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우주와 무한 영원한 섭리의 나
https://www.youtube.com/watch?v=QetdzYVhajM 이학권
https://cafe.daum.net/rnjstlgur/9oZC/542 권시혁
오늘은 완벽한 우주와 무한 영원한 섭리의 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물리학에서 거시 물리학 우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대표로 하죠. 이 거시물리학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E=MC 스퀘어 이 공식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해도 정확한 결과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미시 물리학에 들어가게 되면 양자물리학에 들어가게 되면 계속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피얼스 투 비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렇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원리도 똑같습니다.
01:00
우리는 이 땅에 먼지 같은 작은 육체로 태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육체 티끌에 사로잡히면 무한과 영원을 전혀 못 느낍니다. 그래서 그냥 혈육으로 사는 사람은 이 영원 세계 본질 세계 하나님의 나라를 이 전혀 다른 차원이죠. 전혀 다른 차원인데 느낄 수가 없어요.
전3:11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다 우리 번역은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 그랬는데 그 영혼은 영원을 주셨다예요. 우리의 티끌 속에 영원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원을 느끼는 사람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이게 하늘과 땅의 차이 영혼과 영원의 차이가 되는 것이죠. 먼저 우리는 이제 땅에 태어났죠. 그게 땅을 살아야 됩니다. 01:58
이 땅의 것은 양자물리학과 마찬가지예요. 유한하고 계속해서 변화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확보하고 지키기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삶에 있으면 하늘, 하늘은 무한하고 불변이죠. 느껴지지 않아요. 그래서 본질 실제 이런 것은 개념일 뿐이지 실제로 느껴지는 건 돈뿐이에요.
왜냐하면, 현상의 모든 것은 돈으로 관리되니까. 돈밖에 못 느끼죠. 결과는 나의 삶 나와 나의 삶에 전락이 되어 나 자신과 나의 삶을 그래서 티끌에 불과한 다시 말해서 물질과 상황에 종속되어 버린 그런 나. 그런 삶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본질은 전혀 안 느껴지죠. 그 본질이 뭐예요? 02:57
사랑 꿈 행복 이런 것이에요. 그래서 이게 사랑 꿈 행복 이런 것을 항상 실제가 아니고 언덕 넘어 파랑새예요. 그러니까 신성과 영원이 느껴지지 않고 이 허무하게 계속 쓰러지고 있는 상황이 전부인 것 같죠.
그래서 타고르의 시에 그런 것 있죠. 자기가 아름다움을 찾아서 세상을 주유했는데 찾지 못하였고 결국 돌아와서 자기 집 문 앞에 그 풀잎에 맺혀있는 이슬 그 이슬 속의 아름다움을 만났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본질을 보는 사람은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만나죠. 그러나 현상을 보는 사람은 아무리아무리 찾아도 이 본질도 아름다움도 영원도 보이지 않는 것이죠. 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이 실제예요. 예 이건 물리적으로 확실하잖아요. 03:53
질량 에너지 불변의 법칙. 그 말이 뭐예요? 한번 생긴 에너지는 본질은 에너지고 이것이 나타날 때는 질량으로 우리에게 체험되어 지는데 이것이 한번 생긴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요. 이 에너지 형태가 변할 뿐이죠. 그래서 영원을 누리지 못하면 우리는 하루살이예요.
우리가 백 년을 산다고 해도 지금 우리 지구의 생태계만 육천 이백만 년 되었어요. 6,200만 년 중의 100년은 뭐 이게 반짝하는 순간도 안되는 거죠. 그래서 단절된 현상만을 살면 내 삶이 단말마 적이 되죠. 단 말마적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안해하고 욕심을 부리고 그렇게 되죠. 04:40
내가 | 중심기재 | 불안과 두려움 | ||
현상의 | 자유할 | 수 없다 | 나를 | 못 누림 |
존재이면 | 완전할 | 아버지를 |
그런데 내가 만약 현상적인 존재라면 이 현상적인 존재이면 중심 기재는 불안과 두려움뿐이죠. 그렇죠.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쓰러지니까 불안과 두려움뿐이죠. 그러면 결코 자유할 수 없어요. 자유할 수 없다는 말은 나를 누릴 수가 없어요. 결코 완전할 수가 없어요.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말은 아버지를 누리지 못해요.
