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대하여 겨우 진주였단 말인가 어떤 아랍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가지고 있던 식량이 다 떨어졌다. 이틀간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결사적으로 걸었다. 그는 마침내 사막 가운데의 한 작은 샘터를 발견하고 거기에 이르렀다. 급히 물을 마시고 보니 얼마 전에 거기에 천막을 쳤던 흔적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혹시 천막을 치고 머물렀던 사람들이 아무런 음식 조각이라도 떨어뜨린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어떤 주머니 하나를 발견했다. 얼른 그것을 만져보니 손에 떡처럼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그 사람은 미친 듯이 주머니를 헤쳐서 열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속에 있는 것을 한 움큼 움켜서 꺼내 보니까 그것들은 아주 좋고 큰 진주알이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손에 한 움큼 쥐었던 진주들을 사방에 던져 뿌리며 외쳤다. "겨우 진주였단 말인가?" 그리고 그 아랍 사람은 사막에 누워서 죽어 갔다.
다니엘 루기가 대통령의 주치의가 될 수 있는 자격 자신이 치매증 환자라고 밝힌 미국의 레이건이 대통령 재직 시 한 정신병자의 총탄을 맞고 급히 대학 병원으로 수송된 적이 있었다. 신분도 대통령에다가 칠십이 넘은 노구의 몸에 총탄이 박혔으니 그 수행원들이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는가? 그런데 이런 긴급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대통령의 주치의인 다니엘 루기는 냉정하고도 탁월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호원과 함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는 대통령을 신속히 병원으로 옮겼다. 남은 경호원, 경찰, 보도진들이 그 뒤를 따랐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당황한 측은 병원의 의사들이었다. 가슴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는 대통령, 그리고 수십 명의 경호원, 경찰, 보도진들이 들이 닥치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다니엘 루기는 침착하게 말했다. “당황해 하지 마시오. 환자를 대통령이라고 생각지 마시고, 보통의 총 맞은 시민이라고 생각 하시오.” 그제야 의사들은 대통령을 응급실로 옮겨놓고 치료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가 수술하느냐를 놓고 우왕좌왕했다. 이때 그는 “병원 측이 맡으시오. 이곳 시설은 당신들이 더 잘 알지 않소.” 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은 수술을 받게 되었고, 수술도 성공해서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대통령도 사람인데, 그것을 너무 의식하고 부담감을 갖는다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게 된다. 상황이 긴박할수록 더욱 그렇다. 작은 실수나 부주의라도 있게 되면 영영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다니엘 루기는 이것을 염려하여 “대통령을 보통 사람처럼” 대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긴급한 상황 뿐 만 아니라 평상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누구를 존경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평소처럼 꾸밈이 없이 대하면서, 그가 가진 높은 뜻을 따라 배우고, 그의 훌륭한 행동을 본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에게 맹종(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시키는 대로 무턱대고 따름) 하거나 지나치게 꾸미는 것은, 오히려 그를 파괴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니엘 루기와 우리의 전직 대통령(노태우의 비자금 사건)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교훈 : 1.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똑같은 한 인격체임을 말함 2. 사람을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을 본받으라는 교훈 3. 생명의 존귀함을 알았다.
더 깊은 의미 깊은 생명의 의미를 알기 위해 노력하던 두 학생이 교수를 찾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의 실제적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이 위치상으로는 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해하였으나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더 깊은 의미였다. 어쨌든 그 교수는 그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극히 최근에 죽은 한 학생에 관해 말하면서 교수는 우선 그들에게 물었다. “아무개 군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무덤으로 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무정한 것을 그에게 털어놓으십시오.” 교수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아해하면서도 그들은 그의 말대로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죽었는데 그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다시 한 번 그의 무덤으로 가십시오. 그래서 당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아첨의 말, 그를 우쭐대게 하고 교만스럽게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그에게 하십시오.” 그들은 들은 대로 행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교수는 대답했다. “당신들은 내게 와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당신들이 저 죽은 친구의 무덤 앞에 서서 독설과 아부를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응답도 듣지 못한 것처럼, 당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개인적 믿음으로 그의 죽으심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 때 비로소 당신은 육신에 응답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정 받으며 살아 무엇하리 'H.D소로'라는 작가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극히 가난하여 일주일에 빵 한 덩어리만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18세의 한 소년시인이 어느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배고픔을 알게 된 하숙집 주인이 그 시인이 자기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고 권했으나 그는 너무도 내성적이어서 주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고 나서 그 시인은 빵집에 가서 외상으로 빵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거절당하고 말았다. 시인은 '동정 받으며 살아서 무엇하리' 하는 생각을 하고 그 길로 약국으로 가서 '쥐를 잡는다'는 구실로 독약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난 며칠 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이상히 여긴 주인이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그 시인은 흩어 놓은 원고 틈에 쥐처럼 죽어있었다.
