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Ab-S8e3new?si=7pmoKK92koqdoS4e
Carlo Bergonzi (1987, Tokyo)
1. 전후 최고의 베르디 가수
카를로 베르곤지는 1948년에 데뷔하여 1993년까지 45년 간 노래하였으며 은퇴한 지금도 그가 설립한 '카를로 베르곤지 아카데미아'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즉 그는 한평생을 오페라를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이다.
'베르디 가수'로 유명한 베르곤지는 1924년 7월 13일 베르디가 태어난 부세토 근처의 비다렌초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낙농업을 하는 가난한 농부였기에 베르곤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진학을 포기하고 농장에서 일을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했고 밤 11시에 잠들 정도로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 탓에 그는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서 당시 유행가처럼 불리던 베르디의 아리아를 자주 들어 몇 곡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그에게 결정적으로 가수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16세에 부세토에서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공연이 있었는데 그는 그 공연에서 만리코라는 인물에 완전히 반해 버렸던 것이다. 극장에서 본 것을 흉내 내려고 머리에 남비를 뒤집어 쓰고 손에는 칼 대신 부지깽이를 들고 거울 앞에서 '저 타는 불길을 보라'를 부르다가 아버지에게 들켰던 일화가 있다고 한다.
얼마 후 그는 부세토에 있는 바리톤 가수에게 의견을 들으러 갔는데 그 바리톤은 베르곤지에게 가수가 될 소질이 있다고 판정을 내렸다. 초등학교 5년까지 공부한 이후로 6년간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한 권의 책을 본 일도 없어서 음악학교의 입학 시험이 문제가 되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음악 전문 중학에 들어갔다. 노래와 피아노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그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계속 일해야 했다 학교 성악 교사는 그를 바리톤이라고 하여 바리톤으로 공부를 하던 중 1943년 여름이 되자 군에 입대했다. 고사포 부대에서 복무하던 중 그 해 9월 8일 휴전이 되었고 대원들은 도망쳤는데 그는 고열로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래서 독일군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종전 때까지 거기에 있었고, 집으로 돌아오자 다시 음악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1948년에 졸업했다.
그의 첫 무대는 그 해 8월의 밀라노 근교인 바레도 교회의 부속 극장에서였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데뷔는 레체에서 있었던 <세빌리아의 이발사>였다. 그는 여기서 바리톤 역인 피가로를 불렀다. 이 공연은 성공적이어서 바리톤으로서 <돈 파스쿠알레>, <사랑의 묘약>, <라 보엠>, <루치아>, <춘희> 등을 부르며 활동을 했었는데, 그는 스스로를 당대의 유명한 바리톤 가수들과는 비할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상태로 가수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데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당시는 결혼도 한 상태였으며 아내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심리적 부담은 커졌다.
그러다가 1950년 <나비 부인> 공연을 하던 중 테너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임신 8개월이던 아내를 친정에 보낸 채 누구의 지도도 없이 비밀로 테너 전향 연습을 했다. 열심히 연습을 한 끝에 2주만에 그는 <아이다>와 <안드레아 쉐니에>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유명한 콜롬보를 찾아가 <안드레아 쉐니에>의 아리아로 테스트를 받았고, 소리에 정통했던 콜롬보는 1월에 파리에서 공연될 <안드레아 쉐니에>의 쉐니에 역을 그에게 주었다.
그래서 1951년 1월 12일 파리에서 <안드레아 쉐니에>의 쉐니에 역으로 테너로 데뷔했다. 그날 신문에 난 그의 공연평을 보고 그의 아내와 장모는 그가 바리톤 역의 제라르가 아닌 테너 역의 쉐니에라는 것을 보고 평론가들의 실수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는 2회 공연까지 무사히 끝낸 다음에야 아내에게 테너로 바뀐 사정을 이야기했다.
같은 해에 그는 베르디 서거 5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있었던 라디오 오페라 방송에서 베르디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인 <지오반나 다르코>, <이 듀에 포스카리> 등을 불러 성공을 거두었다.
