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같은 액체… 위스키가 없는 삶이라니, 어휴!
심현희
하이볼, 하드셀처... 바야흐로 낮은 도수의 술마시기가 대세
집단주의적인 '부어라 마셔라'를 밀어낸, 홈술과 혼술의 시대
취향 존중, 낮은 진입장벽, 오래 보관하면서 맛의 변화 관찰하기
위스키는 '시간'을 마시는 것이다! 술이 취미가 되는 마법의 시간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위스키를 일러 ‘액체 햇살’이라 불렀다. 해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나? 위스키 없는 삶도 마찬가지지. 작가 마크 트웨인은 이리 말했다. “무엇이든 너무 많으면 나쁘지만, 좋은 위스키는 아무리 많이 마셔도 충분하지 않다.”
바야흐로 위스키 시대다. 이마트에 따르면 2022년 주류 카테고리에서 위스키가 처음으로 매출 1위 자리를 차지했다고 한다. 2019년의 순위 5위를 생각하면 놀랄 만한 일이다. 룸살롱에서 철철 부어가며 섞어 마시던 그 위스키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 일은 ‘쌍팔년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로 치부된다. 집에서 먹는 홈술, 혼자서 먹는 혼술에 더할 나위 없는 술로 모셔지고, 취향 맞는 친구 연인 지인 가족들끼리 오순도순 모여 마시는 술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누구는 가성비가 좋다 하고 누구는 가심비가 좋다 한다. 어쨌든 좋다는 얘기다. 시절이 아무리 하수상해도 위스키로만 한정하면 태평성대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이제 확고한 대세가 되었고(지못미 발렌타인!), 하이볼은 말 그대로 주류시장, 주류문화의 견인마라고 할 수 있다. 술에 진심, 술을 좋아해 주류 전문 기자가 된 심현희 작가가 위스키 보고서이자 찬가를 보내왔다. 배우이자 코메디언이었던 W.C.필즈의 말을 떠올리며 기사를 권한다. “뱀에 물렸을 때를 대비해 항상 위스키 한 병을 가지고 다니세요. 참, 작은 뱀도 항상 가지고 다니시고요.” [편집자 주]
12년산 스카치위스키에 진저에일을 섞고, 거기에 유기농 오렌지를 두 조각 더했다. 위스키잔으로도 명성 높은 핀란드의 이딸라 울티마 툴레에 담겼다. 잘 만든 하이볼은 예술적인 게 아니라 그 자체 예술이다. 사진=Kris Olin
2030도 아재들도 위스키로 헤쳐모여!
“위스키 원액 어디 없나요? 구할 수 있을까요?”
요즘 주류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하소연이다. “살 수만 있다면 위스키 원액을 구하고 싶다.”고 한다. 위스키 원액은 위스키 가운데서도 ‘벌크’로 가장 저렴하게 수입되는데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만큼 위스키의 인기가 뜨겁다는 얘기다.
이마트에 따르면 지난해 주류 카테고리에서 위스키가 처음으로 매출 1위 자리를 차지했다. 3년 전만 해도 위스키는 주류 매출 순위 5위에 불과했다. 대형마트나 주류전문점, 편의점에서 위스키 할인 판매를 하는 날이면 ‘오픈런’ 현상이 발생한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아재 술’로 불리던 위스키는 이제 2030이 열광하는 술로 탈바꿈했다. MZ세대는 왜 하필 위스키에 꽂힌 것일까. 그들이 좋아하는, ‘다양성’과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술은 와인도 있고, 크래프트맥주도 있는데 말이다.
