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강승택 | 날짜 : 10-03-30 11:38 조회 : 1892 |
| | | 아내가 사는 법
가난한 초등학교 교사를 남편으로 둔 탓이었겠지만 아내가 부업을 시작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처음 아내가 일거리를 찾아 나설 때만 해도 나는 그것이 중년 여자들이 흔히 갖는다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일시적인 방편쯤으로 알았지 이토록 장구한 세월 이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긴 했으나 퇴근길에 아내 없는 텅 빈 방을 감수하면서까지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겠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기에 아내의 부업 이야기는 그만큼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거쳐 온 부업의 종류도 다양해서 웬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 치고 아내의 손이 닿지 않은 일이 없다할 만큼 아내는 온몸을 던져 일해 왔다. 같은 연배의 여자들이 제 한 몸치장하고 다스리기도 힘들다고 엄살일 때 아내는 온갖 형태의 일과 마주하며 스스로의 기력을 소진시켜 왔다.
아내의 부업은 주식투자가 단초가 되었으니 출발이 다소 엉뚱했다. 그 무렵 사회 분위기가 너도나도 주식에 손을 대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다. 어느 날 아내는 대림산업 주식을 몇 주 샀노라 며 신문과 텔레비전의 주식 관련 소식을 열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9시 뉴스가 끝나면 그날의 시세가 경쾌한 음악과 함께 나왔는데 다행히 떨어지는 날 보다 오르는 날이 많았고 덩달아 아내의 얼굴도 환해지곤 했다. 그런 날이면 밥상의 반찬도 한두 가지 더 올라 나까지 관심을 가지고 응원하게 만들었다. 차츰 아내의 씀씀이도 커지는 느낌이었다. 몇 달이 지났을까. 아내의 입에서 주식을 그만하겠다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의외였다. 아쉬운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돈에 대한 귀중함이 사라지는 때문이라 했다. 주식 투자를 하면서부터 남편의 봉급이 외소하게 느껴지고 감사의 마음도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요리학원을 다닌다고 했다. 평소 음식 조리에 대해서는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을 들어왔으니 잘된 선택이지 싶었다. 더욱이 직접적인 수혜자가 될 나의 입장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따금 시식용이라며 입을 벌리고 넣어주는 음식에 대해 나는 ‘ 짜다 ’ ‘ 싱겁다 ’ 아니면 ‘ 맛있다 ’ 정도의 반응만 보이면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내는 조리 기술을 익혀 출장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부업을 가질 생각이었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옮겨지진 못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아내가 하는 일이 음식을 만드는 일이고 보면 이것도 흔히 말하는 팔자인가.
첫 계획을 흘려보낸 아내가 이번엔 홈패션 일을 배운다며 학원을 오갔다. 얼마간의 강습이 끝났는지 헌 재봉틀 한 대를 아이들 방에 들여놓았다. 어디에서 일감을 맡아오는지 밤 12시를 넘기면서까지 재봉을 돌렸다. 아내의 손에서는 이불이 만들어지고 방석과 커튼이 나왔다. 방안에는 크고 작은 천 조각들로 발을 들여 놓을 틈이 없었다. 다행이 아이들이 취학 전이었으므로 큰 지장은 없었으나 방안은 늘 어수선했다. 아내와의 대화도 쉽지가 않았다. 식구들 밥상을 차려주기가 무섭게 재봉틀 앞으로 돌아앉는 아내는 일밖에 모르는 일벌레였다. 완성된 제품을 배달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중고 르망 차에 물건을 싣고 아내의 지시대로 이상 없이 전달하고 오는 날이면 큰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마음이 흡족했다.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두 달에 한 번씩 아내는 일 삯을 받아들고 행복한 얼굴을 짓곤 했는데 이렇게 얻어진 돈으로 아내는 아이들 간식도 만들어주고 살림살이도 늘려갔다. 몸은 힘들고 손에 쥐는 돈은 적어도 주식투자 때보다 보람이 있다고 늘 만족해하였다. 아내의 홈패션 일은 용운동 주택에서 내동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잠시 중단되었다.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코오롱 아파트는 처음 경험하는 아파트 생활이란 호기심도 있었지만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 12층 거실에서 내려다보는 밤의 풍경은 온갖 불빛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26평작은 아파트였지만 우리 부부가 나눈 행복의 크기는 지금까지 거쳐 온 어느 곳보다 가장 컸던 곳이었다. 