그래서 이 단절된 단반말마적 현상만 남는 것이죠. 영생은 물리적인 지속이 아니에요. 예 이 물질적으로 뭐 영원히 있는 게 아니고 인격적 지속을 말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존재예요. 예 어떻게 하나님 나라로 가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게 되든지 어느 쪽이든지 우리는 영원한 존재예요. 05:39
창세기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2:18절에서 처음으로 좋지 않다가 나와요. 그때까지 좋았더라가 12번 나옵니다. 토브가 12번 나와요. 그런데 열세 번째 나올 때 좋지 않다가 나와요. 그게 뭐예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걸 무슨 뭐 독신이라든지. 이런 걸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에요. 사람은 단절될 수 없는 존재라는 거죠. 하나님 안에서 이게 하나가 돼야만 하는 존재예요. 그 단절로써는 영혼도 못 누리고 본질도 누릴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이 지옥은 하나님이 벌 주시는 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잠깐 잘못했다고 영원히 벌을 주냐? 이거 불공평하다. 그런 사람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거죠. 지옥은 결코 하나님이 벌 주거나 저주하는 데가 아니고요. 06:38
인간의 인격적 선택이에요. 예 이 현상계에 있는 동안 모든 인간은 선택해요. 뭐를요 생명을 선택하든지 생존을 선택하든지 생명은 하나 돼서 누리는 것이고. 생존은 단절되었기 때문에 내가 피하고 유리하고 지켜야 되는 삶이에요.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돼 있어요.
예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옥에 대해서 말씀하신 이유는 뭐예요? 절대 속지 말아라. 절대로 속지 말아라. 이 영원에서까지 가짜 본성인 것 같은 저주는 없다. 영원에서까지 한 알 그대로로 단절되는 그런 저주는 없다. 그러므로, 절대로 속지 말고 산상수훈은 뭐예요? 07:30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이 형상 인간 본성을 겨자씨만큼만 살아봐. 살아보면 너희 안에 아버지의 본성 그 완전함이 있다는 걸 금방 알게 돼. 겨자씨만큼이라도 살아보면 그것이 진짜 기쁨이고 그것이 진짜 가치고 그것이 보람이라는 걸 알게 돼.
그러면 이 현상 세계 거짓에 마귀의 거짓에 결코 속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옥에 대한 메시지예요. 그래서 영원을 누린다는 것은 모든 현상 속에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현상이니까. 모든 신성과 능력이 다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현상 속에서 본질을 느끼는 거예요. 08:16
예 이 뺨에 스치는 바람 쌉쌀하고도 구수한 호박잎 맛, 저는 호박잎을 참 좋아하는데 호박잎만 아기의 뺨에 내 뺨을 갖다댈 때 그때 뭐를 느껴요. 뭔가 현상적인 느낌 이상의 느낌이 있는 어떤 것을 느끼잖아요. 마치 타고르가 집에 돌아와서 문 앞 풀잎의 이슬에서 드디어 나는 아름다움을 만났다는 것처럼 모든 현상 속에서 본질을 느끼는 것이죠.
그래서 복음은 기쁜 소식은 영원히 있다는 거죠. 영원하다 모든 것이 이 영원을 만나면 죽음에서 자유해지죠 그죠 영원엔 죽음이 없잖아요.
그런데 죽음이 끝이 되면 이 현상 세계는 전부 죽음이 끝이에요. 뭐 이 영원 이런 건 다 개념이고 죽음이 끝이 실제적으로 그러니까 죽음까지가 전부예요. 죽음까지가 전부예요. 09:13
그러면 단절된 현상에서 할 수 있는 게 뭐 있어 욕심부리는 것밖에 없어요. 욕심 부린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이 현상 세계에서 허락하는 것은 시공의 현상 속에서도 우리 안에 있는 이 본성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스림의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세우기 위한 섭리죠.
그래서 결국은 결론이 어떻게 돼요. 고전15:55 사망한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한 너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죠.
