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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극동 공화국 내 스보보드니에서
붉은군대의 통수권 접수를 거부한
한인망명 독립군들이 포위 진압된 사건이다.
1921년 6월 27일에 극동 공화국 아무르 주 자유시(러시아어명: 스보보드니) 인근인 수라젭카에서
사할린 부대가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가 지휘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에게 진압을 당한 사건.
스보보드니는 한국어로 '자유로운'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므로,
지명의 경우 '자유시'로 번역할 수 있다.
한글로는 러시아어 표기법에 따라 보통 '스보보드니'로 적지만
강세를 반영한 실제 발음은(스바보드느이)'에 가깝다.
시베리아 아무르 주에 있는 자유시는
1920년 2월 볼셰비키 적군이 백군을 몰아내고 점령한 알렉세옙스크란 도시로,
소비에트 정부는 해방구의 상징으로 삼고자 자유시로 개칭했다.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도 불린다.
흑하는 아무르 강을 지칭하는 말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자유시 참변이라는 용어를 쓴다.
자유시에서도 벌어졌다고 교과서에 나와 있으나, 실제로는 수라젭카에서 발생했다.
러시아 연해주의 '의병'들은 독립군이 아니며, 한인계 러시아인 2세라는 썰이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연해주의 의병 또한 독립군이라 보고 있으며, 러시아 귀화인들 중에 적군에 들어간 인물도 있으나, 이는 소수라는 것이 현재까지의 견해다.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러시아 사회내에서 일정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귀화 한인들로서는 소비에트 적군편에 서는것을 꺼린 것으로 보인다.
내전에서 소비에트 적군이 승리한다면 사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이는 지금까지 애써 쌓아올린 자신들의 지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됨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장교 출신들은 대부분 적군편에 서기보다는 백군편에 서는 것을 택했다.
호르바트 백군내 한인부대에는 장교가 1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이들중 많은 수가 호르바트군에 들어가면서 진급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많은 수의 한인 장교들이 백군편에 섰음을 보여주는 방증자료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장교 출신으로 소비에트 적군편에 서서 빨치산 운동을 했던 한창걸, 오하묵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를 통해 시베리아 내전시기 소비에트 적군편에 서서 백군 및 일본군과 싸웠던 한인 빨치산부대 구성원들의 출신성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귀화하지 않은 한인, 즉 여호인이었다.
러시아지역 한인 빨치산부대의 근간은 연해주 지역의 기층민중들인 비귀화 한인들과, 간도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청년들이었다.
즉 러시아지역 한인들에게는 러일전쟁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여러 차례의 군사경험이 있었음에도, 그 경험들이 시베리아 내전시기 한인 빨치산부대의 활동에 미친 영향은 극히 부분적이었다.
부대에 미친 군사적 영향은 오히려 일본과 중국의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연해주로 온 군사 지휘관들이나, 간도에 설립된 여러 한인 군사 교육기관을 통해 군사적 소양을 쌓은 한인 청년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연해주의 한인들의 항일부대는 대부분이 독립군이었다.
이는 반공우익 성향인 권희영 교수의 논문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볼셰비키의 승리에는 파르티잔이라고 호칭되는 자발적인 민중들의 무장부대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파르티잔의 존재는 백군들에게는 분명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민중들을 선동하는데 보다 능숙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볼셰비키는 민중의 무장부대를 그들 편에 흡수하는데 성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인들에 의해 조직된 무장부대도 결국은 볼셰비키들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에 대한 약속,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던 한인들에 대한 해방의 메시지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인 무장부대는 만주에서나, 노령에서나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마다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일본군과 대규모의 전투를 벌이는 것은 한인 무장부대의 목표가 아니었다.
한인 무장부대는 우선적으로 무장역량을 강화해 나가면서 외교적 상황을 고려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였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된 이유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한인의 독립운동에 민족해방 운동의 지원이라는 명분하에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도 분명한 오해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인들로서는 민족해방 운동이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로서는 한인들의 민족해방 운동의 지원이란, 한인사회에 사회주의를 유포시키고 계급투쟁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문제는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당시 치타에 수도를 둔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소련의 정식 수립은 1922년이다.
러시아라는 호칭도 오류가 있는데, 당시엔 다른 지역도 국가명+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표시했는데, 이 국가들이 모스크바와 분리된 독립국가는 아니었다.) 극동공화국에서는 2개의 한인단체가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부른다.
