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 Franiois Millet (1814~1875)
장 프랑수아 밀레는 프랑스의 화가로, 프랑스의 지방에 위치한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창립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삭 줍기,' '만종,'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하며,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라 불리고 있다.
1814년(1세)
10월 4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의 그뤼쉬 마을에서 비교적 넉넉한 농가의 맏아들로 태어난 밀레는 장루이니콜라(Jean-Louis-Nicolas)와 에메앙리에트아델라이드 앙리(Aimee-Henriette-Adelaide Henry) 밀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노르망디의 그레빌아그(Greville-Hague)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Gruchy)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은 농업이 주된 삶이었던 지역이었기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농부들의 삶을 관찰하며 자라났다. 마을의 두 개신교 목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밀레는 라틴어와 근대의 문학 작가들에 대해 배웠다.
1833년(19세)
19세 되어 쉘부르로 보내져 그곳에서 초상화가 폴 뒤무셸(Paul Dumouchel)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835년(21세)
그로(Baron Gros)의 제자였던 뤼시앵테오필 랑글루아(Lucien-Theophile Langlois)에게서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게 되었다.
1837년(23세)
랑글루아와 다른 이들이 밀레에게 준 장학금으로 파리로 이사하게 되며, 파리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에게서 그림을 계속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물의 개성을 명확히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둔 교과 과정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밀레는 루브르 박물관의 명화를 모사하면서 그림을 배운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39년(25세)
장학금 수여는 종결되었으며, 폴 들라로슈의 화실에서 나왔고 같은해 파리 살롱에 제출했던 그의 작품은 거절당하게 된다.
1840년(26세)
첫 작품이었던 초상화가 파리 살롱에 전시되게 되자, 밀레는 셰르부르(Cherbourg)로 돌아가 초상화가로 개업하게 되었다. 중반 즈음 밀레는 콩스탕 트루아용(Constant Troyon), 나르시스 디아즈(Narcisse Diaz), 샤를 자크(Charles Jacque)를 비롯하여 후에 밀레처럼 바르비종파 화가로 알려지는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와 친구가 된다. 또한 밀레는 그의 명암 기법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와 밀레의 전기 작가이자 정부 관직을 지내고 있었으며, 훗날 밀레 일생의 후원자가 된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와 만나게 되었다.
1841년(27세)
밀레의 첫 아내인 폴린 비르지니 오노(Pauline-Virginie ono)와 결혼하여 다시 파리로 이사했다.
밀레의 첫째 아내 - 폴린느 오노
1841년 즉, 밀레가 27세 때 만난 첫번째 아내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밀레와 결혼해 고생만 하다가 결국 밀레와 결혼한지 2∼3년이 지난 1844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폴린느가 사망할 당시 이들 부부는 굶어죽기 직전에 있었다고 한다. 밀레는 그 고통을 이겨냈으나 폴린느는 오랫동안 굶음으로 인해 몸이 극도로 약해져 결국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Portrait de Madame Felix-Bienaime Feuardent, 1841년, 캔버스에 유채
1837년 고향 세르브르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나온 밀레는 들라로시의 아틀리에에서 지도를 받는 한편, 루브르를 자주 방문하면서 주로 미켈란제로와 푸생 등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 작품을 연구했다. 그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한 것이 40년이니까 파리에 나온 지 3년 후가되는 셈이다. 이 시기 밀레의 작품은 주로 초상화와 신화(神話)를 테마로 한 그림들이었으며, 검은 색을 주조로 하면서 백색의 효과를 살리는, 전통적인 수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고향 세르브르에 돌아와 주문받은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검은 색을 기조로 하면서 뉘앙스가 풍부한 수법을 사용, 인물의 내면의 섬세한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외제니 카노비유 부인이 초상
첫 번째 부인 포리느가 죽었을 때 이들 부부가 아사(餓死) 직전에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인지 초기의 초상화에는 짙은 술픔의 그림자가 화면을 덮고 있다. 이 초상화의 여인도 슬픈 눈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검은 옷에 화려한 레이스는 어딘가 모르게 정숙한 품격을 자아내게 하는데, 앞으로 포개어진 두 손과 얼굴을 연결하는 목걸이 선이 눈길을 끈다. 어두운 배경에 인물의 얼굴만은 부각시키는 고전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엄격한 데생에 의한 인물의 포착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단단한 기법을 말해 주고 있다.