영원에는 결핍이 없죠. 영원이 어떻게 결핍이 있어요. 영원에는 소멸이 없지요. 영원에는 변질이 없지요. 그러니까 마귀의 최고 성공이 뭐예요? 영원을 개념화시킨 거예요. 영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10:11
그런데 영원이 개념화가 딱 되어 버리면 이 현상이 전부가 되어버리는 거죠. 현상에 사로잡혀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두 번째 하나님이 만드신 이 영원하고 무한하고 온전한 세계 속에 우리도 창조하셨어요.
그것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신성한 존재로. 그러니까 이 완벽한 우주에 우리가 한 부분이죠. 그럼 우리가 완벽하죠. 완벽한 우주에 우리가 완벽하지 않으면 우주가 완벽하지 않은 거죠.
하나님은 완벽한 창조를 하셨고 우리는 그 완벽한 창조와 우주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밀과 섭리를 그냥 누리면 돼요. 우리 삶 전체 가득해요. 그런데 우리가 안 누리죠. 왜요 에고 때문에 에고를 탁 내려놓는 순간에 금방 보죠. 11:07
모든 것은 완벽하고 모든 것은 아름다워요. 제가 그 아이리쉬 멀드하게 유니콘 얘기를 했잖아요.
그 주인공이 늪에 빠져서 죽게 되는데 막 살아야 된다는 것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치르다가 결국은 자기는 그래봐야 죽는다는 것을 알고 그냥 그것을 에고를 살아야 된다는 에고를 탁 내려놓는 순간에 그 숲 주변에 황금빛 노을의 숲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게 빠져 들어가 버려요 자기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생각의 대상이 아니에요. 생각이 쓰러져버리는 거 있죠. 그래서 하늘을 살기는 이 신성과 본질을 누리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뿌리에 우리가 접붙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 신성과 본질이 피어나는 것이고. 11:59
그저 뿌리에 접 붙어 있으면 다른 가지도 전부 뿌리에 접 붙어 있기 때문에 통하고 누리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뿌리에 접붙는 순간부터 내가 얼마나 만들었느냐 이 현상 세계에서 내가 얼마나 현상적으로 만들었느냐. 현상적으로 이렇게 생겼냐 저렇게 생겼냐? 뭐 이런 자리 있냐, 저런 자리에 있냐. 그런 그 이 상대 가치는 그냥 저절로 소멸되어 버리죠.
그리고 존재 가치 뿌리에 접붙었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가 숭고한 것이죠. 예 갓난애기는 갓난 애기가 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뭐 갓난 애기가 도움이 되는 게 있어요. 그런데도 무한히 사랑스럽고 귀하지 않나요. 12:50
그게 존재 가치죠. 그래서 이 2~3가정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성령으로 교통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으니까? 임재가 거기에 있죠. 임재 안의 하나 됨으로 하나님의 복과 약속을 누리는 이것이 바로 하늘을 누리고 영원을 누리는 자리죠.
우리가 1820 데일리 브레드하는 것은 현상 속에 조금씩 상부상조하자. 이런 게 아니에요. 교회 또 다른 프로그램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 현상의 종 노릇하던 우리가 본질의 자녀로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하늘을 누리는 것이에요. 이것은 임재 안에서만 가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만 가능해요. 13:40
그러므로, 계속해서 에고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어요. 예 자기 자신이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결코 두려움의 포로가 아니라 다스림의 존재예요.
예 우리는 다 십자가의 생명을 갖고 다스림의 완성이 십자가였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는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을 그 발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다스리게 하셨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다스림 그러면 십자가를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이 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생명이 피어날 때 우리는 우리가 현상만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돼요. 14:36
우리가 IMF로 아주 어려웠을 때 2천년 8월 31일 이 프라피툰이라고 하는 태풍이 남해안에 들어왔습니다. 초속 58.3M의 파고가 50피트예요. 그러니까 파고가 삼십 초를 올라갔다 삼십 초가 떨어지는 거예요. 어마어마한 시간이에요. 사실은
그런데 그 가거도의 고흥산이라는 어부가 있었습니다. 당시 육십삼 세였습니다. 이분의 전 재산이 이 어선 하나예요. 삼 톤짜리 예 삼 톤짜리는 이런 파도에는 나뭇잎이에요. 그런데 항구에 정박시켜 놓으면 이건 깨어져 버려요. 파도에 들려 올라갔다 떨어지면서 박살이 나버립니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일이 이 파도 한가운데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파도를 조금만 비껴 맞아도 배는 좌초됩니다. 15:31
파도가 오는데 90도로 90도로 파도를 타고 올라갔다가 90도로 내려오는 거예요. 이거를 6시간을 해서 이 배를 살려서 돌아왔어요. 그때 이 기사가 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을 다스리고 넘어설 수 있는 인간 정신 때문에 인간 정신 때문에 이게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에요.