상해파는 한인사회당에 기반했으며, 자신들의 한인조직에 조선인 빨치산 부대인 '니항부대'를 합쳐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를 만들었다.
상해파의 영수는 이동휘였으며,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상해파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경력이 있어 상해파라고 부른다.
민족주의, 독립 추구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한인사회당(1918.5.11) → 공산주의자그룹(1920.봄) → 상해파 고려공산당(1921.5)
니항부대는 독립군 부대이다.
니콜라옙스크 사건, 적백내전 당시 야코프 트랴피친의 민간인 학살에 연루되었다는 흑역사가 있다.
니항부대가 무정부주의자 트랴피친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인지, 사할린 부대에도 아나키스트 성향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이르쿠츠크파는 대한국민의회 계열 인사들이 주도했으며, 자신들 나름대로 자유대대(고려혁명군)라는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전로한인공산당(1919.9.5) →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1920.1.22) → 전로고려공산당 중앙총회(1920.7) →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1921.5)
이르쿠츠크파는 '노령 (러시아)파' 라고도 불렸는데, 상해파에 비해 민족주의 성향이 약했고 공산주의, 친러 성향이 강했다.
이후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출범하자 후원을 받게 된다.
이 극동비서부가 이르쿠츠크에 위치해 있어서 이르쿠츠크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코민테른은 상해파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헷갈릴 수도 있지만,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본부에서는 극동지역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기에, 이런 엇박자가 가능했다.
러시아 극동지역을 일임하려고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를 만든 것이니 당연하다.
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시베리아 극동으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유는 만주지역 내 활동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초 대규모의 항일독립군이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초토화 공격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 전투이후 일제는 토벌공세를 높여 경신참변과 같은 만행으로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독립군 입장에서도 일련의 대전투에서 무기, 탄약을 소진하여 현존 무력을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4~95
간도독립군은 러시아로 이동하기 전에 이미 일본군의 공격과 근거지 초토화 및 보급문제로 군대유지가 불가능해서 이미 해산한 상태였다.
그러나 러시아로 갈 준비를 위해 재집결을 한 것이었다.
이미 러시아로 이동하지 않으면 군사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해산한 아군사에게 고한다.
지난번 아대병을 해산한 것은 일시의 변법에 지나지 않고, 광복사업 성취하지 않는 한 그를 해하려서는 안 된다.
이제야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 충분하고 또 무기탄약은 제한없이 무료로 공급받을 것이다.
이래 와신상담 산야에 전전한 목우즐풍 영일없이 상하 서로 피를 철하고 맹약한 바를 지켜야 할 것이다.
김좌진과 홍범도가 1920년 12월에 발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78~79
이때 간도독립군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고 잘못 알려졌으나, 이것은 2009년 이후부터 부정되고 있다.
당사자인 독립군 회고록에도 없는 내용이고,(윤상원) 일본군도 유언비어라며 내부에서 부정하고 있다.(이숙화)
당사자인 독립군과 일본군 양쪽이 다 부정한다.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부대가 밀산에서 단일한 통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후 이동했다는 주장은 사실관계와 부합되지 않다고 본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6쪽
주로 서간도와 북간도 지방의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한인무장 독립군을 지칭한다.
사상과 종교(대종교, 천도교, 기독교, 천주교, 불교)가 다양했지만, 민족의 해방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이들이었다.
비교적 단결이 잘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1920년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했지만 성과가 없자, 민간인과 군인을 구별하지 않고 한국인 수만명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이로써 서간도, 북간도,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의 간도 한인 무장부대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북쪽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역인 흑룡강성 미산시(密山市)에 모였다.
이곳에 모인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 및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된 조직.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1919년 만주 북간도에서 조직.
대한독립군단의 주도 조직.
대종교 계열.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1919년 만주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에서 조직.
사령관 홍범도(洪範圖).
○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
1919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
기독교 감리교 계열.
단장 김규면(金圭冕).
○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1919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조직.
개신교 계열.
구춘선(具春先).
○ 혼춘대한국민회(琿春大韓國民會)
1919년 만주 혼춘에서 조직.
회장 이명순(李明淳).
○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1919년 만주 왕청현(汪淸縣) 봉의동(鳳義洞)에서 조직.
사령관 최진동(崔振東).
○ 의군부(義軍府)
1919년 만주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조직.
