함께 북대하로 피서를 갔는데 마침 그 곳에 휴양차 와 있던 장학량과 재회하고 친해졌던 것이다. 천진으로 돌아와 자주 만나 춤을 추면서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당시 장학량은 이미 유부남이었다.
조일적의 아버지는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딸이 장학량과 같이 있는 것을 알고 분기탱천해 집안에 가두어 놓았다. 하지만 조일적은 1929년 여섯째 오빠의 도움으로 가출하여 심양으로 가서 장학량과 동거하게 된다. 당연히 집안에 난리가 났는데, 아버지는 신문에 ‘부녀관계를 끊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는 광고까지 냈다고 한다. 장학량의 본부인 우봉지(于鳳至)는 조일적에게 비서자리만 주고 정식 부인의 지위는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기꺼이 비서신분으로 장학량을 모셨다. 본부인은 조일적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진심으로 장학량을 좋아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집을 하나 지어주고 살게 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형님아우하며 화목하게 지냈고, 조일적은 다음 해 아들을 낳았다.
1933년경 장학량은 전투에 패한 뒤에 보직에서 해임되어 실의에 빠졌고 아편에 중독되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 때 홍콩에 있던 조일적은 장학량을 찾아가 고통을 지켜보면서 아편을 끊게 만들어 건강을 되찾고 재기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시안사변 후에 연금을 당해 어려웠던 시절에도 조일적은 장학량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1964년에 본부인 우봉지가 장학량과 이혼해 주었기 때문에 64세와 51세의 나이로 대만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고도 계속 반연금 상태에 있다가 1993년에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어 하와이로 이주해서 살았는데, 7년 뒤인 2000년에 조일적은 88세의 나이로 장학량과 손을 잡은 채 숨을 거두었다. 장학량은 휠체어 신세를 지는 100세가 넘은 노인이지만 줄곧 부인의 침상을 지켰고, 부인이 숨을 거두고 나서도 근 한 시간 동안 그녀의 손을 놓지 못했다고 한다. 무려 71년에 걸친 부부의 사랑이 끝나자 장학량은 그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
장학량(张学良)이라 하면 그가 일으킨 <서안사변(西安事变)>은 민국사상의 가장 규모가 큰 군사병변으로, 이는 오늘까지도 자주 사람들의 화제로 되고 있다. 하지만 장학량과 그 신변의 여인들도 크게 한몫을 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 중 장학량이 일생동안 못 잊어 하던 여인, 송미령. 이는 그가 생전에 줄곧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던 여인- 바로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龄)이었다. 하지만 어느 장소에서인가 장학량은 무의식간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뉴욕에 있다”라고 내뱉었다. 그러하다면 그 당시 장학량이 잘 아는 사람 중 뉴욕에 있는 이는 바로 송미령뿐이었다. 그리고 장학량의 사인서신거래 중 가장 많이 거래를 한 여인이 바로 송미령이었다. 무려 100여통의 편지가 장학량으로부터 송미령한테로 날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후일 <서안사변>으로 장학량이 연금되었을 때 장개석은 몇 번 장학량을 죽이려고도 했으나 송미령의 보호로 끝내 성사하지 못하였다.
심양에는 장씨수부박물관(张氏帅府博物馆)이라는 장학량의 관저와 사택을 모셔둔 곳이 있다. 심양의 베스트 여행지라고 치면 단연, 심양고궁이 가장 유명하지만 역사를 좀 더 세밀하게 안다면 단연 추천할 할 만한 곳이 이곳이 아닌가 싶다. 다음에 한가로울 때 미처 못 가본 그곳을 찾아 볼까 싶다. 특히 조일적 생가(赵一荻故居)가 나는 눈에 끌린다. 장학량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사뭇 엇갈리지만 <서안사변>이 당대 최대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만큼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송미령도 흔들릴 정도니... 그는 무슨 아우라가 넘쳤길 래 숫하게 여심을 울리고 자극했던 것일까. 아무리 봐도 장개석 얼굴이 장학량보다는 훨씬 낫다싶은데 말이다, 양귀비가 지금으로 치면 절대 미인이 아니다. 장 현종은 그럼에도 그녀에게 빠졌고 양귀비가 양자 삼은 안록산은 난을 또 일으켰다. 알 수 없는 게 남녀사이가 아닌가. 아무튼 화청지는 세기적 명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36. 옥불원 앞에서 하는 중국 옥 이야기
나는 옥 불상을 보러 옥불원을 들어가지 않았다. 두 번 볼 가치라고는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입구에 있는 옥 전시관을 들러 옥 영상물을 보고 안산의 특질인 안 스틸 제품의 칼을 기념으로 샀다. 기념가게에 진열된 옥에 모두들 시선이 집중한다. 나로선 그 전경이 참으로 의아하다. 오묘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렇게 탐이 나고 갖고 싶은 것일까. 정말 중국 사람들의 옥 사랑은 유별나다. 나는 이곳 만주에 오기 일주일 전 친구 아들 결혼식이라 하여 대만을 들렀었다. 그곳을 가면 당연 고궁박물원이라는 데를 꼭 들른다. 이번이 두 번째다.
