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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병이어 이적과 베드로의 신앙고백(6:1-71)
하나님 아들의 은혜로운 계시는 날카로운 전정 칼과 같아 교회가 열매를 맺도록 교인을 무섭게 정화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철저히 가르치시고 이들을 시련과 고난의 장 속으로 이끌고 가시는 것에서 나타난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는 칼로 다듬어져서 선한 열매를 맺는다. 자기 죄를 깨닫고 고통을 감내하고 회개를 통해 새 생명으로 거듭난다. 이것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잘려나간다. 이들은 교회에 충실히 다닐지라도 심판 때에 불살라질 가라지와 같다. 본 장에서 이러한 예가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계시가 깊어질수록 실망하고 예수님을 떠나지만, 제자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나간다.
하나님의 전정 칼에 의해 가지가 잘려나가는 고통을 견디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것은 그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을 알아갈수록 기쁨과 능력이 커져서 고통을 이기고 그분께 더욱 가까이 간다.
6장 전체 내용(6:1-71)은 원래 여러 사건으로 구성되었지만, 요한은 이 이야기들을 한 줄거리로 엮어서 기술했다. 이것은 이 사건들이 모두 그리스도와 영생이라는 주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도를 주로 분명히 고백하고 그분을 끝까지 따르는 자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6장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연구하는데, 후반부(60-71)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 중심을 이루므로 논쟁과 구분해 별도로 다룬다. 오병이어 표적은 상당히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표적이다. 표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할지라도, 표적이 주는 메시지를 영접하지 않으면 결국 떠나는 무리를 우리가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표적을 잘 이해하고 영접하여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소수의 제자도 보게 될 것이다.
A. 오병이어 이적과 그에 따른 논쟁(6:1-59)
오병이어 이적은 요한복음의 이적 보도 중에서 공관복음에도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이적 보도이다[1]. 보도가 중복된다는 것은 이 사건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이적의 중요성은 이적 자체보다는 이적이 주는 메시지이다. 예수님의 이적은 항상 중요한 의미가 담긴 메시지를 주므로 요한은 이것을 특별히 표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이 가리키는 표적이 무엇인지 찾아내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병이어 이적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으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다각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이 빚어낸 비극은, 유대인이 이 이적을 잘못 이해하여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기적 표적을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무리와 예수님 간에 길고 괴로운 논쟁이 이어진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유대인이 실망하여 예수님을 떠난다.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도 떠나고 단지 열두 사도만 남는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실망했지만, 진리를 찾는 이 사도들은 이번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분을 그리스도로 새롭게 고백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는 교회 내에서도 분리를 가져온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더욱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 있어 열매를 맺게 된다. 15장 말씀은 이러한 의미이다.
오늘날 번영 복음과 은사 운동이 영생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과 남미에 특히 심하다. 본문은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예수님은 자신을, 자기 피와 살을 주시고자 한다. 그러나 무리는 은사, 즉 썩어지는 양식인 빵을 원한다. 결국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은사인 예수님 자신은 무리에 의해 거절된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말씀 영접을 통한 진정한 삶과 영생을 가르치면 인기가 없고, 귀를 간지럽게 하는 거짓 약속, 기쁨, 평안, 안락함 등을 설교해야 사람이 모인다. 이러한 사람은 하멜른의 소설에 나오는 “피리 부는 사나이”(피리로 쥐 잡는 사람)의 피리에 취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과 같다.
우리는 본문 연구를 통해 독생자 그리스도의 영광을 다시 한 번 깊이 체험하여 예수님께 빠져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나이까? 당신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있나이다”(6:68). 그분의 영광을 모르면 이러한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
7.1.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다(1-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 보도는 공관복음서의 보도와는 상당히 다른 측면에서 보도하므로 내용에 차이가 있다. 그곳에서 생략한 것들이 이곳에서 기술되므로 본문은 공관복음에 좋은 보충이 된다. 5장 끝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신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갈릴리에 나타나셨다. 이것은 요한이 많은 사건을 의도적으로 생략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복음서를 보충하려고 했으므로 일어난 사건을 모두 보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후에”라는 말이 어떤 때를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5:1절의 명절이 9월에 있는 장막절이므로, 5장과 6장 사건 사이에는 약 6개월이 지났다. 왜냐하면 6장 사건은 유월절이 가까운 때인 대략 3월 말에 일어났기 때문이다(4).