총재 이범윤(李範允).
○ 혈성단(血誠團)
1919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
단장 김국초(金國礎).
○ 야단(野團)
1919년 만주 길림(吉林)에서 조직.
동학의 한 교파인 청림교(靑林敎) 계열.
단장은 신포(申砲)로 일명 아소래(我笑來)로 불림.
○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1919년 만주 안도현(安圖縣) 내도산(內島山)에서 조직. 총재 이규(李圭).
○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한독립군단 결성을 위해 12월 밀산(密山)에 대한신민회의 대표로 김성배(金聖培)를 파견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洪範圖), 고문은 백순(白純)과 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은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은 김좌진(金佐鎭), 참모는 이장녕(李章寧)과 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은 지청천(池靑天)이었다.
군단 휘하에 상급부대로 여단을 두고, 제1여단에는 여단장 김규식(金奎植)과 참모 박영희(朴寧熙), 제2여단에는 여단장 안무(安武)와 참모 이단승(李檀承), 제2여단 기병대에는 기병대장 강필립과 중대장 김창환(金昌煥), 오광선(吳光鮮), 조동식(趙東植) 등을 선임하였다.
여단 아래에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으로 대규모 병력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대한독립군단은 대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과 피복, 군량과 여러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다.
러시아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회주의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켰다.
레닌 사회주의는 공동생산, 공동분배가 되는 체제를 지향했기에 공산주의라고도 부른다.
러시아 혁명을 이룩한 레닌의 공산당이 볼셰비키이고, 레닌주의 국제 공산당 연합이 코민테른이다.
영향을 받은 한인들이 공산당 조직을 결성한다.
크게 두개의 파로 나뉘어 경쟁했다.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 박애(朴愛), 전일(全一)이 중심이 되어 한인사회당을 만들었다.
볼셰비키의 원동인민위원회 의장 크라스토체코프의 지원을 받았다.
한인 공산주의 단체 중에서 유일하게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은 조직이 되었다.
정통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하는 편의적 공산주의였기에 상해 임시정부에도 참여했다.
상해 임시정부와 노선차이로 떨어져 나와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했다.
그래서 상하이파라고 불렸다.
대표적인 무장부대는 이항부대와 다반군대이다.
○ 박일리아의 이항부대
니콜라옙스크항을 근거지로 해서 붙은 이름.
○ 최니콜라이의 다반군대
하바롭스크 한인마을인 다반에서 구성되어 따온 이름.
1919년 9월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金哲勳)ㆍ오하묵이 중심이 되어 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을 만들었다.
스미야스키의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볼셰비키의 한인지부가 되었다.
볼셰비키 시베리아국 동방민족부 산하 고려부에서 한인 사회주의 운동을 총괄하게 되면서 이르쿠츠크가 한인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1년 5월 이들도 상하이파와 똑같이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하였다.
그래서 이르쿠츠크파로 불렸다.
대표적인 무장부대는 자유대대이다.
○ 오하묵의 자유대대
한인 빨치산 부대가 극동공화국 소속 특립한인보병대대가 되었다.
오하묵이 대장이었고 주둔지가 자유시였기에 자유대대라고 불렀다.
볼셰비키는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 중 누구의 손도 확실하게 들어주지 않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고려공산당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서로 대립하면서 코민테른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경쟁했다.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중이었다.
레닌의 볼셰비키를 중심으로한 적군(赤軍)과 군주제, 자본주의, 반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백군(白軍)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 내전을 적백내전이라고도 부른다.
시베리아에서도 적군과 백군의 대립은 이어졌다.
또한 러시아 흑룡주 정부가 독립하여 극동공화국이 되었고, 이 공화국은 볼셰비키 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외국군의 무력간섭이 겹치면서 연해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백군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1918년 4월에 일본은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백군을 지원하면서 연해주에서 독립 무장투쟁을 하는 공산주의 계열 한인 무장부대를 소탕하고자 했다.
공산주의 독립군은 적군(赤軍)에 협조했다.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적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백군을 격퇴시켰다.
일본군은 1920년 4월 4~5일 야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모든 볼셰비키 기관과 신한촌을 비롯한 한인 밀집지대를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기관과 적군이 일본군을 피해 북방으로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의 한인 무장부대도 근거지를 옮길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볼셰비키 세력이 강성한 극동공화국의 자유시로 향했다.