잘 알다시피 국립 고궁 박물원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미술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전시품은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네 왕조의 황실 유물로, 본래는 중국 베이징의 고궁 박물원 등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1948~1949년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이전해 온 것들이다. 넓은 대지 위에 자리 잡은 박물원은 중국 궁전 양식의 4층 건물로 녹색 기와와 황색 벽면이 인상적이었다. 듣자니 본관 뒤로 보이는 산의 중턱에는 지하 수장고를 지어 귀중한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하고 모택동이 본국에서 폭격을 하더라도 차마 보물이 사라질까 봐 이곳만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여 주변 땅값도 만만하지 않다는 말도 있는 동네다. 아무튼 이 박물관은 값을 따질 수 없는 오천 년 역사의 중국 보물과 미술품 69만 점으로 꽉 차 있다. 그래서 한꺼번에 전시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너무 많아 인기 있는 것들은 상설 전시관에 전시하고 옥, 도자기, 회화, 청동의 보물들은 일정 기간을 두고 테마를 바꾸어 가며 전시하고 있다. 지난 번 내가 갔을 때는 중국의 도자기 역사를 한 눈에 알아 볼 좋은 기회였는데 가기 전 이번 고궁 박물원에서 꼭 봐야 할 주요 전시품 TOP 10이라는 선전 문구를 어디선가 주워들었었다. 그 열 개의 보물 중에서도 단연 대표작은 옥 보물이었다. 이름하야 청나라 취옥백채(翠玉白菜) , 취옥백채는 고궁 박물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흰색과 녹색을 띤 옥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배추라는 친근한 소재를 표현하였다. 경옥으로 다듬은 배추 잎에는 여치와 누리가 앉아 있는데, 둘 다 번식력이 뛰어난 곤충이다. 신부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황비에게 자손이 많아 대대손손 황실의 혈통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미가 있다는데 크기는 작았지만 그 배추 잎사귀 안에 더 작은 여치와 메뚜기가 생동감으로 나를 감질나게 했다. 어쩌면 저렇게 까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 다음으로 많이 모여든 사람들은 청나라 고종 황제, 그러니까 건륭제의 옥새(碧玉璽)였다. 이 또한 옥으로 만든 휘황찬란한 보물이다. 사실 현재 고궁 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 대부분이 건륭 황제가 수집한 것들이기 때문에 서화와 기물, 도서 문헌에서 고종의 낙관과 인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참으로 그는 남의 나라 황제이지만 사고전서란 책 수집도 그렇지만 참으로 용한 인물이다.
그 다음으로 눈여겨 볼 것이 청나라 진조장(陳祖章)이 조각한 감람핵주(橄欖核舟) 청대의 궁정 장인 진조장이 길이가 1.5인치에 불과한 올리브 씨에 조각한 작은 배이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배 위에 탄 쌀알 크기의 인물 8명은 물론 여닫이 창문과 탁자, 의자, 심지어 탁자 위의 잔과 접시까지 완벽하게 조각해 냈다. 심지어 배 밑에는 소동파의 〈후적벽부(後赤壁賦)〉 전체 300여 자까지 새겨져 있다. 이를 믿을 텐가. 지난 번에는 쌀알에다 글자 100개도 넘는 것을 넣었다하여 다들 놀래 자빠졌는데 역시 대단한 진조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청나라 육형석(肉形石)도 놀랄 작품이다. 신선하고 육즙이 많은 ‘동파육(삼겹살 조림)’과 너무나 똑같아서 보는 이들의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작품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한 층 한 층 다른 색깔로 형성된 천연 마노를 재료로 삼아, 본연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 색을 입히고 정교하게 조각하여 모공과 피부 결까지 표현해 낸 진귀한 작품이다.
당나라 회소(懷素)의 자서첩(自叙帖)도 꼽고 있는데 회소는 8세기 말에 활동한 승려로서 성정이 소박하면서도 호방하고 술을 몹시 좋아해 취할 때마다 붓을 들어 초서를 쓰곤 했다는데 〈자서첩〉은 당나라 서예의 자유분방한 정신을 대표하는 작품이며 날아갈 듯한 운동감이 서양 현대 예술의 추상 회화와 견줄 만하다. 서주(西周) 말기의 모공정(毛公鼎), ‘정(鼎)’은 세발솥을 뜻하는데, 원래 고대에 고기를 삶는 냄비였던 것이 후대에 와서는 권력과 신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기물이 되었다. 모공정은 안쪽에 500자에 달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문장이 고아하고 서체도 뛰어나 국보로 칭송받는다고 했다. 당나라 궁악도(宮樂圖)도 빠지지 않는다는데 나는 제대로 찾지 못했고 보지를 못했다. 청나라 중기 상아로 조각된 사층투화제식합(四層透花提食盒)도 일품이라는데 이도 역시 보지를 못했다. 신석기 시대의 채도(彩陶)라는 도자기 작품, 나는 예전 이를 보면서 약간은 흥분 했었다. 최초의 중국 도자기는 채도와 흑도(黑陶)에서 출발한 것으로 흥산문화의 유산과는 차이가 분명 있었다. 물론 채도는 매끈하게 문지른 오렌지색 질그릇 위에 천연 광물질 안료인 자석과 산화망간으로 도안을 그려 불에 굽는다. 매우 풍만하고 호방하며 안정적인 조형을 보이는 이 도기는 원시 예술의 거칠고 소박한 미감을 잘 간직하고 있었지만 우리와는 다른 전형으로서 우리문화는 우리 나름의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건륭제가 아꼈다는 신석기 시대 룽산(龍山) 문화 말기의 응문규(應紋圭)가 흥미를 끈다. ‘규(圭)’는 옥으로 만든 홀(笏)을 뜻하며, 왕이나 귀족의 신분을 나타내는 용도로 쓰였다. 이 규의 양면에는 아주 연하게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한쪽은 깃털을 꽂은 관을 쓰고 있는 얼굴 문양이고, 다른 한쪽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매의 형상과 귀걸이를 한 여인의 모습이다. 