예 그 공산 어부가 이 파도를 탈 때는 오직 이 순간뿐이에요. 예 아까 거 탔다 뭐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앞으로 저게 몇천 개가 오는데 또 어떻게 이런 시간 없어 지금은 파도를 타고 올라갔다가 지금은 파도를 내려가는 거예요. 예 이렇게 사는 거예요. 어제와 내일은 완전히 허상이에요. 16:25
그런데 이걸 인제 돈으로 우리가 개념화시켰죠. 돈으로 개념화시켰죠. 그래서 뭐, 아! 이 돈이 있으니까 막 내일도 편할 거다. 난 돈이 없어서 내일이 불안하다. 다 이런 것 아니겠어요. 웃기는 짓이죠.
예수님은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현상 두려워하지 말고 본질을 두려워해야지. 그걸 안타까워해야지 그런 뜻이죠. 두려움을 일상의 당연한 평범으로 다스리셔야 됩니다. 아무리 큰 어려움이 와도 요 큰 어려움일수록 인생의 축이 되는 깨달음을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17:09
그러므로, 어떤 것이든지 오면은 저항하지 말고 이런 상황은 있어야 있으면 안 돼 그리고 저항하지 말고, 예 그대로 일상 그렇지 이런 파도도 오는 거지. 잔잔한 날도 있는 거지. 이렇게 해서 두려움을 일상의 당연한 평범함으로 만드는 것이 다스림의 비밀이에요.
그래서 저항을 잠재우는 강력한 힘은 감사예요. 예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큰 믿음이요. 오는 것들을 그대로 받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어냅니다.
예 그래서 점점 더 담대해지게 되죠. 그런데 이게 뭐 이런 건 있어서 안 돼. 생겨선 안 돼 그리고 싸우는 사람은 점점 더 불안하게 되어서 나이가 들수록 삶이 쫄아들고 쫄아들고 해서 결국 한 알 그대로가 돼요. 18:06
예 Ergon의 몸을 만들라. 에르곤의 몸을 만드는 것은 이 에르곤의 몸이라는 것은 수영을 배우면 수영 몸이 생기고,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 몸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래서 이 에르곤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고 내 몸속에 성향성을 만드는 거죠.
어떤 성향성을 만들어요. 만유를 그대로 누리는 성향성 이게 나중에 부활 영체예요. 우리가 부활 영체가 되면 뭐 젊은이로 얘기를 할 때는 막 젊은이의 씩씩한 모습이 나타나고 아주 지혜로운 나이 든 노인으로 얘기를 할 때는 노인의 자애한 모습이 나타나고 이렇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영체는 몸과 마음이 일체 된 거예요. 예 이 마음대로 몸이 나타나는 거죠. 18:59
우리가 이 육체에서 그럴 수 있으면 참 대단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에르간의 몸은 우리가 노력해서 만드는 게 아니에요. 누림으로 만들어요. 누림 not 노력, but 누림.
그 말은 뭐냐 그러면 마음을 살라. 예 마음을 좀 그만 억눌러요. 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좋다. 이거 마음으로 다 알아요. 우리가 참 서로 돕는 것이 좋다. 서로 나누는 것이 좋다. 마음으로 이거 다 알아요.