하이볼 때문이다. 현재 위스키 열풍은 주류 시장의 메가 트렌드로 자리잡은 ‘하이볼’ 열풍에서 비롯됐다. 하이볼은 위스키나 진 등 고도수의 원주에 탄산수를 섞은 칵테일이지만 ‘위스키’를 원주로 한 하이볼이 가장 흔하다. 그래서 위스키 원액 품귀 현상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하이볼 때문에 주류 시장의 풍경까지 변화하고 있다. 수제맥주 양조장에선 생존을 위해 맥주가 아닌 하이볼을 생산하고 있고, 대부분의 외식 업장에선 소주, 맥주만큼 ‘하이볼’이 필수 주류 메뉴로 자리 잡았다. “왜 위스키인가.”라는 질문은 “왜 하이볼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1915년에 발매된 윌리엄 매케너의 노래 〈Friend Highball〉의 커버. 적어도 1915년에 이미 하이볼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이볼과 혼술 시대, 분위기는 갖추고 도수는 낮추고
서양에서 시작된 하이볼*은 먼저 일본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사케(청주)와 맥주를 주로 즐겼던 근대 일본인들은 독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1929년부터 일본 최초로 국산 위스키를 만들어 팔아온 산토리사(社)는 일본인들이 왜 도수가 높은 술을 꺼려하는지 분석했다. 원인은 ‘DNA’였다. 일본인 자체가 타고나기를 알콜 해독 능력이 썩 좋지 않았다. 일본에 사케, 소주, 위스키 등의 술에 물을 넣어 1/2 이상의 농도로 희석시키는 ‘미즈와리(水割り)’ 문화가 발전한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터였다. 뿐만아니라 1960년대 들어서는 글로벌 주류시장에 보드카와 라이트 럼이 등장한 이후 전통적인 ‘독주’의 위상을 지켜온 스카치 위스키의 인기가 하락하고 있었다.
*하이볼은 알코올을 베이스로 삼은 스피릿(고도수의 술)과 무알코올 믹서(주로 탄산음료)를 섞은 혼합 알코올 음료를 말한다. 스카치와 소다, 진과 토닉, 스크루드라이버(보드카와 오렌지 주스), 럼과 콜라 등이 유명하다. 역사가 오래된 가장 일반적인 하이볼은 스카치 위스키와 탄산수로 만들어진, ‘스카치와 소다’다.
산토리는 위스키 판매량을 어떻게든 늘려보기 위해 1970년대에 ‘하이볼 마케팅’을 고안했다. 탄산수와 얼음을 섞어 위스키의 도수를 누구나 마실 수 있도록 낮추는 것이 살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주력 위스키 브랜드인 가쿠빙 위스키를 하이볼로 만들어 마시면 맛있다는 광고를 하면서 하이볼 전용잔 등 상품까지 만들며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결과는 대성공. 진하고 독한 위스키 원주는 음식과의 페어링에 한계가 있지만, 하이볼은 어느 음식에나 어울렸기 때문에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졌다. 20년간 불황을 겪었던 일본의 위스키 시장은 하이볼로 인해 1980년대 초반 화려하게 부활했으며 하이볼 인기를 타고 일본의 위스키 시장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산토리는 이후 프리미엄 위스키 브랜드 ‘히비키’ 등의 상품을 론칭하면서 내수 시장을 뛰어넘어 글로벌 위스키 브랜드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하이볼이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건 2010년대 이후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 우리나라 특유의 ‘부어라 마셔라’ 하는 주류 문화가 점차 희석되고, 개인의 취향에 따라 술을 마시는 ‘홈술’, ‘혼술’ 문화가 퍼지면서 하이볼 시장이 급성장했다. 확실히 하이볼은 단체로 말아 마시고 만취할 때까지 폭음하는 술이 아니라 술을 가볍게 즐기길 원하고, 삼삼오오 모여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눌 때 곁들이고픈 술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하이볼에 가장 많이 쓰이는 산토리 가쿠빙(각병)의 황색 버전.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출시되었던 사양이다.
가벼운 술 즐겁게 마시기, 취하는 거 말고!
하이볼의 인기는 점점 가벼운 술을 선호하는 글로벌 주류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다. 맥주, 와인 등 발효주는 특히 지난 10년간 ‘물처럼 마실 수 있는 스타일’로 가고 있는 추세인데, 크래프트 맥주의 경우 마침내 홉의 향이 강렬한 인디아페일에일(IPA), 자극적인 신맛의 사우어 맥주 등의 시대가 끝나고 다시 ‘필스너(라거) 시대’를 맞이하는 모습이다.