청나라의 건륭 황제는 이 응문규를 매우 좋아하여 나무 받침을 제작하고 규의 표면에 자신이 지은 시와 옥새 문양을 새기기도 하였다는데 그가 이를 아낀 것은 단순히 정교해서가 아니라 바로 용산문화가 갖는 특질로서 신석기시대에 '동이(東夷)족'이라고 불린 산동반도와 요동에서도 퍼졌던 어느 친근함 때문이 아닌가 싶어서다. 건륭제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들의 보물 열 가지 중 2가지 이상이 모두 옥으로 만든 작품들이다. 왜 그들은 그토록 옥에 열광하는가. 그런데 고궁 박물원에서 희한한 기록을 보았다. 세계 주요 옥 분포도에서 대만 화련이 1등이고 그 다음이 곤륜산 그리고 그 다움에서야 안산이 들어가 있고 우리나라 춘천이 13위로 등재되어 있었다. 꼼꼼히도 파악한 그들, 그만큼 옥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들이다. 박물원에는 청나라 때 황제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유리 세공에 대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모두 눈길은 옥에 집중들을 했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옥은 원석부터 나온 천연의 것이지만 유리는 당시로선 신가하였겠지만 태생적으로 으로 큰 차이가 있다. 우리 고서에 흔히 등장하는 말 ‘마음가짐은 초박처럼 하고, 일을 결단함은 오구를 어루만지네 秉心同楚璞,(병심동초박,) 剸事撫吳鉤,(전사무오구,).’ 란 표현도 그렇지만 초박에 대한 문구가 고서에는 제법 많이 등장한다. 초박이란 말은 유독 퇴계 선생의 〈도산기문(陶山記文)〉에 대한 발문이라든지 연암 박지원의 문집의 발제 문 등등 곳곳에서 등장을 하는데 이는 초박이 갖는 의미에 그 뜻이 있을 것이다.
초박은 초(楚)나라 변화(卞和)의 박옥(璞玉)을 가리키는 것으로 박옥은 돌 속에 들어 있는 가공되지 않은 옥으로, 춘추 시대 초나라 사람 변화가 형산(荊山)에서 직경이 한 자나 되는 박옥을 얻어 여왕(厲王)과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옥을 감정하는 사람이 잘못 보고 돌이라 하여 두 발이 잘리고 말았다. 그 후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화씨는 형산 아래서 박옥을 안고 사흘 밤낮이나 울어 피눈물이 흘렀다. 문왕이 이 사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 “천하에 발이 잘린 사람이 많은데 그대만이 유독 이렇게 우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발이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게 아니라 보배로운 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를 미치광이라 하니, 이 때문에 내가 슬피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옥공(玉工)을 시켜 박옥을 다듬게 하니 직경이 한 자나 되고 티 한 점 없는 큰 옥이 나왔다 한다. 여기서는 나라를 위한 자신의 충정이 이와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마음가짐은 초박처럼 하고, 일을 결단함은 오구(오구(吳鉤)는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진 병기(兵器)로, 춘추 시대 오(吳)나라 사람이 이를 잘 만들었기 때문에 오구라고 일컫는데, 후에는 예리한 검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를 어루만지네’ 라는 표현한 이 말은 진정성 있는 가치에 대해 소신대로 굳건히 일을 시작하여 일 처리를 명확하게 한다는 표현으로서 아마 해석이 될 것이다. 이글에서 보듯 ‘화씨자벽’에 나오는 한비자가 말했다는 초나라 사람 和氏가 옥 덩이(박옥)를 초나라 산 속에서 발견하여 초 무왕께 바쳤다는 시대가 어디쯤인가 말이다.
(玉, Jade)은 9000년 이전 고대로부터 중국 사람들의 예술과 문화에 깊이 배어든 가장 소중한 보석으로 중국의 문화와 역사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옥은 황실가족을 위해 중요한 성징과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는데, 그것은 땅의 음과 하늘의 양 기운이 모두 담아져 있는 유일한 천국의 돌로서 인간의 육체적인 세계와 정신적인 두 세계 사이를 결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AD 200년 경의 중국 사전의 기록에 의하면 옥은 자선, 정직, 지혜, 용기, 재산의 5가지 덕목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정의한다.
비취는 녹색과 갈색, 검은색, 등이 반투명에서부터 불투명한 옥까지 다양한 색상의 형태로 존재하고, 중국에서 후덕하기로 유명한 많은 철학자, 공자 등은 옥의 단단함과 아름다움에 빗대어 유백색의 옥과 같은 사람으로 지칭되었으며, 그것은 존엄과 축복, 장수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옥의 아름다움은 은혜와 순결을 의미한다. 옥은 종종 색상을 변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돌”이라고 부르는데, 녹색의 비취를 오랫동안 착용할 경우 점점 더 짙은 녹색으로 변경될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은 소유하거나 착용한 옥의 조각이 더 짙은 녹색으로 변경되었을 때 자신을 수호하는 기운이 그것만큼 더 축적된 것으로 믿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보(家寶)가 되어 시집가는 딸이나 자손에게 물려준다.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옥을 세공하여 왔는데, 신석기시대 중국의 무덤에서 발견된 옥으로 만든 원형의 고리는 저승과의 연결을 나타내는 초기의 옥문화이며, 기원전 1600년부터 기원전 1050년 경까지의 상 왕조 시대에는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 개인의 의식과 장식을 위해서 옥이 사용되었고, 칼과 같은 실용적인 도구로도 만들어졌다. 또 기원전 200년경 저우왕조에서는 옥으로 책을 만들어 왕조의 불멸을 새겼고, 그것은 매장 의식이 잘 발달된 한 왕조로 이어졌다. 또한 옥을 시신과 함께 매장하는 장례 관행은 당나라시대에서 끝났지만, 16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명나라와 청나라 왕조에서는 더 많은 옥이 궁궐의 예술품제작에 사용되어졌다.