루크르트와 부인의 초상. 1841년, 캔버스에 유채
주지하다시피 밀레는 노르망디의 한 한촌(寒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만년(晩年)에 명성을 얻을 때 까지 누구보다도 많은 고생을 하였다. 특히 청년 시절은 빈한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부인인 포리느오노가 죽 은 것도 병약(病弱)한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초기의 초상화들에서 알 수 없는 우수가 화면을 덮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이 초상은 아내 포리느의 언니, 아니면 동생을 그린 것인데, 초기 밀레의 초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촉촉한 눈을 보이고 있다. 단정한 자세와 화면에 들어 차는 구도의 밀도는 초기 밀레의 초상화가로서의 뛰어난 일면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Pauline ono (1821-44) in Blue, 1841-42
초상화 속의 폴린느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초상화는 밀레가 1841년부터 1842년까지 만든 작품이니, 아내가 죽기 2년 전쯤 완성된 작품이다.
1843년(29세)
파리 살롱에서 작품 전시를 거절당하고 아내인 폴린이 폐병으로 죽자, 밀레는 셰르부르로 다시 돌아갔다.
실내복을 입은 폴린느 오노의 초상
1843-44년, 캔버스에 유채
폴린느는 1844년에 사망했으니, 바로 그 해에 완성된 작품이다. 그러니까 이 초상화 속의 아내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밀레는 폴린느의 죽음을 예측하고 아내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기 위해 아내를 그리는데 열중하였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 바르비종 이전 작품 중에서 이 '실내복을 입은 폴린느 오노의 초상'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알 수 없는 강한 느낌을 주는 초상화에 밀레의 모든 감정이 살아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망 오노의 초상 - 밀레의 처남, 1843
아망 오노는 밀레가 초기에 그린 부르주아 연미복이 주는 엄격한 인상으로부터 벗어나 마치 어떤 풍속화 속의 인물처럼 밝게 표현되었다. 밀레의 처남인 아망은 자유분방한 젊은이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는데 이런 점에서 밀레 자신을 그린 또다른 자화상을 발견하게 된다. 풍성한 소매와 화면에 생기를 주는 건강한 남자의 손에서 밀레의 표현기법이 생생히 드러난다.
미망인 루미 부인의 초상
미망인 루미는 밀레의 첫 번째 부인인 폴린느 오노의 먼 친척이었다. 아마 폴린느의 어머니 출생을 지켜봤던 산파였던 것 같다. 나이가 들고 이가 빠져 볼이 움푹 들어간 시골여인의 이 초상화는 밀레의 초기 초상화 기법을 한껏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도면에서 밀레가 1년 전 자화상을 그리면서 사용한 구도와 같은 단순한 삼각형의 구도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작품에서와는 달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는 모델들의 수수한 옷차림과 소박한 삶에 어울리는 단순한 장식품이 신선하게 돋보인다. 루미 부인의 등 뒤에 보이는 적갈색의 의자는 밝은 황토색으로 표현된 투박하면서도 야윈 손과 균형을 이루고 있고 가슴 언저리에서 어슴푸레한 빛을 내는 십자가가 그녀의 칙칙한 검은 드레사의 목선에서 조심스레 빛을 발한다.
게다가 밀레의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즌 것은 투명함과 불투명함을 나타내는 붓터치를 번갈아 사용하여 사실감을 더해주는 부인의 두건이다. 고갱의 작품에서 보여지듯이 19세기 프랑스 여인들은 각 지역마다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두건을 쓰는 것이 관례였다. 루미 부인이 쓰고 있는 두건은 노르망디 지역의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그녀의 쏙 들어간 뺨과 슬쩍 튀어나온 이마와 더불어 이 독특한 두건은 지긋한 나이에서 풍겨지는 침착함과 위엄을 드러내 준다.