그런데 그렇게 안 사는 이유가 뭐예요? 왜 생각은 나누면 손해니까. 예 그러니까 이 생각으로 마음을 억눌러 놓고 살도록 마귀가 우리를 속인 것이죠. 우리 현상을 사는 길은 두 개 두 개지요. 생각으로도 살 수 있고 마음으로도 살 수 있는데, 생각은 머리에서 나오죠. 예 머리는 이 뇌에서 전기 신호와 화학 신호를 가지고 감정을 만들어내요 감정은 이 가짜예요. 가짜 19:55
현상 | 생각 | 머리 | 감정 | 상황 | 염려-영원망상 |
마음 | 가슴 | 느낌 | 존재 | 누림-영원 현재 |
예 이 감정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상황이 모든 것이 되죠. 그러니까 항상 염려해요. 상황이 좋지 않게 되면 어떡하나 염려하죠. 그래 이 사람은 영원이 아니고 영원 망상을 가지고 있어요. 예 영원 망상, 참 역설적이지만 영원을 사는 사람은 현재를 살아요. 그런데 영원 망상을 가진 사람은 막 어제를 보상받으려고 해요. 어제 못한 거를 오늘 보상 받으려고 그러고 내일을 보장 받으려고 해요.
이 사람은 현재를 전혀 못살죠. 그러니까 영원을 살아보지 못해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가슴을 사는 사람이에요. 가슴으로 사는 사람은 느낌이 있어요. 느낌을 가져요. 감정이 아니고 느낌이 있어요. 느낌은 존재를 누려요. 존재는 다른 걸로 누릴 수가 없어요. 20:49
예 꽃을 보는데 꽃을 보고 어떻게 감정 만듭니까? 아이 기분 나쁘게 예쁘네. 나보다 뭐 이럽니까? 그럼 웃기는 거죠. 그냥 꽃을 보면 그 아름다움에 내 생각이 쓰러지는 것이죠. 존재를 누려요. 존재를 누리기 때문에 영원한 현재였어요.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누리는데 어제 본 꽃과 비교해야지 뭐 이래요. 그럼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영원히 현재를 누리죠. 마치 엄마 품의 아기 같은 것이죠. 엄마 품에 아기가 어제는 젖이 많이 나왔는데 이러나요? 아니죠.
예 그래서 마18:3에 돌이켜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게 뭐예요? 마음으로 살라는 거예요. 그 생각으로 살던 삶에서 마음으로 사는 삶으로 좀 돌이켜라.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 이 생각으로 알아야 뭔 소용이 있어요. 여기서 능력이 나와요? 21:48
여기서 복이 나와요. 여기서 약속이 이루어져요. 그냥 지식이에요. 그러나 이것을 마음으로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건 우주 전체예요. 우주 전체.
세 번째로, 물질화된 육체의 ‘저항’ 너머 흐름 타기 이 육체는 이 상황이 나에게 좋게 돼야 된다. 이렇게 자꾸 그 상황에 저항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를 다스려서 생명 흐름을 타야 돼요. 무슨 일이 있든지 기꺼이 맞이하는 거예요. 품기예요. 품기 22:33
고전10:13 사람 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면 우리가 끝장나는 거죠. 그럼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냈겠어요. 예 모든 것은 하나님 섭리 안에 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마음의 믿음을 가지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품으면 그 품음 받은 것은 전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삶의 모든 것은 선한 섭리 안의 선물이에요. 예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일어날 수 없죠. 그죠 예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이게 정말 좋지 않은 거라고 생각이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선과 복이 있기 때문에 허락하신 거예요. 23:33
그래서 조건화된 내 생각과 감정, 이 머리의 장난에서 들리셔야 돼요. 해골에 갇혀 있으면 곤란해요. 내 삶이 해골에 갇혀 있으면 정말 곤란한 거예요. 인간은 육체 속에 있지만 육체를 초월하는 신비한 존재 아니요.
들림을 받아서 보면 상황은 그냥 계속 지나가고 있어요. 지나가면 되는 것이여. 그러기 때문에 내 곁에 누군가 있는 것 어떤 사건이든지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전부 복이에요. 전부 복이에요.
내 곁에 나한테 유익한 사람만 있어야 된다. 그 복이 아니에요. 예 항상 어둠은 없애야 된다. 그러면 잠 못 자서 죽으니까. 밤도 복이고 낮도 복이고 그런 거예요.
인간 게임은 뭐예요? 이 사회를 유지해야 되잖아요. 이 사회를 유지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사회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예 사람의 기를 죽여놔야 돼요. 다 자유하면 누가 이 세상에 거짓 통제를 받겠어요. 사람을 종노릇 시켜야 되고 종노릇 시키려면 기를 확 죽여놔야 돼요.