요즘은 어떤가. 혹시 베이징 올림픽 메달에 옥을 사용한 것을 아시는지. 그들은 메달 정면에 국제올림픽 위원회에서 규정한 도안을 사용하였고, 메달의 뒷면은 중국의 고대 용무늬 옥 벽 조형에서 따온 옥 벽이 사용되었다. 중국에서의 크리스마스 때에 일반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선물은 사과이다. 사과 외에 크리스마스 때 남자친구가 여자 친구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옥 팔찌, 옥 목걸이를 많이 주기도 한다. 이러한 옥에 대한 사랑 때문에 최근 중국 언론에 따르면 옥의 가격이 몇 년 사이로 4배 이상은 뛰었다고 한다. 최근 거래된 최고등급의 15.8g짜리 옥의 가격은 무려 12만 위안 이였다고 하는데 이 가격은 황금의 40배가 넘는 가격이다.그래서 黃金有價玉無價이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이 의미는 사람들은 황금은 값을 매 길수 있지만, 옥은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말한 옥의 가치와 黃金有價玉無價의 말의 영향으로 요즘 중국 부유층들은 부동산 투자가 아닌 옥 투자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로또와 비슷한 옥 광석 경매까지 생겼다고도 하니 당연 최근 옥 시장에서 사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중국의 4대 명옥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중국의 4대 명옥은 신강의 화전옥(和田玉), 하남의 독산옥(獨山玉), 요녕의 수암옥(岫岩玉), 호북의 녹송석(綠松石) 이렇게 4개가 중국의 4대 옥석이라고 한다. 화전옥(和田玉) 은 신강의 사동으로부터 타스쿠얼칸까지, 화전으로부터 옥전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해 있으며, 흰색, 청록색, 흑색, 황색 등으로 다양한 색채를 띠면서 원래의 질감은 반투명하지만, 연마를 하면 투명해지고 광택이 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독산옥(獨山玉)은 남양시 북부 교외의 독산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는데 독산옥은 다른 옥에 비해서 채굴 역사가 길다고 한다. 화전 옥과는 달리 질감이 부드러우면서 맑고, 유지, 유리와 같은 광택을 가진 특징이 있다고 한다. 유암옥(釉岩玉)은 현재 중국의 주요한 옥 생산광산으로서 전국의 유암옥 생산량의 60%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외관으로 보면 청록, 황녹, 담백색을 띄고 반투명하고 연마 후에는 파리핀 표면과 흡사한 광택을 낸다고 하는 옥이다. 녹송석(綠松石)은 고대 이집트인에게 발견되어서 예전에는 신비의 돌로 간주하였다고 하는데 중국 후베이에서 생산되는 녹송석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며, 현재는 녹송석의 특이한 색깔 때문에 제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옥이 있었는가? 오랜 옛날부터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대한민국은 조선을 이어온 유구한 나라니까. 실제 청색의 유리환옥이 신라 고분에서 뿐만 아니라 백제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다. 또한 녹색·감색(紺色 : 검은빛을 띤 푸른빛)·담황색 등의 유리 구옥(球玉)도 함께 출토되었다. 감색 유리구옥은 코발트를 구워서 산화코발트를 만들고 그것을 유리에 혼합하였을 때 얻어진다.마노환옥 또는 다면옥·관옥 등은 그렇게 흔하지 않아서 신라·백제의 고분에서 발견된 것이 매우 적다. 마노는 석영·단백석·옥수(玉髓) 등의 혼합물이며, 간혹 다른 광물질이 스며들어 적갈색과 백색의 무늬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마노로 곡옥을 만들었던 것은 적갈색이기 때문에 이색적인 목걸이를 얻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수정은 제법 많이 그래도 출토되었다. 우리 나라의 수정옥 산지로서 이름이 높은 곳은 경주의 금오산이다(속칭 남산이라 한다.). 그래서 ‘남산옥돌’이라는 말이 조선 말부터 알려졌으며 ≪동경지 東京誌≫에도 기록되어 있다. 남산옥돌은 바로 수정옥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라시대의 고분 출토품 중에는 주판알 모양으로 다듬은 수정옥 38개를 연결하고 가운데에 수정옥으로 만든 곡옥을 늘인 목걸이가 있다. 비취는 청자색 정도의 색채에서 진한 것까지 여러 가지 색조가 있는데, 녹색이 진하면 진할수록 귀하고 값이 더 나간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비취곡옥은 백색 속에 녹색 선조가 있는, 휘석(輝石)의 섬유상 결정이 집합하여 이루어진 비취로 중국제 비취와는 다른 계통이다.이것으로 미루어 신라에서 비취가 산출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산출지인 유적지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신라사람들은 의식관(儀式冠)인 금관에 작은 곡옥을 많이 매달아 놓는 것을 하나의 정석처럼 생각하였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의 입식에 달려 있는 곡옥,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의 입식과 대륜에 달려 있는 비취옥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경주 황남동 98호분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어느 금관보다도 많은 비취곡옥이 달려 있었는데, 이 곡옥들은 푸른빛을 내는 양질의 경옥이었다.