1953년에는 스칼라 좌에 나폴리의 <마사니엘로>로 데뷔하였고, 런던에는 1953년에 <운명의 힘>의 알바로 역으로 데뷔했는데 이는 스톨 극장에서였다. 미국 무대에 데뷔한 것은 1955년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였고 1956년에는 <아이다>와 <일 트로바토레>로 메트로폴리탄에 진출했으며 그 이후로 30여 년간이나 이 극장과 인연을 맺었다. 1962년에는 <운명의 힘>의 알바로 역으로 영국의 코벤트 가든에 데뷔했다. 그는 이후 25년 동안 코벤트 가든에서 자주 노래를 불렀고 그의 순수하고 가식없는 가창과 귀족적인 프레이징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코벤트 가든에서 가장 주목 받았던 역은 <가면 무도회>의 리카르도 역이었다.
베르곤지는 비평가와 팬들에게 골고루 사랑받은 위대한 테너였다. 그는 오페라계의 큰 길을 공명 정대하게 걸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신사적이고 성실한 사람으로 한번도 조잡한 공연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가수에 대해 가장 정통했고 혹독한 비평으로 성악가들이 두려워했던 로돌포 첼레티는 베르곤지에 대해서만은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첼레티는 베르곤지에 대해,
"그는 결코 감정에 치우쳐서 서두르지 않으며 가사를 음절마다 세게 억지를 붙이거나 과장하지 않고 목소리를 쥐어 짜지도 않는다. 즉 항상 노래하고 있다. 베르디를 노래할 때는 한 음이라도 노래하기만 하면 스스로 기품 있고 당당하고 과감하게 될 수 있는 독특한 정신적 긴장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그는 오페라의 양식에 정통해 있다. 그 때문에 오페라 속의 인물을 어떠한 성질로 노래해야 하는지를 거의 완벽하게 식별하고 있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베르곤지는 특별한 선생의 지도 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테크닉의 비결을 쌓았다. 그는 레시타티브를 통해 곧 이어지게 될 아리아에 대한 분위기를 완벽하게 설정해놓았고 본격적인 노래에 들어갔다. 이는 베르곤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고 완벽하게 조정되어 있으며 프레이징은 긴 호흡에 의해 뒷받침된다. 또한 그의 명확한 딕션은 남성다운 씩씩한 어조와 어울려 아주 바람직한 방향으로 베르디 오페라의 정수를 드러낸다. 그는 음색을 언제나 자유롭게 변화시킬 줄 알았기에 음을 여리게 하고 짙게 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함으로써 인물 묘사를 완벽하게 하였다.
그는 특히 베르디 오페라에 뛰어나 '전후 최고의 베르디 스페셜리스트'라 불렸다. <오텔로>와 <팔스타프>를 제외한 베르디 오페라를 모두 불렀고 레퍼토리의 폭도 상당히 넓어 18세기의 것부터 현대의 것까지 66곡에 이른다. 그가 남긴 베르디 오페라의 전곡 레코딩은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꼽히고 있으며 아직도 음악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이태리 테너 중 가장 정교하고 세련되고 지적인 음색을 내는 테너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바리톤에서 출발한 탓인지 중음역도 풍부하다. 오페라에 임하는 그의 성실한 자세와 지적인 분위기는 델 모나코와 스테파노, 코렐리가 활동하던 당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했다.
또한 그는 목소리의 관리에도 힘써 약 69세까지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베르디의 고향이기도 했던 부세토에 생활 기반을 두고 그가 가장 좋아했던 베르디 의 오페라 이름에 연유한 <이 듀에 포스카리>라는 호텔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으며 보스턴, 예일 대학교에서 성악가가 아닌 교수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현재는 '카를로 베르곤지 아카데미아'라는 성악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실제로 그의 지도를 받은 학생들은 세계의 유명한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베르디 콩쿠르에서 1등을 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바리톤 최현수가 그의 제자이며 소프라노 전소은, 박은경, 김성미, 테너 장보철, 박규홍, 바리톤 안상현 등도 그의 제자들이다. 이중 전소은과 장보철은 베르곤지가 수여하는 장학금을 받았던 학생들이었으며 이들은 현재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성악 교수로서의 베르곤지
노승종 선생님은 베르곤지와 인터뷰를 했고 그것이 예전에 발행되었던 월간 <음악 동아>에 실려 있다. 노 선생님의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베르곤지 교수의 답을 들어보자.