그곳에는 극동공화국 소속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한인 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연해주 한인 무장부대는 이만군대, 다반군대가 대표적이었다.
이만군대는 사령관 김표돌, 부사령관 박개서와 김덕보로 이루어져 있었고, 다반군대는 사령관 최니콜라이가 이끌고 있었다.
코민테른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었다.
지원이 필요했던 대한독립군단은 흑룡강주 밀산에서 겨울을 나고는 러시아-만주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향했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김좌진이 자유시 합류를 반대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믿을 수 없으므로 다시 간도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볼셰비키의 적군은 대한독립군단을 흡수하여 백군과의 내전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대한독립군단은 지원이 절실했기에 계속 진군했다.
연해주와 흑룡강 일대에서 한인 무장부대로 활동하던 문창범, 한창해의 도움으로 대한독립군단은 만주-러시아 국경 하천인 우수리강을 넘어 안전지대인 연해주 이만(Iman: 현재 러시아의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하였다.
극동공화국 소속 자유대대의 오하묵은 자유시에 대한독립군단을 위한 군대주둔지를 마련할 테니 이곳으로 집결하기를 권했다.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대한독립군단 소속 한인 무장부대들은 자유시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자유시로 먼저 들어온 대한독립군에게 공산당을 위해 싸워달라고 요구했다.
대한독립군이 이를 거절하였다.
적군은 대한독립군을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무장해제를 시켜버렸다.
그러나 김좌진은 이를 미리 알게 되었고 부하를 거느리고 극비리에 이만에서 다시 만주의 간도 지방으로 돌아가버렸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부대를 살펴보면, 우선은 간도지역의 독립군부대가 주축인 대한독립군단은 최진동의 총군부,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독립군, 서일의 군정서가 있었다.
러시아 지역의 연해주 한인 무장부대들로는 김표돌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박일리아의 이항군, 오항묵의 자유대대, 박그리골리의 독립단군이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이 자유시에 집결한 궁극적 목적은,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 부대들이 힘을 합쳐 단일한 조직 아래 대일항전을 전개하려는 것이었고, 적군(赤軍)을 도와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자치를 보장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자유시에 모인 한인 무장군대는 크게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독립군단과 공산주의 계열의 연해주 및 시베리아 한인무장 세력이었다.
대한독립군단은 공산주의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주도권은 공산주의 계열의 한인무장 부대가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계열의 무장세력은 2개로 나누어져 한인 연합부대의 통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는 박일리아의 이항군대로 대표되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는 오하묵의 자유대대로 대표됐다.
우리나라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기 전에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 상해의 임시정부까지 총 3개가 있었다.
상하이파는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했고, 이르쿠츠크파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다.
자유시는 극동공화국 땅이었고,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 소속 부대였기에, 한인 무장부대는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에 편입이 되어야만 했다.
이때 상하이파 박일리아의 이항군대가 자유대대 편입을 거부하고, 이를 극동공화국 한인부에 알렸다.
당시 극동공화국 한인부는 상하이파 인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국민의회나 자유대대와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박창은, 그리고리예프를 파견하여 극동공화국과의 협의하에 주도권을 차지하려 하였다.
박일리아의 이항군대를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로 만들어, 모든 한인 무장부대를 밑에 두려 했다.
하지만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다가 실패하며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한인부는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했다.
박일리아는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이항군대와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간도에서 온 독립군이 주축이던 대한독립군단도 자유시에서 강제로 내보냈다.
이때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여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의 지방수비대로 격하되어 강제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 부대에 대한 통수권은 상해파와 박일리아가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자유대대를 이끌었던 오하묵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오하묵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동양비서부에 가서 한인 무장부대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코민테른은 극동공화국을 조종하고 있었기에 충분한 힘이 있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와 오하묵의 손을 들어주었다.
동양비서부는 임시 고려혁명군 정의회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관에는 오하묵, 군정위원으로는 김하석, 채성룡을 임명하였다.
박일리아는 이에 맞서 한인 군사위원회(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921년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한 칼란다리쉬빌리는 7일 자유시에 있는 전 부대를 소집하여 자신이 고려혁명군 정의회 총사령관임을 선포했다.
8일 박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대한독립군의 홍범도와 안무의 군대는 명령에 따라 자유시로 들어갔다.
그러나 박일리아는 임시 고려혁명군 정의회에 계속 반항했다.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의 연대장 그리고리예프까지도 칼란다리쉬빌리에게 투항했다.