그런데 대개의 옥은 지금도 출처를 모른다. 현 대한민국에는 유감스럽게 1967년 이전에는 옥이 생산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춘 강원도 춘천옥, 우리나라에서는 유일무이한 옥 생산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춘천 옥광산 이외에서는 옥이 생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그 방송에서는 1968년에 개발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1968년 그 이전에는 한국, 한반도에서는 옥이 생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춘천 옥광산>은 연간 채광량은 약 150톤이고 추측 매장량은 약 30만 톤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 속의 문화에는 옥이 판을 친다. 옥대(玉帶)는 비단으로 싸고 옥으로 된 장식을 붙여 꾸민 띠로 왕이나 조정 신하가 공복(公服)을 입을 때 허리에 둘렀던 허리띠를 말하고 옥잔(玉盞), 옥배(玉杯) 옥책(玉冊)등등하여 일상적으로ㅗ도 많이 사용되엇음을 짐작하게도 되는데 도대체 이 옥들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조선시대 모반 옥향로 옥등잔 옥재털이-천하명품 태극옥향로 골동품판매목록은 수두룩한 것으로 보아 분명 조선에는 옥이 엄청나게 많이 생산되고, 옥의 문화가 발달된 나라였을 것인데 그것이 나로선 정말 아리송한 이야기다. 이 말에 대해 나는 정말 옥석을 가리고 싶다.
37. 안산을 휘돌아 다시 요동 땅에 이르러
우리는 안산을 빠져 나오는 길에 요기를 했다. 일정상 간단한 식사를 하자고 햄버거 집을 정하기는 했는데 실은 일행들이 중국음식에 거의 적응을 못하는 것도 같아 속 편하게 찾은 햄버거 집이었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까딱 지체하다가는 요동에 광우사 입장이 가능치 않을 수 있다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큰 길 변에 까르푸 건물에 KFC간판을 발견했다. 잘 알다시피 중국 사람들은 자식들에게 후하다. 의무적으로 자식 하나만을 두게 한 결과가 빚은 산물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식 하나 두고 부모에 할머니 할아버지 까지 달라붙어 과잉 보호를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KFC햄버거는 현지 음식으로서는 꽤 비싼 음식이다 싶은데 아이들에게는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듯 줄이 길었다. 그 바람에 우리 점심은 더 지체 될 수밖에는 없었다. 점심을 마치고 큰 길로 치달아 도착한 요동 땅, 요동은 안산에서 북으로 다시 올라서는 길에 있다. 거기서 위로 더 오르면 열하길기에서 연암 박지원이 말한 대로 고려총과 아미장을 지나 심양에 이른다. 나는 사실 고려총이란 곳에 관심이 많은데 파악을 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 아쉽기 그지없다. 북경 근처에 신채호가 말한 고려영이라든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고려포라는 곳과도 같이 이 고려총은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무덤내지 아니면 고구려 엣 터전이라는 말 같은데 도시 알 방법이 없다는데 아쉬움이 생긴다. 하지만 나는 추정으로서도 요동과 심양 그 언저리는 모조리 고구려 땅이고 고구려 한복판이란 생각을 갖는다. 대개 집단 무덤은 충주에서 발견된 무덤들이ㅏ 그러하듯 주거지 인근에 세운 것이 정례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도착한 요동 땅, 고구려의 평양이라고 생각되는 요동성 위치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오늘의 요양은 2300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요동성을 함락한 후 여기에다 요주(遼州)를 설치했다가 이듬해 폐지하고 그곳을 새로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속하도록 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요동 땅 표식도 바뀐다. 기원 918년(요신책<遼神冊>3년)에 요나라 태조는 요동성을 점령하고 여기에다 요양부(遼陽府)를 설치해 두고 이듬해에는 이 성을 보수해 동평군(東平郡)으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기원 1116년, 새로 일어난 여진족이 건립한 금나라는 요나라의 동경도 요양부를 함락하고 요나라 때처럼 요양을 동경, 제2수도로 삼았고 원나라가 건립된 후 기원 1287년에는 요양 등 몇 곳에 행상서성(行尙書省)을 설치했고 그이후에도 시대흐름에 따라 요동의 명칭은 달라졌다고 하니 요동은 연암 말 그대로 요동이 편하면 세상이 편했다는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싶다. 그렇게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17세기까지 줄곧 동북지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였던 요양은 현재 요녕성 14개 대도시 중 하나이다. 요양은 자연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이미 파악된 지하자원이 30여 가지인데 철, 석탄, 금, 동, 석유, 석고(石膏), 점토(粘土)의 매장량은 물론 천연가스 저장량도 많다. 석고의 매장량은 동북 전 지역에서 으뜸이며, 백운모의 매장량은 요녕성에서 1위를, 철광의 매장량은 전 성에서 2위를, 석회석 매장량은 요령성에서 3위를 차지한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그냥 배가 아프고 만다. 거기에 요양경내에 태자하, 혼하 등 29갈래 강이 있고 삼와(參窩)와 탕하(湯河) 등 저수지가 있어 물자원이 풍부하고. 생태환경도 좋다. 동부산간지역에는 사과, 아가위와 한약재가 많이 나고 땅이 기름지며 관개수가 충족한 서부평원에는 벼, 수수, 옥수수, 콩 등 농작물이 많이 난다. 참 아쉬운 우리의 고토가 아닌가 말이다. 그 동네에서는 민물고기 요리가 성행한다는데 요양현과 등탑시는 전국의 농산물생산기지이자 민물고기 양식 중점구역으로 선정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밖에도 요동은 특대형 석유화학섬유연합기업으로 중국에서 유명한 동네이다.