* 질문: "한국 성악도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요?"
* 답변: "부세토에서 바리톤 최현수를 지도하였습니다. 리골레토를 아주 훌륭히 불렀으며 센프란시스코 오페라 극장에 추천하여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일: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한국 학생들이 소유하고 있는 목소리와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 질문: "한국 학생들 떠나 성악을 전공하려는 학생에게 주는 조언이 있다면?"
* 답변: "타고난 좋은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근면하고 체계적인 훈련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또한 좋은 음악적 취향과 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저와 같이 공부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말씀드린다면 30여명의 학생이 참가하여 노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의 마지막 날에는 연주회를 하는데 이들 모두 다 연주를 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중 16-17명을 선출해서 개최하려 합니다. 좋은 소리와 기대되는 학생은 기억하며 매 시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이들 모두를 불러 개인적으로 충고를 하는데 이 충고가 틀릴 수도 있지만 이것은 오랜 경험과 연구를 한 베르곤지의 충고이며 학생들이 잘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연주회에 선발된 학생은 다른 학생보다 잘해서가 아니라 그때 그때 기록한 것을 토대로 참고한 것에 불과하며, 모두 연주하기 위해서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지 그들의 실력이 월등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 질문: "곤란한 질문이지만 한국학생 중에서 베르곤지 선생의 관심을 끄는 학생이 있는지요?"
* 답변: "한국학생은 매우 음악적이며 준비가 잘 되었습니다. 발음도 이탈리아인과 같이 정확하며 벨칸토 창법에 필요한 기술을 한국인들은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학생이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만은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지요."
짧은 대담이었지만 노승종 선생님은 그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었으며 또한 훌륭한 인품이 그의 예술 속에 스며 흘러 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비오듯 흘러 내리는 더운 열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정열을 다하여 지도하는 그의 훌륭한 태도는 스승의 본보기라고 느껴졌다고 한다. 그리고 베르곤지를 찾았을 때 그는 마치 공사장 인부와 같이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땀을 흘리며 지도하고 있었고 노승종 선생님은 제자들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스승의 상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예술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예술가의 초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자존심과 고집만 내세웠거나 소비향락적이었던 그의 동시대 유명 테너들과는 달리 베르곤지가 얼마나 성실한 예술가인지 알 수 있다.
무대를 떠나서도 자신의 혼을 쏟아 부어 제자를 가르치는 카를로 베르곤지. 어쩌면 그야 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테너가 아닐까?
2. My Review
베르곤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악가이다. 나는 베르곤지라는 성악가가 있었기에 오페라에 빠져 들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으로 들었던 그의 노래는 '그대의 찬 손'이었는데 그 당시는 별로 감흥을 얻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오페라라는 분야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어느 성악가의 노래가 어떤지에 대해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악을 계속 들으면서 소리를 분별하는 귀가 생겼는데, 그의 목소리는 우아하면서도 힘차고 지적이었으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멋이 있었다. 특히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의 1막에서 만리코가 무대 뒤에서 부르는 '세상은 혼자라네'에서 세상 누구보다도 세련되고 우아한 음색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타는 저 불길을 보라'에서는 힘찬 고음을 아주 길게 뿜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가 남긴 오페라 전곡이면 모조리 사 모았다. 그래서 현재 22종을 구입했고 아리아집을 비롯한 독집은 7종이 있다. 아직 더 사야 할 전곡 녹음이 몇 가지 더 있다.
내가 가장 감명깊게 들은 그의 녹음은 1990년 10월 20일 도쿄 공연 실황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67세였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보존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나폴리 민요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전성기처럼 초점이 잘 맞추어져 있었고 나폴리의 정열을 담뿍 담아 불렀던 스테파노와는 달리 열정에다 약간의 절제를 하여 단정하게 불렀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정한 마음'의 어려운 고음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후반부에 부른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2절에서 약간 목소리가 흔들렸고 앵콜로 부른 듯한 '오 솔레 미오'에서는 장식음을 넣어 관객의 환호를 받았지만 고음의 끝에서 약간 소리가 갈라졌는데 아주 미미하여 몇 번이고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잘 발견할 수 없다. 이런 미미한 실수는 그의 노령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눈감아 줄 만한 것이고 젊은 가수들도 이정도의 실수는 하기 마련이다.