와인 양조 트렌드 또한 오크 숙성을 지양하고, 오크 숙성을 한다 해도 오크 캐릭터가 잔잔하게 받쳐주면서 미네랄리티를 강조하는 캐릭터의 와인이 최근에 인기가 많다. 와인에 탄산수를 섞어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와인 칵테일을 아예 병입해 판매하는 생산자들도 나오고 있다. 또 미국의 젊은 세대가 하이볼을 닮은 하드셀처**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글로벌 주류 소비 트렌드는 확실히 ‘가벼운 술’이 대세다. 하이볼은 가벼운 술의 한 종류일 뿐이다.
**Hard Seltzer. ‘하드’(알코올 함유)와 ‘셀처’(탄산수)의 합성어로 저도수, 저칼로리의 탄산주류를 말한다. 과일 향료가 함유된 경우도 많다. 알코올 도수는 약 5도 정도이며 칼로리 함량은 상대적으로 낮다.
하이볼은 탄산이 들어가 음용성이 매우 뛰어나다. 고도수 위스키를 물로 희석한 것이라 바디감이 가볍다. 여기에 토닉워터나 레몬 등을 추가할 경우 기분 좋은 산미가 생긴다. 음용성과 산미는 술과 음식의 궁합을 따질 때 필요충분조건이다. 치킨, 생선회, 삼겹살 등 여러 안주와 잘 어울린다. 플레인 탄산수에 원주를 섞을 경우 맥주보다 탄수화물(당) 함량도 적어 가볍게 마시기에 더없이 좋은 술이다.
하이볼은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판매하기 편한 술이다. 칵테일이라고는 하지만 레시피가 워낙 간편해 인건비를 크게 들이지 않고 누구나 제조할 수 있다. 위스키 한 병으로 여러 잔을 만들어낼 수 있어 경제성도 뛰어나다. 원주로 고량주 하이볼, 전통 소주 하이볼 등으로도 응용될 수 있어 다양한 증류주 시장에 하이볼이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싱글몰트 위스키의 성지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위스키들. 위스키 매니아들마다 선호하는 브랜드는 달라도 아일라산을 좋아하는 것만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사진=jackmac34
또 하나의 유행, 싱글몰트와 아메리칸 위스키
하이볼이 아닌, 순수 ‘위스키 원주’ 시장은 어떨까? 국내 위스키 시장은 지역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맛과 향의 스펙트럼이 다채로운 스코틀랜드의 싱글몰트 위스키와 미국의 버번, 테네시 위스키 등 아메리칸 위스키가 리드하는 시장으로 완전히 태세 전환했다.
지금은 위스키가 ‘홈술’과 ‘취향’을 대표하는 술이 되었지만 201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위스키는 ‘밤의 마초 문화’를 상징하는 술이었다. 하지만 김영란법 시행 이후 유흥 시장 규모가 작아지자 위스키 업계에 암흑기가 찾아왔다. 시장 규모부터 반토막이 났다. 당시 유흥 시장에서 잘 나갔던 위스키는 ‘국산 위스키’라 불렸던 임페리얼, 골든블루 등의 브랜드였지만 지금 이 위스키 브랜드들은 각종 수입 위스키들의 인기에 치여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다.
국산 위스키는 영국 스코틀랜드 등에서 블렌디드 위스키 원액을 벌크로 들여와 국내에서 병입만 해 판매하는 것이다. 각종 고급 수입 위스키에 비해 맛과 향의 개성이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고, 이러한 위스키를 마셨다고 소비자가 SNS에 올려 자랑할 만큼 가치있게 평가받지도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는 국산 위스키로 그 누구도 룸살롱에서 ‘양폭’***을 10-10(텐텐)으로 말아먹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양주에 맥주를 섞은 폭탄주의 줄임말. 뒤에 나오는 텐텐은 맥주잔에 맥주 가득, 양주잔에 양주 가득 따라 섞는 것을 말한다. 지금 흔한 말인 ‘소맥’도 처음엔 ‘소폭’이라 불렸다.