≪열하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박지원은 요양에 도착하여 먼저 관우 사당인 관제묘(關帝廟)를 구경하고, 그 다음으로 백탑(白塔)을 보았고, 그 다음으로 백탑과 같은 위치에 있는 광우사(廣祐寺) 터를 보았다. 당시 박지원은 관제묘(關帝廟)에 대하여 가장 많은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가 당시에 보았던 관제묘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매우 번화한 장소였으며, 그 규모 또한 매우 컸다. 하지만 그 관제묘는 소문에 따르면 1960년대 문화혁명 때 철저하게 파괴되어 지금은 빈 터만 있을 뿐 사실상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관제묘는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요양박물관에는 당시 관제묘에 모셔져 있었던 관우상을 만나 볼 수 있다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관제묘와 백탑 주변이 그 시절 볼거리인 것처럼 지금도 그 주변은 밤이면 야시장이 펼쳐진다하니 이는 자연적 연고가 아니겠는가 싶기도 한데 거기에 또 하나 도교를 말하는 관제묘와 더불어 광우사도 도교와 관련한 사찰이라니 같은 맥락이다 싶기도 하다. 우리는 광우사 뒤편 작은 강 뚝 편에 차를 대고 광우사를 향했다.
당장 느껴지는 것이 3년 전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정비를 잘해서 시민 휴식공간으로 거듭나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요동 백탑을 제대로 알아주는 것 같아 내심 흐뭇해진다. 그런데 아쉽게도 예상한대로 광우사는 문을 닫았다. 시각이 4시 15분 쯤이니 15분 늦어 광우사 대웅전 그 웅장한 자태를 보지 못한 것이다. 대신 우리는 항공모함 급 팽이 돌리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됐다. 노인들이 힘차게 후려치는 팽이 소리가 마치 딱총 울리는 총소리 같이 크게 들려왔다. 우리 일행도 청을 해서 한번 씩 후려쳐봤는데 실력이 그들만은 못했다. 이걸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스트레스 해소로는 그만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료 입장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백탑으로 향했다. 연암 일행도 관제묘 구경을 마치고, 관제묘에서 반 리 정도 떨어진 백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의 <요동백탑기>에서 백탑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백탑은 여덟 면으로 된 백색의 탑으로 13층에 높이가 70길이나 된다. ……… 요동이 왼쪽으로 푸른 바다를 끼고 앞으로는 큰 들판에 접해 있어서 거리끼고 막힌 것이 없어 천리가 아득하므로, 백탑은 바로 요동 벌판의 삼분의 일의 형세를 차지한 셈이다. 탑 꼭대기에는 세 개의 구리로 된 북이 설치되어 있고, 탑의 매 층의 추녀 모서리에는 물바가지 크기의 풍경이 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풍경 소리가 온 요동 벌판을 진동케 한다. ……… ” >
백탑은 불사리 탑으로서 원래는 광우사 보탑이라 불렀으나, 탑신에 흰색을 칠하였으므로 흔히 백탑으로 부른다. 높이 71미터로 중국 동북지방에서 가장 높은 탑이며, 중국의 76개 고탑 중의 하나로서 중국 6대 고탑에 속하며 중국의 국가 급 문화재이다. 백탑의 건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부분 요나라 때 처음 건립되었다가,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보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암은 <요동백탑기>에서 백탑의 건축에 대하여 “세상에 전하기로는 당나라 장군 울지경덕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치러갈 때 건축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 파악한 것이다 싶다. 백탑의 원래 명칭이 ‘광우사보탑’이었다는 점을 보면, 백탑은 원래 광우사 경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780년 당시, 박지원은 백탑은 보았지만, 광우사는 이미 폐쇄되고 중들도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미처 이번에는 볼 수 없었지만 광우사는, 동한(東漢) 시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초기에 건축된 불교 사원 중의 하나로서 중국 국가 AAAAA급 문물이다. 금, 원, 명, 청나라 등의 각 왕조의 지속적인 보수와 개선 공사를 거치면서 면적 9만 평방미터에 200칸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발전하여 중국 동북지방의 최대 불교성지가 되었다. 1682년 강희제는 친히 광우사를 찾아 <광우사>라는 시(詩)를 하사하였고, 1842년 도광황제 때에는 부분적으로 보수하였으나, 1898년 러시아의 철도 건설로 광우사는 부분적으로 훼손되었다. 이후 광우사는 1900년 7월에 의화단의 활동 본거지로 사용되다가, 그해 9월 28일 러시아 군대가 의화단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불에 타서 폐허로 변하였다. 광우사터는 100년 이상 방치되어 오다가, 2002년 6월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광우사에 대해 “금폐무승(今廢無僧)”이란 말을 썼다. 난 이 말이 꽤 아리송하다. 연암이 광우사를 찾은 것은 1780년 8월로 건륭제가 중국을 통치하던 태평성세였고, 광우사가 불타 없어진 것은 그 후 120년이 지난 1900년 9월인데, 박지원은 무슨 이유에서 ‘지금은 절이 폐하여지고 중도 없다(今廢無僧)’라는 기록을 남겼을까? 당시 박지원은 자신이 목격한 광우사의 모습이 어떠했기에 이러한 기록을 남겼을까? 건륭제 시기, 즉 1780년대를 전후해서 광우사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하였던 것일까? 그런데 우리나라 스님들이 그들의 기록을 갖고 찾는 순례 여행기에서 나는 묘한 기록을 발견했다.