그는 동시대의 다른 테너들과 비교해 볼 때 아주 신사적이고 성실했으며 무대에서 최선을 다했고 인품도 훌륭했다. 스테파노의 경우, 1막에서 자기보다 바리톤 가수가 박수를 많이 받으면 화를 내며 공연을 중단하고 2막을 다른 성악가들이 대역으로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테파노는 목소리의 보존에 신경을 쓰지 않고 파티와 도박으로 밤을 새는 등 자신을 혹사시킨 나머지 전성기가 10여년 정도였는데 반해 베르곤지는 45년간 무대에서 최선을 다했다.
델 모나코와 코렐리는 독선적인 성격으로 동료 가수와 연출가, 비평가 중에 많은 적을 두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델 모나코, 코렐리, 스테파노를 아주 좋아한다.) 하지만 베르곤지는 음악팬과 동료가수, 비평가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던 성악가였다.
전곡 녹음 중 괜찮은 것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우선 카라얀 지휘의 <아이다>(DECCA)를 들 수 있다. <아이다>의 '청아한 아이다'는 여성적인 우아함과 남성적인 패기가 교묘히 혼합된 훌륭한 아리아인데 실제 가사를 봐도 참전을 원하는 장교의 이미지와는 달리 여리고 아름답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섬세하면서도 힘찬 그의 음색은 라다메스 역을 표현하는데 최적격이라고 할 수 있다. '청아한 아이다'만 따로 놓고 보자면 전곡녹음에서보다 필립스에서 녹음한 아리아집에서 더 잘 부르긴 했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가장 우수한 <아이다>녹음으로 꼽힌다.
<가면 무도회>는 넬로 상티가 지휘한 공연 실황 녹음을 어렵사리 구해서 가지고 있는데 아멜리아를 잃은 슬픔을 애절하게 아주 잘 표현했다.
가르델리 지휘의 <운명의 힘>(EMI)은 들어보면 다른 전곡 녹음을 무색하게 하는 뛰어난 연주다. 델 모나코의 녹음이 유명하지만 표현력에 있어서 베르곤지가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 정통 베르디 오페라에 있어서 베르곤지가 얼마나 훌륭한 해석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게오르그 솔티 지휘의 <돈 카를로>(DECCA) 역시 테발디와 호흡을 맞춰 정교하고 섬세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세라핀 지휘의 <라 보엠>은 다른 전곡 녹음의 매력을 뺏는 독특한 분위기를 지닌 음반으로 베르곤지의 진가가 그대로 드러난다. 베르곤지가 부르는 <라 보엠>은 우리 나라에 가장 먼저 소개되어 수많은 음악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추억의 명반이다. <나비 부인>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비 부인>은 EMI에서 나온 것과 DECCA에서 나온 것이 있는데 베르곤지의 노래는 두군 데 다 훌륭하며 전체적으로 보자면 테발디와 호흡을 맞춘 세라핀 지휘의 DECCA 반이 더 낫다. 이 외에 DECCA에서 나온 <라 트라비아타>, <라 지오콘다>등도 상당히 괜찮은 연주다. <팔리아치>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경우에도 델 모나코의 해석을 기준으로 삼는 편견만 가지지 않는다면 베르곤지의 유려한 노래를 즐길 수 있다.
아리아에 대해 간단히 살려보면 필립스에서 나온 베르디 아리아집에는 <루이자 밀러>중 '고요한 이 밤에'가 실려 있는데 레시타피브에서 완벽한 분위기를 설정해 놓고 노래에 몰입하는 그의 훌륭한 가창을 들을 수 있다. 이는 <멕베스> 중 '아아, 아버지 손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이 노래를 베르곤지만큼 당당하고 감명깊게 부르는 사람은 카루소 밖엔 없다고 생각한다. <운명의 힘> 중 '천사와 같은 레오노라'에서 특히 그의 노래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의 고음 부분은 솟구치는 듯이 매력적이며 격조 높다.
