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 왔다. 전국 각지에서 분홍빛 벚꽃이 화사하게 만개하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남쪽의 섬 제주도에도 봄이 왔다. 지난 2월 말에 찾아간 노리매공원엔 벌써 매화가 막바지 추위를 뚫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제주도의 봄은 다른 곳보다 빠르게 찾아온다. 아름다운 풍경을 이른 시기부터 만끽할 수 있는 제주이지만, 제주도의 봄은 마냥 즐겁고 예쁜 이야기만 담고 있지는 않다. 제주 도민들의 마음 속엔 봄날이 늦게 왔다. 아직도 마냥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아름다운 꽃을 찾아, 푸른 바다를 찾아, 맛있는 음식을 찾아, 멋있는 오름을 찾아 밟고 다니는 제주도의 땅 아래에는 우리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 나오고 있다. 제주도를 핏빛으로 물들게 했던 4.3 사건은 여전히 봄꽃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4.3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를 수밖에 없었고, 모른 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근·현대의 커다란 사건만큼이나 국가가 권력을 잔인하게 사용했고, 사람들은 그것에 맞서 싸우며 큰 희생을 겪어야 했는데도 말이다.
폴란드 남부 오시비엥침 지역에는 우리가 흔히 접해 알고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장소이다. 공간의 크기만 놓고 보면 제주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 이상이다. 4.3 사건이 일어난 기간 동안 제주도에서 그 영향을 피해간 지역은 없었다. 섬 곳곳에서 잔혹한 일들이 벌어졌고, 그 흔적들이 여러 곳에 걸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섬 전체가 거대한 학살 터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조금은 무거울 수 있지만 큰 아픔을 겪어야 했던 제주 도민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제주도에 대해 다른 마음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4.3 여행을 소개한다.
이 여행을 더욱 뜻깊게 하려면, 4.3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
사건의 시작은 1947년 삼일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은 직후였고, 제주도 역시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길 기대하며 사람들이 조직을 꾸리고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 중심엔 인민위원회가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도에서도 이에 발맞춰 결성하고 개편한 조직이다. 인민위원회는 치안과 자치교육 업무로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미군정이 실시되며 미군정은 도청, 경찰 등 요직에 일제강점기 당시 관리를 그대로 앉히고, 우익 인사들을 조직화하며 인민위원회에 대항하기 위해 세력을 키웠다. 미군정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으며, 강경하게 밀어붙인 정책은 도민들의 불만만 키웠다. 식량은 감소해 먹거리가 부족해지고, 가격은 폭등했다. 식량난으로 삶은 다시 어려워졌고, 도민들의 원성은 더욱 커졌다. 그런 와중에 열린 3.1 기념 대회에서 어린 아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다쳤는데도 무시하고 지나간 경찰의 행동에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경찰은 이에 군중을 향해 총을 쏴 주민 6명이 희생되는 비극이 벌어진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제주 도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제주도 오라리 방화사건
제주 구도심과 신도심 사이에 자리잡은 한적한 동네인 오라동은 4.3 역사 여행에서 사람들이 흔히 찾는 장소는 아니다. 그러나 4.3 당시 큰 사건이 벌어져 중요한 곳이다. 3.1 사건 이후 도민들은 민·관 총파업으로 항의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제주도를 ‘붉은 섬’, 빨갱이 섬으로 지목해 버린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러한 민심과 한반도가 분단될 위기를 앞두고 치뤄진 5·10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투쟁을 반대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켜 우익 단체 단원들의 집을 습격하며 대응했다. 선거를 앞두고 미군정과 무장대 간 평화 협상이 성사되었지만, 3일 뒤 누군가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질렀고 협상은 깨졌다. 미군은 경비대에게 총 공격을 명령했고, 경찰은 무장대가 자행한 것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이는 무장대가 아닌, 우익청년단원들의 저지른 방화였다. 총선거는 제주도의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가 과반에 달하지 않아 무효가 되었고, 미군정은 불순세력의 음모로 판단하고 강경 토벌작전을 실행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된 이후 정부는 ‘빨갱이 소탕’이라는 이념에 갇힌 명분 하에 평범하게 살아가던 많은 도민들의 삶을 앗아갔다.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을 때의 무장대는 350명. 이들을 잡겠다고 시작된 토벌은 7년간 이어졌고, 당시 제주 인구 10%에 달하는 2~3만명의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4541552_thumb.jpg)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했던 연미마을
구불구불한 도로 옆으로 낮은 돌담이 반겨주는 골목에 작은 연미마을회관이 있다.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한 장소이다. 이 일대로 4.3 유적지가 있기 때문에 도보 코스를 안내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돌담 사이로 사건 70주년을 맞아 기억하는 뜻에서 주민들이 세운 커다란 비석이 묵묵하게 이야기를 건넨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4655600_thumb.jpg)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4659101_thumb.jpg)
마을회관 안에는 현재 오라초등학교의 전신이었던 오라공립국민학교의 터가 있다.