그래서 지금 우리의 상태는 모든 게 저주 된 상태예요. 모든 게 아니 제일 첫째로, 우리 외모부터가 저주 된 상태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잘생겨도 외모에 대해선 열등의식을 느껴요. 왜냐 그러면 실제가 없는 완벽한 이상을 만들어 놨거든요.
뭐 매거진을 통해서 미디어를 통해서 그래서 제 중고등부 사역할 때 보면은 아 고 나이 때 여학생들이 다 예쁘잖아요. 넌 참 이쁘고 아름답다 그러면 얘들이 아주 그냥 두드러기나 해요. 25:30
그걸 견디지를 못해 왜냐하면, 항상 나는 못났다. 나는 부족하다 이 잘난 것은 나보다 훨씬 뭐가 어때야 된다.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허 그게 참 참 안타까운 일이었어요. 저한테는 어떻게 외모까지도 사회 규정에 종노릇을 지키면서 살고 있어요.
외모라는 건 뭐 인종별로 일단 색깔이 다르죠. 민족 별로 이 특징이 다르죠. 우리 동양인은 좀 납작하잖아요. 또 서양인은 조금 튀어나오고 뭐 등등 그게 특성이지 어떻게 외모까지 사회 규정의 종노릇 시켜서 이런 사는 이런 세상을 따른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됩니다. 말이 안 돼요.
외로움도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움이 아니에요. 예 함께가 없는 것이에요. 혼자 있는 것도 얼마든지 즐거워요. 왜냐 그러면 혼자 있다는 건 실체가 아니에요. 혼자는 있을 수가 없어요.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바람이 있고 수풀이 있고 뭐 다 있어서 내가 혼자 있는 거죠. 그러니까 혼자 있다는 건 사실은 불가능한 거예요.
요즘 세상은 이게 정말 사람이 같이 있기가 힘드니까 점점 이렇게 그 혼자 있는 세상이 되어 가지만, 그렇다고 혼자 있는 사람은 없어요. 혼자 있는 것 때문에 정말 문제들이 많이 생기는데 이게 정말 거짓에 속은 것이죠.
그다음에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제 영혼과 실재를 누리면 역설 너머의 실제로 살 수 있어요. 우리는 인간은 2가지 역사를 갖고 있죠. 우리 시작할 때 본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걸 아는 건 지혜예요. 나는 전부이다. 그걸 아는 건 사랑이에요. 27:27
그런데 이 2가지의 역설 때문에 존재 긴장감이 생겨요. 그 존재의 긴장감 때문에 아름답고 매력 있고 신비스러운 거죠. 예 뭐 로보트로 완벽한 외모를 만들어서 항상 똑같은 표정만 짓게 짓고 있다. 그 아름다울까요? 아름답지 않지. 징그럽지.
예 그래서 양수 발전 같은 거죠. 양수 발전은 뭐예요? 물을 끌어 올렸다가 떨어뜨릴 때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거죠. 마치 그런 것이에요. 우리는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존재 속에 하나님께서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영원과 신성을 누리기 시작할 때 에너지가 막 솟아나는 거죠. 그러므로, 삶을 좀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살아요. 28:22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는 자기가 놀고 있는 것밖에 몰라요. 뭐 내가 어떻게 생겼냐 어떤 집 자식이냐 이런 거 상관이 없잖아요. 이 역사를 사는 것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해요.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약점과 죄까지도 당당한 것으로 만들어요.
아 우리가 죄악 중에 출생했고 죄 중에 잉태되었는데 뭐 우리가 무슨 죄를 안 짓는 존재처럼 아주 뭐 죄는 없는 것처럼 이러고 다니는 건 조금 역겨워요. 저는 항상 그렇게 고백해요. 주님 내가 이렇게 부족한데도 난 주님 보면서 살아갑니다.