<돈 카를로>의 '퐁테느블로의 숲이여'는 섬세하고 정교한 가창을 들려주고 <아이다>의 '청아한 아이다'에서는 우아하면서도 힘찬 음색으로 당당한 소리를 들려 주는데 DECCA 전곡에서 부른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 이 외에 다른 아리아도 다 훌륭히 소화해낸다.
오르페오 레이블에서 소개된 피셔 디스카우와의 2중창집 또한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해준다. 이들은 전성기를 지난 후에 녹음을 해서인지 젊은 시절의 패기가 확연히 느껴지지는 않으나 두 거장, 특히 이태리 오페라를 결코 즐겨 부르지 않았던 피셔 디스카우와의 2중창집이라는 점이 이 CD의 소장 가치를 높인다. 비제의 <진주조개잡이> 중 '이 정결한 사원에서'를 비롯하여 <운명의 힘>, <라 보엠>등에 나오는 테너와 바리톤의 2중창이 실려 있다.
또한 오르페오에서는 베르곤지가 부르는 토스티 가곡집이 있는데 여기서 베르곤지는 시종일관 유려한 음색을 들려주며 다른 성악가들과는 달리 감정을 절제하여 부른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부르는 스테파노나 코렐리의 토스티 가곡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것이 베르곤지의 나폴리 민요와 토스티 곡에 대한 접근법인 것 같다.
오르페오에서 나온 베르곤지가 부른 성가곡집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생명의 양식', '피에타 시뇨르', '나무 그늘 아래서' 등이 실려 있는데 그의 노래가 힘이 없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컨디션이 좋았을 때 불렀더라면 훨씬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페라 연출가 조성진 선생님은 예전에 진행했던 일요일 밤의 라디오 프로에서 예전에 활동하던 성악가들은 전문 대리점 같은 성악가들이고 요즘 아무 역이나 다 잘 부르는 파바로티와 도밍고 같은 성악가들은 백화점 같은 성악가들인데 조성진 선생님 본인은 백화점 같은 성악가들보다는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였던 모노 시대 성악가들의 노래를 더 좋아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 생각도 조성진 선생님과 일치한다. 모차르트에서 바그너까지, 그리고 뮤지컬과 자르주엘라까지 부르고 거기다 지휘와 연출도 하는 도밍고나 폭넓은 레퍼토리에다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파바로티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선택한 영역에서는 최고였던 옛 성악가들의 노래를 더 좋아한다. 그 중에서 특히 1950,60년대에 활동했던 델 모나코, 스테파노, 코렐리, 베르곤지 등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들은 도밍고 만큼 폭넓은 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동료가 흉내내기 힘든 자신만의 스타일과 영역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성악가들이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와 개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시절의 오페라 팬들은 오페라 무대에 싫증을 느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몇몇 성악가들이 3테너니 어쩌니 하면서 모든 레퍼토리와 인기를 독점한다. 그 거대한 3테너 때문에 젊은 성악가들은 웬만해선 두각을 드러내기가 힘들다. 그리고 오페라 팬들은 이들의 노래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다양한 오페라 해석에 눈뜰 기회를 은연 중에 빼앗기고 싫증을 느낄 우려도 있다. 이 3테너는 레퍼토리를 무분별하게 확장하고 오페라의 백화점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그러다 보니 상업주의에 물들어 돈 문제에 너무 신경을 쓴다. 예전의 성악가들도 돈 문제엔 관심이 많았지만 3테너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그래서 3테너들을 보면 예술가라기 보다는 장사꾼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단순한 성악가가 아닌 세계 최고의 문화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오페라 팬들에게 선택의 폭을 좁게 만든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고 그들의 노래가 완벽에 가깝게 훌륭해도 백화점 같은 그들보다는 어느 특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나타내는 전문 대리점 같은 성악가가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단지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니 혹시 3테너 팬들이 기분상하시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그분들의 취향 역시 내 취향만큼 존중하기 때문이다.
https://youtu.be/cl6Muajmstc?si=qzDOcJxRaD2GkPqK
'별은 빛나건만'
박태영의 오페라 리뷰: http://beowulf.p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