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6,1-10
형제 여러분,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이 직분이 흠잡히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6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9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10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구약의 복수동태법의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9)
이는 ‘악인에게 무관심 하라’, ‘악인을 피하라’, ‘악인에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곧 악에 대한 무저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단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요, 자기 기만이요, 비겁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맞서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든,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응수이든, 일일이 맞대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맞서지 말라’기보다 ‘맞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똑같은 방식으로 맞대응하지 말라’,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악과 맞대응 하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는 일, 곧 하느님의 방식으로 맞서 대응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을 진정으로 맞서는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사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불을 불로 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불은 불이 아니라 물로 꺼야 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 5,39) 것은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복수심을 몰아내는 길이 됩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진정 이기게 되는 길입니다.
사랑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진정한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는 악이나 악인에게 맞서기보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비폭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사랑을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40-42)
<오늘의 말·샘 기도>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마태 5,39)
주님!
맞서지 않게 하소서!
대적하거나 앙갚음하지 않게 하소서.
한쪽 뺨을 치면 다른 쪽 뺌을 돌려 대게 하소서.
당신께서 처벌할 권한이 아니라 사랑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인 까닭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두려움 너머 자유를, 자유를 넘어 사랑을>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지금까지 피했다면 이제 맞서라.
지금까지 맞섰다면 이제 넘어서라.
악과 악인이 두려워 피했다면 이제 맞서라.
악과 악인을 맞서게 되었다면 이제 넘어서라.
악과 악인을 넘어서게 되었다면 이제 사랑하라.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을 나름대로 풀이하면, 한 바퀴를 뛰었다면 이제 두 바퀴에 도전하고, 두 바퀴를 뛰었다면 이제 세 바퀴에 도전하라는 것이요, 두려움에 도전하였다면 이제 자유에 도전하고, 자유에 도전하였다면 이제 사랑에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을 넘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되면 어떤 경우에도 자유롭게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경지를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행복 선언처럼 역설적인 행복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어서 얘기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의견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박할 생각을 하며, 심지어는 골탕을 먹일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는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냉정’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네가 그런 식으로 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협박하기도 합니다.
'끼리끼리'도 있고 소위 '줄서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고 하십니다.
천 걸음을 걷기도 힘들거늘 이천 걸음을 걸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시니 그저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정말 이렇게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하라고 하시니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당하고 있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와 주님께서 가르치는 정의는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갖은 조롱과 모욕을 안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니 오늘도 여전히 그 방법이 유효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철저히 허약함을 선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으나 우리의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가르침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내야 합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고상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 되갚을 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사랑으로 흡수될 때 그 악은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는 악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을 때까지 더 큰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모 기업 회장이 폭행을 당한 아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되갚으려 했다가 더 큰 원한을 키웠고, 그로 말미암아 물적인 손해뿐 아니라 동안에 쌓아놓은 명예는 물론 물질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야 위로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으로는 결코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 아들이 또 마약에 손을 대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식사랑도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사랑은 상처만 낳게 됩니다.
세상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외치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자비와 연민으로 사랑 안에서 나온 정의를 말씀하십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맞서려거든 사랑으로 맞서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 사랑으로 대결하십시오.
사랑은 악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불의를 크게 앙갚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겁이 나서, 마음이 약해서 피한다면, 심지어는 상대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 되기 싫어서 맞서지 않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차원 높아져야 합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악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게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은 “악에 굴복 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넓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든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잘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전통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가르침 안에 ‘동태복수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눈에는 눈, 이는 이로’입니다.
‘칼에는 칼, 총에는 총’입니다.
아직도 선교지의 전통적인 부족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는 룰입니다.
우리 부족의 일원이 다른 부족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당했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범인을 색출하고 당한 그대로 보복을 가합니다.
그러다 보니 부족 간의 전쟁이 그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동태복수법을 배격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마태오 복음 5장 38~41절)
사실 우리 인간의 마음 저변에는 동태복수법의 논리가 아주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쪽에서 한 대 때렸을 때 나도 똑같이 응징해주고픈 마음이 드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저쪽에서 내 가슴을 후벼 파는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을 때 나도 똑같이 평생 잊지 못할 독설을 건네고 싶습니다.
저쪽에서 나를 고소했다면 나도 물러서지 않고 맞고소하고픈 심정이 우리들의 보편적인 정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은 정의와 관용과 자비가 같이 가야 한다고 외치십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있어 보이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보천치같은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결코 녹록한 삶이 아닙니다.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잘 살고 계시다는 표시입니다.
뭔지 모르지만 억울한 느낌이 든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사랑에 대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해의 폭도 점점 확장시켜나가야겠습니다.