칼란다리쉬빌리는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에는 상하이파 뿐만 아니라 간도에서 온 대한독립군 부대도 함께 있었다.
간도 독립군들이 시베리아 극동으로 피난을 오자, 현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은 몰려오는 한국독립군을 “정치적 이민자”로 규정하며 ‘무장해제’ 하라고 단호하게 요구했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1월 3일
1.
남쪽에서부터 중립지대를 거쳐 왔거나, 중국 영토로부터 왔거나, 제2 아무르군 관할지역에 온 모든 한인부대를 즉각 무장해제할 것을 명령한다.
이 경우 무력이라는 가장 단호한 수단도 동원 가능하다.
무장해제는 완벽히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총포류나 도검류를 하나라도 남기지 않는다.
2.
한인 무장부대를 무장해제한 후에 구역 책임자들은 한인들이 자유시민의 완전한 권리를 향유하는 정치적 이민자로서 갖는 일반권리에 의거해, 스스로 자신의 거주장소로 선택한 먼 후방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차량이나 마차들을 즉각 요청한다.
3.
무장해제를 실행하는 책임자들은 즉각 모든 무기를 목록화 하여 각 사단이나 제2군의 포병보급 부서로 보낸다.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임시 직무대리 뷔로프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2~53
그런데 일부 한국독립군들은 제2군을 무시하고 무기를 가지고 넘어가려고 했다.
독립군의 위기에서 타국가의 영토에 이동하는 처지인데 일부 독립군은 현지 지휘관의 무기 양도 요구를 거부하고 시베리아 극동에 들어가려 했다.
독립군이 현지지휘관의 요구를 거부하며 시베리아 극동에 접근하자, 제2군사령관은 단호하게 차단하며 한국 독립군에 대한 조치를 중국마적(홍후즈)에 대한 조치와 동일하게 취급했다.
중국마적(홍후즈)과 마찬가지로 한국독립군도 절대 현지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막으라고 명령하며, 현지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에는 통행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현재 지역에 들어온 독립군에게는 무장해제 거부하려면, 만주로 가라고 요구한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3월 9일
1.
한인부대들이 무기양도를 거부할 경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즉각 무장해제 하라는 금년 1월 3일자 제2 아무르군 각 부대에 대한 명령18호를 반드시 집행할 것을 확인한다.
만약 한인부대들이 무기양도를 단호히 거부한다면, 군사활동을 개시하여 길을 차단하여 그들이 우리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용인하지 말라.
반대의 경우, 그들에게 우리 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떠나라고 제안하라.
2.
아무르 국경지대에 출현한 무장 홍후즈 부대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 동원을 포함한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한인 부대들에게 대해서도 그 지도부에 동일한 조치를 취하라.
우리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 범죄분자들이 유입되지 않도록 통행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각 경우에 관해 군사령부에 즉각 알려야 한다.
제2군사령관 파블로프
군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쉬콜린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4~55
현지 군인들이 제발 오지 말라고 계속 요구하는데도 2개월 이상이나 국경지역에서 요구를 무시하며 무장하고 들어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게 압권이다.
이런 실랑이 끝에 결국 김좌진ㆍ서일ㆍ이범석ㆍ나중소 부대는 다시 만주로 되돌아갔다.
되돌아가지 않은 군인들은 자유시로 이동했고, 그 이후 양도했던 무기들을 되돌려 받았다.
윤상원, 2010, 170~171; 백기인·심헌용, 2017, 95~96쪽
이렇게 들어온 독립군들에 대한 관리를 맡은 것은 원래 상해파였다.
이유는 상해파가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를 통해 극동공화국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전한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한인 부대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고, 자유시로 이동해온 간도 독립군 상당수는 이전 재러 한인독립군과 함께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로 들어갔다.
자유시엔 1921년 1~3월에 도착한 연해주 출신 한인 빨치산 부대인 이만군대ㆍ다반군대ㆍ니항군대ㆍ자유대대ㆍ독립단 군대와 북간도 밀산을 거쳐 온 최진동ㆍ안무군대의 독립군부대,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홍범도ㆍ이청천 부대들이 집결한 상황인데, 이 중 니항부대가 극동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결성하였다.
반면 오하묵이 주도한 자유대대는 니항부대와 대한의용군을 거부했다.