잡지 《하퍼스 바자 코리아》2017년 10월호에서 한 기자는 위스키 기획기사에 이런 말을 붙여두었다. "(위스키는) 그냥 자유롭게 마시면 된다. 스트레이트가 독하면 물을 부어 마시고 그게 밍밍하면 진저에일이나 클럽소다를 섞어도 맛있다. (...) 이런저런 위스키를 마셔보고 자기가 선호하는 맛을 알아가는 것도 큰 재미다. 어느 분야든 ‘그레이드’의 세계가 아닌 ‘스펙트럼’의 세계로 접근했을 때 훨씬 행복해지기 쉬우니까." 스펙트럼의 세계, 넓고 다채롭고 평등한, 그래서 흥미진진한 위스키의 세계가 우리 옆에 있다. 사진=pexels.com
나만의 술왕국을 즐기는 법
술을 좋아하는 2030이 서양 위스키에 특히 열광하는 건 단순히 ‘나를 위한 소비’ 차원만은 아니다. 먼저 음주의 양보다 ‘질’을 중요시하는 이들은 많이 마시지 않아도 알코올을 충전시킬 수 있는 위스키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품종, 대량생산 시대의 음주 문화가 다 같이 만취해 우정을 쌓는 집단주의 문화였다면, 다양성과 취향의 시대인 지금은 개인이 선호하는 술을 사생활이 보장된 공간인 집이나 바에서 혼자, 혹은 취향이 비슷한 ‘소수’의 지인과 공유한다. 적게 마실 수 있으면서, 다양한 콘텐츠를 소비하고, 취향까지 찾을 수 있는 술로는 위스키가 적합하다. 와인과 맥주 또한 다양한 선택지가 많고 취미로 삼아 알아가기 좋은 술이지만 ‘술’보다는 음식에 더 가까워서 취기를 느끼려면 같은 술이라도 더 많이 마셔야 할뿐더러 생산지, 등급체계 등이 복잡해 진입 장벽이 더 높다.
가격 면에서도 위스키의 접근성이 더 뛰어나다. 와인이나 맥주는 발효주이기에 병이나 캔을 한번 오픈하는 순간 술이 변질된다. 사람에 따라, 주량에 따라 혼자 마실 수도 있겠지만 특히 와인은 혼술에 적합한 술은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맥주는 상미기한도 1년으로 짧다. 하지만 증류주인 위스키는 백년 이상을 보관해도 끄떡없다. 뚜껑을 열어 에어링이 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맛이 달라져 변화를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숙성년도가 오래된 고연산 위스키나 셰리 오크에 숙성된 위스키들이 결코 싼 가격은 아니지만 장기간 다채로운 매력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이점이며 이는 곧 가성비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스스로 모디슈머****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위스키의 매력이다. 위스키를 탄산수에 섞어 기호에 따라 레몬 등을 첨가한 것이 하이볼이다. 간단한 하이볼 레시피를 응용한다면 누구나 바텐더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위스키 소비를 부추긴다. 위스키뿐만 아니라 원주를 전통 증류주, 보드카 등으로 바꿔 만들어보는 재미도 있다. 자신만의 하이볼을 만들어 먹는다는 건 홈파티에서도 신나는 일이다. 공들여 구축한 홈바를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서로의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은 일상화된 놀이다.
****수정하다는 뜻의 modify와 소비자라는 뜻의 consumer의 합성어. 제조업체에서 제시하는 방식이 아닌 사용자가 개발한 방식으로 제품을 활용하는 소비자를 이른다. 한국에서 모디슈머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라면이다. 많은 사람이 포장지 뒷면의 표준 조리법 대신 자신만의 비법(제조법)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다.
이제는 위스키를 다루는 업장에서 하이볼을 주문하면 “어떤 위스키로 드릴까요?”라고 먼저 질문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됐다. 더 이상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에나 나오는 대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오고가는 대화가 되어버렸을 정도로 주류 시장은 다양해지고 성숙해졌다.
글쓴이 심현희는
블로터 생활경제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술 전문 기자가 되었다. 너무 당연하게도, 술에는 정도가 없다고 생각한다. '많이 마셔본 자가 맛을 아는 법'을 지론 삼아 어제도 마셨고, 오늘도 마시고, 내일도 마실 예정이다. 저서로는 《술꾼의 정석: 취향 속에서 흥청망청 마시며 얻은 공식》, 《맥주, 나를 위한 지식플러스: 맥덕기자의 맥주, 어디까지 마셔봤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