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누려라. 마18:1-10.
https://www.youtube.com/watch?v=JxoT9ugJ36I 이학권
https://cafe.daum.net/rnjstlgur/9oZC/543 권시혁
우리 마태복음 18장 첫 번째 본문입니다. 제목을 아버지를 누려라. 그렇게 잡았습니다. 부제를 달면은 [사랑으로 살자 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야고보서 1장 17절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렇게 돼 있어요.
세상에 복은 하나님께로밖에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아니한 것은 복 같아 보이는데 살아보면 복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변덕이 없어요. 복 주시다가 너 하는 거 보니까 기분이 나쁘구나. 그래서 뭐 이렇게 화를 내신데, 그런 변덕이 없어 그다음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어요. 01:05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부작용이 없다는 뜻인데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반드시 생겨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림자가 없어요. 부작용이 없어요.
여러분 세상에 좋다는 것 오거나 가질 때는 기쁘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계속 복이 됩니까? 그걸 한동안 갖고 있으면 그것 때문에 약한 점이 생겨요. 그것 때문에 더 어려워지는 점이 생겨요.
복은 하나님께로만 오는 것이고.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이니까. 그래서 이 본문이 말해주는 건 한마디로 하면 그냥 아버지 앞에 나와서 아버지의 딸과 아들로 살아. 왜 집 나가서 그렇게 고생해. 예 그게 인제 18:1-10절까지예요. 마태복음을 이제 만나시려면 마태복음에는 판이 플레이트가 있어요. 02:03
우리 지구는 가운데는 이게 마그마예요. 펄펄 끓는 이 쇳덩어리 바다예요. 그 위에 대륙판 위에는 육지가 있고 대양판 위에는 바다가 있고 그래요. 그래서 이게 항상 움직이고 있죠. 그래서 인제 지진도 일어나고 무슨 또 처음 듣는 소리 듣는 것처럼 그렇게 예 그래요.
그래서 삶을 이루는 큰 플레이트가 있는데, 마태복음이 그 플레이트를 가지고 얘기하고 있어요. 왜냐면, 마태는 세리니까 세례는 자기가 거둬들여진 세금을 로마와 정산하잖아요. 그러니까 제국의 삶에 상당히 민감했던 사람인 것 같아.
그래서 마태복음은 한마디로 이 제국판 속에 로마 제국이 그때는 얼마나 거대하게 보이겠어요. 지중해 전 세계를 다 정복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거대한 제국판 속에 실개울로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
그래서 딱 시작하자마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계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 약속의 시작이죠.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시작되는 점이 아브라함이죠.
다윗은 그 약속의 클라이막스죠. 다윗의 나라를 영원케 하겠다고 그랬으니까 그게 그렇게 하나님이 지금 아브라함부터 계보가 나오기 시작하는 이유는 역사가 그냥 흐른 게 아니야. 03:38
그 많은 세대들이 그냥 뭐 세월 따라 지나간 게 아니라 하나님은 정교하고 정밀하게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고 있어. 그래서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폐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 그래서 계보가 나오고 그렇게 가꾼 섭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것이야. 그것을 얘기하는 거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제국판은 참 잔혹한 판이라는 거죠. 이 동방박사는 구하고 찾고 두드린 사람들의 모델이죠. 그 수만 리 이방 땅에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 별빛 하나를 따라오는 구하고 찾고 두드림의 사람들 앞에 제국은 2살 아래 모든 아이를 살육하는 그 참혹함으로 이것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맞고 있는 이 역사에 이 예수님은 이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드디어 자라기 시작해요. 나사렛이 싹 순이라는 말이에요. 이사야 선지자의 그 말씀에 한 가지에서 한 싹이 나오며 나사렛이 나옵니다. 05:10
그렇듯이 그래서 이 거대한 제국의 진실은 우선 북치고, 장구 치고 몽땅 다 믿어야 되고 그럼 진실일 수 없죠. 정말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중심에 진실이 있는 사람만 만날 수 있어요. 그게 순도 100%예요.
요즘 뭐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들고 그럼 100% 순도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어요. 예 다이아몬드도 순도가 높은 건 몇백 년에 하나씩 나와요. 순도가 조금이라도 섞여있기 때문에 광산에서 캐내는 거죠.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뭐라 그래요. 이 모든 일은 주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지금 이루고 있는 것이다. 06:06
그것이 드디어 이루어져서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하나님 나라가 싹으로 지금 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섭리를 따라 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왜 제국화는 잔혹합니다.