보석 상자 어느 도시에서 불이 났습니다. 부유하게 사는 집이었습니다. 주인집 여인은 마침 뛰어 나와 겁에 질려 있다가 불속으로 용감히 뛰어 들어가서는 불에 타고 있는 자기의 귀중품이 들어 있는 보석 상자를 안고 나왔습니다.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지으면서 소리쳤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이제 살았습니다. 내 귀걸이, 내 반지, 내 목걸이, 내 팔찌 모든 보석을 다 찾았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여인은 사람들이 소리치는 것을 알아듣고는 "내 아이들! 우리 아이들은 어디 있지" 하면서 아이들이 불속에 있음을 알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삼켜 버린 후였습니다.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소중한 생명을 잃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 회심한 목사님 경복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신 김성화 라는 분이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머리를 깎고 도를 닦으러 절로 들어갑니다. 많이 배우시고 강직한 선생님 출신이라 불교계의 안 좋은 관행을 바로 집고, 개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데 불교계 안에 내분으로 인하여 이분이 교도소에 갇히게 됩니다. 복역 중에 교도서 안에서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대출해서 읽기 시작합니다. 스님이시기 때문에 주로 불경을 읽었는데, 어느 날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주는 교도소 경비원이 자신이 신청하지 않은 신약성경을 넣어 주더라는 겁니다. 경비원은 불경은 다 대출을 해 가고 한 권도 없기에 심심할 것 같아 성경을 가져왔다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고 있는데 한번 읽어보시지요?”라고 말하였답니다. 심심하다고 저 기독교 책을 보면 부처님을 배신하는 것이라 생각되어, 나무아비 타불만 수 천 번 외우며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래도 옆에 있는 기독교 책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을까? 궁금해서 읽어보기 시작했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누가복음에 나오는 나인성의 어느 과부가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에게 모든 소망을 걸고 살아왔는데 그 아들이 죽어, 과부는 통곡을 하며 아들의 시체를 관에 넣고 성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는데, 마침 예수님께서는 길을 지나가시다가 이 일을 목격하시고는, 청년의 관을 멈추게 하시고,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하시자 죽었던 청년이 그 자리에서 일어난 내용을 읽으면서 스님은 전율을 느끼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똑같은 내용이 불경 안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경에 보면 인도 구시라 섬에 시다림이란 한가한 숲 속을 석가모니와 제자들이 함께 걷고 있었는데 한 젊은 과부가 통곡을 하며 울고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석가모니가 사유를 물은즉 과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이때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고을에 가서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줌 얻어다가 죽을 끓여 먹이면 살아날 것이라.” 하였습니다. 젊은 과부는 기뻐서 뛰어 갔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모든 집을 다 돌아 다녔지만 젊은 과부는 빈손으로 석가모니 앞에 섰습니다. “부처님 하루 종일 돌아 다녀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그런 집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왔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석가모니는 “자매여! 생자(生子) 필멸(必滅)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 따라 일어나서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 할 것이 없느니라.”고 말하고 그 과부를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 그렇다! 석가는 죽었지만 예수는 살아나셨다. 