‘삼국유사’ “탑상편”에 실린 ‘요동성 육왕탑’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당나라 때 도선(道宣, 596~667) 율사께서 저술한 ‘집신주삼보감통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일연 스님이 채록한 것이라는데 글의 뜻은 ‘요동성에 있던 아쇼카왕이 세운 탑’이란 뜻이라는 것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고구려의 영토였던 요동성에 고구려의 성왕이라는 왕이 순행을 왔다가 신비한 오색구름이 휘감아 돌며 머무는 곳을 발견했다. 이에 그곳으로 다가가보니 그 구름 속에 지팡이를 든 승려가 홀로 서있는 것이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노인은 사라지고 대신 3층의 흙으로 쌓은 기단 위에 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탑만 보였다. 왕은 승려가 서있던 자리를 파보게 했는데, 지팡이와 신발과 더불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명문이 나왔다. 마침 그 중에 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있어 이것이 불탑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에 고구려 왕은 불교를 믿을 결심을 하고 이 탑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금 7층의 목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탑은 ‘삼국유사’ 기록에도 이미 오래 전에 낡아서 점차 층수가 낮아졌다고 했는데,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가 이곳을 지날 때만 해도 이곳은 이미 “空曠蕭條(공광소조)”, 즉 텅 비고 쓸쓸한 상태였다고 하니 세월이 오래 흐른 탓도 있고, 연개소문 이후 도교를 중시한 결과이기도 하리라 짐작된다. 사실 요동 백탑은 요동성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로 전해지는 그 외곽에 ‘백탑’이라는 요나라 때 세워진 거대한 탑이 서 있는 격인데 바로 이 자리가 요동성 육왕탑이 세워져 있던 곳이 아닐까 그 스님들은 추정하고 있다. 실제 고구려 고분 중에 요동성을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벽화가 그려진 “요동성총”에도 요동성의 안과 밖에 고층 누각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이것이 탑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추정되며, 성 바깥의 누각 자리가 현재의 백탑이 서있는 육왕탑 자리일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가능성에 대해 수긍을 한다. 원래 고구려 탑인데 요나라 사람들이 신의를 다지기 위해 그 자리에 다시 세웠다는 가설, 이는 관제묘와 더불어 도교 형식의 광우사가 있으며 자연 발생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요동의 중심으로서 나중에는 야시장으로 변모했다는 그런 사람 사는 동네의 풍광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습성에 기인하여 나 역시 이에 찬동하는 것이다.
늘 보아도 한 결 같은 요동 백탑, 일행들은 그 장엄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나는 그 보다는 우람하면서도 평범한 자태가 너무 마음에 든다. 지금의 몽고를 말하는 거란족들, 산위에 돌을 쌓고 깃발을 돌려서는 신령을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풍속을 빼어 닮은 돌무더기가 층층이 하늘로 높이 솟아 누구든 우러러보지 않고는 어쩔 도리가 없는 그들만의 신앙적 우상이었으리라. 누구는 정교함이 없다 말할 것이지만 이는 돌무더기를 쌓아 조장을 지내는 그들 ㅊ풍속만큼이나 그들만의 독특함이 있으며 오히려 가공성이 적어 친연하고 보통으로 보여 천연 성으로서 그저 마음도 훈훈해진다 나는 대리석의 차디찬 어느 위엄이라기보다는 범상함에서 우러나오는 조용한 카리스마가 연상되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고결함은 그런 진때 위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밑자락을 보면 굳이 석공이라 할 숙련된 자가 필요 없어도 쌓아올릴 것도 같은데 그런데 자세히 보자면 이 말은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저 높이에 이르는 것이 어디 감당할 노릇이던가. 아무리 보아도 저 꼭대기를 오를 방도가 없다. 탑 안에 길이라도 만든 것이던가. 아무튼 그들의 염원대로 후세사람들은 연실 탑돌이를 하며 하늘을 향해 소원을 빌고 또 빌며 맑아지고 환해지고 싶은 것이다. 나도 간단하게나마 내 소원을 빌었다.
현재 중국에선 ‘요대고탑(遼代古塔) 보호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10년간 요녕성에 산재하고 있는 요나라의 고탑 약 40기를 보존 수복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것이다. 요나라(916~1125)는 잘 알려져 있듯이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고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耶괹阿保機)였다. 그는 건국 초기인 926년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승려를 포함한 발해인 50인을 당시 수도였던 요나라 상경으로 데려가 천웅사(天雄寺)를 짓게 하였다. 이 천웅사나 북경의 천령사는 너무 요동 백탑라고 너무 닮아 있다.