이미 그것을 동방박사와 헤롯의 2살 아래 아이를 다 죽이는 것을 통해서 대조적으로 딱 보여줬잖아요. 제국은 잔혹합니다. 잔혹한 세계에서는 믿음이 사라집니다. 깨어져 버려요. 폭력이 많은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는 그 폭력이 뭐 어떤 폭력이든 간에 예 믿을 수가 없어요. 07:06
그립지 않겠어요. 언제 화를 낼지 언제 무드가 바뀔지 그래서 이 잔혹한 세계에서는 믿음이 사라져요. 그래서 사랑이라든지. 용서 뭐 풍요 복 생명 약속 이런 것들을 들으면 개념을 이해하지만 믿을 수는 없어요.
실제적으로는 사랑이 어디 있어. 무슨 뭐 복을 이렇게 죽으라고 일해도 이 모양인데 이런 것들이 누가 말을 해줘서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의식 플레이트예요.
의식 판에 깔려버려요. 그래서 변화산에서 딱 내려왔을 때 예수님은 이 세상을 뭐라고 했어요. 믿음이 없고 폐역한 세대예요. 왜 우리는 못 고쳤습니까? 너희 믿음이 없는 까닭이라.
그래서 이 제국 판의 기본 자세는 불신이에요. 불신이라고 하는 건 참 안타까운 거예요. 왜냐 그러면 모든 것 이전에 사랑과 복을 믿지 못해 복되게 살고 싶은데 근본적으로 내가 어떻게 복 되겠나? 내가 언제 돈을 벌어서 뭐 남들처럼 좀 살지. 거기 딱 깔려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거부하는 거예요. 08:51
사실은 열리는 건 어디서 어떻게 열릴 수, 열릴 가능성 수도 없이 많죠. 그 사람 자신 안에서 딱 닫혀 있어요. 그래서 이 사랑 용서 긍휼 말은 좋지만, 그런 게 어딨나?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쟁취로 봐야 돼. 쟁취해야 돼. 돈 일부를 벌어도 내가 안 벌면 이게 안 오는 거예요. 사실 그렇지 않은데 쟁취해야 되니까.
삶은 경쟁이 되죠. 경쟁이라는 게 뭐예요? 실족케 하는 거예요. 실족케. 예 성경에서 실족케 하니까 여러분 뭘 생각하세요. 지금 여기 US 오픈 테니스하잖아요. 그 뭐 8강에 올라갔다. 4강에 올라갔다 그러면 올라가서 싸우면 어떻게 해요. 한쪽이 져야 되는 거예요. 09:48
실족해야 되는 거지. 그래서 난 안 나가. 옆에 얘기해 주세요. 누가 오라 그러나? 실족 계획 그래서 자기도 복이 없지만, 그렇게 원하는 자식도 복 되게 못 해주고 내게 다가오는 그 수많은 이웃들을 복되게 못 해줘요. 우리 중심은 그렇지 않아요. 복 되게 해주고 싶어. 나 때문에 행복할 때 최고로 행복한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안 된단 말이죠. 제국판 속에서 하나님의 생명파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 이게 마태가 복음서를 적는 중심이에요. 지금 우리는 인제 곧 그걸 만나게 돼요. 10:47
그런데 이 제국판은 조직이고 피라미드고 그렇지만, 하나님의 생명파는 가족이에요. 저 한자고 중국 사람들이 쓰는 말. 아 중국 사람들도 요즘은 가족이라는 말을 안 쓰고 가인이라고 그렇게 써요. 가인이라고
우리 한국 사람들은 식구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요즘은 식구란 말 별로 안 쓰는 것 같아요. 식구라는 말이 참 좋은 말인데 같이 먹는다.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리스트가 성경에서 4번 나오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순서가 막 다 다르다 이래요. 아니 읽을 줄 몰라서 그래요. 순서 똑같아요. 첫 번째 다섯 번째 아홉 번째 제자 이름은 똑같아요. 내 기록이 전부 베드로 빌립 야고보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 그 말은 뭐예요? 11:43
두세 사람이 모이는, 우리로 말하면 small group 스몰 그룹들이 얽혀서 또 더 큰 교회가 되어요. 교회가 교회 되고 세포가 세포 되고 그러는 것이죠. 우리 교회 방과 촌 모델이 그렇습니다. 3~4가정이 1방이 되고 방이 몇 개 모이면 촌이 되고 촌이 되면 청소하고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 할렐루야. 그게 예수님과 우리의 좀 차이네. 그래서 복음서는 전부 그래요. 마태복음은 뭐로 시작해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까? 임마누엘은 뭐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 문제는 함께할 줄 모르는 거 아니에요. 12:35
부부가 되어도 함께 할 줄을 모르죠. 자식을 낳아서 그렇게 사랑해도 자식과 함께 할 줄은 모르고, 가슴 아픈 아이가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아이를 어떻게 길러줘야 저 아이가 복되게 사는지. 그걸 우리가 몰라요. 제국에서는 그걸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마가복음은 더 직접적이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셨어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함께 있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래서 이 핵심 신앙은 나 개발이 아니에요. 내가 얼마나 잘 믿나? 내가 얼마나 잘하나? 이건 전부 사람 앞에 하는 거예요. 13:31
사람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잘 믿나? 내가 얼마나 훌륭하나? 그런 게 중요하잖아요. 훌륭하지 않으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뭐 내가 잘난 척할 수 있어요. 못난 척을 할 수 있어요. 그냥 아버지 집의 어린아이가 되는 거죠. 그게 신앙의 시작이에요.
