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시의향기 - (837) 우리는 묘비명을 뭐라고 쓸까? -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시인 서홍관

[화룡이(이창모)]

우리는 묘비명을 뭐라고 쓸까? -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네이버블로그/ 함형수 - 해바라기의 비명 (碑銘)

그때는 고등학교 시절이었고, 나는 몹시 외로웠다. 전주역에서 여수로 내려가는 전라선 완행열차 기적 소리가 밤하늘을 가르면, 나의 영혼도 흔들렸다. 기차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가고 싶었고, 오대양 육대주를 배를 타고 돌아다니고 싶었고, 얼굴도 모르는 소녀와 대화를 나누는 상상을 했지만, 현실은 책상에 앉아 영어 단어를 암기해야 했고, 안 풀리는 수학 문제를 풀어야 했다. 답답할 때마다 책상 서랍에 넣어 놓은 유치환과 서정주와 한용운 시들이 나의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었다.

뉘라 알랴!

하마도 터지려는 통곡을 못내 견디고

내 여기 한 개의 돌로

적막히 눈 감고 가부좌하였노니.

                        ―유치환, 「석굴암대불」 부분

유치환의 시에서는 우주와 대결하는 듯한 비장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서정주의 시들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유장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예민해진 나를 달래주었다.

바보야 하이얀 민들레가 피었다.

네 눈썹을 적시우는 문둥병의 하늘 밑에

히히 바보야, 히히 우습다.

                ―서정주, 「민들레꽃」 부분

나도 중간고사고 뭐고 다 때려 치고, 문둥이가 되고 바보가 되어 보리밭을 마구 달리고 싶었다.

누님, 눈물겨웁습니다.

이, 우물 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

다수굿이 젖어있는 붉고 흰 목화(木花) 꽃은

누님, 누님이 피우셨지요?

                ―서정주, 「목화」 부분​

임시 실패의 두려움 속에서 나를 몰아붙이며 낑낑대었지만 막상 대학입시를 보는 날은 편했다. 1977년 대학에 들어가니 인생이 끝난 게 아니고,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 입시에서 벗어난 해방감은 잠시였고, 유신 말기의 억압 속에서 나는 목표와 지향점을 상실했다. 세찬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 『대학작문((大學作文)』 책에 함형수(咸亨洙)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시인의 시가 적혀 있었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함형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비명(碑銘)’이라는 것은 한사람의 인생을 요약해서 새겨놓은 글을 말한다. 그런데 이 시인은 자기 무덤 앞에는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한다. 자기 인생은 차가운 빗돌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대신 시인은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고 하고,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리고 푸른 보리밭 사이에는 날아오르는 노고지리가 있어야 한다.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하던 시인의 화려한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고, 푸른 보리밭 사이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는 아직도 날아오르는 시인의 꿈을 상징한다.

나는 이 짧은 시를 곧바로 외우고 다녔다. 나도 내 인생이 화려한 사랑과 날아오르는 꿈으로 요악되기를 희망했던 것일까? 미팅에 나가면 여학생에게 이 시를 읊어주기도 했다. 당시 여학생에게 보낸 편지가 송두리째 반송되기도 한 것을 보면, 나의 연애전략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함형수라는 시인은 대체 누구일까? 그는 1916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났다.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936년 가난 때문에 다니지 못하고, 그해 11월 서정주와 함께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이 되어 「해바라기의 비명」을 발표했다. 그는 이후 노동자 숙박소 등을 전전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당시 서정주도 만주로 건너가서 함형수와 우정을 나누었다고 하는데, 함형수는 만주에 순회공연차 온 여배우와 동거생활을 하였으나 그녀가 젊은 남자와 도망쳐버리자 비탄에 빠져 폐인처럼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 북한에 들어갔다가 정신 이상이 생겨 1946년 북에서 사망했다고 하니 편안치 않는 삶이었던 셈이다. 그는 단독으로 시집 한권 내보지 못했다. 시가 몇 편 되지 않기도 하려니와 「해바라기의 비명」 말고는 시의 수준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바라기의 비명 하나로 나에게는 영원한 시인으로 남아 있다.

벗들이여! 나의 무덤 주위에는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주고, 무덤 앞에는 푸른 보리밭을 심어주게나. 노고지리야 없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 ‘그 시를 읽고 나는 시인이 되었네, 내 영혼을 뒤흔든 41편의 시(이종민 엮음, 모악, 2021.)’에서 옮겨 적음. (2024. 6.26. 화룡이) >

[의초 이정석]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는 유언도 큰 부탁입니다
해바리기는 키가 크고 거름을 많이 먹기 때문에
손길이 많이 가야합니다..
한 해 동안 많은 해바라기를 볼보아 보았습니다...

[화룡이(이창모)]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는 유언도 큰 부탁입니다'고 하신
말씀을 되짚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