석가에겐 무덤이 있지만 예수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신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고 마침내 목사님이 되어 허무하게 죽어가는 불교도들에게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극락의 불나비」라는 책을 쓰고 불교도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김상화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 불교는 돌고 도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살리는 종교인 것을 발견하고 그는 지금 목사님이 되어 생명의 종교인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생명 생명을 나타내는 말로 구약에서는 두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첫째로 '하임'은 추상명사로서 죽은 상태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살아있는 존재의 상태를 의미한다.(신28:66, 잠15:24) 둘째로 '네페쉬'는 생명의 중심으로서 피와 밀접히 관련되어 사용되어졌다.(레17:11-14) 따라서 사람의 육체적 생명은 비물체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결합임을 밝혀준다. 모든 생명은 그 근원과 유지되는 것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창2:7,19) 신약에서 생명이란 말은 '조에', '비오스', '프쉬케' 의 세 가지가 사용되었다. 대개 '조에'는 생명의 성질과 관련하여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영적, 도덕적 성질에 관련된 것이며, '비오스'는 우리의 현재 지상 생활의 조건들과 관계된 것이다(눅8:14, 딤전2:2). '프쉬케'는 마 2:20,10:39, 막10:45에서처럼 특별한 개인의 생명을 표현한다. 성경은 사람의 생명의 신성한 것임을 전권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시36:9, 요5:26),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창2:7), 하나님의 기운으로 전달되었다(창2:7). 더우기 하나님의 구속사역인 성경말씀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호하시며 죽음의 위치, 곧 죄인 된 인간 위에 정당히 내리시는 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에게 생명을 제공하시고 화목하시려 찾으시는 사랑을 선포함에서 확증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생명의 면류관은 크고도 영광스러운 생명 그 자체이다(계2:10). 영생은 신자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요3:16,36). '영생'이란 다만 '무한'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시간의 계약을 초월하는 시상(시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는' (골3:3) 생명이며 그 본질은 하나님과의 일치, 친교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 생명의 보증이 되었다(요14:19). 이 생명은 육체적인 죽음으로 방해되지 않는다(살전5:10). 장차 얻을 생명 안에서 이 생명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완성되고 실현될 것이다(롬 2:7). 오늘날 인간의 생명의 관련된 많은 문제들이 있다. 사형, 신자의 전쟁 참여, 가족계획, 인공유산, 안락사 문제가 그것이다. 죄악 된 행동의 행위자에 대한 보상으로서 한 인간의 생명은 개인적으로 처단함이 옳은가? 성경은 정당한 법의 절차에 의해 올바른 집행될 때 그것을 허용한다. 전쟁참여 문제는 롬13:1이하와 벧전 2:13이하에 호소한 원리에 의해 전통적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가족계획, 인공유산, 안락사 등의 문제는 생명의 신성을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생명 천시 소련에서 망명해온 문학가 솔제니친의 보고에 의하면 소련은 1920년대에 우크라이나에서 600만 명의 농민을 굶겨 죽였다 한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도 600만의 유대인을 죽였고 중공이 중화민국을 점령했을 때도 3천만 명을 숙청해 죽였다. 하나님의 신앙이 없기 때문에 생명을 천대합니다. 1946년, 전직 관리 한 사람이 나치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히틀러가 가스실에서 2,000명을 살해하는 살인극에 참여했다고 자백하는 그의 표정이 얼마나 태연하고 담담했던지 관계자들 모두가 놀랄 정도였다. 심문을 계속하던 관계자들은 다른 가스실에서 2,000명 이상을 살해한 또 다른 사실을 밝혀냈다. 이번에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의 말을 거의 믿을 수 없었던 한 조사관이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다. "결코 그런 건 믿지 않소!" 그의 대답이었다. 하나님이 배척당하고 계신 나라에서는 하나의 신호에 따라서 인간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사라진다.
