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원장
역대 노벨 과학상 수상자 20% 분석과학 분야에서 배출
우리도 극한 한계 넘어설 ‘브레이크스루’ 장비 갖춰야
글 _ 류준영 머니투데이 차장(월간 과학과기술 편집위원)
‘아토초’, 100경분의 1초. 그 찰나의 빛으로 원자 내부 전자의 움직임을 들여다보는 실험법을 고안한 과학자들이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면서 분석과학 분야가 재조명됐다.
지난 10월 3일(현지 시각)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위원회는 원자와 분자 안에 있는 전자의 세계를 탐사할 새 도구를 건네준 실험을 한 공로가 인정된다면서 피에르 아고스티니, 페렌츠 크러우스, 안 륄리에 3명의 과학자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했다.
100분의 1초 사이에 일어나는 장면을 셔터 속도 10분의 1초인 카메라로 찍을 수 없듯, 100경분의 1초 단위로 변화하는 전자 세계는 그만큼 극도로 짧은 파장의 빛이 있어야 관측이 가능하다. 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냈다는 데 이들의 연구의 가치가 있다는 평가다.
이번 노벨 물리학상에 대해 양성광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 원장은 “역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중 약 20%는 분석과학 분야에서 배출됐다”라면서 “우리도 극한 한계를 넘어설 브레이크스루(breakthrough, 파괴적 혁신) 장비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는 2027년 충북 오창에 완공될 다목적 방사광가속기를 통해 세계 톱 클래스 분석과학 연구그룹 5개를 만들겠다”라는 포부도 밝혔다. 방사광가속기는 반도체, 이차전지, 신약 개발 R&D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장비로 꼽힌다. 따라서 산업계가 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빔라인도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양 원장은 “우리 기업들이 잘하는 이차전지 분야는 산업계 주도로 빔라인을 설치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고, 연구를 위해 비용을 기꺼이 내겠다는 기업들과 협의 중”이라며 “좋은 빔라인을 만들고 이 빔라인과 연구장비를 연계해 현장에서 한꺼번에 분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 연구장비는 대체로 많은 과학자들이 쓸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너럴한 경우만을 고려해 설계·제작하는 측면이 있다”라면서 “노벨상에 근접하려면 남들과 다른 아주 특별한 비밀(최고 사양의 연구장비)이 있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따라서 범용 장비들은 대학·기업에 이전하고 KBSI는 선도 연구장비 중심으로 재편해나간다는 복안이다.
양 원장은 새로 구축할 방사광가속기의 추가 빔라인 구성을 벌써부터 기획 중이다. 그는 “예상대로면 빔 스케일업을 위해 하나에 보통 150억 원에서 200억 원 정도 추가 비용이 들 텐데 방사능가속기 구축이 막 끝나고 난 후에 바로 예산을 받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며 “아주 브레이크스루할 만한 빔라인 구축을 위해 정부 지원이 안 되면 우리 기관 연구장비 구매 예산을 써서라도 추진할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양 원장은 “우리 기관은 지난 35년간 연구장비 분석에 전문화된 인력들을 많이 육성해왔고, 좋은 연구결과들도 계속 획득해왔다”라면서 “방사광가속기도 연구자 그룹과 좋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차분히 준비하면 좋을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했다.
한편, 양 원장은 인터뷰 중 7개 지역센터를 임무중심형으로 통합 개편하는 작업을 본격화하는 기관 운영 효율화 방안도 내놨다. 대전은 소재, 오창은 바이오, 수도권은 바이오 메디컬, 호남권은 노화 및 고자기장 연구를 특성화한다는 구상이다. 그는 “기관장은 프로 연구원을 육성하고 성장시키는 프로 트레이너와 같은 역할”이라면서 “KBSI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와 책임을 다하고, 세계적 연구를 선도하는 연구기관으로 발전시켜나가겠다”라고 말했다.
Q 오늘(10월 10일)이 취임 152일째 되는 날이다.
A 나이 이순이 넘어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일한 35여 년의 경험을 쏟아부어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이 급격한 환경 변화와 R&D 예산 축소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혁신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각오 아래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취임한 지 벌써 5개월이 되어 이제 임기가 2년 반 조금 넘게 남았으므로 내년부터는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연말까지는 혁신 기반의 구축과 시스템 개선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또 KBSI의 새로운 비전과 핵심가치를 구성원들이 공감하고 내재화할 수 있도록 직원들과 많이 만나 의견을 경청하고, KBSI의 고객인 정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 대학,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기업들과도 자주 만나 소통해나가겠습니다.
Q 임기 동안 가장 큰 목표는.