고전적인 율법 정신에 따르면,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그저 물리치고 배척하고 이겨내야만 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세상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통용되고 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키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나를 박해하고 위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의 이 자기 중심적이고 편협된 사랑이 보다 더 큰 사랑, 보다 더 보편적인 사랑, 보다 더 이타적으로 신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킬 것을 당부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율법은 원래는 “처벌은 죄에 상응해야 한다.” 라는, 공적 사법기관의 ‘재판 지침’이었습니다(탈출 21,24).
죄보다 더 무거운 벌을 선고해도 안 되고, 죄보다 더 가벼운 벌을 선고해도 안 된다는 지침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원래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사적인 복수를 해도 된다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그것은 이 율법을 악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율법을 언급하신 것은 원래의 율법을 폐지하신 일이 아니라, 사적인 복수를 위해서 악용하는 것을 금지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적 사법제도를 부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약시대는 ‘당한 대로 앙갚음하던 시대’ 라고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 시대가 꼭 그런 시대였던 것은 아닙니다.
구약 율법에도 원수에게 잘해 주라는 율법이 분명히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
(탈출 23,4-5)
잠언에도 원수에게 잘해 주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어라.
그것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이다.
주님께서 너에게 그 일을 보상해 주시리라.”
(잠언 25,21-22)
바오로 사도는 잠언의 가르침을 인용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음과 설명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2,17-21)
앙갚음하지 말고 오히려 잘해 주라는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라는 말씀은 “악에 맞서지 마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악에 맞서야 하고, 악을 물리쳐서 없애야 합니다.
이 말씀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마라.” 라는 격언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들은 바오로 사도가 설명한 것처럼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는 방법’입니다.
악을 물리쳐서 없애야 하는데, 그 방법은 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복수는 악에 악으로 맞서는 일이고, 사람을 심판하시는 주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입니다.
심판은 주님께 맡겨 드리고 우리는 선을 실행해야 합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일은 예수님 말씀대로 된 ‘좋은 예’입니다.
사울은 스테파노 순교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박해자들의 두목’이었습니다(사도 7,58).
또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에도 박해를 주도하면서 교회를 모질게 박해했습니다(사도 8,3; 9,1-2).
만일에 그 당시에 사도들과 신자들이 스테파노의 죽음에 대해서 앙갚음하려고 사울을 암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더 큰 박해가 일어났을 텐데, 그것보다도 우리 교회는 위대한 사도 바오로를 얻지 못하게 되는, 진짜로 ‘큰 손해’를 입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하신 일입니다.
바로 그 점이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라면 주님께서 직접 나서신다는 것.
당사자인 바오로 사도 입장에서 생각하면, 박해자였던 자신을 사도들과 신자들이 받아 준 일은 바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일이었음을 금방 깨달았을 것이고, 그것은 선으로 악을 굴복시킨 일이었음을, 또는 선으로 악을 굴복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앙갚음하지 말고 잘해 주라는 예수님 말씀은 악인들의 악행을 묵인하거나 방관하거나 동조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능동적인 선과 사랑으로 악인을 회개시키고 변화시키라는 가르침입니다.
개인의 힘만으로 악에 맞서는 것이 어려울 때에는 공동체가 함께 나서야 합니다.
나쁜 독재자를 물리치기 위해서 싸울 때, 폭력을 사용하거나 테러를 일으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폭력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방법으로, 즉 평화로운 시위나 시국미사나 기도회 등의 방법으로 싸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로 아무 힘도 없는 약자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강력한 힘으로 싸우는 방법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정의를 실현하려면 자비를 실천하여라.”로, 또는 “자비를 실천하려면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하여라.”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자비가 없는 정의는 악이 되어버립니다.
반대로,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자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닮의 여정 - 주님의 일꾼, 주님의 전사, 자비의 전사>
계속되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입니다.
오늘은 6개 대당명제 중 5번째 대당명제로, 폭력을 “포기하여라(보복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짧지만 강력합니다.
예수님의 힘찬 말씀을 들어보세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빰마져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어 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이런 이야 말로 하느님의 일꾼의 자격이 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자비와 지혜의 하느님을 닮은, 예수님을 닮은 성인입니다.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입니다.
이런 이들 앞에서 악은 저절로 무장해제되어 무력해집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악에 대한 비굴하거나 비겁한 무저항이 아닙니다.
악인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거룩한 사랑을 지녔기에 두려움의 어둠이 걷힌 내면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악인에 대해 일일이 대응하지 않습니다.