1844년(30세)
<우유 짜는 여인, The Milkmaid>과 파스텔화 <승마 교습, The Riding Lesson>으로 처음 성공을 거두었는데, <승마 교습>은 그가 1840년대에 그린 작품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으로 관능적 성격을 갖고 있다.
Reclining Female Nude circa, 1844-45
농민 화가로서의 뚜렷한 방향을 잡기까지 밀레는 한때 누드 그림도 그린 적이 있다. 초상화에서 농민화로 넘어가던 과도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커튼을 열어젖힌 안쪽 침대에 등을 돌리고 있는
나체의 여인 모습이 보인다. 침대의 흰 커버와 흰 이불 속에 드러난 알몸의 여인은, 그러나 그 정황에 비해 짙은 관능성(官能性)은 찾을 수없다. 그저 평범한 일상 중의 한 단면이라고나 할까. 모델로서의 누드가 갖는 흥미는 그렇게 드러나 있지 않다. 바라보고 있는 화가의 눈이 탐욕스럽지 않다 고나 할까. 그러면서 초기의 초상에 비해 보면, 농민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기법이 역력하다.
수욕
밀레는 농민 화가로서의 자기 위치를 찾기 이전 초상화와 신화화(神話畵)를 그렸고, 또 일련의 노동자들의 일하는 모습을 담았다. 이 작품은 그 소재가 다소 예외 적이긴 하나, 노동자들의 모습을 다룬 그림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인체의 억센 형체감을 살리려고 한 의도가 노동자들의 그림들과 일치된다. 작품은 남녀가 멱을 감는 정경에서 취재된 것인데, 물에서 올라오는 여인을 남자가 안아서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두 인체가 마치 격투라도 벌이고 있는 듯한 억센 동감으로 표현되고 있다. 밀레가 미켈란젤로에게 매혹되었다고 하는 설이 이 그림을 통해 뒷받침된다.
Portrait of Madame ono, 1844
Portrait of the artist's sister, Emily, 1841-45
1845년(31세)
카트린 르메르(Catherine Lemaire)와 함께 르아브르(Le Havre)로 이사한다.
밀레의 둘째 아내 - Catherine Lemaire
카트린 르메르는 밀레의 둘째 아내이다. 첫째 아내가 사망한지 1년이 지난 후에 맞은 아내인데, 폴린느와 달리 힘도 세고 건강한 아내였다. 이 두번째 아내 카트린과의 사이에 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카트린은 아내로서 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밀레는 갸륵한 어머니로서의 카트린과 그 아이들을 모델로 여러장의 그림을 그렸다. 폴린느의 초상 옆에 나란히 걸려있는 카트린 르메르를 그린 작품은 밀레가 그녀를 만난 해인 1845년에 제작되었다.
아가씨 (Young Woman) 1845년, 캔버스에 유채
1845년경 밀레는 목가적인 연인들을 테마로 한 몇 점의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도 그러한 목가적(牧歌的) 분위기를 띠고 있는 그림이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현실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입과 반쯤 뜬눈의 꿈꾸는 듯한 표정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나타낸다. 초기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단정하고도 엄격한 수법을 엿 볼 수 없고, 터치가 즉흥적이면서 다소 거칠게 나타나 있다. 일련의 누드화에서도 그렇지만, 밀레의 눈은 호색적(好色的)이지 않다. 그가 나중에 로코코 화가들을 특히 호색적인 면에서 비판하고 있음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해군사관의 초상 (Portrait of a Naval Officer)
역시 밀레 초기의 작품을 대표하는 초상화중의 하나,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한 밀레가 1845년 잠깐 동안 르아브르란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항구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 초상은 당시에 그렸던 주문화 가운데 하나다. 이 때는 밀레의 명성도 점차 상승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이 부호나 미술 애호가, 해군 사관, 선장들에게서 많은 주문이 쇄도해 왔다. 파르당 부인의 초상과 같이, 검은 제복을 입고 양팔을 낀 사관의 표정은 밀레의 더욱 자신 있는 수법의 원숙을 통해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인물과 배경의 부드러운 조화라든지, 검은 옷 빛깔과 황금빛의 장식과의 격조있는 대비 등은 인물의 성격과 함께 화면의 짜임새를 더욱 돋우어 주고 있는 듯 보인다.