이 마태복음을 이천 년 전에 적었어요. 심리학도 없고 무슨 뭐 예 뇌과학도 없을 때 적은 책이에요. 뇌과학이 지금 이거 조금 따라가요 그냥 아버지 집에 있는 아이는 외국에서 자유하잖아요. 14:21
그 아이가 무슨 뭐 밥때 되면 굉장히 상냥해졌다가 그런 거 없죠. 지 좋아하는 거 안 줬다고 신경질이나 내고 그렇지 그냥 아버지의 복을 누리는 거죠. 에고의 이 저주의 핵심이 뭐예요? 계산이 계산을 하면 굉장히 똑똑하게 생각이 돼요. 현명한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자기 계산이 자기 한계라는 거를 스스로 몰라. 그래서 자기가 거기에 사로잡혀 자유하지 않아요.
사람의 일은 하는데 하나님의 일은 뭔지 몰라. 이런 거예요. 뭐 청소 하나를 해도 그냥 하나님에게 하면 돼요. 그러면 그건 냉수 한 그릇이에요. 15:21
그런데 청소하면 안 도와주는 사람이 섭섭하고 같이 하는 사람이 못마땅하고 모든 걸 사람의 일로 만들어요. 에고는. 어려울수록 어려운데 네가 섬기니 참 고맙다 그건 마음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에요. 그건 은혜를 만날 때 솟아나는 마음이지. 내가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되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자 이 제국의 삶은 그래서 서로를 실족케 하는 게 제국의 삶이에요. 예 그걸 우리말로 바꾸면 상처예요. 우리는 가족이 되어서도 상처를 주고받아요. 그런데 그 상처가 하나님의 섭리예요. 하나님의 섭리예요. 하나님이 잔혹한 제국을 허락하셨어요. 16:19
왜냐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장성시키기가 그만큼 어렵고 가치가 있는 것이죠. 그만큼 힘든 훈련이 필요한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은 훈련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문제는 상처가 아니에요. 그 상처를 대하는 나 자신이에요. 상처를 받게 되면 문제는 열등감이 생겨요.
열등감, 상처를 받으면 열등감이 생겨요. 어쩔 수가 없죠. 그런데 그 열등감은 그냥 아 난 좀 부족해 이런 게 아니에요. 맹수예요. 맹수 우는 사자예요. 뭘 좀 잘못하면 막 자기를 깎아내려요. 하면은 그거밖에 안 되지. 또 그렇게 했니 막 이러죠. 그럴수록 겉으로는 안 그런 척도 해야 되죠. 진정한 자신을 못 열어요. 17:15
자신을 보여주기를 거부해요. 그리고 멋지고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자기가 자기를 버리는 거지. 모든 것과 거리를 두면 가까이 오면 불안해요. 심지어 부부 사이조차도 가까이 오면 불안해져. 누군가는, 누군가는 진심으로 다가와 주기를 원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자기가 감추어요. 그리고 척해요. 왜요 현상의 나밖에는 현상의 나 뭘 잘했냐 못 했냐? 뭐 보여줄 게 있냐 없냐 그 나밖에 몰라요. 18:10
존재 나를 모르죠. 왜 존재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까? 그런데 이 상처를 통해서 자존감이 높아질 수도 있어요. 상처를 다스리는 사람 그 자존감이 높아지는 상태가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에요.
어린아이는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살고 누리잖아요. 그냥 아이는 자기 자신이잖아요. 아이가 완벽하려고 해. 울고 싶은데 딱 참고 근엄한 표정 짓고 이런 거 없지요. 예 그냥 현재 나로 당당할 뿐이에요. 떼쓸 때는 떼써요. 기분 좋을 때는 기분 좋아요.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을 그냥 할 뿐이지, 이걸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내야 된다. 이런 것에 사로잡히지 않죠.
존재를 사는 존재를. 왜냐 그러면 초월적 나를 알아요. 이 단어가 이렇지만 아이는 자기가 하는 게 뭐 잘하고 못하고 그런 게 상관없이 엄마 아빠는, 가족은 나를 받아준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나타내는 것 이상의 나를 그냥 믿어요. 그렇게 아는 거죠. 그래서 상처는 열등감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상 속에서 자존감을 피워내는 하나님의 섭리예요. 초월이 일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예요. 그래서 이 상처에 속은 사람은 현상뿐인 사람은 상처라고 하는 건 뭐 백해무익한 것이죠. 썩으면 상처가 없어야 될 것이에요. 없어야 돼요. 20:02
그런데 없앨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네 탓 내 탓 네 잘못 내 잘못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부모 잘못 이러고 있는 거죠. 그렇게 되면은 이 사람은 힘 기르기밖에 몰라요. 힘 기르기밖에. 자라날 때 어른은 엄마와 아빠는 상처를 주고도 정당하잖아요.