토벌 작전으로 소실된 마을도 많다. 이를 두고 잃어버린 마을이라고 표현하는데, 오라동에는 어우눌 마을이 있었다. 연미마을회관에서 대로 방향으로 골목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라관광호텔’의 앞에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 번에 찾지 못해 큰 길까지 나가기도 하고 조금 헤맸다가 비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석 뒤에는 고목 한 그루가 마치 비석을 지켜 주듯이 듬직하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주변은 가끔 보이는 건물을 제외하면 허허벌판이었다. 지금은 텅 빈 이 곳에, 아마 과거엔 가족들이 그리고 이웃끼리 오손도손 살아갔을 작은 그 마을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그 모습을 그려보며 마을을 떠났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4901333_thumb.jpg)
토벌대가 진압하는 과정에서 폐허가 된 오라리를 재건하기 위해 주민들은 성을 쌓고 집단 생활을 했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4904443_thumb.jpg)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4915074_thumb.jpg)
4.3길임을 알리는 표식이 있다. 어우눌 마을로 가는 길은 한적하디 한적하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7](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4918780_thumb.jpg)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8](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4923585_thumb.jpg)
비석을 바로 옆에 두고도 촬영에 신경을 집중한 나머지 지나쳐버렸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9](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4959367_thumb.jpg)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1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5005250_thumb.jpg)
비석과 주변 모습을 통해 작은 마을이 있었을 거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민오름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민오름이 있다. 이름난 오름은 아니지만 정상에 올라서면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는 제주 도심을 조망할 수 있고, 그 뒤쪽으로는 중산간의 한적한 경치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20분 정도면 올라갈 수 있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1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5704800_thumb.jpg)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12](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5708805_thumb.jpg)
민오름의 숲길
정상 부근에 계단이 있어 고비였는데, 숙소를 체크아웃하기 전에 아침에 빈 속으로 급하게 계단을 올라갔다가 귀가 먹먹해지고 어지러움이 밀려오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아무래도 쓰러질 것 같아 지나는 사람을 붙잡고 당장 도움을 청하고 싶을 정도였으나, 다행이 서서히 회복되어 정상 풍경을 바라보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1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5759318_thumb.jpg)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은 다소 힘들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15](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5802154_thumb.jpg)
전망대에 오르면 제주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16](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5805135_thumb.jpg)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17](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5810908_thumb.jpg)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18](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5814701_thumb.jpg)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19](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5812971_thumb.jpg)
제주드림타워도 가까이에 보인다.
민오름은 미군정의 토벌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록된 무성 영화인 ‘제주도 메이데이’에 등장한다. 방화사건이 발생하기 전날에는 대청단원의 부인 2명이 납치당해 끌려와 한 명이 학살을 당한 일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오름이나 숲 곳곳에는 주민들이 피신 생활을 했던 동굴 터들이 있는데, 민오름도 그중 한 곳이고 주민들이 희생당한 역사가 남아 있다. 제주 도심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고즈넉한 풍경 뒤에 서린 아픔이 있는 민오름이다.
![제주 시내 한적한 동네에 서린 4.3의 아픔20](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s%3A%2F%2Fstorage.doopedia.co.kr%2Fupload%2F_upload%2Fimage5%2Ftravel%2Feditor%2F2022%2F04%2F03%2F20220403105941941_thumb.jpg)
해안선에서 5km 안쪽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고,
중산간의 많은 마을들은 불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