대한의용군=특립 사할린 빨치산부대이다.
이후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마자노프란 마을에 집결하였다.
그런데 당시 독립군 각 부대들은 "자기들의 장교에게 스스로 그 지휘를 원하고, 다른 군대의 장교는 일면도 없는 까닭에 지휘를 받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독립군들은 타민족의 영토에 들어가서 본인들의 장교에게만 지휘를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1921년 1월 설치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동양비서부)가 4월부로 러시아의 동방정책 결정권을 극동공화국으로부터 이양받았다.
극동비서부(동양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를 후원하게 되는 기관이다.
이러한 결정권자의 변화로 인해, 한인부대 관련 정책이 일부 바뀌면서 상황은 더욱 혼란하게 된다.
1921년 3월, 이르쿠츠크파는 고려혁명군 정의회를 조직하고, 자신들 산하의 자유대대(고려혁명군)를 중심으로 한인 부대들을 통합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와의 제휴를 통해 시행된 것이었다.
이후 극동비서부가 동방정책 결정권을 가지게 되자,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만 믿고 한인 부대들을 통합하고 있던 상해파와 사할린부대는 멍하게 된다.
슈먀츠키는 한인부대를 가능한 빨리 극동공화국으로부터 벗어나서 조선 쪽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으며, 무장부대들을 통합하기 위해 창설된 고려혁명군 정의회의 위원장으로 조지아 출신인 깔란드라쉬빌리를 파견하였다.
깔란드라쉬빌리는 극좌 무정부주의자로서,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편이었다.
‘극동의 나폴레옹’을 꿈꾸던 깔란드라쉬빌리는 슈먀추키와 이르쿠츠크파 빨치산 부대장 오하묵, 최고려와 함께 한국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공공연하게 벌이려고 했다.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의 정세 오판과 사욕이 빚은 비극. ‘자유시 참변’의 진실
이러니 당연히 부대통합 문제로 둘 간에 갈등이 심해졌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소비에트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21년 5월에 각각 독자적인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기반한 고려공산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통상 지칭하며, 대한국민의회에 기반한 고려공산당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통상 지칭한다.
이런 상황을 거치며 당시 한인 부대들은 자연스럽게 두 편으로 나뉘었다.
전한군사위원회 관할의 사할린부대 병력을 총 1,770명, 고려혁명군 정의회 소속의 고려혁명군은 1,972명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홍범도 부대는 원래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 소속이었다가 나중에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갔는데, 이 때문에 둘 사이의 세력균형이 무너져서 자유시 참변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애초에 한인부대 통합 권한이 처음에는 대한의용군에 있었다가, 이후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갔으니 그에 맞춰서 소속을 옮기는게 어찌보면 당연하긴 하다.
상황은 타민족 무장 독립부대를 받아들인 극동공화국 정부와 소비에트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간의 주도권 갈등이 거세지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이때 홍범도와 최진동 그리고 안무부대가 전체 한인부대의 통합을 위해 이르쿠츠크파에 힘을 실어주자, 대한의용군의 상해파가 북간도로 회귀한다고 결정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7
그런데 갈등의 소지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무장독립군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려 했는데, 현지 극동공화국 농민들은 협조할 의사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현지 농민들에겐 무장독립군을 위해 식량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할린 부대의 중심인 니항 부대(니콜라옙스크 부대)는 이미 니콜라옙스크 사건이라는 대량학살과 폭력으로 유명했다.
사할린 부대는 현지 농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했다.
마자노프에서 독립군의 폭동과 약탈이 벌어지기도 했다.
독립군들은 식량과 물자조달을 위해 극동공화국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현지 극동지역 농민과의 대립이 극에 치달았다.
현지 극동공화국 지역의 농민들은 자신들을 약탈해가는 무장 독립군에게 분노하며 현지 간부들에게 호소와 항의를 했고,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져서 독립군과 현지 극동공화국 농민 사이의 전면적 무장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되었다.
자체 식량이나 둔전 없이 자유시로 온 독립군이 현지 간부들과 농민들의 비우호적인 상태로 현지에 계속 주둔한다면, 당연히 굶주림에 의한 약탈과 이에 따른 갈등이 쌓일 수 밖에 없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극동공화국에서는 칼란다리쉬빌리를 파견했다.
칼란다리쉬빌리는 아나키스트 성향이 있었다고 하며, 적백내전에서 적군 편에서 싸운 지휘관이다.