그렇잖아요. 부모는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도 정당하잖아요. 사랑하니까 아이를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니까 아이는 희생해 달란 적이 없어. 그러니까 이 아이는 자라나면서 어떻게 돼요. 상처는 힘의 문제지 힘만 있으면 상처를 주고도 정당한 것이고. 힘이 없으면 상처를 받고도 잘못된 것이고. 20:59
이렇게 되면 이 상처에 눌리기 시작하면 이 사람은 상상으로 상처를 자원함으로 모든 곳에서 무시받아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래서 뭐 표정 말투 제스처 이런 게 그냥 다 상처 예민해 섬세하고 민감한 건 좋은 거예요.
그런데 예민은 안 돼. 예 그게 이제 제국 그렇게 섭리가 그렇게 흐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상처에 쏙지 않으려면 들리는 게. 들린다는 말은 현상 속에 지금 뭔가가 일어나고 있잖아요. 21:47
그렇지만 그 일어나는 상황도 내가 아니고 그 상황에 반응하는 나도 내가 아니고 진정한 나는 그 상황에서 들려서 상황과 상황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서 내 반응을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나죠.
그래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보면 그런 말이 있어요. “새 관점을 가져라.” 그러니까 불리는 게 어려운 사람은 새의 관점이라도 가지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 새가 돼서 높은 하늘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거예요. 높은 하늘에서 자기를 바라보면 그 세계 속에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그래요.
그런데 그 전체를 못 보면 막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는 자기에게 자기가 늪이 되는 거죠. 그래서 맨날 거울아 거울아 그래요. 22:46
백설공주 계모가 거울아 거울아 하는 이유가 뭐예요? 나보다 우월한 사람이 있을까? 봐 그게 열등감이에요. 내가 잘나야 돼 다른 사람이 잘나면 안 돼. 그래서 우월감과 열등감은 전 동전의 양면이죠. 이게 뭐 저주 중의 저주예요. 여기에 사로잡혀 있으면 저주예요.
왜냐 그러면 그냥 나는 용납이라는 거야. 그런데 행복은 그냥 나일 때만 행복할 수 있어. 그냥 나가 용납이 안 되는 사람 뭔가를 잘해야 되고 뭔가를 성공해야 되고 뭔가를 이루어야만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아요. 23:39
그 결과가 왔을 때 잠깐의 만족은 있을 수 있지만 절대로 행복을 몰라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생명의 기력을 빼앗긴 사람 억지로 살아가는 거예요. 삶을 만드는 게 너무나 지쳐 있어. 그래서 마태는 구원은 그냥 나 됨으로 안식하는 거예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 집에 그냥 어린아이가 되는 거예요. 이걸 설명하는 내가 오늘은 참 답답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명을 나에게 주셨거든.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생명이 내가 누리는 나의 유업으로 피어나게 하려고 이런 세상 훈련장에 나를 보내신 거거든요. 24:37
그런데 그 하나님 주신 생명에는 병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어요. 없죠. 가난이 있어요. 없어요. 메마름이 있어요. 없어요. 미움 정죄 판단 없죠. 사랑 용서에 풍성하죠. 그래서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도 옮긴다는 말이 그 믿음을 잘못 생각하시면 안 돼요.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으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 유업자라는 것을 겨자씨만큼만 알아도 병이니 가난이니 삶의 어려움이니 이건 다 현상이 주는 거짓이에요. 여기 있는 동안에 그런 것들이 느껴지지만 그건 다 쓰러지는 것이에요. 25:28
그것에서 자유함을 얻으면서부터 생명이 피어나요. 그럼 병을 고치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 잘못된 내 삶을 교정시키려고 나한테 와서 너 고생했다. 인제 가 그래서 그냥 아버지 집에 어린아이로 돌아오면 돼요.
그게 참 탕자의 비유하면 이 탕자가 아들의 자격과 조건이 하나도 없는 상태예요. 지금 아들의 자격과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 아버지는 아버지야 첫째는 아버지에겐 그게 전부예요. 잔뜩 성공 출세해서 아버지 나 보셨죠. 나 이런 사람이에요. 26:24
아버지에겐 그게 더 싫을지 몰라. 에덴의 동쪽에 보면 칼렙이 전쟁 일어난 걸 이용해서 콩으로 돈을 엄청나게 벌어서 아버지한테 주잖아요. 내 아버지가 사람 죽는 전쟁을 이용해서 돈을 벌었니 그리고 기뻐하지 않죠.