결코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을 닮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보복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으며 악마가 쾌재를 부릅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미풍을 미풍으로 끝내는 참으로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참으로 자비에 저절로 따라오는 지혜와 용기입니다.
이런 거룩한 행위는 무저항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의 저항입니다.
이의 전형적 인물이 누구보다 예수님을 닮았다는 힌두의 성자 간디입니다.
이런 이들이 참으로 용기있는 사람들이요 자비와 지혜의 내공이 깊은 내적힘을 지닌 자들입니다.
참된 자기 존엄성과 품위를 지키는 자들이요 상대방의 존엄성과 품위를 지켜주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악에 대한 처방은 거룩한 사랑의 저항뿐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보복의 악순환을, 폭력의 악순환을 단(斷), 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결코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를 낸다면 사감이 걷힌 의노일 것이나 이는 일종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지극한 인내의 대가요 달인들입니다.
참으로 자비롭고 지혜롭기가 하느님을 닮은 이들입니다.
참으로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들이요 내적 부요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갈 때, 즉 하닮의 여정에 충실할 때 가능하겠습니다.
이런 거룩한 사랑을 지니려는 거룩한 청정욕은 너무 좋습니다.
욕심이 다 나쁜 것이 아니니 이런 거룩한 사랑의 성인이 되려는 청정욕은 정말 좋습니다.
역시 제가 늘 강조하는 영적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됩니다.
지칠줄 모르는 성인이 되려는 좋은 열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영적승리의 삶에, 평생 영적전투의 삶에, 지칠 줄 모르는 샘솟는 좋은 열정은 필수 전제 조건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좋은 열정에 있습니다.
역시 정신 건강, 영혼 건강, 마음 건강에도 필수 전제 조건이 이런 지칠 줄 모르는 샘솟는 순수한, 좋은 열정입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매력적인, 아름다운 영혼들입니다.
모든 수행이 이런 열정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성인의 되려는 선택이요 이에 따른 한결같은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이렇게 선택-훈련-습관의 시스템 안에서 하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이런 거룩한 사랑의 저항이 가능합니다.
악에 대한 궁극의 영적 승리가 가능합니다.
이의 결정적 표지와 답이 십자가의 예수님,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파스카 주님의 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구체적 수행으로 끊임없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요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로 늘 맑게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인내의 정주의 산으로, 안으로는 늘 하느님 바다 향해 맑게 깨어 흐르는 찬미의 강, 사랑의 강, 용서의 강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산과 강의 영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결코 값싼 은총은, 값싼 구원은 없습니다.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노력을 다해 비폭력의 삶을 사는 이들, 거룩한 사랑의 실천으로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려 악을 무력화하는 이들이야 말로 탁월한 의로움의 사람들이요,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사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의 전형적 모범이 참으로 자랑스런 영적 승리의 표상, 인간 승리의 표상이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라며, 또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이 날이라며,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강조합니다.
즉 주님의 전사, 자비의 전사, 지혜의 전사로 살아 온, 초지일관, 시종여일의 삶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요 부단한 자극이 되고 더욱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스 문장은 하나랍니다.
폭포수같이, 또 단숨에 읽히는 내용 전부를 인용합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늘 그렇게 한결같이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 온 바오로 사도입니다.
불가사의입니다.
도대체 이런 백절불굴의 성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철갑으로 완전무장한 바오로,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영적 삶의 대원칙으로 삼아 끊임없이 이렇게 살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의 본질적 깊이의 영적 삶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비워갈 때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1.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진실합니다.
2.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3.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4. 벌을 받은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5.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6.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7.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의 일곱의 역설적 진리의 삶을 통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사는 것"이란 사도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그대로 주님의 빛나는 현존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참으로 진리가, 하느님의 은총이 바오로를 자유롭게, 백절불굴의 주님의 전사로 살게 했음을 봅니다.
여기에 한 분 추가하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의무기념으로 미사봉헌하는 10-11세기 성 로무알도 아빠스입니다.
가말돌리회 창립자로 베네딕도 규칙을 근간으로 하여 공주생활과 은거생활의 두 공동체를 동시에 하나로 품은 수도생활을 시작한 분입니다.
이 수도성인도 지칠줄 모르는 좋은 열정으로 하닮의 여정에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 시종여일한 삶을,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닮의 여정중인 우리 모두를 날로 당신 자비의 전사, 지혜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오래 기억에 남는 곳은 ‘성모님의 집’이 있던 ‘에페소’입니다.
성모님의 집은 깊은 산 속에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순례자들을 포근하게 맞이하는 것처럼 성모님이 집은 따뜻하고 아늑했습니다.
