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종주기 2 >
삼 일째 되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장터목대피소로 향하였다. 이틀째는 산의 형세가 완만하여 일부 사람들은 지리산 경치가 지리멸렬하다고 하였으나 셋째 날은 바위도 많이 보이고 발아래 펼쳐지는 풍경이 그 어떤 산수화보다도 훨씬 웅대하고 아름답다. 끝이 없을 것같이 넓고 진경산수화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모두 사진찍기에 바빠 대피소 도착 예정 시간이 자꾸만 늦어진다. 점심은 세석(細石)대피소에서 라면과 현지에서 산 햇반으로 잘 먹었다. 물이 하도 시원하고 물맛도 좋아 식수도 병에 가득 담고 수건도 적셔서 젖은 수건으로 여기저기 몸도 닦으니 그리 시원할 수가 없었다.
저녁 무렵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니 실망이 크다. 우선 화장실이 재래식이라 냄새도 많이 나서 근처에 가기도 싫다. 숙소도 세 개 대피소 중 가장 열악하다. 사람도 많아 주위 사람들의 여러 가지 소음으로 잠자기가 무척 힘들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내일은 비가 오면 천왕봉을 단념하고, 비가 오지 않는다면 1,915m의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으로 힘차게 올라갈 것이다. 천왕봉에 가냐 안가냐, 일출을 보냐 못 보냐 모두 하늘의 뜻에 달려있다.
다음 날 꼭두새벽에 일어나 보니 모두가 일어나 있다. 밖에 비가 오지 않아 정상으로 가기로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바깥 기온이 낮고 바람도 차가워서 옷을 여러 개 껴입었다. 처음에는 6인이 출발하였으나 조금 못가 D가 자기는 빠지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뒤에 남았다.
머리에 헤드 랜턴을 켜고 올라가니 낮과 같이 밝아서 좋았다. 한참을 올라가니 정상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정상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이른 새벽 저 아래에는 새하얀 구름바다 운해가 펼쳐지고 저 멀리 마을을 밝혀주는 밝은 불빛의 풍경은 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일출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정상으로 최대한 빨리 가서 일출을 볼 수 있다면 보자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정상 주위로 붉은 빛이 맴도는 것 같다. 드디어 정상에 다가갔다. 그때 태양이 자신의 동그란 얼굴을 지평선의 구름 위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 얼마나 황홀한 순간인가. 三代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일출을 난생처음으로 천왕봉에 올라온 나에게도 그 보기 어렵다는 일출을 보여주다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모두가 감동적이고 조상님과 지리산 산신령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지리산에 와서 시련이라면 시련이라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어려움을 주시더니 종국에는 한반도의 남부에서 제일 높은 곳에서의 일출 광경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천왕봉에서 내려와 장터목대피소에서 아침으로 닭죽과 남은 음식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닭죽이라 하니까 무슨 특별한 별식처럼 들릴지는 몰라도 닭죽을 만든 사연이 재미있다. 버너에 밥을 짓는데 고지대의 기압이 낮아 밥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계속 물을 붓고 부어서 죽으로 만든 것에다가 미리 사 온 조리된 닭고기를 넣어서 만든 것이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높은 산악지대에서는 특별한 음식이다. 백무동버스터미널이 있는 곳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하산길을 조심스럽게 내려와야 이번 지리산 종주의 대미를 멋있게 장식할 수 있다. 내려오는 5.8Km 길이 모두 너덜길이라 힘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꾹 참았던 장맛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해서 길이 미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우비를 입고 벗기를 반복하면서 조심스레 내려와서 모두 안전하게 하산할 수 있었다.
지난 삼 일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양치질도 못하여서 완전히 노숙자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천만다행으로 터미널 부근 백무동 골짜기에서 시원한 맥주도 마실 수 있고, 온수로 샤워도 할 수 있는 곳을 C가 우연히 발견하여, 모두가 덥고 목이 마른 상태라 500cc 생맥주 한 조끼를 마시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으니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점심으로 산채비빔밥과 도토리묵 그리고 막걸리 한 잔을 마시니 다시 한번 문명 세계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우리가 너무 편안한 문명 생활에 오랫동안 익숙해서 잠시나마라도 자연인으로 돌아가 살기는 힘들 것 같다.
서울로 귀경하니 강한 빗줄기의 장맛비가 시작되었다. 동서을 터미널에서 8인의 지리산 종주팀이 모여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지리산 종주 여행을 무탈하게 완주한 것을 자축하고, 고려대 72산악회의 건승을 기원하면서 해단식을 거행하였다.
끝으로 이번 지리산 종주을 기획하고 준비하신 조영민 회장님, 차석철 대장님, 그리고 사흘 동안 같이 종주하면서 어려울 때 서로서로 밀어주고 끌어주신 5인을 포함한 일곱 분 모두에게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