아버지에게는요 의나 공로를 가지고 아버지 내가 아들입니다. 이런 아들보다 어쩌면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공로가 없어. 그런데 그냥 아버지라는 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아들이 훨씬 더 사랑스러울 것 같아요. 27:18
그래서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는 거 제국은 하나님을 알 수도 만날 수도, 느낄 수도 없어요.
왜냐 그러면 제국에는 무조건 성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무조건이요. 무슨 조건이 있어. 아버지예요. 예 무조건 그게 존재죠. 이 무조건 성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영혼의 능력이에요. 종교 생활에 없어요. 아버지를 살아봐야 아는 거잖아요. 28:10
그래서 나 됨이 회복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셨어요. 짧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내 안에 피워서 날 보고 누리라고 그 아버지를 아는 것이죠.
이때 세상이 출세하고 성공하고 뭐 남보다 잘나고 이런 것으로 알았던 세상이 무한 신비예요. 무한 신비 무한 사랑이에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데, 나 왜 이렇게 살았을까?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나눌 수 있는데, 이런 것이 그래서 성경의 특징이 가정 용어예요. 가정 용어 성경은 가정 얘기잖아요. 29:10
일단 창조 끝나고 타락 끝나고 나서 뭐 해요. 노아의 가정 얘기 그다음에 아브라함의 가정 얘기 이삭의 가정 얘기 야곱의 가정 얘기 모세의 가정 얘기 그럼 사무엘의 가정 얘기 다윗에 가정 구조 멋있게 만들어서 사람이 아름다워지잖아요.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이 무조건적 관계인 가족관계에서 그래서 아버지와의 가족관계로 회복되지 않는 한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이 복과 신비는 회복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용어 자체도 전부 가족 용어예요. 부모 자녀 형제자매 뭐 그렇잖아. 신탁 중에 최고의 신탁이 나단의 신탁이죠. 다윗의 나라 메시아의 나라를 영원케 한다. 그게 나라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해요. 30:09
집이라고 하죠.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너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베이어스 베이오스 그 tyIB'(1004, 바이트) 집, 가정 house
우리는 이걸 잘 모르니까 노아의 방주에서도서 역청을 안팍으로 칠해라. 이렇게 번역했는데 안팍 앞에 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요. 집을 안팎으로 칠해라. 어색하지 않나요. 여기 무슨 집이 있어? 번역에선 생략해 버렸어요.
또 창세기 15장에 가서도 이삭을 약속받았지만 못 나으니까 내 상속자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입니까라고 묻잖아요. 우린 상속자라고 번역했어요. 그런데 그 단어가 베이어스 집이란 단어예요. 내 집이 다메섹의 엘리에셀입니까? 아니다. 내 몸에서 날 자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30:40
그래서 스테반이 그 순교하는 설교를 할 때 행7:46 야곱의 집을 위하여 그게 tabernacle 타브나크예요. 이스라엘이란 나라라고 하지 않고 야곱의 집을 위하여 그런데 47절 솔로몬이 빌딩 세웠다 building. 48 사람이 손으로 지은 빌딩에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냐 49 나를 위하여 무슨 빌딩을 짓겠느냐 이렇게. 31:08
굉장히 영적인 부분 그래서 마태복음은 지금 이 어마어마한 로마 제국 안에서 우리를 이렇게 부르고 있죠.
Ⅲ 종교 너머 아버지 집에 다시 나기.
이제 종교 끝내고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다시 태어나. 기독교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거듭남인데요. 32:04
거듭남의 의미를 한번 기독교 세계 다 다니면서 물어보세요. 가장 추상적일걸요 왜 그래요. 거듭난 단어만 갖고 얘기를 하니까. 복음서에 거듭남은 제국에 살던 사람이 아버지의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제국과 가정은 삶의 자세 의식 모든 것이 다 달라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요3:3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않아 gennavw(1080, 겐나오) 낳다, 32:59
다시 태어난다. 하늘로 나지 아니하면, 하늘의 가족으로 나지 아니하면, 그러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종교의 신앙:절망의 신앙이에요.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부정적이에요. 부정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아이가 조금 늦어져도 그냥 이거 사고 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냥 좋고 나쁘고가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되는 거죠. 아이가 오늘은 좀 좋은 일이 있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가 보다. 그렇게 안 돼요. 아버지 안에 있으면 그걸 믿음이라고 해요.
