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령포 장릉 탐방 후기 <2>
<2024년 3월 23일>
1편에 이어 2편입니다.
낙화암 ~ 노루조각공원 ~ 점심 ~ 장릉
◀ 낙화암 ▶
1457년 10월 24일 酉時(오후 5시 ~ 7시)에 노산군(단종)이 영월부 객사인 관풍헌 앞마당에서 승하하시게 되자,
단종을 모셨던 시녀와 종인들은 ‘이승에서 모셨던 임금님이 저승에 가셨으니 빨리 따라가서 제대로 모시자’ 하며
절벽아래 금장강(현재의 동강)으로 투신하여 순절한 장소이다.
순절한 여섯 시녀를 기리기 위한 사당인 [민충사]가 있으며, [낙화암 비석과 순절비] 등 단종과 관련 되는 유적이 있다.
단종과 직접 연관은 없지만, [금강정](세종 10년 창건)과 영월의 기생 [고경춘 순절비](영조 당시 實話) 등도 있다.
주차장에서 낙화암 가는 길 초입에 [해병대 영월지구 전투전적비]가 있다.
금강공원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강변 절벽 위에서 세종 때 처음 건립했다는 [금강정]을 만난다
안내판에는 [금강정]이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정자 안에 걸려 있다고 했으나, 실제는 밖에 걸려있다.
정자 안에는 퇴계와 황희 등의 글들이 걸려 있다.
금강정에서 바라본 동강 하류, 영월대교와 동강대교가 보인다..
정자 뒤편 동쪽 언덕에 [민충사]가 있다.
영월 5일장(4일과 9일)에는 재미있는 걷기가 되겠네.
동편으로 조금 가다말고, 아뿔사, 반대 방향 서편으로 길을 잡는 바람에 고경춘순절비 및 낙화암 비석과 순절비를 놓쳤다.
김삿갓 난고 시비
※ 난고 김병연(1807 ~ 1863), 그의 조부 김익순(홍경래의 난 당시 평안도 선천부사)이 반란군에 투항한 죄로 廢族당하였고,
어머니와 함께 영월에 숨어 살던 김병연(본관 안동)은 '김익순을 조롱하는 과시(科詩)'로 鄕試에서 장원하였으나,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조부였다는 사실과 집안 내력 얘길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란 자책과 폐족의 자식이란
아픔으로 자신은 밝은 하늘을 차마 쳐다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평생을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방방곡곡 숱한 화제(話題)를 뿌리며, 본명보다는 김삿갓, 金笠으로 통한다.
그의 호 蘭皐는 '바위 틈에 자라는 난초'를 의미하며, 그의 구전 詩들을 모은 [김립시집]이 있다.
아쉬움에 퍼온 사진 두 장 올립니다. [월기 경춘 순절지처] <퍼온 사진>
영월 기생 고경춘(본명 고노옥)은 조실부모하여 기생 추월의 양녀가 되었다가 관기가 되었단다.
1771년(영조 47) 영월부사로 부임한 이만회의 아들 侍郞 이수학이 금강정에 올랐다가 빨래하는 경춘을 보고 사랑에 빠졌으며
이듬해 이만회의 한양 부임으로 하릴없는 이별이 오고 '입신 후 꼭 차자아오겠다는 약속의 글을 정표로 남기고 떠났는데,
후임 영월부사 신광수의 수청 요구에 수학과 맺은 백년가약의 정표를 보여주며 거절을 반복하다가 그때마다 감내해야하는
주초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끝내 낙화암에 몸을 던지니 그녀의 나이 16살이었다.
1795년(정조19년) 8월 강원도순찰사 이손암(李巽菴)이 월주(영월)의 절행부를 살피던 차 이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사비를 털어 영월군수에게 주고 순절비를 세우도록 했다.
관기 경춘의 본명은 고노옥이며. 영월 선비 고순익(高舜益)이 자식이 없어 태백산 산신령에게 백일기도를 해 얻은 귀한 딸이다.