생명의 근원 매우 성미가 급한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도시에 서만 생활하다가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밭에다 밀을 심었습니다. 그는 워낙 성미가 급한 사람인지라 매일 밀밭에 나가 밀이 자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밭에 나가 얼마나 자랐나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싹이 나오는 것도 더디지만, 새순이 자라는 것은 정말 지루할 만큼 더디 다고 느꼈습니다. 자기의 성미대로라면 하룻밤 새 부쩍 자라서 열매를 맺어 주면 좋겠는데 자라는 속도가 얼마나 더딘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물도 자주 길어다 부어 주고, 비료도 풍성히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성장 속도는 너무도 미비했습니다. 초조한 농부는 기다리다 못하여 하루는 밭에 나가서 순을 조금씩 잡아 당겨 키를 키웠습니다. 그러고 나니 확실히 밀은 그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자란 것처럼 보였습니다. 농부는 만족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다시 밭으로 나간 농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밀들이 모두 하얗게 말라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밀은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그 줄기의 생명이 끊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식물은 생명의 근원인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삶의 근거를 두지 않는다면, 뽑힌 밀처럼 시들고 말라 버릴 것입니다.
생명의 길 영의 일을 생각함은 생명이요. 육의 일을 생각함은 죽음이다. 하늘 일을 생각함은 생명이요, 땅의 일을 생각함은 죽음이다. 육의 일에 아름다운 것이 없지 않으나 요컨대 피었다 떨어지는 한 포기 꽃에 지나지 않는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고귀하여도 하나님에게 평화를 얻을 수 없고 하나님의 법에 복종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귀엽게 중하게 자랑스럽게 양육 발전시켜 오던 육신에 속한 모든 지식과 사상을 십자가에 못 박으리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라. 몸은 죄로 인하여 죽되, 영은 하나님의 의를 인하여 살리라 영의 삶이 참 생명의 길이다.
생명의 존엄성 아브라함 링컨이 하루는 예복차림으로 백악관 앞에서 마차에서 내려 층계를 오르려 했을 때 돼지 새끼 한 마리가 시궁창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았다. 이를 손수 건져내줄 마음도 있었으나, 더러운 물이 튀어 예복에 묻을 것 같아 그대로 지나쳐 사무실에 들어가 책상에 앉아서 기도하려 했는데, 방금 지나쳐 올 때 본 돼지새끼 모습이 눈에 떠올라서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다시 가서 시궁창에 빠진 돼지새끼를 건져 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링컨의 이러한 하찮은 동물의 생명이라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저 위대한 흑노 해방의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생명이다 우리들은 돈이나 물건을 도적맞으면 야단법석을 하지만 생명과 같은 시간을 도적맞고 속임을 받아 흘려버려도 태평한 것이다. 시간도적은 죄가 되지 않는데 이것은 이상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야 말로 생명 그것이고 시간의 연결만이 생명이 아닌가? 그것을 채이거나 빼앗겨도 노하지 않는 인간은 참으로 잘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시간 이야말로 잃어버리면 다시 찾을 길도 없으며 변상도 듣지 않는 무엇보다도 재산이 되는 것이다. 이 뜻을 참으로 안 사람은 생활에 빛이 날 것이다.
엘리자베스여왕의 탄식 20세기 초기 영국은 실로 놀라운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전 세계 도처에 식민지 영토가 있어서 영국기가 게양되고 있었으므로 영국 기는 24시간 내내 게양되었던 결과가 되었으므로 결코 해가 지지 아니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여왕에게는 큰 자부심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여왕에게는 세계에서 제일 큰 진주가 있었고 보석이며 기타 장식도 마차로 실어야 할 만큼 많았던 것입니다. 여왕이 입는 옷은 매일 매일 옷을 갈아입어도 10년간은 있는 것만 갈아입을 수 있었던 정도로 옷이 많았습니다. 이 부유와 권리는 여왕의 큰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왕도 죽음 앞에서는 초라하였습니다. 임종 시에 문무백관을 앞에 모으고는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시간과 바꾸겠다"라고 마지막을 얘기했습니다. 시간이 다하여 죽음에 들어갈 때 그 모든 보화와 영광이 단 일분간의 생명을 연장할 시간보다 못하였고 그 모두가 티끌이 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을 말해 주는 이 여왕의 탄식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한 양식 성경말씀 진리는 금언이나 명연설이 아닌 성경구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것이 기록된 본래의 정신을 가지고 읽혀져야 합니다(롬15:4).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속에서 말의 미묘함보다는 영혼을 위한 양식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책은 귀하고 심오하며 단순하고도 경건한 책인 줄을 알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의 저자가 위대한 사람인지 아니면 학식이 없는 사람인지에 대하여는 관심을 갖지 말고 오로지 진리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도록 하십시오(고전2:4) "누가 이 말을 했는가?" 보다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에 주의를 집중시켜야 합니다. 사람은 나서 없어지지만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남아 있을 것입니다(시117:2).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외모나 능력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아니하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롬2:11;10:12). 우리의 호기심은 종종 성경을 읽을 때 간단히 보고 지나가야하는 것도 지나치게 따지고 집착함으로써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성경으로부터 유익을 얻으려면 겸손한 마음과 단순한 생각,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되 지식에 집착하여 논란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롭게 의문을 제시하면서도 복음서 기자들의 말씀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성경의 가르침이 당신을 불리하게 하거나 괴롭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코 까닭 없이 써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전12:9).