설마 어려운 일이 일어났어도 그것을 통해서 복이 안 되면 일어났을 일이 없으니까 그래서 복을 끌어당기는 사람이다.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또 안될까 봐 걱정돼서 기도하고, 그래서 더 안 되게 하고 안 된 걸 또 확인하고 욥기에 보면 친구들이 그래요. 33:54
야 욥4:7 생각해 봐 죄 없이 망한 자가 있어? 정직한 자가 끊어지는 게 어디 있어? 너 죄 있으니까 그래 인과응보예요. 인과응보 네가 그렇게 된 거는 죄가 있기 때문이라. 그럼 하나님은 뭐 하시는 분이야?
그다음에 욥11:8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다. 스올보다 깊다. 네가 뭘 알겠느냐? 하나님과 우리는 그냥 딱 단절되어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왜 하나님을 믿어
엘리후는 종교인 중에 최고의 사람이에요. 그런데 욥37:23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다.
그럼 무한히 크시고 그의 공연은 무한하지 않느냐? 종교의 최고봉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신성 때문에 우리는 단절돼 있다는 거예요. 이건 다 세상 종교예요. 성경은 아니에요. 34:44
성경의 신앙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지만 아버지 집에 하나님은 아버지고 나는 어린아이야 그래서 뭐라 그래요.
욥13: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하면 하나님과 변론해 봐야 되겠다. 뭐 죄가 있어서 이렇든 뭐가 잘못해서 이렇든 나는 하나님하고 얘기해야 되겠어. 난 알아야 되겠어. 성경은 이 산신앙을 말해줘요. 개념이 아닙니다.
창세기 18장에 하나님이 롯이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다고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막아서서 의인 50명 있어도 멸망시킬 겁니까? 45명 10명 있어도. 하나님에게 따지고 드는 거죠. 35:08
내 마음에는 그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하시고도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야곱을 보세요. 창세기 32장에 가서 사기 치고 술수 써서 외삼촌 거 한몫 팍 잡았지. 그게 단숨에 날아가 버렸죠. 에서가 그 당시 400명이면 어마어마한 군대입니다. 단숨에 날아가 버렸지요.
그러면 종교적 신앙 가진 사람은 고개도 못 들어요. 내가 사기 칠 때 알아봤다. 스스로 정죄해 누가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야곱이 뭐라 그래요. 당신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난 당신 못 놓습니다. 지금 보세요. 내 얼마나 애써서 모은 건데 빈털터리 됐잖아요. 그러니까 축복 안 하시면 난 못 놓습니다. 36:07
이게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이상 더 설명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욥32:1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긴 거 세 친구가 말을 그치니-기절했더라. 아 그 말이여. 이 욥에 어린 아이 같은 신앙을 모르는 거예요. 잘했든 못 했든 난 아버지 만나서 아버지한테 얘기 들어야지. 너네 얘기 난 듣고 싶지 않어. 내가 확실히 아는 거 하나 있어. 욥23:10 내가 이 모든 일을 지나서 내가 순금같이 될 거야. 그게 없다면 하나님 아니지.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만나서 말을 하고 싶은 거죠. 37:35
Ⅳ 본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라.
어디서? 제국에서 내가 방방 뛰어보겠다고 날뛰던 제국에서 그냥 보여줄 것 그런 것 만들지 말고. 너 자신으로 한번 자유롭게 피어나 봐.
마18:1-4절까지 천국에서 큰 자가 뭐요? 마태복음만 돌이켜, 돌이켜. 제국 판에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붙였어요. 그래서 긍정적으로 쓰잖아요. 37:38
마가와 누가는 싸웠잖아요. 누가 크냐고. 그런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진심으로 물어요. 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큰 사람입니까? 거기에 예수님께서 간절한 마음으로 답변하셨어요.
너희는 이것을 누려야 한다. 절대로 속으면 안 된다고 하고 장황한 설명을 해줍니다.
돌이켜 | 제국 mentality | to | 가족 mentality |
부족 경쟁 불안 | 하나됨 순전함 |
어린아이는 자격과 공로와 의가 내가 가족이라는 것밖에는 없어요. 그런 아이 있어요. 내가 지금 이 가정에 벌어들인 게 얼마인데? 없지요.
그래서 어린아이는-가정의 아이는 가장 작고 낮은데도, 자기가 작고 낮은 것을 알아요. 그럼에도 누림에 당당해요. 맛있는 것 먹겠다고 그러고 달라고 떼 쓰고 그러지요. 울 때는 울고 웃을 때는 웃어요.
우리는 울지도 못지도 못하지요. 실제를 누리고 실제를 살아요. 저는 항상 애들과 얘기하다보면 애들이 주로 딸아이들이 아빠한테 불만이 많아요. 한국 아빠들은 아빠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모르니까 일단 아빠가 슬슬 맞장구를 쳐주는 거예요.
아빠가 잘못했구나. 그건 아빠가 나쁜거야. 그런 아빠랑 어떻게 같이 사니? 그렇게 하다가 그러다가 딱 그래요. 더 좋은 아빠로 바꿔줄게. 딱 그 순간에 애가 달라도 표적은 다 똑같아요. 그 표정이 뭐냐 그러면, 이게 왠 또라이냐?