The Return of the Flock. 1846, 유채
초기에서 점차 농민화로 전향해 가던 중간쯤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그런 만큼 이 작품엔 누드화를 주로 다루었던 시기의 제반요소와 농민화로서의 소재적 관심이 함께하고 있다.
아이를 업고 있는 상의를 벗은 여인의 모습은 누드화의 연장 선상에서, 그리고 오른편으로 반쯤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양떼는 농민화로서의 연결을 시상해 주고 있다. 아이를 업은 여인과 어깨에 농구(農具)를 진 남정네와 양떼를 몰고 있는 앞 쪽의 아이가 가운데 공간으로 집중되면서, 한 가족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의 밀도를 엿보여 주고 있다. 오른쪽으로 치우친 양떼들이 화면 가운데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농민화가 밀레의 세계가 확립되어진다.
Self Portrait. 1845-46년, Portrait
1847년(33세)
처음으로 파리 살롱에서 성공적인 전시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 때 전시된 작품으로는 Oedipus Taken down from the Tree가 있었다.
The Sower, 1847-48
1848년(34세)
아는 사람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팔면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살롱 (파리에서 해마다 열리던 미술 전람회)에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 The Winnower>를 출품한다. 이 작품은 밀레가 최초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다소 좌파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당시 혁명 정부 임시 내각의 좌파 내무 장관이었던 르드뤼 롤랭이 이 그림을 구매한다. 이후 국가의 공식적인 작품 주문까지 받게 된 밀레는 어느 정도 삶의 여유를 갖게 되고, 파리에서 유행하던 콜레라를 피해 가족들과 함께 바르비종에 정착한다. 여기서 그는 농부들의 일상사를 묘사하는데 전념하여, <이삭줍기>, <만종> 등의 걸작들을 완성한다.
Catherine Lemaire 1848년, Pencil on paper
The Winnower. 1848년, 캔버스에 유채
1848년 이후, 밀레는 지금까지의 초상화와 신화적 테마의 범주를 벗어나 농부나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직접 묘사하는 새로운 전환을 시도했다. 이른바 농민화가(農民畵家)로서의 밀레의 출범을 알리는 전환이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시기에 제작된,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 해 살롱에 출품한 최초의 농민화 이기도 하다. 그의 태반의 농민화가 그렇듯이 이 작품의 소재도 너무나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고티에는 이 소재의 단순함을 칭찬해 마지 않기도 했는데, 바로 이런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 속에 농민과 농촌 생활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두운 곳간에서 키를 까불고 있는 남자의 프로필이 일하는 이의 감동을 잘 포착하고 있다.
나뭇군
<키질하는 사람>과 비슷한 구도의, 나무를 패는 모습을 붙잡은 작품이다. 산 속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화면 가운데 나뭇군이 배치된다. 나뭇군의 앞과 뒤쪽 주변에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산 속에서 만난 평범한 나뭇군의 생활의 한 단면을 붙잡은 것으로, 쿠르베를 연상시키는, 보이는 것만을 그린다는 리얼리스트의 태도가 역력하다. 나뭇군과 그 배경과의 관계, 원경의 숲과 앞 쪽의 정경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명암의 강한 대비가 이 단순한 정경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수평과 수직의 구성적 배려가 미묘하게 느껴지는 밀레의 독특한 시각이 있다.