A KBSI의 연구행정 시스템을 연구원들이 잡무에 시달리지 않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프로 스포츠 팀과 같은 프로 R&D 시스템으로 개편하고, 구성원들도 프로답게 성과를 내는 프로 연구원과 프로 행정원으로 변신해 능력과 성적에 따라 정당하게 보상하는 평가·보상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세계 톱 클래스 수준의 연구자를 많이 배출하는 ‘프로 트레이너’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기관 차원에서는 세계 톱 수준의 프로 연구원을 지원하는 연구행정 시스템을 갖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 다른 주요 목표는 9개로 분산된 본부와 지역센터를 통합, 연구주제별로 특성화해 5개의 임무중심형 분석과 학전문연구소로 개편하고, 각각의 효율적인 운영 시스템을 구축해 성과를 내는 것입니다. 최근 대학의 코어 퍼실리티(core-facility)를 통한 연구장비 구축 확대와 민간의 분석지원 서비스 확산으로 KBSI의 역할이 상당부분 축소됐는데, KBSI는 앞으로 첨단 대형연구시설장비를 중심으로 국가 전략기술 분야와 연계한 분석과학 연구 및 분석 지원 서비스를 강화해나갈 계획입니다. 이를 통해 세계 유수의 연구자들이 우리 연구원을 찾아오고, 모여들 수있도록 개방형 협력체계를 강화해나갈 예정입니다. 더불어 다목적방사광가속기의 성공적인 구축과 향후 운영·활용을 위한 지원체계의 기반을 마련하고, 국내외 이용자 그룹과의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국가 가속기 운영의 효율화를 도모해나갈 계획입니다.
Q 기관운영계획서에 ‘세계 수준의 개방형 연구 플랫폼’ 에 대한 내용이 있던데.
A 우리 연구원이 보유한 첨단 대형연구시설장비와 분석과학 전문연구인력 역량을 활용해서 전 세계의 연구자들에게 전문적인 분석과학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고 공동연구를 수행해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창출한다는 개념입니다. 지금 전 세계 연구자들이 자신이 골몰하는 문제의 해답을 구할 방사광가속기와 이와 연계된 연구장비를 찾고자 전 세계를 무대로 한 국제공동연구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KBSI가 오창 다목적방사광가속기의 빔 퀄리티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고, 오창연구소의 첨단 연구장비를 활용해 분석과학 역량과 체계적으로 연계한다면 오창 지역은 미국의 아르곤연구소처럼 세계적인 연구자들이 몰려들어 최첨단 연구가 수행되는 세계 수준의 연구 플랫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연구원은 태생부터 연구장비를 공동 활용하기 위한 개방형 시스템으로 출발해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미 연구 플랫폼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제시한 비전의 핵심은 앞으로 방사광가속기의 강력한 분석력을 활용해 보다 전문화되고 고도화된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고 글로벌 연구를 확대해 세계를 무대로 협력연구를 활발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KBSI의 역할은 축구로 비유할 때 이강인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라고 생각합니다.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성과들을 빌드업해서 골문까지 가져가는 역할, 그리고 거기에서 스트라이커에게 연계를 해주거나 기회가 나면 직접 골도 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연구원의 고유한 분석과학 연구 역량과 함께 대형연구시설장비를 바탕으로 한 연구지원 서비스 역할을 함께 갖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국가 연구 인프라의 혁신을 선도하는 5개의 글로벌 분석과학연구소 육성’을 경영 목표로 제시했는데.
A 신규 경영 목표로 제시한 ‘5개의 글로벌 분석과학 연구소 육성’은 사실 긴 시간 혼란스러웠던 기관의 역할과 정체성 고민에 대한 나름의 해답과 방향성입니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이란 이름이 내포한 우리 연구원의 역할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타 출연연과 같이 연구분야가 특정되지 않은 데다, 연구뿐만이 아니라 첨단 대형연구시설장비를 활용해 다른 연구자의 연구를 지원하는 서비스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KBSI는 다른 출연연과 비교해 인원수가 많은 편이 아님에도, 연구 분야가 다양하고 9개의 지역 조직으로 흩어져 있어서 연구역량을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에 우리 연구원이 현재 갖고 있는 인적·물적 인프라를 분석해 이들을 국가 과학기술 발전과 지역 과학기술 혁신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가장 파급력 있고 효율적인 형태로 재배치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 총 9개의 본원 및 지역센터를 5개의 특성화된 분석과학전문연구소로 개편하는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5개의 연구소는 대전, 오창, 수도권, 영남 권, 호남권에 위치하게 되는데, 대전은 이차전지와 소재 연구, 오창은 방사광가속기 중심 글로벌 연구, 수도권은 바이오메디컬 연구 등으로 특성화하고, 영남권, 호남권은 특성화 분야를 검토 중에 있습니다. 이들 5개의 분석과학 연구소는 각각 독립적인 연구영역에서 세계 수준의 역량을 갖추고 분석과학 R&D와 연구지원 및 공동연구라는 우리 연구원의 고유 역할을 수행해갈 것입니다.
Q 국제협력 차원에서의 가속기 구축·활용 계획이 궁금하다.