이곳에 유배온 단종임금(魯山君, 태백산 신령)이 점지해 준 소중한 자식이라 해서 이름을 노옥(魯玉)이라 지었다 한다.
낙화암 비석과 순절비. <퍼온 사진>
낙화암 비석 후면 기록 내용.
단종을 모시던 여러 시녀(侍女) 및 종인(從人)이 같은 날 (동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영종 무인(영조 34년, 1758)년에 ‘민충사’란 편액이 내려졌으며, 이보다 앞선 영종 임술(영조 18년, 1742)년에
영월부사 홍성보가 처음으로 비를 세우고 ‘낙화암’ 3자를 새겨 넣었다.
순절비 후면 기록 내용
조선조 단종께서 영월에 머무시다가, 정축년 10월 24일 천명이 불휴(불순)하여 갑자기 승하하시니,
시종(侍從) ‧ 시빈(侍嬪) 90여 인이 모두 한 몸처럼 순절하였다.
*** 고종 때 영종을 영조로 묘호를 바꾸었으며, 1742년에 처음 세운 비는 파손되어 1924년에 비석을 새로 세웠다.
언젠가, 장돌뱅이길을 한번 걸어야겠다.
◀ 노루조각공원 ▶
[노루조각공원]은 장릉과 노루에 얽힌 전설을 바탕으로 조성한 휴식공원.
*** 엄흥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산으로 올라 적당한 묘터를 못찾아 헤맬 때,
한 마리 노루가 앉았다가 떠난 그 자리에 시신을 묻고 엄흥도는 자취를 감추었는데,
중종 때, 왕명에 의해 묘를 찾아내어 치제하고, 그후 여러 지관들이 살펴보았지만
노루가 점지해준 묘터보다 더 좋은 명당 자리를 찾지 못해 협소한 채로 왕릉을 조성.
이런 사유로 다른 조선 왕릉들과는 제향공간과 능침공간의 연결 배치가 많이 다르다.
잉어와의 교감
며칠 전(2024년 3월 20일) 영월군은 예산 66억원(국비 보조 20억원)으로 장릉 일대에 '도깨비마을' 조성계획을 발표.
이는 도깨비들이 장릉을 수호했다는 [능말 도깨비 설화]를 바탕으로 도깨비 광장을 중심으로 도깨비 객주 조성과 함께
도깨비광장 ~ 노루조각공원 ~ 보덕사 ~ 영월저류지 ~ 청령포를 잇는 도깨비 탐방로를 개설하는 등 야심찬 계획이다.
◀ 점심은 장릉 입구 식당가. 보리밥집 곤드레밥집 송어횟집 등등, 삼삼오오 취향대로 ~~~. ▶
◀ 장릉(莊陵) ▶
[장릉(莊陵)] 1457년 단종이 폐서인되어 죽임을 당하였고,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묘를 만들었으며,
1698년(숙종 24년) 복위 되어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한다.
*** 파주 장릉(長陵)은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릉, 김포 장릉(章陵)은 추존 원종(인조의 아버지)과 인헌왕후 구씨의 쌍릉
장릉 연대:
1457년 단종 사망 후 엄흥도 冬乙旨山에 암매장
1516년 중종 때 단종 묘를 찾아 첫 제사를 지냄.
1541년 영월군수 박충원이 종종의 명으로 봉분 조성.
1580년 선조가 석물(장명등, 표석 등)을 세움.
1698년 숙종이 노산군을 단종으로 추존하며 노산군묘를 '장릉'으로 조성.
1726년 영조가 엄흥도 정려각 조성.
1791년 정조가 장판옥, 배식단 설치.
진입공간에 재실 외에 다양한 건물 등이 있는 것은 그만큼 단종에 얽힌 일들이 많아서 ~~~.
[배견정(拜鵑亭)]
동강 낙화암에서 뛰어내린 시녀들이 두견새가 되어 매일 바위에 일렬로 앉아 우는 소리를 영월부사 박기정이 듣고(중종 떄),
이를 가상히 여겨 두견새를 위한 정자를 지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편히 단종을 문안하게 하고, 그 바위에 '배견암'이라 새김.