도착한 칼란다리쉬빌리는 1921년 5월 자유대대 및 현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사할린부대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농민약탈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미 자유대대로 통합하라고 지침이 내려온 상황인데, 사할린부대가 계속 버티는 것은 레닌의 모스크바 정부와 달리, 현지 극동공화국의 지도부, 관료, 군인, 농민 입장에서는 불편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독립군은 민간인 무장단체이며 타국에선 위험한 집단인데, 타국에서 통제를 무시한다면 해당 지역에서 가만히 두는 게 오히려 이상하고 생각해보면, 무장해제 거부가 황당한 행위다.
남의 땅 들어가는데 무장 그대로 하고 지휘는 받기 싫다고 하는 것이니, 그 나라 입장에선 분노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결국 칼란다리쉬빌리는 1921년 6월 28일 사할린부대를 강제 진압해 무장해제 시키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28일 자유시 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은 무장해제 명령에 불응했고, 자유시 수비대 29연대는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같은 날, 오후 4시
칼란다리쉬빌리가 이끄는 소련의 적군과 오하묵의 자유대대가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와 대한독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관총, 장갑차, 대포를 이용해 몰아부쳤다.
독립군 뒤쪽에는 강이 있어 도망가지 못해 피해를 더욱 키웠다.
독립군의 사상자는 대략 최소 36명에서 수십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970명은 포로가 되어 볼셰비키 혁명군으로 편입되었다.
사망 36명, 포로 964명, 병자로 불참한 자가 19명, 박일리야가 데리고 도망한 자 34명, 그외 59명 행방불명이었다.
무장해제를 집행한 군대는 사망1명, 29연대 사망 1명이었다.
"무장해제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군대 병사들이었음"으로 사망자 중 간도독립군이 대부분인 것은 맞는데, 간도 독립군인 허재욱의 의군부는 전체 간도독립군 중에서는 소수였다.
홍범도, 안무, 최진동, 이청천(지청천), 대부분 간도 독립군은 이미 수라젭카에 없었다.
칼란다리쉬빌리의 명령을 이행하여 자유시로 미리 들어왔던 홍범도, 지청천도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게 되었다.
상해파 부대는 무장해제됐지만, 현지의 관료들과 군인들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무장해제 계획을 주도했던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가 상해파 부대에게 감동을 받아 무장해제를 반대하고, 무기를 돌려주기까지 한것이다.
그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부대와 재무장한 한인 유격대는 주둔지의 현지인들을 상대로 폭력과 약탈을 일삼으므로, 현지의 군인, 관료, 농민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자유시 참변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는 극동공화국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극동공화국의 지도자가 모스크바의 레닌에게 항의한 전보에 의하면, 현지 지도부는 이르쿠츠크파의 무모한 한국해방 전쟁과 한인부대의 만행에 진영구분 없이 모두 분노하며 항의했음을 알 수 있다.
독립군과 극좌 공산당 부대의 전쟁범죄, 독립군의 세력갈등, 러시아 공산당의 급진파와 독립군에 의한 일본의 도발 정당성이라는 문제 모두가 극동공화국의 관료와 군인들, 힘없는 농민 자신들에게 위협적이었다.
한국에선 흔히 독립군과 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만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현지의 관료, 군인, 주민들에겐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러시아 공산당의 급진파와 한인 독립군 모두가 재앙이었고, 그들을 지원한 레닌의 모스크바 정부의 입장에 항의했다.
수라젭카의 진압으로 대한의용군(사할린대대) 소속 병사 약 864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르쿠츠크파의 주도로 이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이루어졌는데, 홍범도가 이때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고 하며, 당시 발표된 상해파 규탄 성명도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지청천, 간도 독립군 지도자 27명의 명의로 되어 있다.
하지만 홍범도, 최진동은 이후 1922년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해 이르쿠츠크파를 살인자라고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이르쿠츠크파가 자신들의 동의없이 성명서에 이름을 넣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주미희)
이로 미루어 볼때 간도 독립군들은 사태 무마를 위해 이르쿠츠크파가 내세운 얼굴마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이므로, 윤상원 교수의 연구결과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해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결에서는 이르쿠츠크파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동휘가 1921년 11월 직접 블라디미르 레닌과 면담하여 '11월 결정서'를 도출시키면서 상황은 또다시 반전했다.