A 선진 가속기 기관과의 협력체계 구축을 통해 다목적방사광가속기 구축·운영에 필요한 경험을 공유하고 질 좋은 빔을 생산할 수 있도록 빔라인 설계 국제자문단 활동을 강화하겠습니다. 국제컨퍼런스 및 한미과학자대회 KBSI 포럼 등을 통해 방사광가속기 구축에 필요한 인재 유치 및 관련 연구자 간의 교류의 기회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또 ‘KBSI 방사광활용연구단’을 구성해 해외 방사광가속기 활용 연구그룹과의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공동연구를 지원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다목적방사광가속기의 해외 이용자 그룹 확대 기반을 만들고, 새로운 연구를 선도하는 해외 석학과의 공동연구를 강화하겠습니다. 방사광가속기가 성공적으로 구축되고 KBSI의 첨단 연구장비와 효과적으로 연결되면 방사광가속기는 기초연구는 물론 반도체와 이차전지, 의약품·의료기기 등 다양한 R&D에 활용되고, 오창은 전 세계 과학자들이 몰려오는 글로벌 협력 연구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Q 국가연구시설장비 총괄 관리 기관인 KBSI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연구시설장비 운용 현황에 대해 평가한다면.
A 과거에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해석하는 용도로 연구장비가 활용됐다면, 현대의 R&D에서는 연구 데이터를 생성하고 대규모의 컴퓨팅 자원을 통해 해석된 데이터를 검증하는 연구를 수행하는 핵심요소로 연구시설장비가 활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시설장비는 기술의 복잡도가 높아짐에 따라 전문적인 운영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구축가액의 10%를 연평균 운영비로 투입하고 있습 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연구시설장비는 특정 기술 확보를 목적으로 구축하는 경우가 많으며, 연구시설장비의 평균 수명이 14.8년인 데 비해(2018년 국가연구시설장비 실태조사 결과) 과제 지원기간은 평균 5년으로, 기술개발 이후 잘 활용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습니 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이 별도의 재원으로 전략적 구축을 추진하거나, 중국이나 일본처럼 특정 인프라에 대한 투자전략도 없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국가적으로 필요한 인프라의 수요를 종합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구축, 운영할 수 있는 모델, 예컨대 영국 연구혁신기구(UKRI) 산하 과학기술장비연구회(STFC)와 같은 역할이 현재 한국의 연구현장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이를 통해 전문적인 운영 역량을 배양하고 이를 활용한 전문적인 연구지원 서비스를 개발한다면 연구시설장비가 전방의 스트라이커 같은 핵심 연구자를 지원하는 미드필더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Q 내년도 정부 R&D 예산 삭감 기조가 기초과학 진흥을 목적으로 연구시설장비 R&D와 연구지원 등을 수행하는 기관 본연의 역할에 끼치는 영향은.
A KBSI가 운영하는 R&D 사업의 비효율성을 들어내면 축소된 예산안으로도 운영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 기관의 경우 내년도에는 신규 장비 도입 계획이 없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이나, 연구시설장비 유지보수 비용은 줄일 수 없기에 일부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내부적으로 비효율성을 걷어내고, 자체 예산 조정과 우선순위를 정해 긴급 사항에 대응할 계획입니다. 비효율성은 R&D 예산 배분, 관리, 평가 등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시스템적 요인이 크므로 출연연이 새로운 예산안을 수용하고 혁신하기 위해선 정부의 제도 변화가 선행돼야 합니다. 특히 연구기관과 연구자 스스로가 비효율을 찾아 걷어낼 수 있도록 출연연의 기관고유사업 운영에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Q 분석과학 대표 연구기관으로서 이번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어떻게 보나.
A 분석과학은 새로운 분석기술과 장비의 개발을 통해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을 견인하는 기반 학문입니다. 역대 노벨 과학상 수상자 중 약 20%가 분석과학 분야에서 배출됐습니다. 2023년 노벨 물리학상도 기존 분석기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아토초 펄스’ 생성법을 개발한 물리학자 3명에게 돌아갔습니다. 100경분의 1초(10의 마이너스 18제곱초)에 해당하는 찰나의 빛을 활용하면 원자가 이온화되는 극히 짧은 과정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상자 중 한 명인 안 륄리에 교수가 레이저 장치를 사용해 아토초의 펄스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포항방사광 가속기(PAL-XFEL)는 현재 펨토초(10의 마이너스 15제곱 초)를 분석할 수 있는데, 가속기 빔라인에 빛을 1,000분의 1로 더 쪼갤 수 있는 장치를 추가로 부착한다면 안 륄리에 교수의 장치처럼 아토초 펄스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분석과학의 진보는 이번 노벨상 수상에서와 같이 과학기술 발전뿐만 아니라 전자공학이나 의료 등에 활용되어 산업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현재 다목적방사광가속기의 10개 빔라인에는 과학기술적 브레이크 스루를 이룰 만한 것이 없어 안타까운데, KBSI는 자체 장비 도입 예산을 활용해서라도 이러한 혁신적인 빔라인을 추가로 구축해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팀이 몰려들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