[낙촌 비각] 종종 때 영월군수 박충원이 노산군 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비석
*** 1973년 후손들에 의해 건립. 낙촌은 박충원의 호. 前에는 박충원 정려각이라 불렀다.
*** 야사에 의하면, 중종 11년(1516) 노산묘를 찾으라는 어명으로 묘를 찾아 치제하였으나,
그 후 방치되었으며 영월 군수가 부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7인에 이르게 된다.
중종 36년(1541) 영월 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은 郡吏들의 피신 권고에도 불구하고 의관정제하고 앉았는데,
단종대왕의 현몽으로 꿈을 꾸다가 깨어나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하여 엄흥도 후손 도움으로
찾은 곳이 꿈 속에서 본 바와 같아 봉축하고 치제하였으며, 그 후로는 군수가 부임초에 죽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단종의 능침부터 먼저 찾아 참배하려고 능침으로 가는 길
[정령송(精靈松)] 혼령이라도 함께하시라는 뜻에서 정순왕후 사릉에 있는 소나무를 남양주군에서 제공하여 1999년에 식재.
*** 남양주 사릉에는 2004년에 영월 장릉 소나무를 한 그루 옮겨 심었다.
능침 가는 길에 언덕에서 내려다 본 제향 공간, *** 홍살문, 향로와 어로, 영천, 수라간, 정자각, 가운데는 보호수인 느릅나무.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문석인 석마 석양, 석호(사진에서는 잘 안보이네). 곡장을 둘렀는데 묘역이 매우 협소하다,
*** 능침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고 무석인도 없다.
제향공간 초입에 있는 [장판옥] ,정조 15년에 건립,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등 268인의 위패를 모신 집이다.
충신위 32인
朝士位 186인
宦者軍奴位 44인, 여인위 6인
배식단(配食檀)] 장판옥(藏版屋)에 위패를 모신 268위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마련한 제단
통상 정자각 왼쪽에 [예감(瘞坎)] 우측에 [산신석(山神石)]을 두는데, 장릉에는 좌편에 상하로 예감과 산신석을 두고 있다.
*** 예감은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 산신석은 능이 위치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
*** 예감이 위에 있는 것은 산신보다 임금이 상위(산신에게는 세 번 절하고 임금에게는 네 번 절한다.
보호수인 느릅나무, 우편에 [영천(靈泉)]
*** 영천]은 제사음식을 장만하는데 사용하는 우물인데 제향을 지내는 한식 때는 언제나 물이 풍부하다고 한다.
비긱과 수복방 *** 유독 장릉에만 [수복실]이라 표기하여 거슬렸는데 이번에 표지판을 수복방으로 고쳐 적었네.
보호수인 [느릅나무] 수령 390년
[엄흥도 정려각]
영월 호장 엄흥도는 단종의 시해를 보고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 동을지산에 암매장한 충신이다.
숙종 때 공조참의에 증직(贈職)되었고, 영조 때 정문(旌門)을 내렸다. 뒤에 공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정려각]이 바른 표기인데, 한글 안내 표지판에는 아직도 '정여각'으로 표기, '정려각'으로 바꾸면 참 좋겠다
재실(齋室)
장릉의 원찰인 보덕사, 가본지 꽤 오래 된 거 같다. 2층 규모로 상당히 큰 해우소(문화재로 지정)는 아직도 잘 있겠지.
이후 선돌관광지 및 한반도지형 전망대 관람 사진은
영월 청령포 장릉 탐방 후기 <3>에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엄홍도 그리고 시녀들..너무 가여워요
천만리 먼길에 고운님 여의옵고.........울어 밤길 예놋다
마음상태를 어찌 이리 잘 표현한 시인지..
嚴興道, 역시 대단한 충절입니다.
그가 동강에 떠 있는 단종의 주검을 수습하며
남겼다는 말, '爲善被禍 吾所甘心'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