이사의 흥분이 가라앉아 갈 무렵, 아내는 다용도실 한 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재봉틀에 대해 또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내의 예상대로 이곳에서는 기계음이 내는 소음 때문에 홈패션 일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재봉틀 밑에 두꺼운 이불과 스티로폼 따위를 받쳐가며 아래층으로 전달되는 진동을 막기 위해 이리저리 방법을 찾아보는 듯했으나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얼마간 살림에만 전념하는가 싶던 아내가 이번에는 가게 자리를 알아보았다며 새로운 계획을 내놓았다. 동네 버스 정류장 앞에 빈 공터가 있는데 도로편입 예정지라 했다. 가건물을 지어 분양하는데 아내는 이곳에 여성용 매장을 열고 싶어 했다. 남은 공간을 이용하면 홈패션일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아직 아이들이 어리고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것도 아니건만 부업을 향한 아내의 집념은 이상하리만큼 강하고 집요했다. 마침내 조립식 건물이 완공되어 아내의 가게가 문을 열던 날, 나는 그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흥미도 있어 퇴근 시간만을 기다렸다. 가게의 이름은 ‘논 오방’ 이었다. 뜻을 물으니 아내도 잘 모른 채 누군가 그렇게 지으면 장사가 잘 될 것이라는 말만 믿고 따랐다는 것인데 웃음이 나왔다. 저녁에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보니 종이로 만든 화환이 몇 개 세워져있고 여기저기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개업 턱이라며 아내가 시루떡 한 조각을 겉절이와 함께 내놓는다. 그러면서 이곳은 여자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와서는 안 된다는 주의와 함께 어서 가라고 등을 떠민다. 처음 계획대로 아내는 이곳에서 여자들 속옷과 화장품을 팔았다. 그 와중에도 홈패션 일을 함께 했는데 틈틈이 집안일까지 챙기느라 언제나 동동거렸다. 아이들이 국민 학교 4학년과 5학년이어서 엄마의 손이 한창 필요할 때였다. 별 탈 없이 자라주는가 했던 아이들이 언젠가부터 삐걱거리더니 마침내 아내로 하여금 더 이상 가게 일을 할 수 없겠다는 판단을 하기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아내는 결국 가게 문을 연지 반년이 채 못 되어 아이들 곁으로 돌아왔고 나 역시 한 시름 놓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내는 또다시 홈패션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번엔 남의 매장으로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었는데 아이들이 학교 공부가 끝나기 전까지는 돌아온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아내의 홈패션 일은 월평동에 있는 누리 아파트로 오면서 마침내 종식을 고하게 되었는데 아내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아내의 시력이 극도로 나빠진 것이다. 아내는 어떤 일이건 하기로 작정하면 온몸을 던져 일했다. 남자들도 어려워하는 커튼 달기 작업을 위해 전기 드릴로 천정을 뚫는가하면 고개를 잔뜩 젖힌 채 나사 하나하나를 일일이 고정시키기 위해 온몸이 뻣뻣해지도록 힘을 썼다. 언젠가부터 돋보기를 찾는 아내에게 그것도 닮을 것이라고 남편 따라 하느냐고 놀려보지만 피어보지도 못한 채 사그라지는 아내의 젊음을 보는 것 같아 못내 안쓰러워짐은 숨길 수가 없었다.
한번 자리 잡은 부업 병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인지 숨고르기를 끝낸 복싱 선수가 다시 링에 오르듯 아내는 난데없이 우유 배달을 하겠다고 나섰다. 아내의 일이 항상 그렇듯 이번 역시 모든 것을 혼자서 결정하고 난 후였다. 그런 아내에게 짐짓 짜증도 내어보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설 아내도 아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우유 배달을 아침, 저녁 두 차례 했다. 아내는 새벽 4시면 일어나 불도 켜지 않은 채 조심조심 옷을 찾아 입고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어쩌다 눈을 떠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는 때면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참으로 고생도 사서 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저만한 생활력이면 남편 유사시에도 식구들 밥 굶길 일은 없겠다’는 엉뚱한 상상도 가져보게 되는 것이었는데 분명 아내에 대한 모욕일 터이지만 그런 아내가 든든하게 여겨지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 겨울 방학이 되어 나도 아내를 따라 우유 배달을 하겠다고 나섰다 배달 지역이 살고 있는 같은 아파트여서 아침에만 숨어서 하기로 하였다. 처음엔 새벽 운동 하는 셈 치겠다는 마음이었으나 1층에서 15층까지 오르내린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우유를 투입구에 정확히 넣는 것도 중요했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엘리베이터에도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작이 굼뜨면 사정없이 1층으로 급강하를 하거나 꼭대기 층까지 수직 상승하곤 했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손에 쥔 명부를 읽어내기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보다 몇 배나 어렵고 힘들어보였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이때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아내의 우유 배달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 되었을 것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 때였다. 