성모님의 집이 오늘날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가 된 것은 고고학자들의 발굴과 한 수녀님의 환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고학자들은 에페소의 산 속에서 ‘성모 마리아의 집’ 터를 찾았습니다.
성모님은 요한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에페소로 왔을 거라는 추측을 했지만 확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수녀님이 ‘환시’를 통해서 성모님을 만났고, 성모님께서 집을 보여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우연히 고고학자들은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수녀님이 이야기한 집이 자신들이 발굴한 성모님의 집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려서 아팠고, 독일을 떠난 적이 없었던 수녀님은 에페소에 성모님의 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에페소에는 성모님의 집이 복원되었고, 사람들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성모님의 집을 순례하였습니다.
이슬람에게도 성모님은 존경받는 분이기에 성모님의 집을 복원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길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니는 것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생기는 것처럼 성모님의 집을 찾는 순례자들이 많아지면서 신학자들도 성모님의 집에 대해서 연구하였습니다.
2000년 전 에페소는 바오로 사도가 열정을 기울여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에페소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종교적으로도 자유로운 도시였다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요한 사도와 성모님을 따뜻하게 맞이했을 거라고 합니다.
몇 번의 지진이 있었고, 이슬람이 통치하면서 교회는 땅 속에 묻혔고, 성모님의 집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노력과 한 수녀님의 ‘환시’를 통해서 성모님의 집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모님의 집도 순례지로 인정하고 있으며 에페소에 있는 성모님의 집도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로 인정하였습니다.
교황님들도 성모님의 집을 방문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성모님의 집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성모상’이 있습니다.
손이 없는 성모상입니다.
성모님의 손을 복원하기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손을 내어준 성모님을 생각하면서 손이 없는 성모상을 봉헌했다고 합니다.
저도 성모님의 집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손이 아니라 심장까지도 내어 주실 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교구 인사이동으로 저의 소임지가 정해지면 언제나 먼저 그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에 힘입어 저는 큰 어려움 없이 4개의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저는 어머니께 3년 동안 같이 지내자고 부탁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죄송했지만 어머니는 기꺼이 저와 3년을 지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도와 따뜻한 사랑이 있어서 3년 동안 본당신부로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집에서 미사를 마친 후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성모님은 아마도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 사도도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성모님과 요한 사도는 멀리 에페소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합니다.”
저는 자매님의 묵상을 들으면서 공감이 갔습니다.
성모님은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우리 신앙의 모델입니다.
성모신심은 결코 독자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모신심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님께서 있습니다.
성모신심이 향하는 곳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모신심이 향하는 곳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모신심이 향하는 곳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성모님이 우리 신앙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었던 삶입니다.
성모님은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삶 속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났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보게 됩니다.
‘묻지 마’ 범행처럼 세상에 대한 혐오로 그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인종차별 때문인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아시안, 유다인, 흑인 혐오로 인해 총기 난사라는 잘못된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나는 정의롭다”라고 말합니다.
백인우월주의를 가지고서 다른 인종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극우파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빨갱이를 다 없애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세상은 나 혼자만 살 수 없으며, 전 세계가 인종에 상관없이 하나로 뭉쳐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끔찍한 범행을 저지릅니다.
왜 그럴까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런 행동을 어느 학자는 ‘이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타인의 잘못된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가짜 뉴스가 난무합니다.
이 역시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기억하면, 자기 입으로 쏟아내는 이야기는 진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진실보다는 거짓을 담을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거짓을 말하고 있음도 깨닫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상대를 폭력으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럴수록 죄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 진리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에 따라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만큼 진리에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랑’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사랑보다는 거짓된 이야기에 더 휩쓸리곤 했습니다.
앙갚음할 때, 받은 것 이상의 복수를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이 복수 행위가 민족 집단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면 그것은 전쟁이 됩니다.
그래서 복수의 복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적국을 완전히 말살했습니다.
이런 복수의 열기는 개인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지요.
이런 마구잡이 복수를 막고 공평한 정의의 사회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 바로 인류 최고의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입니다.
그중에서 탈리온법(동태복수법)은 아주 유명한데,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상처는 상처로, 타박상은 타박상으로 갚아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법을 도입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라고 하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선으로 갚으라고 하십니다.
악을 없애는 것은 그와 맞서는 악이 아니고, 사랑으로 참아 주는 선이 악을 없애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예로,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또 천 걸음을 가지고 강요하면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라고 하시지요.
바보스러운 행동이지만, 세상의 악을 없애는 길은 이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보스러운 사랑의 실천자가 세상의 악을 없애고 대신 사랑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참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무조건 따라야 할 이유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