2절에서 “큰 무리”가 따른다는 말은 지금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의 절정에 계셨음을 알려준다. 이 상태를 학자들은 “갈릴리의 봄”이라고도 한다(참조: 마 4:25; 14:14). 그런데 바로 오병이어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인기는 서서히 감소한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몇 달 후에는 칠병이어 사건이 따르는데 그때는 약 사천 명이 모였다(막 8:1-13; 마 15:32-39). 그리고 그 후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의 메시아 고백이 나온다(막 8:27이하와 병행 구절). 그런데 요한은 이 보도로써 이 중요한 신앙고백 사건을 대신한다.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 2:13절과 11:55절에도 이와 매우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요한은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맞이하신 세 번의 유월절을 언급한 셈이다. 6:4절에서 언급한 것은 이중 둘째 유월절이며,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일 년 전이다. 유월절은 우리 달력으로는 대략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에 있다. 이때쯤이면 동쪽 해안에도 풀이 나므로, 막 6:39절에서는 “푸른 잔디”가 있었다고 말한다.
요한이 그때가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한 것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실제로 그는 오병이어 사건을 유월절 사건과 연관 짓는다. 그러므로 요한의 보도는 공관복음서의 보도와는 초점이 다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은 바빌론 포로 생활이라는 큰 고난을 거치면서 갈수록 메시아 대망이 커졌고 특히 유월절에는 메시아 대망이 팽배하게 된다. 모세라는 민족의 영웅을 통해 조상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과 같이, 당시의 유대인이 모세보다 더 큰 영웅인 메시아를 통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꿈꾸는 것은 당연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2]. 그러므로 우리는 오병이어 이적을 체험한 무리가 예수님을 강제로 메시아로 만들려고 한 것(6:15)을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과 메시아의 오심을 연결하여 메시아가 그의 백성을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시되, 정치적 압제가 아닌 영적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 하셨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생명의 떡을 주시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메시아의 이적은 받아들이되 그에 따른 메시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지상에 있는 교회가 항상 직면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열두 제자는 이 메시지를 영접하여 영생의 말씀을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나아갔다. 우리도 이렇게 귀한 고백을 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출애굽 시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신다고 약속하시고 그대로 실행하셨다(출 16:4 이하). 그런데 예수님이 이와 비슷한 일, 즉 아무것도 없는 광야와 같은 지역에서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면, 그분은 하나님과 같은 전권이 있는 분이시며 이스라엘을 구하실 메시아시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실제로 이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영접했다. 예수님의 의도가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극은 그들이 메시아를 “빵을 주는 왕”으로 오해했다는 데 있다. 특별히 아래 두 구절이 유월절과 연관이 된다: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곳에 “잔디가 많다”고 했으므로 이들은 잔디 위에 편히 앉아 먹을 것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말세의 선한 목자에 대해 말한 겔 34:14절의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는 것이다: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이 예언을 성취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일은 예수님이 시 23:2절에 따른 선한 목자라는 특징적 표시가 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라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10:9-11).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이것을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유월절과 연관시키시는 것은 12절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낸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제자들이 빵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가져온 것은 당시 유월절에 먹고 마실 것이 일단 가장에게 주어지는 것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빵을 받으”시고 “감사기도”를 드린 것은 유월절 예식이 가장의 축복으로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분이 빵과 물고기를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신” 것 또한 가장이 유월절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음식을 먹는 모든 유대인들은 유월절 예식을 연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처럼 구약의 유월절 예식과 관련짓는 것을 통해 예수님이 나타내시려 한 것은 무엇일까? 그분은 첫 유월절 예식에서 애굽의 노예상태로부터 구속된 것과 같이 지금도 메시아적인 구속이 가까웠음을 나타내고자 하셨다. 이제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자기 백성을 사탄의 지배로부터 풀어주실 때가 왔다. 그동안 하신 예수님의 축귀와 치료 사역은 이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이적을 현장에서 체험하고 올바른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얼마나 감격했을까? 예수님은 나중에 성만찬 제정 때도 성만찬과 유월절을 연관시키신다. 그러므로 유월절, 오병이어 이적, 성만찬은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 유대인과의 논쟁에서 자기가 “생명의 떡”임을 강조하셨다(6:51). 