존재의 의미 대학시절에 안소니 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태리 영화 '길'이라는 영화를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주인공 젤소미나는 떠돌이 요술사요, 서커스 단장인 짐파노에게 마치 원숭이처럼 끌려 다니는 어릿광대요, 아내요, 조수요, 그리고 식모입니다. 짐파노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경찰에 붙들려간 사이에 곡예사인 청년과 젤소미나는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가랑잎 휘날리는 거리를 걸으며 거리의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차며 “우리들 신세는 마치 길거리에 무심히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군요. 대체 우리와 같은 이런 인생에는 무슨 뜻이 있겠나요.” 신세를 한탄하며 젤소미나가 말했을 때 곡예사 청년은, “하지만 돌멩이도 돌멩이로서의 의미가 있답니다. 어떤 것도 이 돌멩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하는 대화입니다. 끝내 청년을 따라가지 않고 돌아온 그녀는 짐파노에게 갖은 학대를 받은 채 쓸쓸히 바닷가의 하나의 돌멩이같이, 나부끼는 가랑잎같이 죽어갑니다, 그렇습니다, 돌멩이 하나에도 그 위치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돌멩이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인생이겠습니까? 성경은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합니다.
죽는 것이 사는 길 어떤 사람이 깊은 산중에서 산불을 만나 타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궁리한 끝에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 다음에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갔더니 불의 피해를 막고 살아 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 자기가 사는 길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남도 살고 자기도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34)고 하신대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수십 배 수백 배로 사는 길입니다. 모든 죄악의 열매가 자기(Self)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셔서, 자신도 부활하시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항복(Self surrender)시키는 것이 참으로 승리하는 길입니다.
죽은 씨앗 초등부 교사 한 분이 하루는 주일학교 성경공부 시간에 조그만 알맹이 하나를 손에 들고 들어왔다. 호기심 어린 투명한 눈망울들이 일시에 선생님의 손을 바라보자, 미소만 머금고 있던 선생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얘들아, 이것은 씨앗이란다. 그런데 이 씨앗이 자라서 큰 나무가 되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하겠니?"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말문을 열 기회만 찾던 개구쟁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선생님 흙이 제일 중요해요. 씨앗은 흙이 있어야 자랄 수 있잖아요." 한 녀석이 자신 만만하게 으쓱거리며 대답을 하자, 또 한명이 "햇빛이 가장 필요해요. 햇빛이 없으면 영양분을 만들어 낼 수 없어요"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한참 듣고 있던 선생님이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할 시간이란 듯이 입을 열었다. "얘들아, 사실을 이 씨앗은 삶은 것이란다." 그러자 꼬마들은 억울한 듯 얼 뚱한 눈들을 아무렇게나 내던지며 선생님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란다. 생명이 없는 씨앗에는 햇빛도, 물도, 흙도, 공기도 더 이상 소용이 없는 법이지."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으며 참 생명의 근원이 된다. 우리는 이 생명을 분여하는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짐승과 사람의 차이 “짐승은 먹기 위해 살고 사람은 살기위해 먹는다.” 먹고살기 위해 사는 자는 결국 먹을 것으로 여생을 마치고 만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먹는 사람은 분명 목표가 있는 삶이요. 