'11월 결정서'는 기본적으로 자유시 참변의 원인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모두의 책임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제1항에서 코민테른 국동비서부(동양비서부)가 이르쿠츠크파를 편파적으로 원조해 충돌을 심화시켰다고 비판했다.
또한 양파 동수로 연합간부를 구성할 것과 상해파 인사 80여 명을 석방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로써 두 고려공산당의 각축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 되었다.
이후에 발표된 '4월 결정서'에서도 모스크바는 상해파에 유리한 결정을 내려줬다.
하지만 이후의 상황을 보면 결국 이르쿠츠크파가 우세해진다.
자유시 사변 이후 사건으로, 중국군에 의한 김좌진 계열 군대 무장해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김좌진 계열이 김규식의 군대가 러시아 농민 4인을 총살한 사건으로 무장해제 당하려 하자, 목능현으로 도망갔다가 중국군에게 무장해제 당한 사건이다.
러시아 농민 4인 살인사건은 일본의 문서와 고려인 회고록으로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이르쿠츠파와 상하이파 간의 공산주의 권력다툼에 대한독립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참변이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달후 밀산에서 자살했다.
이범석, 김홍일,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 이만으로 가지않고 만주에 남아 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돌아왔기에 병력을 보존할수 있었다.
홍범도와 같이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지청천은 그곳에서 오하묵과 함께 고려혁명군 (1921.8) 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고려혁명 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소련 당국이 학교 교육방침을 문제삼아 지청천을 체포했으나, 지청천은 동년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이 극심해졌고, 코민테른이 강제로 이들을 해체시킨후 1922년 1월 극동총국 산하 꼬르뷰로를 설치하여 한인 공산주의 세력을 통일시켰다.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주의 독립군 거의 대부분이 공산주의인 이르쿠츠크파 및 상해파에 등을 돌렸다.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는 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는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
독립운동이 내외부적으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예다.
이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고 설명하였다.
반면에 다른 교과서에서는, 소련 영내의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붉은군대 (적색군, 혁명군) 와 하얀군대 (백색군, 반혁명군) 의 내전에서 적색군(赤色軍)을 도왔는데, 이것은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백색군 (白色軍, 백군) 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였다.
자유시 참변은 사실상 한인 공산주의 양대 단체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vs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갈등과 권력투쟁이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사상자는 박 그리고리의 독립단군와 허재욱의 의군부에서 많이 나왔으니, 적군(공산주의) 에 가담한 한인(韓人) 독립군 간에 서로 총을 겨누는 일이 일어난 사건이라, 이 사건을 한인 간에 최초의 동족상잔 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고려군정의회가 극동공화국군을, 소련군을 끌여들인 이유에 말이 무성하다.
이 모든것이 소련의 음모라는 식으로 치부해버리리며, 소련을 문제의 근원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2017년 6월 9일, 자유시 시장과 아무르 주 부지사와 스보보드니 마을 주민, 홍범도 장군의 손녀가 참가한 가운데 자유시 참변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 이라고 써져 있다.
위치는 스보보드니 외곽의 작은마을 입구에 있다.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 멸망, 러시아 내전발생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
일본 군이 하얀군대를 돕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동했지만 붉은군대와 싸우던 미국과 체코슬로바키아, 그외의 연합군이 철수함.
일본국회가 러시아에서 일본군도 철수하기로 결의.
3·1 운동 발생
니콜라옙스크 사건.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있는 조선 항일 무력단체들을 토벌하기로 함.
일본군 19사단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군을 공격.
봉오동 전투 발생.
최진동장군이 이끄는 북로독군부가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과 싸워 크게 이김.
최진동장군,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침.
일본군 21사단은 남쪽의 서로군정서군을 공격.
연이어 대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 개시.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로 인해 독립군은 전략상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동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킴.
병력은 약 3,500명 정도.
대한독립군단이 러시아 연해주 자유시로 진입.
분산된 모든 독립군들을 자유시로 불러모음.
수많은 부대가 총집결한 대한독립군단 내부에 군권장악과 관련 권력투쟁이 발생함.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의 소수파인 공산주의자와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공격함.
자유시 참변 발생.
분산되었던 조선의 독립군들이 모두 모여서 3,500명의 대규모 부대를 이루어 놓은것을 적군(赤軍)에 의해 사살, 부상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감.
탈출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연해주 지방의 조선독립군 세력은 모두 와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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