그리고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성찬식을 제정하실 때도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오병이어 이적을 마지막 만찬과도 의도적으로 연관 지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3]. 또한 요한은 마지막 만찬 보도를 이 사건으로 대신했으므로 이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다. “감사기도 하시고”, “나눠 주시고”라는 말은 유월절 예식과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영적 의미에서 우리의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신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갈증도 채워주신다(“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우리는 매일 생명의 말씀으로 배고픔과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예수님이 “그들의 원대로” 주셨다고 한 것도 중요하다. 12절에서는 그들이 배부르게 먹었다 하고 13절에서는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축복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넘치도록 베푸신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것은 낙원에 관한 이야기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토록 고생하는 것은 왜 그런가(히 11:36 이하)? 그것은 고생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든, 우리는 이것이 가장 좋은 삶이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복된 삶이다. 우리는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감사함과 평안과 기쁨과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 불평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므로 떨쳐 버려야 한다.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는 보도는 의도적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시려는 의도로 “열두 바구니”만큼 남겨주셨다. 열두 제자가 나누어주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은, 말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시 일으키신다는 예언과 관련된다(참조: 사 49:6 이하; 60:4). 그리고 이를 통해 지금 메시아적 말세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공식적으로 열두 사도를 임명하신 것은 이러한 예언 성취와도 연관된다. 베드로가 가룟 유다가 죽은 후에 맛디아를 선출하여 사도의 숫자를 12로 채운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오병이어 사건을 잘 관찰하면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징이 있고, 이를 통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영육간에 풍성한 가르침을 받았다.
우리가 본 사건을 통해 실제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절대로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넘치도록 주신다. 우리가 굶어 죽고 순교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한다. 더욱이 지금은 메시아의 은혜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은혜의 시기가 왔다! 이에 따라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시대의 축복이 성취되고 있다. 이것이 이 표적이 유대인에게 주는 메시지다. 이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 은혜를 풍성하게 누려야 한다. 아멘!!!
7.2. 이적에 따른 갈릴리인의 반응(6:14-15)
갈릴인은 메시아가 일으킨 이 큰 이적을 보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이 이적에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주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하나님이 불쌍한 자기들을 돌아보시는 은혜의 메시아 시대가 드디어 왔다는 것이다. 그분은 각자 흩어져서 비참하게 된 양들과 같은 이스라엘을 모으시고 먹이신다. 새로운 시대가 왔다! 이것은 메시아가 우리는 죄와 마귀의 결박에서 풀어주시고 새 생명과 영생을 주신다는 강력한 메시지이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주셨다.
요한복음의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큰 은혜를 몸소 체험한 사람은 진리로 나와야 한다(“은혜와 진리”). 그분은 은혜를 통해 진리를, 영원한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이적이 그 기능을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에 이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본문에 나타난 이들의 반응은 우리에게 큰 경각심을 준다. 계시와 은혜를 체험한 인간이 그 계시를 얼마나 오해하고 오용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 후로 하나님을 오히려 오해하게 되어 하나님을 배신하는 경우이다. 하나님 나라가 왔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도록 나를 그분께 내어 드리지 않고 다른 것, 자기의 필요를 채워줄 것을 원한다. 이 사건을 통해 오늘날 왜 많은 교회가 세속화되고 타락했는지 그 이유를 배우게 된다. 그간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이 갈릴리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자기를 발견해야 한다.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4절은 무리의 첫 반응을 보도한다. 이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몸으로도 체험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차려주신 음식을 먹고 배가 불렀다. 이들은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던 조상과 같은 체험을 했다. 모세가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준 것과 같이 예수님도 광야와 같은 곳에서 오천 명을 먹이셨다. 이들은 모세의 예언이 분명히 성취된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신 18:15). 그러므로 이들은 감격하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고대하던 그 메시아께서 오셨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참으로”라는 수식어는 이들이 확신과 기쁨에 가득 찼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에서 절로 메시아 고백이 나왔다.
