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산 대곡사 대웅전을 보노라면 인법당처럼 너무나 옛집 느낌 그대로이다.
벽사기능을 가진 귀면도 없고 단순 전통의 격자무늬 문틀만이 우리를 반긴다.
당연히 단층을 하지 않은 원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거부감 없이 법당을 대할 수 있는 것 같다.
“대곡사는 정상명, 노무현 등 이 나라 법조계를 주름잡았던 많은 분들이 거쳐간 곳이랍니다.”
무허 스님의 상좌이셨던 혜산 주지 스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다.
노무현 회고록에 실제 이 절이 기술되어 있다.
대곡사엔 빈대가 참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이었다라고.
그래서 시험치는 기도도량으로 유명한 모양이다.
이절이 통돌 위에 세워진 절이라 효험이 많다는 설명인데
통돌과 기도 영험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어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알 길이 없다.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대곡사길 80에 위치한 경북 의성 대곡사는
이규보의 대곡사 탐방시詩, 대곡사 다층석탑의 양식,
텃밭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후기 양식의 금동불상을 근거로
통일신라시대 말에서 고려 초기에 중건되었다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에 원래 있던 대곡사를 대국사(大國寺)로 창건했고
조선시대에 다시 대곡사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이렇게 말이 많은 것은 언제 창건되었다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혜산 주지 스님은 이 절은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등 3대 화상(三大和尙)이 직접 지어서 관리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 예로 삼화상 진영을 들고 있다.
또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존영이 있는 것은 호국 사찰로서도
그 면모가 있는 절이니 스스로 대단한 절임을 홍보한다.
그래서 혜산 스님은 이절을 옛 명칭인 ‘대국사(大國寺)’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한다.
숭유억불 정책의 절정기에 있던 영.정조 시대 어사 박문수가
이곳을 지나면서 어찌 대국인 중국을 사찰명으로 삼고 있느냐며
당장 대곡사로 바꾸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이 절을 대국사로 다시 환원해야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고 만약 그 근거가 확실하다면 당장이라도 바꿔야 마땅하리라.
하지만 현재까지 정설은 지공(指空) 대사가 원나라와 고려를 다니면서
불법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이며 처음 세운 목적에 따라
대국사라 명명했다가 정유재란 때 전소되어 선조 때 탄우(坦祐)대사가
대웅전과 범종각을 세우고, 숙종 때 태전선사(太顚禪師)가 중건하면서
이 지역에 100리나 되는 긴 계곡이 있어 대곡사로 개칭했다고 전한다.
범종루는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태전선사가 다시 중건했다고 한다.
원래의 범종은 예천 용문사에서 보관중이다.
왜 여기 종이 용문사에 아직 보관 중이어야 하는지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