또한 진정으로 살기 위하여 먹는 자는 삶의 다른 방편이 있다면 분명 먹기를 포기하고 다른 삶을 추구할 것이다. 참된 질 리가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하는 삶인 것이다. 참으로 살기를 원하는 자는 살 것이요 죽기를 원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것 제임스 쿠크는 1768년부터 1779년까지 11년에 걸쳐서 모두 세 번의 탐험 항해를 했다. 쿠크는 새로운 대륙 발견이나 항로 개척보다는 탐험의 방법을 더욱 과학적으로 체계화한 공이 더 컸다. 1775년 남태평양을 항해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 목적은 남방 대륙 탐험이었고 배의 이름은 `엔디버'호 `노력'이라는 뜻의 이름이었다. 푸에고라는 섬에서 물을 실은 뒤 학자들이 육지에 꼭 올라가 보고 싶다고 하여 저녁때까지 시간을 약속하고 허락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한 식물에 끌러 너무 멀리 들어갔던 것이다. 이튿날 수색대를 보내 구조하기는 했으나 데리고 갔던 토인 두 사람이 이미 얼어 죽고 난 다음이었다. 그 때 쿠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새로운 풀을 당신들은 몇 포기 발견하신 모양인데, 풀과 사람의 목숨을 비교해 볼 때 어느 쪽이 더 귀중합니까?" 성실한 생명경외 사상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 어느 날 밤 젊은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는 복잡한 집안 형편을 믿음으로 극복해가며, 교회 생활도 열심히 했고, 어느 여자 전도사님의 따님과 교제하여 정식으로 혼담이 나오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께서 형편없는 집안에 딸을 줄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하시는 겁니다. 겪는 일마다 고통인데 마음 놓고 결혼도 할 수 없으니 살아서 뭘 합니까?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나는 독약을 손에 들고 이 전화를 마지막으로 거는 겁니다.” 젊은이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했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결심을 굳힌 듯했습니다. 한순간 난감하고 막막했습니다. 잠깐 눈을 감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지혜를 주십시오. 한 생명을 우주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이시오니, 이 젊은이를 구하실 말씀을 주십시오.' 그 순간 저는 저 자신의 아픔에 대한 것으로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보세요, 젊은이. 나는 결혼한 지 8년째 되지만 아직 아기가 없어요. 생명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거예요. 그렇게 애절하게 원해도 아직 허락을 하시지 않는 그 생명을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간단히 버리려고 합니까? 생명은 당신의 것이 아니에요. 자, 전화를 끊지 말고 우선 그 독극물 약을 버리세요. 어서!” 전혀 예정에 없던 말이었습니다. 젊은이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격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 뒤 한참 만에 전화를 다시 드는 듯했습니다. “선생님, 약을 버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문제가 저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던 탓이었습니다.”
한 올의 실 어느 신설 공장에 높다란 굴뚝 쌓기가 끝나고 인부들이 작업대를 하나씩 치우고 있다. 꼭대기에는 박씨 만 남아서 끝마무리를 짓고, 후에 밧줄을 타고 내려오기로 했는데, 그만 인부들이 밧줄도 아래로 내리고 말았다. 큰일이 터졌다. 사람들이 모이고 박씨 집에서도 부인과 어린 딸이 달려 나와 발만 동동 구른다. 박씨는 뛰어 내릴 수도 없고, 아래서 밧줄을 던져 올릴 수도 없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바로 이때 박씨의 열 살 난 딸이 아빠를 부른다. "아빠! 제 말 들려요?" "그래, 들린다." "그럼, 아빠 양말을 벗어서 실을 풀어 보아요." 박씨가 조심스레 양말의 실을 한 올 두올 풀어서 실 끝을 아래로 내려 보냈고, 거기에 가늘고 질긴 삼끈을 잡아매어서 위로 올렸다. 다시 삼끈 끝에 굵은 밧줄이 매어져 올려 졌고, 마침내 박씨는 그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