“그 선지자”란 모세가 예고한 메시아적 인물로 “두 번째 모세”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도 “그 선지자”냐며 물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1:21). 나중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그 메시아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7:40;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이들은 여기에 둘째 메시아 칭호를 붙였다: “오실 이”. 이 메시아 칭호는 시 118:26절과 단 7:13절에서 유래하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사용되었다(참조: 마 21:9; 막 11:9; 눅 19:38; 요 12:13; 또한 마 3:11; 11:3; 23:39; 요 1:15; 11:27).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갈릴리 사람들이 정확한 메시아 인식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메시아를 앞에 둔 이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두말할 것 없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메시아를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모세도 메시아를 예언한 뒤에 그분이 오시면 그분께 순종할 것을 가르쳤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그런데 15절에 나타나는 이들의 다음 반응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도 다르다: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이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메시아적 왕으로 선언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엄청나게 큰 권능이 바로 전에 그들의 눈앞에서 일어났는데, 어떻게 그런 분에게 강제 행사하려고 했을까? 메시아가 오셨으면 기뻐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는 일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곳에서 갈릴리인들에게서 열혈당원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는다”는 말에는, 이러한 믿음과 열성을 보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젤롯(열혈당원)의 잘못된 신앙관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해하지 못할 사건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이 낳은 결과물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루살렘 주민과 갈릴리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종교지도자들은 똑같이 율법적이었다. 막 3장에서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료했다고 해서 바리새인이 그분을 죽이려고 의논한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 이들은 이적을 보고서도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정도로 율법적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와는 달랐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지도자의 강한 지배력 아래에 있었지만 이들을 온전히 따르지는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주민들은 이들의 강한 통제 속에서 살면서 눈치를 보아야 했다(7:13). 그러나 갈릴리 주민은 다르다. 이들은 지도자들의 통제를 크게 받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늘 예수님 주위에 사람이 몰렸다(막 1:45; 2:13; 3:7; 4:1; 5:21; 6:2,44). 그러므로 이들은 열광주의에 빠지기 쉽다. 이러한 것은 예루살렘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항상 잘못된 방향으로 이해하거나 몰아가려고 했다(참조: 요 12:13; 18:33,37,39; 19:3,12). 무리가 지금 그러한 일은 한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여기에 물들었다(참조: 눅 19:11; 24:21; 행 1:6)!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들을 위해 돌아가심으로써 사람을 죄와 마귀와 죽음의 능력에서 구해내려고 하셨다(참조: 마 1:21; 20:28; 요 3:16-17; 19:30). 이러한 이유로 그분은 지금 무리를 피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재판 시에 고소자들이 그분이 전혀 원하지도 않은 일, 즉 “자기로 (정치적) 왕”(요 19:12)이 되려 했다며 고소한 것은 매우 악의적이라 할 수 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마 14:22-23). 예수님께서 ‘즉시’로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그곳을 떠나게 하셨다. 이것은 이들이 무리의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자기가 무리를 보냈다”고 한다. 즉, 예수님이 직접 무리를 분산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큰 위협을 느끼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 후에 예수님은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셨다고 한다. 이로써 예수님은 큰 위기에서 벗어나실 수 있었다. 열광주의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들은 십자가의 길을 미워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경 가르침을 통해 열광하기를 좋아하는 자기 생각과 감정을 바꾸어나가야 한다.
7.3.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다(16-21)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우리가 문맥 속에서 이 본문을 연구하면, 이것이 가장 은혜로운 본문 중의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죄인을 인격적으로 양육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 아들의 영광이 밝게 드러난다. 그분은 불신 때문에 시련에 처한 제자들(참다운 교회)을 도우러 오신다! 이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위로하시며, 더 깊은 가르침을 위해 준비시키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보살핌이 없다면 어떤 사람도 제자가 될 수 없고 구원을 얻지 못한다. 또한 이것이 제자들의 특권이다.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된 그 메시아시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어서 일어난 본문의 사건은 그분이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드러낸다. 이 두 사건은 전혀 다르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같은 목적을 가진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정치적 해방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위엄을 가진 분이시다. 제자들은 빨리 그들의 잘못된 메시아 기대를 바꾸어야 한다.
