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pn51D9-p28Q?si=WLMJvLvuWuN9xXX3
Jussi Björling, Zueignung, Richard Strauss (Live in 1959)
Zueignug (헌정)
Ten. Jussi Bjorling
Ja, du weisst es, teure Seele, Dass ich fern von dir mich quäle, Liebe macht die Herzen krank, Habe Dank! Einst hielt ich, der Freiheit Zecher, Hoch den Amethisten Becher, Und du segnetest den Trank, Habe Dank! Und beschworst darin die Bösen, Bis ich, was ich nie gewesen, Heilig, heilig, ans Herz dir sank, Habe Dank! | 아시나요, 소중한 님이시여! 그대 멀어진 나의 이 괴로움을, 사랑으로 병이 든 것을, 고맙소! 예전에 자유의 술꾼. 나는 연수정의 술잔을 높이 들었고, 그대는 축배를 들었소, 고맙소! 그대는 그 속에서 악령을 몰아내고 난생 처음으로 나는 성스럽고, 성스럽게 그대 가슴에 파묻혔소, 고맙소! |
유시 비욜링(Jussi Bjorling)
유시 비욜링은 1960년 9월 8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외곽의 한 작은 섬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항년 49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1911년 2월 5일 산악과 숲과 호수로 유명한 스웨덴의 중부지역 Stora Tin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는 푸치니 '라 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메트로폴리탄 무대에도 선 적이 있는 훌륭한 테너였고, 그의 어머니 에스터도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다. 할머니로부터 유시(Jussi)란 별명으로 불렸던 요한 요나탄(Johann Jonathan) - 핀란드식 이름에서 유래 - 은 부모로부터 성악과 피아노의 기초를 배웠고, 유시를 포함 세 명의 형제들(Olle와 Gosta)중 두 명이 테너가 된 음악가 집안에서 성장했다.
다섯 살의 나이에, 이미 비욜링은 목소리의 파워면에서 그의 형들을 능가했을 뿐만 아니라, 미성(美聲)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역시 자신의 아들의 열정과 "소년 트리오(Trio Juvenile)"를 결성할 정도의 능력을 보이는 아들을 보며, 자신은 스스로 더 큰 빛을 보기도 전에 자신의 음악적 커리어를 접고 비욜링의 재능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비욜링의 이런 재능은 고향, 스웨덴에서의 성공을 넘어서 미국에서까지 순회공연을 가졌고 가는 곳마다 청중들은 이 어린 신동의 매력에 반하기 일쑤였다.
1942년은 비욜링에게는 첫 번째 역사적인 해였다: 출중한 용모와 아울러 이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신에 찬 성숙한 목소리를 지닌 비욜링이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5세 앞에서 노래를 불러 깊은 감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욜링에게 이러한 영광만큼이나 시련도 일찍 찾아왔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자마자 1926년 15세의 나이에 아버지마저 여의었던 것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형들과도 헤어져 이 세상에서 완전히 홀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비욜링에게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밝고 부드러운 성격에서 말수가 적고 수줍은 성격으로 변한 것이다. 오직 노래를 통해서만 삶의 완성을 추구하고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1928년부터 비욜링은 솔로이스트로 활약하기 시작하는데 (경제적인 이유로 Erik Odde란 이름으로 주로 가벼운 곡들을 노래했다), 일반적으로 인기 있는 곡들이나, 왈츠, 탱고, 그리고 유행하는 곡들을 레파토리로 삼았다. 그렇지만 그런 돈벌이를 위한 연주를 통해 비욜링은 스톡홀름 로얄 콘서바톨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1928년에 스웨덴의 유명한 테너 칼 마틴 오만(Carl Martin Ohmann)에게 재능을 인정받게 되고 결국 스톡홀름 로얄 오페라의 매니저이자 바리톤인 욘 포셀(John Forsell)을 소개받기에 이른다. 비욜링이 포셀앞에서 오디션을 받을 때 포셀은 비욜링의 노래에 너무나 감명 받은 나머지 다른 구실을 대며 그 방을 황급히 떠났다고 한다.
어쨌든 포셀 덕분에, 1929년 비욜링은 스톡홀름 로얄 음악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포셀에게서 독일 오페라를, 그리고 테너 호셉 히스롭(Hoseph Hislop)에게서 프랑스 오페라를 그리고 마에스트로 튤리오 보게라(Tullio Voghera)에게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에스트로 닐스 그레빌리우스(Nils Grevillius)는 비욜링이 악보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갖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그레빌리우스는 비욜링이 평생동안 가장 좋아하는 스승으로 남게된다.
1930년 7월에(비욜링의 나이 19세에, 아마 성악 역사상 흔치않은 일로 기록되는데) 비욜링은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의 '람피오나이오'역으로 데뷔하게 되고 그후 한 달 후 스승인 욘 포셀과 함께 모차르트의 '돈 죠반니';의 타이틀 롤 '돈 옥타비오'를 맡게 됨으로서 진정한 데뷔를 하게 된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는 비욜링의 활동분야가 스칸디나비아로 국한되었지만, 1936년부터는 비엔나의 스타조퍼(Wien Staatsoper) 같은 유럽의 커다란 무대에까지 서게 된다(빅터 데 사바타가 지휘한 '아이다'를 통해), 이 위대한 이태리 지휘자 사바타는 비욜링의 목소리에 완전히 감동되어 이 젊은 테너를 이태리, 특히 이태리 대극장의 대명사 라 스칼라로 초청하게 되지만 계약상의 문제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이후 전 유럽의 언론들은 비욜링에 대해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질리의 부드러움과 카루소의 힘을 겸비했다"
1936년부터 38년까지 비욜링은 가장 명성있는 유럽의 공연장을 가장 유명한 지휘자와의 협연으로 정복해나갔고, 마침내 1938년에 '라 보엠'으로 미국 오페라의 상징 메트로폴리탄에 입성하기에 이른다. 그때부터 1960년까지, 몇 번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비욜링의 모든 공식적인 공연들이 미국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매년 덴마크 코펜하겐(티볼리에서 개최되는 콘서트) 공연 후에는 그가 사랑하는 스톡홀름 로얄 오페라 하우스에서 두 세 차례의 오페라 공연을 갖곤 했다. 그러나 비욜링은 상대적으로 이태리에서는 오직 세 차례의 공연q밖에는 갖지 않았는데, '라 스칼라;'에서 두 번('1946년에 리골레토' 그리고 1951년에 'Un Ballo in Maschera') 그리고 한 번은 1943년에 '일 트로바토레'를 '마기오 뮤지칼레 피오렌티노'에서 가졌다.
1958년 스웨덴에서 비욜링은 '토스카'의 마지막 막의 아리아를 부르는 도중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갑작스런 병 때문이었고, 다른 이로 교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 증세는 비욜링의 서른 살까지의 이력 중 처음 있는 심각한 증상이었고 2년 후에 일어날 중병의 명확한 첫 증세였다. 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욜링에게 1959년은 자신의 이력에서 가장 성공적인 해로 기록된다. 그러나 비욜링은 1960년 4월, 불행히도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영국여왕 퀸 엘리자베스가 참석한 자리에서 '라 보엠'의 2막 끝자락에서 심작발작을 일으키게 된다. 한참동안의 인터미션 끝에 정신을 차렸고 비욜링은 공연이 다시 잘 마무리 되기를 바랬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심각한 실수였고 두 번째 실수는 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노래를 계속하고자 결정한 것이었다.
https://youtu.be/8WZ1BJpALao?si=uz4o7ywuvG9caW4j
Jussi Björling - O Sole Mio
자료출처: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