아이들에게 그런 표정 보기 힘들어요. 너무 뜬금 없는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당황했는데 그걸 반복적으로 보면서 아빠가 잘 해주고, 못해주고, 잘하고 못하고 상관 없어요. 아빠는 아빠야. 실제고 절대야. 잘해서 아빠가 아니고, 못해도 아빠는 아빠야. 그걸 바꾸는 생각을 하다니. 이 목사가 미쳤구먼, 완전히 그런 표정이야.
실제요. 무엇보다 잘못하면 화를내요. 아이들은, 화를 폭팔시키라는 말이 아니에요. 화를 표현해요. 아이가 화를 폭발시키는 과정은 기도 많이하셔야 됩니다. 아이는 화를 표현할 수 있어야 되지.
엄마 아빠 좀 제대로 해. 나 그걸 원하지 않아. 내가 이렇게 원했잖아. 이렇게 할 수 있어야 해요.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사랑이에요. 사랑.
아이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잘하고 잘못함에도 자기로 판단하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표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어른들은 화를 안 내지요. 꾹꾹 눌렀다가 폭발시키거나, 암이 걸리잖아요.
거짓. 마10:5-7절까지는 하나님의 보내심이에요. 이 세상이 큰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은혜는 조그마한 집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자기의 가정을 세우셨어요. 그 가정에 우리를 다 보내신 거예요.
내 옆에 누가 와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거예요. 내가 누구관데 판단 정죄해요. 너는 내가 원하는 것처럼 해야 된다고, 물론 선한 의도도요. 아니에요. 영접해 달라고 보냈어요.
마10:40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한 것이고, 나를 영접한 것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한 것이니라.
그래서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트려지는 것이 더 낫다. 작은 자 하나를 배척하는 순간이 하나님의 모든 세계를 배척하는 순간 그럼 뭘로 살아요. 내 애고의 능력으로 살아요. 45:36
내 에고로 만든 세계가 나의 세계 전부에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참 불쌍한 것이 가족 의식을 상실하는 거죠. 그래서 고아가 불쌍한 거 아니에요. 고아는 모든 것에서 단절된 단절 느낌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가족 의식이 상실된 사람은 삶은 위선적이에요. 보이려고 밖에 없어요. 하나님과 관계는 종교밖에 없어요. 진실을 가꾸지 못하기 때문에 관계가 없어요.
생명의 복은 순전합니다. 순전할 수 있으면 아무것도 불안하고 염려하실 거 없어요. 총 100개 갖고 있는 사람이 강도를 지키는 게 아니에요. 46:32
순전한 마음이 강도를 지켜요. 강도가 들어왔는데 그 야채 가게 주인의 얼굴이 너무나 순진하고 하나도 겁내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있는 거 다 갖고 가라고. 그러니까 강도가 미안해서 그냥 갔대.
옆에 말해줘 요즘 강도는 안 그래. 지켜야 된다. 그게 지키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인데 우리가 같이 살아야 되는데 우리 서로 참 불쌍하구나. 그 마음이 지켜요.
제국의 삶은 이 칠절에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거죠. 제국의 삶은 실족기 하는 게 제국의 삶이에요. 피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실족케 하는 일이 정당화되느냐? 절대 아니다. 화가 있도다가 반복되어 지죠.
실족케 할 수밖에 없는 삶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의 작은 위로 그 안에서의 작은 격려. 그 안에서 작은 열림은 아름다워집니다. 밤이 어둡기 때문에 작은 별빛이 아름다운 것 같은 거죠.
잘 보아라. 실존케 할 수밖에 없는 삶에서 작은 눈빛 하나 작은 미소 하나 작은 용납 하나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지 너희는 속아서는 안 된다. 48:30
총마감 8절에서 10절은 예수님의 마음이죠. 결코 지옥을 살아서는 안 된다. 여기는 설명하고 이해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가만히 한번 읽어보세요. 예수님을 모른다고 생각하시고 도대체 누군데 이런 말을 하시는 걸까 한번 읽어보세요.
실족케 하느니 손 발 눈 다리 다 찍어버리는 것이 낫다 아이 오니아스 푸르 게나푸르 예수님이 그걸 반복을 해요. 이거 1번 하기도 힘든 말이에요. 49:12
영원한 불, 지옥불 거기에 들어가는 이것은 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일이야. 한 사람이 들어간다고 해도 아버지의 가슴에 영원히 못이 박히는 일이야. 결단코 결단코 그렇게 돼서는 안 돼요.