그 외에도 이 두 사건이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다른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을 연구하면서 살펴본다.
배경설명
급식은 저녁 무렵에 있었다(마 14:15), 제자들이 배에 올랐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무렵이다(“저물매”). 예수님이 제자들을 무리의 메시아적 열광에 물들지 않도록 분리해서 먼저 보냈다. 이후에 예수님은 홀로 남아 기도하셨다(막 6:46). 제자들의 배는 가버나움을 향해 출발했다. 출발한 지 어느 정도 지났으므로 어두워졌다. 달이 있으면 괜찮겠는데, 구름에 달이 가려진 것 같다. 그때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다. 그리스어 시제를 볼 때 바다가 계속해서 심하게 요동한 것을 알 수 있다. 17-18절은 그때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고”, “큰 바람이 불었고”, 계속 “파도가 일어났다”. 제자들은 엄청난 위기를 만났다.
교회에 미친 영향사
이 사건은 마 8:23절 이하의 폭풍을 잠재우신 사건(막 4:35 이하; 눅 8:22 이하)과 함께 자주 교회의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교회는 작고 연약해서 위험한 배와 같고, 교회가 있는 환경은 폭풍이 부는 바다와 같이 위협적이고, 시대의 경향은 폭풍이 이는 것과 같고, 예수님은 옆에 계시지 않은 것 같아서 살아날 전망은 어두운 것 같다. 막 6:48절에서는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저었다고 한다. 교회는 살아남기 위해 힘에 겨운 노력을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고통을 당해 소망마저 잃을 정도가 되어서야 제자들을 도와주신다. 이것은 교회가 고통과 환란 가운데서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을지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면 그분이 적시에 오셔서 도우신다는 가르침을 준다. 이를 통해 교회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 번 깨닫고 그분에 대한 신뢰가 자란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시는 방법이다. 이러한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 교회(신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올바로 알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교회는 죽은 교회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반드시 시련을 주신다.
제자들에게 주는 의미
그런데 이러한 상징은 유대인인 제자들에게는 더욱 인상 깊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바다”와 큰물은 이방인의 큰 무리(예: 사 17:12-13; 단 7:2-3)를 상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파괴적 권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참조: 시 18:4; 69:1-2; 74:13; 77:16; 89:9; 93:3-4; 104:6 이하; 욘 2:3 이하; 합 3:8 이하).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 잔잔하게 하시나이다”(시 89:9).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다를 다스리므로 그 어떠한 세력도 예수님의 교회(당시의 제자)를 삼킬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준다. 예수님이 이 일을 하신다면,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과 같은 위엄 있는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하셨으므로 제자들도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또 다른 계시가 필요했다. 이러한 면에서 이 이적은 상당히 적시성이 있다.