나는 언젠가 주님처럼 되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리에 내가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면 기뻐요. 예 그런 나를 주님도 보시면 기쁘죠. 예 그런 생각이 들어요. 29:21
그 로렌스 형제 얘기 아시죠. 로렌스 형제가 이렇게 항상 주님의 임재를 구했어요. 그런데 한 번은 인제 죄를 지었어요. 그러니까 죄짓고 나서 주님한테 그런 거야. 그거 봐요. 날 혼자 두지 말라니까. 왜 주님 같이 안 계셔서 내가 그렇게 넘어지게 해요. 그렇게 하는 이런 것이죠.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런 것이지. 무슨 종교적인 완전함이나 뭐 이런 게 있는 것처럼 사도바울 예수님 만나기 전처럼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말이에요. 행복한 사람은 쓸모없는 일을 많이 해요. 그게 쓸모없는 일을 할 때가 자신을 즐길 때죠. 그렇죠. 왜 이 현상의 혈육에 대한 사람은 항상 뭐 가치가 있어요. 항상 이게 낭비하면 안 돼. 항상 그냥 뭔가를 어떻게 해야 돼. 30:12
예 장자는 그랬어요. 곧은 나무가 먼저 잘리고 맑은 샘이 먼저 바닥난다. 다들 떠 가니까 예 나무가 곱기만 하다고 좋은 건 아니에요. 곧은 나무가 좋은 면도 있지만 또 굽은 나무가 좋은 면도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편안함을 바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문해요.
이게 이것도 역설적이지 그렇죠. 나는 문제 없어야 돼. 나는 항상 상황이 좋아야 돼. 이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가 상황 안 좋을까 봐.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고문하는 거죠. 그리고 편안함을 바라볼수록 무기력해지죠. 예 편안해야 된다. 라는 생각 자체가 뭐예요? 상황이 점점 커지는 거예요. 그러니 상황이 크고 자기는 작으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31:14
제가 좋아하는 니이체의 말. builf your house under the vesuvius sail your boat to the uncharted sea 베스비스 화산 밑에 너의 집을 지어라. 너희 배를 지도에 나타나지 않은 지점으로 배를 띄워라. 이런 거지요.
이 고난을 선택할 때 기가 살아나요? 기가 살아나. 예 그 어려움이 행복이잖아요. 어려움 아니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 동네 축구만 한다고 좋아요.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으면 그게 기쁨이잖아요. 그러나 그때까지 훈련 얼마나 어려워요.
저는 사실 이루지 못한 꿈이 뭐 많이 있습니다만 그중의 하나가 저는 마나슬로와 안나푸르나와 로체를 꼭 올라가 보고 싶었어요. 옛날에 인제 산에 다닐 때 얘기죠 예 마나슬로는 아버지 같아요. 그 위용이 안나푸르라는 엄마 같아요. 그렇게 높고 험한 삶인데 쫙 품어주는 느낌이 있어요. 31:56
로체는 굉장히 신비스러워요. 그래서 이제 그 새 봉우리는 꼭 가보고 싶었는데, 예 오늘날 요렇게 하여튼 아니 산 좋아하는데 오르기 쉬운 남산만 맨날 올라다니면 기쁘겠어요. 아니죠.
예 세상에서 우시면 안 돼요. 고운 하늘 십자가를 선택할 때 기가 살아나요? 운명은 가혹할수록 생명이 더 빛나는 보석이 되고요.
인간은 파괴시켜도 절대로 폐해지지 않아요. 하나님의 형상이니 누가 파해요. 그래서 니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사랑하라. 상처받은 것을 두려워하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고난 속에서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라. 32:41
헤밍웨이는 그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 후에 그 물고기에게 그러죠. 나의 형제여 나는 이제껏 너보다 더 아름답고 침착하고 고귀한 물고기를 본 적이 없다. 나는 너의 정직하고 기상 어린 투쟁에 고개를 숙인다. 이렇게 했어요.
1820 데일리 브래드는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함께할 때 그때 주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죠. 이 임재 안에서만 우리가 피워보지 못한 우리의 본성을 살 수 있어요. 영원과 그 신비를 살 수 있어요.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을 누리기 시작하는 거죠.
열리기만 하면 돼요. 겨자씨만큼이라도 그러면 알아요. 이 세상 더이상 살 수밖에 없지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 기도합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석준기
진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네~^^ 목사님!!! 감사감사합니다.
늘 주님 안에서 샬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샬롬 ~^^
문정수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