건국초기에는 불교가 요의 보편적 종교가 아니었고,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찰을 건립할 수 있는 기술도 없었으나, 이후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연운십육주는 지금의 북경과 운강석굴이 있는 대동(大同), 즉 하북성과 산서성의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이전부터 불교가 번성했던 곳이고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된 요의 불교 또한 황실의 보호 아래 발전해나간다. 현재 북경, 천진, 하북, 산서, 요녕, 내몽골 등 북방각지에는 요대의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중 요녕성 지역에는 유명한 조양북탑(朝陽겗塔)을 비롯해 수 기의 거대한 요대 불탑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요나라 불탑들은 조양 북탑이 70m가 넘고, 다른 탑들도 대체로 평균 높이가 40m 이상이 될 정도로 거대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탑이 세워지는 장소가 사면이 트인 도로의 한 복판이나 높은 산의 정상부, 산이 없는 지역에선 구릉의 정상부 등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점이다. 즉 사방 어느 곳에서도 보이는 곳에 탑이 자리 잡고 있어서 지금도 도시에서는 상징이 되어 있다. 게다가 요나라 탑은 대부분 사찰과는 상관없는 곳에 세워져 있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의 불탑들과는 조성배경이나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조양 북탑은 산꼭대기에 세워져 있는데 왜 요나라 사람들은 사찰은 커녕 인적도 드문 산꼭대기에 저렇게 거대한 탑을 건립한 것일까?
이는 불교의 전래와 상관이 있을 터이지만 우리 성황당이 그렇고 몽고 적 샤머니즘이 그렇듯
주로 육신과 모든 중생의 몸이 깨끗하게 정화되길 기원하고, 다시 올 수명의 깨끗함과 그 수명을 유지하는 행동의 청정함을 기도하는 의미가 강조되어 그ㄹ리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는다. 보기만 하여도, 옷깃이 스치기만 하여도 그 공덕을 받을 수 있는 경전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그런 의식 말이다. 어쩌면 이런 의식은 발해 승려를 모셔간 그들로 보아 발해 사람들의 영향이 커지 않았을까 싶고 이는 또 고구려와 연관도 된다 싶다. 불교를 제일 먼저 들여온 것은 다름 아닌 고구려였다. 역사에 가설이란 것이 없지만 나는 몽고와 티벳 불교를 꽤 중시 여긴다. 그들이 만약 둥쪽 선단에서 투철하게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드센 회교문화가 신장 위구르에서 끝이 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나는 보기 때문이다. 추운 지역에서 산 사람들은 굳센 의지만큼이나 깊은 신앙을 갖고 산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마도 나약한 나 같은 존재가 그쯤에 서 있다면 가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백탑은 신앙이기 전 어느 시대 삶의 투철한 의지같이도 느껴진다. 우리는 그 의지의 곳을 떠나 어둑한 길을 밟아 심양으로 다시 향했다. 그 투철한 의지가 그 시대 고구려에도 그득했는데 하면서 말이다. 어딘가에 그 이름 모를 그들의 무덤인 고려총이 있을 테다.
그 이후 원나라 때만 보아도 심양은 우리와는 밀접하였다. 고려가 몽고에 대항하여 30여년간 항쟁할 즈음 가장 피해가 컸던 북계의 고려군민들은 상당수가 몽고군에 포로로 잡혀 요동의 요, 심, 서간도 지역에 억류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대로 그 지역에 거주하였다. 또한1231년 홍복원의 반역에서 1270년 최탄의 모반까지 북계(서북면)의 대소토호들은 고려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그 때 몽고에 투항하면서 자기 관하 고려민호들을 강제적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이 요동지역의 고려민호의 주를 이루었다. 원에서는 1234년 홍복원에게 이렇게 흘러들어온 요양, 심양 거주 고려 항민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심양로는 바로 고려의 항민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북계가 1270년 동녕부가 설치되어 원의 요양행성 관할하에 있었던 것은 20년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1290년 동녕부가 폐지되어 다시 고려로 들어가자 반기를 든 대다수의 북계지역 토호들은 또 다시 그 관하 민호를 거느리고 요, 심 지역으로 옮겨 들어갔다. 그들은 당시 홍복원의 아들인 홍다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심양로로 들어가지 않고 동녕로를 개설하여 독자적으로 존속하면서 요양행성의 7로의 하나로 되었다. 이렇듯 점진적으로 요동에 흘러들어간 고려민호는 충렬왕대에 이미 3만 명을 상회하였다 한다.(3만 2천 ~ 3만 3천). 대다수의 고려인들이 본국인 고려로 돌아가지 않고 요동에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공민왕 때, 1차 요동정벌을 하면서 2,300여호를 귀환시켰으나 본국에 귀환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몽고에서는 심양로와 동녕로의 고려군민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심(양)왕 아래에 둔 것 같으나, 그를 이용하여 오히려 고려를 정치적으로 견제하였다. 몽고에서는 심양로와 동녕로의 고려군민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심(양)왕 아래에 둔 것 같으나, 그를 이용하여 오히려 고려를 정치적으로 견제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들을 정치적으로 하나로 묶음으로서 고려와의 경제적 교류는 더욱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인삼을 실은 상인들이 고려의 개경에서 요동을 거쳐 원의 수도인 大都(대도)까지 가서 무역을 하는 때 동행하는 중국인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요양성에 살고 있던 상인이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고려 상인이 요동을 거쳐 북경까지 무역을 하는 것도 대단히 일반적이고, 요동상인의 고려출입 등도 대단히 자유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들 또한 고려 출신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노릇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역사는 어쩌지 못한다. 심양이 요동이 조선 사람이 반이었다는 어느 시대의 말과 더불어 우리 땅이니 우리가 되찾아야 한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은 아닌 것이다. 이제야 중국은 요나라도 원나라도 중국이고 금나라도 후금도 발해도 변방으로서 중국이라 하지만 역사는 함부로 위조를 한다고 피를 속이면서 거슬러지지는 않는다. 문화를 깡그리 무시한 그들만의 문화혁명 같은 무식의 투철함이 아니고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