사건 경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이들은 배를 타고 5킬로미터 정도를 갔다. 막 6:47절에 따르면, 이들은 “바다 가운데” 있었다. 갈릴리 바다는 폭이 제일 넓은 곳이 12킬로미터이므로 이들이 “바다 가운데”에 있었다는 표현은 매우 정확하다. 바다 가운데서 제자들이 거센 바람을 맞아 매우 고생할 때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오셨다. 제자들은 멀리서 오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했다. 막 6:49절(마 14:26)에 따르면, 이들은 “유령인가 하여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정말로 두려워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심히 놀라고”(막 6:51) 두려워했을까? 막 6:51-52절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제자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이유는 그들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고 하는데, 마음이 딱딱히 굳은 이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마음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 계시하려는 것, 즉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요 어린양으로서 그들의 영생을 위해 자기 몸을 대속물로 바친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막 8:17절 이하에서 제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신다. 이 꾸짖음도 단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을 향하고 있다. 곧 있을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의 메시아 인식과 고백이다. 이렇게 오병이어 이적을 비롯한 여러 이적과 사건들이 이 중요한 메시아 고백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내니”라는 말은 그리스어 “에고 에이미”(나다, 나는 …이다)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도 사용하신 말씀이다(출 3:14). 그렇다면 어두운 밤에 바다 위에서 사나운 바람과 유령을 만났다며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나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친근하고 사랑이 가득한 말씀이다. 게다가 주님은 한 가지를 또 덧붙이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당시 상황을 잘 생각해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인지를 알 수 있다. 사실 제자들은 꾸지람을 받아도 마땅하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예수님은 광야에서 만나로 이스라엘을 먹이신 하나님과 같은 분이심을 계시해 주셨다. 예수님은 목자요 메시아시다. 이러한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고서도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두려워한 제자들에게는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위로하셨다. 그러므로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주 불신에 빠지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위로의 말씀이다. 헤어나기 어려운 자연의 폭력 앞에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환경의 압박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모든 시대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깊은 위로의 말씀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자주 의심하고 마음이 굳어지고 사랑이 없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꾸짖지 아니하고 오히려 위로하시며 다시 신뢰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의 모든 찬양과 존귀를 받으실만한 분이다. 예수님이 엄한 율법으로만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는 그 어디도 피할 데가 없다. 인간은 너무나도 완악한 죄인이라 예수님의 겸손하심과 사랑의 햇살을 통해서만 그 중심이 움직인다.
광풍이 가라앉고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는 말씀을 볼 때 떠오르는 한 구절이 있다: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07:29-30). 제자들은 그날 밤 게네사렛 바다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이 찬양시의 성취였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시 107편에서 말하는 그 주님이심을 보여준다. 어쨌든 이곳에서 예수님의 존엄함이 나타났다. 이는 모든 대적하는 권세를 잔잔케하시고 제자를 위로하시며 구원하시는 존엄이다. 그분은 오늘날에도 이적을 일으키시며 우리를 말할 수 없이 부드럽게 위로하신다. 이 사건이 제자들에게 또다시 깊은 인상과 깨달음을 주었을 것이다. 이로써 오병이어 사건 이후 무리의 선동,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반응 등으로 제자들의 마음에 생긴 앙금이 해소되었다. 사나운 물결과 함께 이들의 흔들리는 마음도 가라앉았다. 이렇게 해서 제자들은 이어지는 예수님은 엄청난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따라서 본 사건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생명의 떡에 관한 논쟁에서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깨닫고 메시아 고백을 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든 사람이, 심지어 가까운 제자들도 예수님을 떠날지라도 이들 열두 제자는 이와 반대로 확고한 메시아 인식에 이른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것이다. 우리도 비밀과 같은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양육의 의미
우리는 이러한 큰 계시가 단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사실이 유념해야 한다. 군중은 이적이 주는 큰 계시를 감당하지 못한다. 또 오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이 하신 모든 것을 관찰하고 말씀을 배우면서 신뢰관계가 깊이 형성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주어졌다. 그러므로 이들은 다음과 같이 증거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1:14). 또한 1:35-51에서 본 것처럼, 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좇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심성의 소유자였다. 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분 계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오해한다. 교회를 다닐지라도 헛된 우상을 좇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경고를 잘 새겨들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막 4:11).
[1] 요 6:15 이하의 바다 위로 걸어가시는 이적도 마태, 마가복음에 나오지만, 이것을 오병이어 이적에 딸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2] 쾨스턴베르거 “예수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로 기적적으로 음식을 공급한 것은 광야에서 모세가 만나를 공급한 일과 예수를 연결시키며 새로운 출애굽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232.
[3] 쾨스텐베르거 “예수가 떡을 떼어 축사하고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장면은 예수가 사역 마지막에 제정하는 주의 만찬을 예기하는 성만찬 이미지를 떠 올리게 한다”.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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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죄송하네요<핑게지만>
제가 나중에 천천히 읽어 볼게요
아멘 아멘
목사님 감사합니다
올리신 말씀으로 인해 제 영혼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