1849년(35세)
파리 교외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으로 거처를 옮긴 밀레는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추수하는 사람들, The Harvesters>를 그려 국가에 기증하였다. 파리 살롱에서는 같은 해에 <숲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양치기, Shepherdess Sitting at the Edge of the Forest>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같은 해 6월 그는 그의 가족과 함께 바비존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시절에 T.루소, C.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채석장. 1849-50년, 캔버스에 유채
농민화와는 다소 다른 소재의 그림이지만,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티브의 애착은 밀레의 작품 밑바닥을 관류하고 있다. 후기의 농민화에서 보는 정태적(靜態的) 묘사와는 달리, 여기서는 동적(動的)이면서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해 보이고 있다. 돌 틈바구니에 꽂은 지렛대에 매달려 있는 두 인물의,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동작은 화면에 사선(斜線)으로 달리는 시각적 이동으로 인해 단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 시기 밀레는 특히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인물의 데생에 관심을 기울 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고통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밀레의 작품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활기와 박진감을 주고 있다.
1850년(36세)
밀레는 그의 열렬한 후원자인 상시에에게서, 그에게 작품을 그려주는 대가로 지속적인 후원을 약속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그는 다른 구매 희망자를 위해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해에 파리 살롱에서 밀레는 <이삭 줍는 사람들, Haymakers>와 <만종>, <이삭 줍는 사람들>과 함께 걸작이라 평가되는 3개의 작품들 중에 가장 초기 작품인 <씨 뿌리는 사람, The Sower>를 전시하게 된다.
Trussing Hay. 1850년, 캔버스에 유채
밀레가 바르비존으로 오면서 그 해 살롱에 출품한 작품으로, 점차 농민화의 전경을 드러내고 있다. 밝게 쏟아지는 햇볕 속에 건초를 묶고 있는 두 남자와 왼편에 건초를 긁어 모으는 여인의 모습은 일하는 즐거움과 노동의 신선함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특히 명암의 강한 콘트라스트가 주는 긴장감과 더불어 거대한 자연과 투쟁하는 인간의 숭고한 모습이 극적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하겠다. 밀레의 농민화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요소 역시 자연과 인간의 대비적이면서도 조화 있는 관계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거칠고 투박한 표현이 농민화의 특성에 더욱 걸맞는 효과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Peasant-Girls with Brushwood. 1852년, Oil
The Sower. 1850년, 캔버스에 유채
밀레는 1849년 파리 근교 퐁테느블로 숲속에 자리한 바르비존이란 작은 마을로 찾아든다. 이 마을엔 밀레말고도 자연을 동경해서 찾아든 화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미술사에서는 바르비존파(派)라고 부르고 있다. 바르비존을 무대로 한 자연파 화가들의 명칭이었다.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활동도 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본격화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많은 대표적인 농민화 들이 여기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건초를 묶는 사람들>과 같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한 것으로, 씨를 뿌리는 남자의 역동감 넘치는 포즈는 약간 비뚜름한 지평선의 불안한 배경과 어울려 극적인 상황을 예시해 주고 있다. 대지와 인간의 관계가 흥미롭게 드러나고 있다.
Harvesters Resting. 1850년, 캔버스에 유채
나뭇가지. 1850년, 캔버스에 유채
Breaking Flax, 1850-51
The Walk to Work. 1851년, 캔버스에 유채
나무켜기. 1850-52년, 캔버스에 유채
낮잠
일련의 농민화 가운데 하나지만, 이 작품은 여느 그림과는 달리 대범한 모티브 선택이면서도 다소 특이한 구도의 대담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일을 마치고 낮잠을 즐기는 농부의 부부를 약간 아래쪽에서 비스듬한 구도로 붙잡고 있다. 발 쪽에서 비스듬히 상체가 보이는 인물의 포착은 어떤 포즈보다도 까다로운 것인데, 밀레는 이 평범한 한순간을 포즈의 특이한 설정을 통해 흥미 깊게 포착하고 있다. 남자의 상체에 기대어 자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반쯤 드러나 있는 정겨운 모습은 농가의 평화로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파스텔 특유의 경쾌한 데생 처리가 순간의 포착에 더욱 어울리는 것을 엿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