부부 모임이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늦게 만난 모임이 2차까지 거치다보니 어느 새 새벽 배달 시각이었다. 눈도 부치지 못한 채 서둘러 작업을 마쳤으나 이것이 화근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가 갑자기 코피를 쏟는데 그야말로 선혈이 낭자하였다. 밤새도록 밖에서 얼었던 몸이 싸였던 피로와 만나며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듯싶었다. 그렇게 강인해 보였던 아내가 힘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알 수 없는 슬픔과 함께 아내의 고집을 진작 꺾지 못한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원망스러웠다. 다시는 부업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코피 사건이후 한동안 살림에만 전념 하는가 했던 아내가 불쑥 지나는 말처럼 한 마디 던져왔다. 내일부터 오뚜기 식품 영업 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그 표정과 억양이 너무도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는 듯 위장하는 바람에 나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려야 했다. 그러나 이번이야말로 분명한 태도를 밝힐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으로 짐짓 목소리에 무게를 실으며 그동안 묻어두었던 말들을 쏟아냈다. ‘당신 보고 언제 돌을 벌어 오라했느냐, 없으면 없는 대로 건강하게 만 살자는데 왜 그리 극성이냐?’ 강하게 몰아붙이는 나의 기세에 아내도 더 이상 다른 이의가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말을 마치고 올려다 본 아내의 표정은 처음이나 마찬가지로 덤덤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러면서 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음을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집에서 놀면 몸이 편안하니 나도 좋다. 그러나 여자들끼리 어울려봐야 허구한 날 쓸데없는 남의 이야기요 생산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이 일을 해야 보람을 찾는 것인데 뭣 하러 건강한 육신을 놀릴 것인가. 아이들 어릴 때 그나마 한 푼이라도 저축할 수 있지 고등학교, 대학교 가봐라. 정신없을 거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는데 듣고 보니 구구 절절 옳은 말씀이었다. 그렇듯 분명한 소신이라면 더 이상 말려서 될 일도 아니라 생각되었다.
이후 아내의 부업 행진은 어떠한 제재도 없이 계속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베이비시터’와 같이 생소한 이름도 있었고 회사 식당의 조리 원으로 일하며 한 여름 더위에 바람도 통하지 않는 위생복과 고무장화로 중무장한 채 몇 킬로씩 체중이 빠져나가는 전쟁도 치러야 했다.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남의 집 가정부까지 마다하지 않는 아내의 저돌성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때로는 짜증도 날 터이건만 항상 평화로워 보이는 불가사의한 아내의 태도였다.
가끔은 일하는 집에서 보고 느낀 바를 들려주기도 했는데 나도 모르게 흥미를 가지고 귀를 기울일 만큼 차츰 순화되어 갔다. 부부가 대학교수와 연구원인 가정을 드나들면서는 늘 이 집 젊은 부부를 칭찬했다. 배운 사람들이 역시 다르다고도 했다. 경제적으로 살만한데도 알뜰하기가 이를 데 없고 사람을 대하는 겸손함도 본받을 만하더라고 했다. 나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들이었으나 오래 오래 잘 살기를 마음속으로 축원했다.
아내의 부업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함바집’ 이다. 함바집이란 공사장 인부들을 상대로 하는 식당을 말하는데 잘만하면 목돈을 쥘 수 있는 사업이라 했다. 운영권 따내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아내는 이 일을 친정 남동생과 하고 싶어 했다. 이 무렵 처가의 사정을 말하면 작은 규모의 회사를 운영하던 큰 처남이 연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형제들이 갖고 있던 건물 한 채가 고스란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작은 처남의 생계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아내는 더욱 함바집에 매달리는 눈치였다. 다섯 남매의 둘째인 아내는 유달리 모성애적인 본능이 강한 여자였다.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동기간의 걱정을 끌어안고 살았다. 그런 아내에게 작은 처남의 딱한 사정은 당연히 짐이었다. 아내의 노력 덕분이었는지 함바집 운영권이 작은 처남에게로 넘어왔다. 신탄진 4공단에 제지공장을 세우는 공사였는데 규모가 큰 만큼 일하는 사람의 수도 많았다. 임부들의 세끼 식사뿐 아니라 틈틈이 간식을 맞추는 일까지 크고 작은 일 모두가 아내의 몫이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대역사였으나 아내는 무사히 그 소임을 완수했다.