그냥 아버지 앞에 오면 되는데 작은 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그 천사가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영광의 보좌에서 뵙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 기억하라는 거죠.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마음으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냐? 50:03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이 세상 역사가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한 작은 상황 갈대 이게 꺾일까? 봐 지키고 계셔요 이 가날푼 등불이 꺼질까 봐 그것을 지키고 계세요.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야 돼.
Ⅴ 자녀로서의 회복은 허무해서 존재가 되는 거지. 종신토록 땀 흘려 수고하였어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거두는 이 제국의 삶.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것을 이루었어. 그러다 죽을 때 없어지는 거죠.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그 영원한 생명 존재를 표현합니다. 50:58
그래서 이 제국과 땅과 하늘의 차이. 제국과 이 하나님 가족의 차이는 정말 하늘과 땅의 차이예요. 정말 하늘과 땅의 차이. 비교가 안 돼요. 예수님 이미 말씀하셨죠. 마태복음에서는 이 땅의 사람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어.
그런데 하늘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 비교가 안 돼요. 우리는 여기를 들어가고 있습니다. 15년을 찾았어요. 말씀이 회복돼야 되는데 도대체 뭐가 말씀이 회복되는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간단한 일이에요. 우리가 깨어만 있어 그런 말을 이제 배우는 거죠. 이제까지 우리가 뭐로 살았어요. 제국의 autopilot 눈만 뜨면 기계적으로 돌아갑니다. 51:56
걸음마 배우기
우린 그걸 산다고 생각합니다. 1주일 내내 바쁘게 살았어도 기억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 말은 생명 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삶에서 이제 하나님과 관계에서 기억을 못 만들기를 하는 것이죠. 어떻게? 주어진 것에 re-act 하던 삶에서 이제 pro-act 말씀이 이렇게 말하시기 때문에 내가 행동하고 사는 거죠. 아주 작은 것부터 내가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을 아주 작은 겁니다. 52:45
그런데 말씀을 몸으로 살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가 열려요. 우리가 리악트 해서 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잘했나 못 했느냐 제대로 했냐? 이것에 시달려. 그리고 항상 불안해요. 결과가
그런데 말씀을 살아보시면 말씀을 살았다는 것 자체로 성공 실패와 상관없이 굉장히 뿌듯함을 느낍니다. 가치감을 느껴요. 실패해도 내가 그것을 살았다는, 말씀을 살고 선택한 것에는 우리 하나님의 본성에 본성이 연결돼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거고, 복이에요. 손해봐라 뭐 그런 뜻이 아니에요. 53:36
자그마한 말씀을 이렇게 겨자씨만한 것을 살아본 다음에 나누셔야 돼요. 나누지 않으면 생각으로 또 끝나버립니다. 나누면서 조율이 되기 시작해요. 내가 말씀이니까. 이렇게 살았다고 생각한 것인데 나누어 보면 말씀과 내 행동 사이에 차이가 있는 걸 느껴요.
얼라인이 되기 시작해 굉장히 행복해요. 이게 뭐 돈 벌어서 이런 게 아니에요. 굉장히 행복해져요. 그다음에 가속화돼요. 아무리 작은 것도 말씀을 살아보면 기쁨이 느껴지고 가치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하나 한 사람은 2개 하기가 쉬워져요. 2개 한 사람은 4개 하기가 쉬워져요. 이게 간단한 것 같죠. 아닙니다. 지금 말씀 살기 나눔을 보세요. 54:35
산 게 아니고 전부 리-악트에 대한 것이 나와요. 왜 계속 그렇게 살았으니까 당연한 거죠. 리-악트 할려고 했는데 말씀 때문에 브레이크가 이렇게 걸렸다. 뭐 그래서 생각을 바꿔서 그냥 생각했다. 뭐 이런 거예요.
예 그것도 중요해요. 브레이크가 걸리는 게 중요해 거기서 머무르면 아무것도 아니고 그건 아직까지 거기는 에고의 영역입니다. 살아보는 거죠. 이 살면서 코이노니아가 일어나요? 이게 살아보면 전에는 간단하게 생각하고 남이 못 하면 판단 정죄 하던 게 쉬운 일이 아니다. 55:23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그래서 남이 잘 못 하고 실수하거나 실패하면은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기 시작해요. 안타까움, 이 안타까움이 생기기 시작했으면 큰 복입니다. 판이 달라진 거예요. 제국판에 있지 않고 아버지의 가족 판으로 옮겨지기 시작한 증거예요. 그 안타까움이 피어나면 많은 것들이 따라와요. 기도가 따라오고 기도하면 믿음이 따라오고 그러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했죠. 16장부터 우린 침노를 시작했는데 18장에서 활짝 열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첫댓글 아멘~^^ 네~^^ 목사님!!! 고맙습니다.
항상 주님 안에서 행복하셔요. 샬롬 샬롬 ~^^
문정수 목사 올림~^^
감사합니다. 목사님 석준기
고맙습니다.