퇴직한지도 4년이 흘렀다. 이어 달리기 선수가 바통을 주고받듯 아내는 나의 손에 쥐어진 바통을 스스로 옮겨 쥐었다. 이제 비로소 아내가 사는 법을 이해할 것 같다. |
| 박원명화 | 10-03-30 19:26 | | 박봉으로 살기엔 아내도 무엇인가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도와가며 산다는 게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첫번째일이라 생각됩니다. 함께하는 시간 늘 즐겁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 |
| | 강승택 | 10-03-31 17:13 | | 많이 어려웠지요. 그래도 월급봉투 앞에 놓고 부부가 이리저리 쪼개가며 사용처 정하고 서로 격려하던 그 시절이 정은 더 묻어났지요. 요새는 통장으로 직접 입금~ 일본 자주 가시는군요. 부럽습니다. 늘 평안하시길! | |
| | 임병문 | 10-03-31 09:04 | | 강승택 선생님,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사유에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반자로서 아내의 살아가는 모습에 애정과 신뢰와, 염려를 함께하신 선생님의 역할은 실로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그것들에 대한 평가와 결과 또한 당연히 두 분의 몫일 따름이겠지요. 부부란 일심동체라는 말이 그래서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잔잔한 감동의 글 잘 읽었습니다. | |
| | 강승택 | 10-03-31 17:20 | | 부부란 서로 부족한 부분은 메꾸어 주고 좋은 부분은 더 많이 드러나도록 격려해 주는 것, 그런 관계 아닐까요. 흠많고 결점 투성이 남편 모시고 지금껏 살아준 아내에게 늘 빚진 마음 뿐이랍니다. 임병문 선생님, 격려의 글 감사합니다. | |
| | 임재문 | 10-03-31 11:37 | | 아내의 역할에 함께하신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있네요.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합니다. 저도 아내의 역할에 동조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 | 강승택 | 10-03-31 17:23 | | 감사합니다. 지난 총회때는 먼발치에서 선생님 모습 뵙고 찾아가 인사도 못드렸습니다. 금년에는 가까이 마주앉아 짧은 대화라도 나눌수 있게되기를 기대 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
| | 이진화 | 10-04-02 00:47 | | 앞을 내다보는 사모님의 혜안에 박수를 보냅니다. 힘든 일을 마다 않으신 용기가 놀랍네요. 무조건 말리지 않고 잘 외조하신 선생님도 훌륭하십니다. 좋은 글로 자주 만나뵙고 싶습니다. | |
| | 강승택 | 10-04-02 22:01 | | 이진화 선생님,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입회하기전 작가회 회장을 역임하셨더군요. 그동안 선생님의 글 여러 편 읽었으면서도 인사도 못드렸습니다. 한참 뒤진 발걸음이지만 열심히 참여하겠습니다. 늘 강건하시길~ | |
| | 김정자 | 10-04-02 16:14 | | 강승택 선생님 이제사 선생님글을 읽었습니다. 신탄진 대목에서 선생님의 회원정보를 뵈오니 청주교대를 나오셨네요. 그러고 보면 청주하고 인연이 있으신것 같아서 가깝게 느끼며 댓글을 답니다. 제가 청주여인이거든요. ㅎㅎ
대단하신 사모님과 평생을 함께 하시네요. 사실 선생님들 사모님들이 그렇게 생활력이 강하시진 않으신걸로 전 기억이 되거든요 훌륭하신 사모님의 활동력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선생님께서도 너무도 애처가시구요. 잘 읽고 갑니다. 건강하시구요. | |
| | 강승택 | 10-04-02 22:14 | | 김정자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글 읽고 인사도 못드렸는데 먼저 격려 말씀 주시니 도리가 아닌것 같습니다. 회원정보래야 내놓을 것 없는 부끄러운 이력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뵙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 |
| | 박영보 | 10-04-10 22:56 | | "형님, 저는 한번 한다면 합니다". 박대통령 시해시 누군가가 한 말이 떠 오릅니다. 흔히들 말하는 단순한 억척이 아니고 어느 누구도 말리지 못할 신념을 가지고 계신 사모님 이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코피를 쏟으시면서도 자신이 정해 놓은 방향을 지켜 나가시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 |
| | 김희선 | 10-05-26 16:25 | | 신작수필란에 들어가야 하는것을 오늘 사무국장님으로부터 이제야 배웠습니다. 어떻게 글이 진행되는지 궁금증으로 읽었습니다. 대단한 여인의 손길,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하는 글입니다. 부부의 사랑이 느껴지는 감동입니다. 행복하사기를. | |
| | 강승택 | 10-05-26 23:38 | | 회장님께서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네요. 어찌어찌하다보니 컴퓨터와 친해질 시간이 많지 않으셨던 모양이지요.충분히 이해갑니다. 이제 배우셨다니 우리 회장님 목소리, 많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길 응원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